광복군 출신들이 국군에서 홀대 받은 것 같지만 순수 일본 육사 출신도 전체 명단을 놓고 보면 잘나가는 사람만 잘나갔지 그렇게 후대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래 어느 분이 쓰셨지만 새까만 후배들 밑에서 지휘 받는 식으로 수모를 당한 경우도 많지요. 이응준은 5사단장으로 채병덕에게, 김석원은 수도사단장으로 김백일에게 질책을 받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만군출신들도 한직에 맴돌던 사람은 맴돌았구요.
단순히 친일파 중용- 독립군 출신 홀대라는 도식적 이해는 한국군의 초기 역사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많은 광복군 출신자들이 대한민국을 선택했고, 대한민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습니다. 광복군 출신인 장철부 소령 같은 경우 중국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한 조선의용군 출신 장교가 많았던 북한 제766부대와 제12사단과 교전할 때 투항권유를 끝까지 거부하고 목숨을 던졌죠.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766부대의 인민군 장교들이 경북 산악지대에서 격전 중에 장철부 지휘하의 독립기갑연대 제2기병대대를 포위한 상태에서 장철부 소령에게 "망할 한국을 위해 헛된 목숨을 버리지 말고 조국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지속적으로 투항을 권유하는 중국어 무전을 보냈음에도 장철부 소령은 투항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받쳤습니다.
당시의 군인사는 주요 인사권자와의 친소관계, 출신지역 문제, 미 고문단이 통제하기 어려운 고급장교들에 대한 전반적 홀대(이건 광복군이건 일본군이건 구별이 없었죠),이승만과 결별한 이범석에 대한 견제라는 구도하에 이루어진 정치적 고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입니다.
일본군 출신이나 만군 출신들이 국군의 주축이 된 것은 아쉬운 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군 출신 고급 장교중에 상당수는 임정 출신 군정청 통위부장인 유동열 (일본 육사 출신, 중국으로 탈출. 광복군 및 임정에서 활동)씨가 간곡하게 입대를 권유해서 입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쇼든 어떻든 간에 이응준, 안병범, 김석원, 이용문, 이종찬을 비롯한 상당수 일본 육사 출신들은 광복후 자숙하는 의미에서 침거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타의에 의해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사람의 재능이 아쉬울 때니 일본 고등계 경찰 출신만 아니라면 순수 군출신인사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관용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국군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선 아쉬운 점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최소한 상징적으로라도 초대 참모총장들은 독립운동 경력자들을 등용했어야 했는데 그런 모양새 갖추기가 부족했던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겁니다.
안춘생 장군을 육사교장에 임명한 것은 일본군 출신 이종찬 장군이고, 이 장군은 독립운동경력자가 육사교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김홍일 장군을 육군종합학교교장으로 임명한 것은 한직으로 몰아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교육기관만이라도 독립운동경력자를 중용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군 초기 장성들의 면면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일본군 경력자의 등용이라기보단 연배나 경력에 대한 고려가 너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전 발발당시 육참차장 김백일 장군이나 작전국장 장창국.. 기타 연대장,사단급을 많았던 고급장교 중에 다수는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 군경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겨우 20대 중반에 불과하면서 단지 국군입대 시기가 빨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직책을 맡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창기 장교를 단기간에 육성한 탓에 군영출신부터 육사8기까지 나이 차이로는 3~4살 내외 정도 차이 밖에 없었는데도 기수에 묶여 엉망진창의 인사가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주군 동기인 이한림 장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군 경력을 보면 군영출신인 이한림과 육사출신인 박정희 입대연도 1년여 정도의 차이가 거의 7~8년 정도의 승진 계급 격차로 나타납니다) 없던 군대를 갑자기 만들어낸 터라 이해는 되면서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특임으로 몇몇 일본군이나 광복군 고급 장교출신을 구제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고, 차라리 초창기 기수를 무시하고 전면적인 인사 재편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여간 그래도 아래에 나오는 분들이라도 있었으니, 국군이 체면치례라도 겨우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왕정위 군 출신이야 사실 떳떳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두명을 제외하곤 중국 중앙군 장교들입니다. 김홍일 장군을 비롯해 중국 중앙군 출신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김홍일 중장
(중국 귀주강무당과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 중앙군 제19사단장 대리, 중국군 소장, 중국군 근무시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판을 제조해 줌 / 광복군 참모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장성급으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중장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장 역임
-최용덕 중장
(청국 육군사관학교 및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상교 / 광복군 총무처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1기로 장교임관, 공군 중장으로 공군사관학교장 및 제2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김신 중장
(중국항공사 졸업, 중국군 소교, 김구 선생의 자제분)
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2기로 장교임관, 국군에서 공군 중장으로 공군참모총장 역임
-최덕신 중장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유동열 사위, 중국군 중교 / 광복군 계급은 정령)
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11사단장, 보병학교장, 군단장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후에 월북
-안춘생 중장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소교 / 광복군 남원지대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정령, 안중근 의사와 가까운 친척)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사관학교장, 군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독립기념관 관장
-이준식 중장
(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상교 / 광복군 지대장 역임, 광복군 계급은 정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중장으로 육군대학총장 역임
-유해준 소장
(황포군관학교 제15기 졸업, 중국군 상위 /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계급은 광복군 부령) 경비대 시절 군사영어학교 졸업, 국군에서 육군 소장으로 군부사령관 역임
-이성가 소장
(남경군관학교 졸업, 왕정위 정권하 중국군 소교)
경비대 시절 군사영어학교 졸업, 국군에서 제8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역임하고 육군 소장까지 승진
-권준 소장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 중국군 상교 / 광복군 무한지대장 역임, 광복군 정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수도경비사령관 역임
-박영준 소장
(황포군관학교 제17기 졸업, 중국군 상위 / 광복군 개봉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부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사단장 역임
-박시창 소장
(황포군관학교 제5기 졸업, 중국 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상교)
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육군소장으로 부군단장 역임
-장흥 소장
(황포군관학교 제5기 졸업, 중국군 강서사령관 역임, 중국군 상교)
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
-김국주 소장
(광복군 서주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참령)
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
-김관오 소장
(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상교)
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
-송호성 준장
(하남군관강습소 출신, 중국군 상교/ 광복군 지대장, 광복군 편련처장, 광복군 계급 참장) 경비대 총사령관 역임. 육군 준장, 한국전 때 월북 혹은 납북
-오광선 준장
(보정군관학교 중퇴, 중국군 상교 / 신흥무관학교 졸업, 광복군 국내지대장,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호국군여단장(현재의 예비군) 역임
-전성호 준장
(동북구국의용군 소장)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6.25개전시 제1사단 12연대장. 1950년 9월 전사
- 김동수 준장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서안지대 근무, 계급은 광복군 정령) 국군 장교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사단장 역임
-김응조 준장
(왕정위 정부의 중국 화북군 참장) 국군 장교로 특별임관, 국군으로 육군 준장으로 군정보처장 역임
-이종국 준장
(중국 9집단군 정보처 근무, 중국군 상위)
국군에서 육사2기, 국군에서 준장으로 합참 국장 역임
-고시복 준장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참모처 과장, 광복군 정령)
국군에서 육사2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병사구사령관 역임
-박기성 준장
(황포군관학교 11기 졸업, 중국 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서안지대에서 근무)
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육군 군사감 역임
-장호강 준장
(광복군 제남청도지구 특파단장 역임, 광복군 참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이외에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소장 / 광복군 부장)
-유동열 초대 통위부장 (군정청 시절의 국방장관 격)
(대한제국 장교로 복무중 일본 육사 유학, 일본 육사15기, 한일합방후 일본군 소좌, 중국으로 탈출 /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광복군 정장)
영관급 에는 장철부 소령, 채원개 대령, 오동기 중령, 고개옥 중령,윤태현 소령등..
출처: 디펜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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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단순히 명분으로만 광복군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적 구성을 통해서도 광복군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었다. 광복군 출신 창군 원로들은 수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구한말 의병에서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조국 수호의 영광스러운 전통이 국군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李範奭·1900~1972) 장군과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방부 장·차관에 임명됨으로써 독립운동가 출신이 창군 초기 국방 수뇌부를 형성한 것은 우리 군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아 있다. 이범석 장군은 “국군의 육성에 있어 군의 정신은 광복군의 독립투쟁을 계승토록 한다”고 강조하는 등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제3대 육군 정훈감에 임명된 박영준(朴英俊) 장군 또한 광복군 출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병들의 정신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훈병과의 경우 특히 광복군의 영향이 컸다. 미군에는 없는 정훈병과가 국군에 설치된 것도 광복군의 영향 때문이다.
호국의 간성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나 각급 군 교육 기관에서도 국군이 광복군의 후예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광복군 출신이 집중 배치됐다. 김홍일(金弘壹·1898~1980) 장군을 필두로 7, 8, 9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모두 광복군 출신이었으며 이준식(李俊植) 장군 등 역대 육군대학 총장 중에도 광복군 출신이 적지 않다.
최용덕 장군도 국방부차관 퇴임 이후 공군에 재입대, 공군사관학교 교장·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하늘에 살면서 하늘에 목숨 바친다’는 감동적인 구절로 끝나는 현재의 공군사관학교 교가를 지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광복군 출신의 최장군이다. 군 교육 기관 곳곳에 광복군의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건군과 국군의 발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이들 광복군 출신 군 원로에 의해 광복군의 기백과 혼이 국군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광복군 출신 국군 주요 원로
이범석·김신·안춘생 장군 등 독립투쟁사에 큰 족적
청산리 대첩의 주역 중 한 명인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安椿生·예비역 중장)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위해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제조해 준 김홍일(金弘壹·예비역 중장) 전 육군1군단장.
광복군 출신 국군 원로들의 면면은 이처럼 화려하고 다채롭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군 고위 장성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 길이 빛날 쾌거다. 윤의사의 의거는 김홍일 장군이 제공한 고성능 소형 폭탄 덕에 완벽히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군에서 사단장(중국군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투쟁을 지원하던 김장군은 44년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차장 겸 광복군 참모장(광복군 참장)을 지냈다. 중국군 소장·광복군 참장을 거쳐 국군 중장으로 예편한 탓에 별이 다섯 개라는 의미의 ‘오성장군’(五星將軍)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장군은 6·25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켜 내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김장군은 50년 6, 7월 육군 시흥지구전투사령관·1군단장을 역임하며 한강 남쪽 일대에서 지연전을 전개, 반격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김장군은 5.16후 박정희 정권시대에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 활약한 광복군 출신 원로 중에는 저명한 독립투사의 친인척도 적지 않다. 광복군과 중국 공군 복무를 통해 독립투쟁에 헌신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6대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김신 장군은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광복군 지대장(광복군 정령)으로 활약했고 육군야전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안춘생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다. 안장군은 전역 후 초대 독립기념관장을 맡기도 했다. 김신 장군과 안춘생 장군은 안타깝게도 최근 건강이 악화된 상태다.
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은 지낸 박은식 선생의 아들 박시창 장군(박유철 현 보훈처 장관 부친)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때까지 국군에서 활약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항일 전선에서 활약하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 육군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유해준(兪海濬·예비역 준장) 장군도 강직한 성격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유장군이 전역사에서 “통일의 성업을 완성할 때가 오면 계급에 상관없이 백의종군, 1군에 복귀하겠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이 외에도 국군에서 육군소장급으로 전역한 장군들 중 권준 장군, 김관오 장군, 김용관 장군, 김영일 장군, 장흥 장군 등이 광복군이거나 혹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광복군과 밀접하게 협조했던 인물들이다.
육군준장급으로는 고시복 장군, 김동수 장군, 박기성 장군, 이종국 장군, 오광선 장군, 장호강 장군, 전성호(육군준장 추서) 장군과 민용구 해군 제독도 광복군 출신이다.
광복군동지회 회장을 거쳐 현재 독립운동 유공자를 대표하는 광복회의 현 회장인 김국주씨도 광복군 지대장을 거쳐 육사 8기 특별기수로 입대, 1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 기병대대장으로 신화적인 활약을 펼치다가 50년 7월 청송지구 전투에서 전사해 지금도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장철부 중령 등 광복군 출신 중 국군 위·영관급 장교로 활약한 인물도 200명이 넘는다.
출처-국방일보 2004년 광복군 특집
출처: 네이버카페 Military Figure Mania(M.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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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왼쪽부터 노능서-김준엽-장준하 광복군 독수리 요원들이십니다. 한번 한국군에서도의 광복군과 혹은 중국군 출신분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더군요. 마침 구하게 되어서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있는 오동기 중령의 경우 14연대 반란사건이후 반란을 진압하고도.. 악질 친일파 김창룡에게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윤태현 소령의 경우에는 즉결처분건 문제로 명예회복되신 걸로 압니다. 윤태현 소령 문제건은..(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97295) 여기서 확인하세요.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움이 있다면.. 초기 국방경비대 시절.. 광복군 출신들이 본위를 주장하여 입대를 거부한 것이 참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면 결과론적으로나 당시관점으로나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인 군복무자 출신이 한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상황에서의 건군 초기의 군상황에서 본위주장에 의거해서 거부당한 것이 말이죠. 더욱이 광복군같이 미군의 거의 레인저급(당시) 이상의 훈련을 받은 베터랑 수준들의 병력은 더 그렇다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