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 10편
한편 아시아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에 실패한 때로부터 꼭 3세기가 지나고서 일본은
다시 중국침략전을 수립했다. 당시 러시아는 한반도에대한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 국내에 있는 일본의 중요한 상업적 권익이 위협을 받았다.
또 한편 1898년에는 러시아가 만주의 여순을 획득하여 군대와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서
여순항구와 유럽방면을 철도로 연결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존립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의 신문들은 거대국가인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고 있었고 일본 육, 해군은 급속한 군비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가 정식발효 되었지만 이미 이보다 48시간이나
앞서 러일 양군은 각각 최초의 일발을 쏘아대면서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 여기서 야기된
상황은 이로부터 38년후 진주만에 대해 예견케하는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거대한 적국 러시아에 대해 인적으로나 물자면에서 매우 열세였던 일본의 희망은
제해권을 차지하는 일과 개전 초기에 조선을 지배하는데 있었다. 이 두가지 수단에 의해
러시아군은 일본 본토에 대해 군사작전을 강행할 수 있는 조선의 어떠한 항구도 모두
잃어 버리는 셈이 된다. 즉 조선 서해안의 항구는 어느 것이나 일본 함대의 기지로서
이용될 수 있는 좋은 항구였다. 그리고 일본군 부대는 러시아측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압도적인 대군을 유럽방면에서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이전에 해상과 육상의
두 루트에 의해 조선을 경유하여 만주에 출동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유리한 조건을 얻기 위해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중립국인 조선의 인천항에서 러시아 군함 한척이 격침당했으며 일본군 부대가
조선에 처음으로 상륙했다.
그 동안 도고 헤이아치로 해군대장이 이끄는 일본함대 주력은 여순 항구를 향해
고속 항진하고 있었다. 1904년 2월 8일 자정 조금 앞서 항구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전함 3척이 일본 해군구축함들에게서 일제히 어뢰공격을 받았다. 그 이튿날 정오에
제2차 공격이 감행되어 러시아 순양함 4척에 어뢰가 명중했다. 그리고나서
도고 사령장관은 여순항을 봉쇄했다. 다섯달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여순 요새는
일본군 부대에 함락되고 러시아 함대의 잔여함정은 전부 일본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넬슨 제독이란 칭호를 얻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영국 넬슨 제독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멸시켰다.
영국 포트마우스 드라이 도크/ 도고 제독의 기함 미가사. 러일 전쟁 당시 영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다.
여순 항구가 함락되기 몇 달전에 러시아측에선 여순항의 봉쇄를 깨뜨리기 위해
발트해 방면에 있었던 강력한 발틱함대를 파견하였다.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이 함대는
극동의 전역에 도달하기까지 실로 일곱달이나 걸렸다. 그리고 불과 하루새에
대한해협(일본은 일본해해전이라하며 전사는 쓰시마해전이라 함)에서 허무하게도
격멸당하고 말았다.
이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게양했던 상승 기인 Z깃발은
훗날 진주만 기습공격 때 항공모함 아카기에 게양된다.
이것은 러시아함대를 격멸한 일본이 세계열강 중의 하나로 인정받는 것과함께
조선, 나아가 만주의 남부를 사실상 점유하는 결과가 되었다.
러일전쟁 동안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일본인 노동자의
물결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오는데 대한 미국인의 분노는 한층 높았다. 1905년 봄에는
일본인 이민을 저지하는 요구가 높아졌고 미국내의 일본인 상사에 대한 불매운동의
고조와 더불어 상품 불매운동, 배일운동이 이는등 미,일간의 마찰이 증대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 짐꾼들을 이용하여 보급품을 수송하는 모습이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조선은 나라를 잃는 비극을 맞게된다.
패전국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를 통과하여 아시아 대륙 주둔 일본군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하는 것을 간섭할 수 없었다.
다시는 이러한 치욕스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여 정신차리자...
1898년, 미국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접수했으므로 이 새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함대가 필요했으며,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데오도어 루즈벨트는 7년간의 재임기간동안
미국해군의 규모를 두배로 확충하려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대로 러시아함대를 격멸한 일본은 해군력을 더욱 더 증강해나갔다.
1913년까지 일본정부의 해군 지출은 국가 예산의 35%를 소요한다고 설명되었다.
더 나아가 1920년에 가결된 88함대 계획(대형 전함 8척, 고속 순양 전함 8척을
기간으로하는 편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 제해권을 노리며 미국에 당당히 도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영국과 독일 양국간의 군함 건조 경쟁이 제1차세계대전을 조장한 유력한 요인이
되었던 것처럼 일본, 미국, 영국의 해군력 확장경쟁이 그야말로 다음 전쟁을 유발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1920년대를 통해서 일본의 해군병력은 5:5:3의 비율 협정에 의해 제한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영국과 미국이 각각 건조할 수 있는 주력함의 수가 5척인데 반해 일본은
겨우 주력함 3척만을 건조할 수 있다는 제한을 의미했다.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이라 불리우는 해군 군비제한 협정에서 주력전함의
보유 비율을 미국과영국은 각각 5, 일본 3,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각 1.67로 합의하여
미국과 영국은 135000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60000톤,
일본이 81000톤으로하며 비율을 초과한 함정은 폐기처분한다는 것)
워싱턴 군축회의. 1921년 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
군축조약은 사실상 일본을 3등국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으며 또 일본 제국해군의
역할을 단지 전쟁억제력의 역할로만 담당하게끔 조치한 것이다. 우선 회의 벽두에
일본 전권위원 가또 도모사부로 해군대장은 미,영,일 3국의 함대비율을 10:10:7로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해군 전문가들은 지키는 함대는 공격하는 함대보다
50%나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10:7의 비율을 양보해서 인정
한다는 것은 미국 해군이 아슬아슬하게 우세한 한계를 잃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을 경우에 승리냐 패배냐를 결정할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함에 관해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대하여
이 비율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5:5:3의 비율은, 태평양에서 미국이 계속
우세를 유지하는 상태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의 지배권을 결정할 항공모함에
관해 이 워싱턴 회의에서는 전혀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각국 모두
항공모함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일 수 있을만큼 불과 몇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년동안 일본이 워싱턴 조약을 원칙대로 준수했으나 일본 해군력은 차츰
이 조약의 한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런데 1930년까지 일본의 군국주의적 당파는
일본의 지배에 의해 움직이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하여 5:5:3의 불평등한 조약이 해군력의 확장에 방해가 되므로,
조약을 폐기시키든가 아니면 좀더 유리한 비율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에서는 워싱턴 조약의 폐기나 주력함 비율의 변경도
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군국주의자들이 일본정부 지배권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런던조약과 앞서의 워싱턴 조약에 대한 비난은 격화되었다.
이어서 제2회 군축회의는 1935년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맹렬한 항의가 높아져
갔으므로 예비회의를 그 전해인 1934년에 우선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는
해군 병력을 조약에 의해 제한하려고 하는 마지막 시도가 되었던 셈인데, 아직 시작도
되기도 전부터 실패가 운명되어져 있었다. 회담은 두 달동안이나 지연 되었으나
일본 대표단은 어떠한 협정도 성립시키지 않으리라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일본이 요구한 것은 군비는 독립국 주권으로서 민족자결(民族自決)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력함 비율은 협정한 대로 존속시키는 한편, 얼마간의 타협을
모색한다는 영국과 미국의 제안은 단호히 거부되었다.
그해 가을에 일본은 워싱턴 조약을 금후 아무리 연장하더라도 무익하다고 설명하고,
일본은 이 조약에서 탈퇴한다고 통고했다.
이당시 일본의 정권은 군인정치가들로 구성된 강경한 군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므로,
전국에 소용돌이는 치는 전쟁의 물결을 저지하기란 극히 곤란했다.
군축협정으로 인한 제한에서 탈퇴하자 일본은 제국 해군을 재정적 자원이 허락되는 한
확장하는데 자유로워 졌다. 1941년까지 일본 해군은 태평양 방면에서 미, 영 양국의
합동 함대보다도 더 강대해졌다. 즉 일본은 세계가 이제까지 본 일도 없는 최대의
전함 2척(6만9천톤급 거대전함 야마또와 무사시)을 보유할 뿐아니라 항공모함 1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당시 미국은 겨우 3척의 항공모함을, 영국은 단 1척만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보다 더욱 중대한 일은 일본 제국 해군은 이미 공격용 병기로써 항공모함을 사용하는
새 전략을 채용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여전히 항공모함이 전함 그룹에
대공용으로서 우산을 제공하는 데에만 도움이 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함 가가 진수식
1921년 고베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던 전함 가가는 워싱턴 조약에 의해 완공이 연기되었으나
1928년, 고노카 조선소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되었다.(아래 그림)
여기서...
일본의 중국침략
만주를 침공, 점령한 일본 관동군 제12사단 병사들.상공에 애국 헌납 1호기인 K-37 경폭격기가 비행중이다
1931년에 일본은 만주 북부지방을 점령했다.
일본군의 주장에 의하면 이 결정은 오만하고 도전적인 중국군에 의해 떠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급속한 군사작전의 확대로 인해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할 것을 미리부터
계획해왔다는 사실이 곧 폭로되었다.
그 진상은 바야흐로 일본 정부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한 애국적 열광을 국내에
부채질하고 있던 호전주의자들이 일본은 크게 발전되어야한다고 결정한데서 비롯되었다.
자신들의 조국 일본열도는 그 산이 많은 지세 때문에 현대산업에 공급하기위한
원료물자가 부족했으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므로 더 넓은 영토가 필요했다.
일본은 만주 점령 후 6년이 지나 중국대륙 침략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8월까지 8년 동안이나 이 전쟁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일본군 96식 함상 폭격기 / 중국 전선
아무튼 1939년까지 일본은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아시아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연전연승을 할 때마다 호전파의
지배력은 팽창했으며 육군 장군들이 중국 북부에 더욱 더 깊숙이 전진하고 있을 때
해군 제독들은 일본이 소련과의 격돌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만일 일본이 강대국과 전쟁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이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절호의 찬스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 방향은
제국 해군의 실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중국 대륙에서 전쟁에 깊이 말려들어가 있었으므로 이 궁지를 승리로
마무리하는 논리적인 방법은 육군 부대를 북쪽으로 진격시켜 소련과 정면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도 오히려 해군력을 중국 연안에 사용하는
일이라고 전망하였다.
해군은 육, 해군의 합동작전을 계속할 경우에 비교적 소수의 육군부대로 병력이 우세한
중국군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또는 신축성있는 행동으로 대항사켜 사용할 수 있다면
이와같은 전술은 이중의 이익을 가져다 주리라 보았다. 우선 첫째로는 일본보다 인구가
많은 두 개의 대륙국(중국, 소련)을 상대로 하는 소모전에서 일본이 수렁에 빠져 허덕일
위험은 적다. 둘째로는 동안 아시아 방면에서 작전을 전개할 강력한 일본 해군이
출항하는 것은 그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의 외교적, 상업적 기도를
크게 뒷 받칠 하게 될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어떤 시기에는 석유 자원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의
무역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했었다. 중국에 있어서의 전쟁의 긴장이 계속되고 게다가
석유를 비롯한 그밖의 중요한 원료물자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하자 해군 제독들에게
있어서 이 동인도 방면이 사활을 걸 만큼 중대한 지역으로 보이게 되었다.
일본군의 중국 대륙침략 / 일본군 94식 전차.
1938년까지 일본군은 항상 소련을 일본의 주된 가상적군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중일전쟁을 저지하기 위해서 외교적 압박을 가해 왔으므로
일본은 더 더욱 분노를 증대시켜 최대의 적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 육군수뇌부는 중국정복의 공로를 내세우며 과시했고
스스로 전능인 것처럼 광신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에 찬성했으며 또한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추진해 나가기를 기대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삼국 동맹에 일본이 참가하기를 강력히 권하고 있었고,
일본의 장군들은 이 동맹에의 참가를 적극지지했다. 히틀러는 일본이 동맹국으로서
태평양을 맡아준다면 영국을 돕고 있는 미국의 견제뿐만 아니라 영국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기대하여 1940년 9월, 특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으로서는 독일이 유럽에서
프랑스를 누르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발판으로 남진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손에 넣는 기회를 잡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독일과 협상 끝에
9월 27일 베를린에서 3국동맹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첫째, 일본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하여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그들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하며
둘째,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에 대하여,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그 지도적 지위를 인정한다.
셋째, 동맹의 세 나라 중 어떤 나라가 현재 유럽 전쟁이나 중, 일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는 나라에 의해서 공격을 받을 때에는 세 나라가 모두 온갖 수단을 다하여
서로 원조한다는 것 등이었는데
거기에 이 조약을 맺은 세 나라와 소련 사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었음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 명백했다.
하지만 육군과는 달리 대부분의 해군 제독들은 3국 동맹을 찬성하지 않았다.
왼쪽에서부터 일본 구르스 대사, 이탈리아 외상 치아노, 히틀러, 리벤트로프 독일 외상이
3국동맹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베를린
3국 동맹을 축하하기 위하여 도쿄의 공원에 걸린 3국의 국기
그러나 동시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미 미 태평양함대에게 본토 서해안의
군항을 출항하여 태평양 상의 진주만 기지에 집결하도록 명령하였으므로 정세는
일변하고 말았다. 루즈벨트는 이미 일본에 대하여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었고 그것은
차츰 일본을 괴롭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이 함대의 이동은 미국 대통령이
무력간섭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엿보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1941년 7월에 미국의 대일 통상무역이 단절되고
일본의 미국내 자산이 일체 동결당하자 전쟁은 눈앞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
항모 사라토가
과연 일본은 정말 잠자고 있는 사자의 콧털만 뽑은 것일까??
11편으로 계속...
아공 나만 이런건가?? 인터넷 접속이 엄청느리고 자꾸만 짱공 웹사이트 에러가 뜨네요..
자료는 더 올리고 싶지만 오늘은 요기까만 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