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태평양전쟁) ....11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9.05.19 22: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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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도라!도라!.... 제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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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은 1939년 8월 13일

일본 제국 해군의 최고 전투사령부를 지휘하는

중대한 지위인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

되었다. 평소 금주주의자였던 야마모토는

사령장관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큰

컵에 가득 담긴 맥주를 단숨에 꿀꺽 들이켰다한다.

 

야마모토가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된

2주일 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이 조만간 틀림없이 이 전쟁에 휩쓸려

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준비를 위해서

일본 해군을 전통적인 맹훈련으로 단련하는

임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나의 지휘 아래에서는 항공훈련에 최중점을 둔다"라고 말했다.

 

이미 이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는 만약 조국 일본이 무분별하게도 대미 전쟁에 돌입한다면

어떻게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격멸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원래 전쟁 반대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 정치가들의 비위를 거슬려

야마모토는 친미파로 낙인찍혔고 해군 차관 시절에도 반전 신념을 내세웠던 때문에

극우파로부터 암살위협을 받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미국 하버드대학 유학시절 워싱턴 주재 해군무관으로서 당시 미국의

거대한 공업력을 직접 보고 그 규모를 잘 알고 있었다.

가난한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야마모토의 기질은 오직 무사도의 전통을 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황에 대해서 또 조국에 대해서 그가 지켜야할 의무는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궁극적 책무는 조국 방위였다.

 

야마모토는 1927년 부터 이미 항공력을 해군 전략의 새로운 결정적 요소로 보고 있었다.

그 이듬해 새로 건조된 항공모함 아카기의 함장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항공전쟁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간직했던 실제적인 여러문제에 전력을 쏟아 넣었다.

풍운아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39세에 해군 대좌(대령), 44세에 해군 소장,

이어 1937년에는 해군차관으로 고속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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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허왕된 꿈을 보여준 야마토전함

 

1934년의 런던 해군군축회의에서 야마모토는 일본 대표단의 주요 수행원이었지만

이 회의 후부터는 일본은 대규모의 전함 건조 계획에 착수했다. 이것은 주력함의

우위에 중점을 둔 것으로서 거대한 전함 4척(18.1 인치 포 9문 장비)건조 계획 중

첫 번째 함인 야마또는 1941년 12월에 완공되었고 두 번째인 무사시는 그 여덟달 뒤에

완공했다. 세 번째 함인 시나노는 그 후에 설계를 변경하여 항공모함이 되었고,

이 후의 건조계획들은 모두 취소되게된다.

 

미국측에선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군함을 건조할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의 전통적인 이념에 따른 해전에선 총톤수가 우세한 거함거포야말로

일본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또 평화시에는 이 최신형 거대 전함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주고 미,영 양국과의 교섭에 커다란 이익을 주리라 기대되었다.

그리고 긴급한 경우에는, 그것은 바로 철옹성과 같은 단단한 안전보장으로써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제독들 가운데 단 한사람 야마모토만은 이와같은 거대 전함의 건조에 대해서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같은 거함은 아직 그 건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이 거함들은 마치 노인들이 각 가정에 소중한 것처럼 걸어두는 정밀한

종교적 족자같은 것이다. 그것은 실용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지 신앙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근대 전쟁에선 사무라이의 칼 정도쯤밖에 일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으로선 장차의 해전에서 재해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열쇠는 순양함과 구축함에

둘러싸여 호위된 항공모함 함대라는 것이다. 거대 전함에 쓰여지는 막대한 돈은

항공모함과 비행기에 쓰여지는 편이 훨씬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어뢰를 장비한 뇌격기에 의한 공격이야말로 전함을 격파하는데

가장 유효한 방법임을 주장했다.

"아무리 큰 구렁이라도 수믾은 개미 떼한테는 당하지 못한다."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야마모토의 주장은 차츰 받아들여졌다.
그의 끈질긴 주장으로 3만톤급 신형 항공모함 2척(35노트급-시속63km/h의 쇼가쿠,

즈이가쿠)이 건조되었다. 그리고 극비리에 신형 전투기가 생산 단계에 들어갔는데,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부터 2년동안 태평양을 주름잡는 제로 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의 항공기술력을 여전히 형편없는 것으로 얕잡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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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제독은 연합함대 사령관에 취임한지 두달이 채 못되어 일본 해군의

기본적인 전략 계획에 관한 일련의 대변혁 가운데서 최초의 개혁에 착수했다.

첫 번째 개혁작업은 가상적국 제1호였던 미국을 일본 근해에서 격멸한다는 기존의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마샬제도를 포함시키는 동쪽방면으로의 확장계획이었다.
이 변경은 사소한 것이었고 별로 의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령부에서는 의의없이 승인되었다.

 

야마모토의 다음 조치는 연합함대를 이름 그대로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그가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에는 대함대를 구성하고 있는 두 함대가 별도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데 통합하여 그의 직접 작전 지휘하에 두었다.

이리하여 항모와 전함, 순양함, 그리고 보조 함정을 모두 합동시켜,

단일의 강대한 함대로 만들었다.

 

1940년 봄 그의 지휘하에 실시된 최초의 해군 대훈련에서 야마모토는 항모를

기지로 하는 비행기로 적군함을 공격하는 훈련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좀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실로 진주만 공격 감행하기 약 2년전의

일이었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내린 훈시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엄격한 훈련 계획이

암암리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1941년 12월까지 일본 해군의 조종사들의

항공전투 기량은 극히 높은 수준까지 숙달되어 있었다.

 

일본은 절망에 가깝도록 석유가  부족해 있었다. 그리고 만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석유 자원이 단절된다면 일본 해군의 비행기마저 행동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하나 야마모토 자신이 정세를 판단한 것처럼, 일본군이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에 대해서 남진한다면 그것은 대미전쟁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없지만, 남방 지역의

일본군 파견부대에 대해서는 잠재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군의 보급선을

확보하는 단 하나의 방책은 미 함대를 그 기지에서 격멸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참모인 구사카 류노스케(진주만 공격의 제1 항공함대 참모장) 소장에게

은밀히 털어 놓았다.

 

"만일 우리들이 미국과 싸우라고 명령받는다면 치고 빠지는 힛트 앤드 런 방식으로

기발한 승리를 획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6개월이나 1년 동안은 손색없이 일본의

입장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년째 부터는 미군이 그 군사력을 증가시킬

것이므로 우리들이 최후 승리의 희망을 품고 싸우기란 아주 어렵게 될 것이다."

 

야마모토의 진주만 기습 공격 구상은 러일 전쟁 당시의 도고 헤이아치로 해군 대장의

여순 항구 기습 작전, 비록 실패했지만 지중해에서 이탈리아군이 어뢰를 탑재한 항공기로

영국의 순양함 알렉산드리아를 격침하려했던 작전과 타란토 항의 이탈리아 함대를

공격했던 영국 구식 복엽기 소드 피쉬의 성공적인 기습공격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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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인치 어뢰 발사 훈련중인 영국군 쇼드 피쉬

 

 

하와이 제도는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 서남으로부터  약 360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1941년 당시에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주민의 약 90%가 미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하와이 제도의 진주만은 미 해군의 전략적 배치에 아주 적합한 항만이고

그 장소도 편리한 곳에 있는 이점이 있었다. 진주만은 1919년에 해군 기지가 되었지만,

미 함대가 거기에 항구적으로 배치하게 된 것은 1940년부터였으나 미해군 제독들로부터

별로 인기가 없던 곳이었다. 우선 4000km나 멀리 떨어진 미 본토의 서해안에서 직접

받아야하는 보급상의 문제가 있었다. 이것도 문제였지만, 이 항만은 완전히 육지에

둘러싸이고 출입구가 단 하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항상 골치아픈 문제거리로 여겨졌다.

출입구인 해협에 단한척의 배를 가라앉히기만 해도 이 군항을 봉쇄할 수가 있었다.

또한 출입구인 해협을 지나 함대가 공해상으로 나가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함대가 항내에 정박하고 있을 때에는 함선, 연료, 수리시설, 보급물자직접장 등 모든 것이

붐비고 하늘로부터의 공격을 유인하기 쉬운 목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하와이 수역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지만, 급한대로

이 수역내에는 진주만 외에 그것과 비슷한 시설을 갖춘 항만이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리차드슨 대장은 진주만을 함대의 항구적 기지로 정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는 미국 대륙 서해안의 좀 더 좋은 기지로 후퇴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에게까지 반대 의견을 상신했기 때문에 사령관직을 해임당하고,

킴멜 대장이 후임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타란토항에 대한 영국군의 기습공격을 바라본 미국이 그저 수수방관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헨리 녹스 해군 장관은 미일 전쟁이 발생하면 최대의 위협은 항공 어뢰에 의한 공격이며,

요격기, 대공포의 강화 및 레이더 시설의 증설을 최우선으로 서둘러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1940년 12월, 태평양 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서의 어뢰방어망 설치는 해협의

통로를 좁게 하며 함선의 항해를 제약하게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킴멜 제독이

어뢰방어망에 의한 예방조치를 거부한 거의 같은 무렵에 야마모토는 그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해군 소장에게 비로소 진주만 기습 공격의 구상을 털어 놓았다.

 

야마모토는 일본의 연안을 항해하며 해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장소를 물색하다가

큐슈의 가고시마 만의 지형이 진주만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함대를

이곳으로 이동했다. 매일같이 함재기는 해면을 스칠 듯이 비행하며 저공에서의

어뢰 발사와 폭탄 투하 훈련을 실시했지만 그 아무도 훈련의 진짜 목적을 알지 못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공격작전의 암호명을 Z작전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이것은 36년 전 쓰시마 해전에서 저 유명한 "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고

절규하던 도고 제독의 Z신호를 본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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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시 다키지로 해군소장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하기위해 야마모토는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골라 의견을 물었다. 우선 그가 점찍은 동지는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소장이었다.

 

오니시는 해군에서 극히 드물게 항공문제에 일가견을 가진 장성이었으며 훗일 전쟁 말기에 가미가제

특공대를 최초로 조직하게되는 인물이다.

 

제11항공함대의 참모장인 오니시 소장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가능한출격이긴 하지만 마샬제도의 일본군

기지로부터 하와이 공격작전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동남 아시아의 석유지대 점령을 노리는 작전의 선행준비로서 기습의 일격을 가해

미 태평양함대를유린해 버릴 작전계획의 기본 개요를 오니시에게 설명했다.

 

 

야마모토의 작전계획을 경청한 오니시는 겐다 미노루 중좌와 의논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뇌가 명석하고 경험이 풍부한 항공참모인 겐다 중좌는 규슈에서 항공모함

가가에 근무하고 있었다. 36살의 겐다는 영국 런던 주재 일본 대사관 해군 무관 보좌관

으로 해외근무를 갓 끝낸 직후였다. 그는 런던 주재 해군 무관 보좌관 자격으로 참관했던

타란토 항 기습작전의 보고서를 도쿄에 보낸 장본인이었다. 오니시나 야마모토와

마찬가지로 겐다는 해군 항공병력이 극히 중요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란토 항 공격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Z작전 계획에 찬성해 줄것으로 기대했다.

10일간에 걸쳐 겐다는 이 계획을 철저하게 검토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오니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계획은 곤란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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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겐다 미노루 중좌

 

 

야마모토는 가장 먼저 미국의 전함에 공격을 집중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항공모함쪽이 공격 부대로서는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대개의 미국인처럼, 또 대다수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전함이야말로

함대의 주축이며 이것을 격파함으로써 보다 괴멸적인 타격을 적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처음에는 공격기가 항공모함으로 귀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항공모함은 비행기를 아군의 작전영역 밖으로 출격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하와이에는 그다지 근접할 필요가 없다. 또 공격기가 출격하자마자 조국을 향해

귀환 길에 오를 수도 있다. 공격이 끝나면 조종사는 해상에 불시착하여 구축함이나

잠수함의 구조를 받을 수도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겐다는 이러한 구상에는 전혀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공격의 제일 목표는 항공모함으로 해야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항모는

일본 해군에게 있어 최대의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또 최상의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일본의 항모는 되도록 진주만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살적인 무모한

공격은 조종사에게 심리적인 악영향을 준다.

 

또 전쟁이라는 중대국면에 비추어

섣불리 항공기와 조종사를 동시에 희생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공격기의 귀함을

기다리지 않고 귀항길에 오른다면 미국측이 반격해 올 경우 이에 대항할 비행기가 없는

항모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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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모 아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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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가가

 

 

진주만 공격 작전에 유리한 하나의 요인은, 일본 해군이 충분한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36500톤의 아카기는 세계에서 가장 위력있는 항공모함의 하나였다.

이 항모는 미 해군의 렉싱턴이나 사라토가보다도 한층 대형함이었다. 아카기는

1936년부터 1938년에 걸친 개장작업으로 91대의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카기와 비슷한 항모는 38200톤급의 가가였고, 이것보다 소형의 항모 히류와 소류도

취역하고 있었다. 각각 25675톤급인 다른 두척의 항모 즈이가쿠와 쇼가쿠도

1941년 8월에 취역할 예정이었다. 이로써 야마모토 함대가 확보한 항모는

모두 6척으로 증강되는 셈이었다.

 

겐다 중좌는 이 항모 6척 전부를 Z작전에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겐다는 오니시에게

첫째, 이 임무에는 가장 유능한 장교와 가장 잘 훈련된 조종사들만을 선발 할것과

둘째로는 공격 직전의 최후 순간까지 작전은 극비에 붙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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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항을 공격했던 쇼드 피쉬에 장착된 18인치 (45.7cm)어뢰

 

야마모토 제독의 승인을 받아 오니시는 겐다로 하여금 작전계획 원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3월 말 경에는 계획 원안이 차츰 구체화 되어 갔다. 즉, 공격은 특별기동부대가

담당한다. 이 부대는 호위함을 동반한 약 20척의 이(伊)잠수함과 5척의 특수잠항정으로

구성된 선견부대와 6척의 항모를 중심으로 한 주력 공격부대로 편성된다.

 

이 기동부대는 이미 알려진 항로를 피하고 우회 루트를 이용한다.

이 루트로 하와이까지 360km의 지점에 접근하여 여기서 항모로부터 항공기가 출격하고

미군기의 초계비행이 거의 없을 것으로 믿어지는 공중을 따라 진주만을 향해 침입한다.

공격에는 360대의 항공기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급강하폭격기,

고도수평폭격기, 뇌격기, 전투기를 포함시켜야 한다. 어뢰는 폭탄보다도 파괴력이 크다.

더구나 근거리에서의 공격에선 명중률이 높으므로 미 해군함정에 대해서는 아마도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다.

진주만의 수심이 매우 얕다. 그러므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보통의 항공어뢰로서는

통상방법으로 발사한다면 해저에 부딪치고 만다. 그러나 타란토 항의 수심은 41피트

이하였으면서도 영국 해군은 항공기에서 어뢰로 적함을 격침할 수가 있었다.

진주만의 수심은 45피트이므로 이 문제는 명백하게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폭탄의 경우는 미 전함 갑판의 장갑을 관통시키기 위해 대형의 철갑탄이 필

요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기습이 절대로 필요하다.

만일 기습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오히려 공격을 받기 쉬운 귀항 도중에 기동부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위험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습을 확실하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개전이 눈앞에 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측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군령부는 Z작전이 매우 무모한 짓이라며 반대했다.

오니시 자신도 이 작전의 성공률을 60%로 전망하고 있었고,

후쿠도메 참모장을 비롯한 일부 참모진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만은 역시 항공모함에 의한 진주만의 항공기습 공격은 실행 가능하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3월 말 경까지는 계획이 상당히 진척된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누가 기습을 담당하는 기동부대의 지휘관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몸소 지휘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에게는 수 많은 임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하급자 중에서 한명을

엄중히 선발하여 임명해야 했다. 그 결과 선임 소장인 나구모 주이치 해군소장이

기동부대 지휘관으로 결정되었다. 나구모는 완고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고루한

해군장성으로, 항공기나 항모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전문지식이라고

한다면 항해기술에 관한 것 뿐이었다.

 

 

도중에서 연료를 보급하며, 탐지되지 않아야 하며 더구나 엄밀한 계획에 따라 태평양의

수천킬로를 항행하여 적의 군항 가까이까지 대함대를 통솔해 간다는 대임무가 맡겨지자

나구모는 대경실색 했다.

 

작전의 성공은 주로 기습에 달려 있다. 만일 순조롭지 않다면 일본은 해군의 대부분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는 것인즉 그는 이 막중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런데 당분간은

이 작전이 실시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나구모 자신도 한시름 놓았다. 당시로서는

아직도 대미 개전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고 진주만 기습 계획도 군령부의 승인을

아직 받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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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를 접수하는 시점의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 모습이다

 

프랑스가 독일에 패한 것을 이용하여 1940년, 일본군은 비로소 중국 이남으로 진출했다.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지역)의 루트를 통해 중요 물자가 중국의

장개석군에게 수송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이 지역의 북부가 일본군에 의해 관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비시 정권에 대한 독일의 압박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에 대한 일본측의

협박이 겹쳐 마침내 일본군에 의한 북부 인도차이나의 점령에 동의하게된다.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다음, 다시 인도차이나 총독인 카토르 장군을 협박하여

인도차이나 전체를 일본군의 보호 아래에 둔다는 강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인도차이나의 공군, 해군 기지를 장악하게된 일본군은 다시 태국으로의 남진 태세를 갖

추었다. 태국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예를 따르도록 강요 당한 끝에

일본 정부의 보호조치를 받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고 말았다.

 

일본이 동남 아시아의 극히 중요한 전략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진출시킨 사태에 분노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 세 나라는 일본군의 점령확대가 결정된 48시간 이내에 일본의

해외자산을 동결하고 대일본 금수조치에 들어갔다. 그 며칠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일체의 석유 수출금지를 단행하였고, 이어서 네덜란드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에서의 대일 석유공급을 중지시켰다.

 

경제봉쇄에 직면하자 일본은 서서히 목이 조이듯 궁핍으로 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석유 금수가 해제되지 않는 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을 점령하는 조치는 해군에 있어

사활의 관건이었다. 석유의 비축량은 불과 몇 달치밖에 없다. 문제는 유전을 점령해야

하는 필요성의 여부가 아니고 그것을 감행하는데 얼마만의 시간적 여유가 남겨져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사태에 직면하자 해군의 수뇌부는 수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일본은 석유가 필요하다. 전쟁이냐, 평화냐, 늦어도 10월까지 결단을 내려주시길 바란다."

 워싱턴에서는 노무라 기찌사부로 주미 일본대사가 외교교섭에 나서고 있었지만

코델 헐 미 국무장관은 인도차이나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물러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으려는 양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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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편에서 계속......

 

 

자료제공 : H/ 채널 (히스토리)

 

ㅎㅎ 목이 다 뻐근하네 ^^;; 캔맥주 한개 묵고 자야징 짱/밀리 가족여러분들 편안하고 포근한 밤이되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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