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매뉴얼, 이등병 첫 휴가 완전정복 1탄

행동반경1m 작성일 09.06.12 03: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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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휴가 하루 전, 준비

내일이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버지 군번' 이라는 1년 차이가 나는 선임이 A급 전투복을 다려주고, 전투화에 광을 내 준다. '정비실 병' 이 따로 있는 부대에서는 그가 맡긴 옷을 다려주겠지만, 전투화에 광 내는 것은 역시 고참들의 몫이다. 전투화에 광을 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물광 - 구두약을 전투화에 도포한 뒤 천으로 문지른다, 그리고 물을 뭍힌 수건으로 한 번 전체적인 손질을 한 후 다시 구두약을 바른다. 또 다시 물을 뭍힌 수건으로 닦는다. 다시 구두약을 바른다. 역시, 물을 뭍힌 수건으로 닦는다. 이 일의 무한™반복. 요즘은 전투상의 이유로 광이 안나는 전투화를 보급받지만, 이 전투화도 고참들 손에 들어가면 신사복 구두보다 반짝반짝한 전투화로 거듭난다.

불광 - 구두약에 불을 붙히면, 타 들어가며 액체 성분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액체를 뭍혀 전투화를 닦는다. 물광보다 간편한 까닭에 많은 이들이 이 '불광'을 선호한다. 더군다가 '물광' 보다는 훨씬 남자답고 멋져 보이는 이름 아니던가. '불광'이라니. 저녁식사 후 점호 전까지 (약 19시~ 21시, 2시간) 이 일만 반복하다 보면, 사회에 있는 구두방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뭐, 이렇게 공을 들여 전투화를 닦고 나가도 밖에 나가서 알아봐 주는 것은 같은 군인 뿐이다. '오, 저자식 광좀 냈는 걸' 하며 말이다. 사회인들은 가이들의 군화까지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가이들이 한껏 광을 낸 군화를 신고 지나가면 '어, 군바리네' 하고 끝.

전투복 등쪽에 잡아주는 줄도 마찬가지다. 역시, 부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등병은 한 줄, 이병은 두 줄, 상병은 세 줄, 병장은 네 줄. 여기에 목숨거는 녀석들은 다섯 줄 까지 잡는 것도 봤다. 입고 나온 군복을 보며 다른 군이들은 '와우, 완전 칼각인데' 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사회있들은 '어, 군바리네' 하고 끝.

전투모는, 대부분 보급용 '빵모자' 대신 이미 휴가 나갔다 들어온 고참들이 '사제모'를 사다 줬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고참들의 가이들에 대한 귀염성 정도로, 앞에 치약곽을 넣어주고 전투모에 각을 잡아 줬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우리 부대에서는 이등병이 백일휴가(지금은 백일휴가가 없어졌다고 알고 있다)를 앞두고 모자에 각을 잡고 있다가 고참이 관물대를 엎어 버리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가이들의 휴가로 기쁜 사람들은 부대에 많지 않다. 고참들은 원래 근무보다 한 번 더 설 것이고, 행정병은 총기 보관이나 휴가증을 받아오고 상황판에 기록해야 하고, 아무튼 신경쓸 일이 많아진다. 가이들은 최대한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저 덤덤한 척. 명심해라. 휴가가 제대하는 것이 아니다.


2. 목욕이나 머리손질을 적당히

"사회에 있을 때, 머리 깎아 본 사람?"
"......"
"없어? 없으면 다른거 뭐 깎아 본 사람?"
"저, 애견 미용을 했습니다."
"그래? 너, 오늘부터 이발병."

이발병은 주로 이런 루트로 선발이 된다. 우리 부대에서는 중국어과를 다니던 평범한 대학생이 '포상휴가'를 준다는 말에 지원을 했는데, 아래는 하얗게, 위는 검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부대원들은 슬램덩크에 나오는 채치수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앞두고서는 이발병에게 '제발 좀 이번엔 잘 좀 깎아줘' 라는 부탁을 많이 했다. 어차피 나와서 모자쓰고 다닐 가이들이 99.28%인데, 머리깎는 일에는 아예 포기하는 것이 낫다. 머리가 길 경우 간부들에게 소대 고참들이 '휴가 나가는 애 한테 신경도 안쓴다'며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큼으로 되도록이면 삭발을 제외하고 짧게 자르는 것을 추천한다.

휴가를 앞두고 시간을 할애해서 씻는 가이들이 있다. 물론, 설레는 마음에 뭐라도 하나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봐라, 부대에서 씻어야 할 경우 찬물로 씻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집에는 365일 24시간 뜨거운 물이 나온다. 휴가를 가자마자 집에가서 팬티가지 벗어 4박 5일간 쳐다보지도 않을텐데, 고이 모셔둔 새 팬티와 런닝, 그리고 새 양말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아, 거기에만 매직으로 이름을 안 쓴 채 모셔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 어머니도 놀라셨다. '어머, 왜 팬티랑 런닝이랑 다 니 이름을 써놨니?' 그건, 남자들만 아는 이야기.

외모에 대한 준비는 콧털 손질과 귀 청소, 손 발톱 정리, 이런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 각 잡은 모자를 쓰고 여자애를 만나는데, 콧털이 먼저 나와 인사하면 호감도 제로. 광나는 군화를 자랑스레 앞장세워 여자애와 공원벤치라도 앉았는데, 귀에서 귓밥이 오랜만이라며 달려나오면 역시, 호감도 제로. 발톱을 보여줄 일은 별로 없겠지만, 손톱의 경우 길어서 안에 검은 친구들이 살고 있다면 '역시 군인은...'이라는 선입견에 한 몫 보탤 수 있으니 이런 부분들에 철저히 신경쓰길 권한다.


3. 부대를 나서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야간 근무가 있더라도, 그건 달콤한 것이고, 부대에서 내일부터 무슨무슨 훈련을 시작한다고 해도 가이들은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 왜? 내일은 집에 누워서 TV로 케이블 티비를 보거나, 부대원들 야간작전 한다고 참호 안에 들어가 총 들고 덜덜 떨고 있을때, 가이들은 호프집에서 친구와 맥주잔을 급하게 부딪히고 있을테니 말이다.

매일 잔소리를 해 대는 소대 고참이 또 한바탕 설교를 하고 있어도, 노랫소리 처럼 들릴 것이다. 왜? 가이들은 내일 휴가를 가니까. 그저 가이들이 바라는 것은, 혹시 휴가기간중 무슨 일이 생겨 부대로 복귀해야 할 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휴가를 나오기 전 날 눈이 와서 제설작업을 하느라 하루 종일 눈을 치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난 행복했다. 그저 머릿속에서는 휴가 나가서 뭐 할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대충 내 휴가 계획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휴가 나가서 먹을 것 - 피자, 치킨, 순대볶음, 곱창, 돼지부속, 회, 초밥, 탕수육, 삼계탕, 보신탕, 닭도리탕, 프링글스, 자장면, 호떡, 닭꼬치, 치킨볼, 오뎅, 골뱅이, 오리구이, 추어탕, 뼈해장국, 스테이크, 대하구이, 간장게장, 양념게장, 떡볶이, 빵, 아구찜, 등갈비, 삼겹살, 항정살, 꽃등심......집에서끓인라면

휴가 나가서 할 일 - 홈페이지 계정 복구, 도메인 기간 연장, 초.중.고.대학교 친구들 만나기, 동네친구 만나기, 서점가기, 술 마시기, 가족과 외식, 인사다니기, 영화보기, 차타고 드라이브 하기, 밤새 컴퓨터 게임해보기, 늦잠자기, TV보기, 음악듣기, 인터넷서핑하기, 찜질방가기...... 고참들 선물 사가기

대충 이렇다. 도저히 4박 5일동안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일단 계획은 세운다. 대부분의 예비역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가이들의 계획에 미리 찬물을 붓자면, 아니다. 굳이 찬물을 부을 필요가 없다. 그저 수첩 빼곡하게 하고 싶은 것들과, 먹고 싶은 것들을 가득 담아 나오길 바란다. 참고로 이야기 해 주자면, 가이들이 휴가를 처음 나온 날, 가이들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복귀 4일 전.

하룻 밤 자고 나면, '복귀 3일전' 이라는 조울증이 찾아온다.

휴가를 나간다고 하면, 고참들이 부탁을 많이 할 것이다. 게임 잡지부터, 옷을 수선해다 달라는 고참도 있을 것이고, 물론, 이등병 첫 휴가에는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 처럼 되어 있겠지만, '내껀 뭐 안사와도 된다~ 로또나 맞춰봐야 겠다.' 혹은 '난 뭐 필요 없다. 괜히 사오지 마라. 근데 요즘 던힐 2500원 인가?' 이런 식의 압박이 있을 것이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고, 대부분 그렇게 하는 관행을 보인다면 메모해 두는 것도 괜찮다. 참고로 나는 평소 고참들에게 '밖에서는 담배 뭐 피셨습니까?' 하는 물음으로 대충 알고 있는 터라, 그걸 메모해 두었었다. 그리고 로또에 환장하는 고참들도 파악해 두었기에, 대충 필요로 해 보이는 것을 사다 주었다. 단, 너무 과하게 사들고 가면 사간 것을 다 압수 당하고 소대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으니 잘 파악해야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 적도록 하겠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행정적인 절차가 확실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부분 하루 전 날 휴가 계획서를 써서 중대장과 면담을 하게 될 것이다. 대대장이나 그 이상의 간부와 면담을 하는 과정이 있을 수도 있다. 이때, 되도록 '문제가 없도록' 써야 한다.

휴가 계획서는 대부분 시간 기록과 만날 사람 핸드폰 번호까지 상세히 쓰도록 되어 있는데, 첫 날 '집에서 휴식' 둘째 날 '집에서 휴식' 셋째 날 '집에서 휴식' 넷째 날 '집에서 휴식' 다섯째날 '복귀' 이런 식으로 썼다간 소대에서 '가이 위로 고참 전부'를 호출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집에서 쉴 생각이라도 대충 봤을 때에 '음, 나가서 이러이러한 일을 할 생각이군' 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적어서 내길 바란다. 내가 아는 누구처럼 첫째 날 부터 마지막 날 까지 '리니지' 라고 적으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휴가 당일, 행정반에 휴가자의 총기를 보관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고참들의 설명을 듣고 그 곳에 실수 없이 잘 넣어 놓도록 해야 한다. 이쯤되면 이미 근무를 서 봤을 것이니, 근무자 총기함에 기록하는 것 처럼, 휴가자 총기 보관함에도 총기를 넣고 기록해야 할 것을 기록하고, 이것 저것 써야 할 것이 더 있으니 그것도 알아서 잘 챙겨 쓰길 바란다. 자신의 짐은 이미 다 꾸려서 창고에 갔다 넣어 놨을 것이고, 관물대에는 아무것도 넣어 놓지 않는 것이 좋다. 나가 있는 사이 전투준비태세라도 걸린다면, 복귀후 가이들은 고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이 총기함을 잠그고 키를 주머니에 넣은 채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들뜬 마음에 이런 짓(?)을 하는 가이들이 꽤 많다. 내 동기는 이 일로 인해 휴가 당일, 집에 도착했다가 다시 부대까지 되돌아 가야 했던 사연이 있다. 단순히 돌려주고 오는 일이 아닌, 그 키를 찾느라 온 중대원이 부대를 뒤집고, 일과를 멈춘 채 키 하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총기보관함 키라면, 근무자들이 근무교대를 못하고 연장되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는 한 번 주머니에 총기키를 넣고 나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동기는 4박 5일 동안 잠 못 이루고 떨었다.



자, 이제 드디어 집으로 출발이다. 휴가 하나 가는데에도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듯, 휴가 나와서의 일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쁘다. 고참들에게 다녀오겠다는 경례를 하고, 잘 갔다 오라는 말을 들으며, 위병소를 통과 할 때, 위병조장은 뒤에서 무전기로 보고 할 것이다. "현재 휴가자 이병 누구누구 위병소 통과했습니다." 캬. 이유없이 아프던 왼쪽 발목은 저절로 치료가 된 듯 아프지 않고, 가이들의 얼굴에서는 끊임없는 미소와 실소가 번지고 있을 것이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첫 휴가 길, 세상 모든 것들이 평화로워 보이고, 동네에서는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

부대에선 그렇게 춥더니 부대 밖으로 한 걸음 나오자 마자 한 여름 날씨처럼 덥다. 역시 이게 사회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위병소의 고참들이 안 보일때 쯔음 되면 전투화 끝까지 올렸던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벌써 상의 단추는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이들, 그대들은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4박 5일 이라는 첫 휴가, 고참들이 이야기 하는 그 4.5초 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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