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을 읽어보았습니다. 제 개인적 취향으로는 학자들의 한국전쟁 관련저서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비교적 균형있게 기술한 것이 박명림 교수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책 내용중 북한군 최고위 지휘관의 수준을 보여주는 내용이 나오기에 소개해 봅니다.
북한은 작전계획에 따라 전격전이자 기동전 기계화전을 구사하고자 했지만 작전계획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지휘능력과 훈련상태, 무기수준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군 사단장, 여단장급의 지휘능력은 평양에 있던 소련 고문관들의 조언이 아니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구 소련문서에 따르면 7월 초 전선사령부 참모장 강건이 김일성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군사고문들이 자신과 함께 이남으로 떠날 수 있을지 문의해 김일성이 "아직 불투명하다"고 답하자 강건은 "고문들 없이 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 없이 서울로 갈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강건은 김일성에게 소련고문들의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생포되지 않도록 할테니 서울과 군단 지휘본부에 파견허가를 내주도록 조속히 소련정부에 공식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북한군 총참모장의 수준이 이러했다.
1918년생인 강건은 빨치산에서 시작해 18년의 군사경험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개전 당시 불과 33세였다. 강건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만주 항일빨치산(1933)- 동북항일연군-88교도려를 거쳐 해방 후 동북항일연군 연견분견대를 이끌고 연길로 가 1946년까지 활동했다. 정규 장교 양성교육을 받지 않았고 비정규 유격전과 소규모 전투경험만을 갖고 있던 강건에게 10개 사단 규모의 군사작전을 입체적이고 예술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7월 8일 스탈린에게 친필 서명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25-30명의 소련군사고문들이 조선인민군 전선참모부와 2개의 군단참모부에서 활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인민군 간부들이 아직까지 현대 군대 지휘술에 제대로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슈티코프도 각 군단에 소련군사고문 2명을 군단사령관 및 포병사령관 고문으로 파견하며,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가 장교단을 이끌고 전선사령부와 함께 서울 총사령부에 상주하게 해달라고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스탈린이 개전 이후 미국에게 소련의 개입을 감추고 고문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문들의 전선부대 동반을 저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소련군사고문이 전선까지 동행한 것은 분명했다.
총참모장 강건은 소련군사고문의 신변안전을 책임진다고 했지만 안동전선에서 그는 소련고문과 전선시찰 도중 지뢰폭발로 사망했다. (1950.9.8 새벽 4시)
13사단 간부과장으로 추정되는 김만화는 13사단 참모장에게 긴급히 보고문을 보내 강건의 시체는 찾았으나 고문선생의 시체를 찾지 못해 본부인원이 다 동원되었다고 밝혔다.
추가보충.(댓글에서 발췌)
김일성의 게릴라부대원 150-200여명이 대부분 소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인데 거의 다 군장성 등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김일성은 해방후 이들의 능력에 따라 일자리를 주었어야 하는데 자기 졸.개들 챙기다 보니까 고문관 없이는 지휘 못한다는 총참모장이 나오고 법학책 한번 읽어보지 못했을 사람이 검사총장이 되어 박헌영을 때려잡죠. 북한에도 능력 있고 카리스마 있는 중공군 출신의 리권무, 방호산, 장평산 같은 장군들이 있었는데 전쟁 후엔 모조리 숙청되었습니다.
모든 글출처: DEFENCE KOREA 금성천님.
사진출처: war file 네이버 블로그
학력수준을 보면.. 한국군 수뇌부가.. 고학력 수준이네요..ㅡ_ㅡ; 능력은 각각 창군에서 보이는.. 장교의 질적 문제 수준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나마 나은쪽이 한국군이 조금 낫다고 볼수 있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 한국군이 한국전쟁에서 하신 삽질은.. 고학력 수준의 지휘관이 선택할 수 있거나 행동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