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기갑부대 창설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9.08.11 0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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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전차다!"하는 말이 "후퇴하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던 적의 전차전력에 충격을 받은 국군은 전차부대의 창설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된 영천회전 당시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인접 미 기병사단의 게이 소장을 찾아가 이틀간 전차 1개소대(5대)만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는 모습은 장비가 빈약한 약소국 군대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다행히 정일권 총참모장이 워커 장군에게 성질을 부렸는지 아니면 읍소를 했는지 M26 전차 1개소대가 반나절 가량 국군을 지원하여 국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기는 했지만.


50년 11월 29일 육군종합학교에서는 전차과를 신설하여 일본군 항공대 출신인 장송주 중령을 과장으로 하고 교관으로 일본군 전차병 출신인 김동복 대위를 비롯하여 대위인 미 고문관 1명, 중위인 통역관 1명, 수명의 하사관이 종합학교 10기생인 김종찬, 이재호, 한영빈, 박명수, 김영해, 이향우, 권병구, 허의구, 구복서, 김상영, 신덕만, 포병 간부후보생 3기인 최종례 등 12명의 기갑부대 창설요원을 교육시켰다. 교육용 전차로는 M36 전차 6대였고 교육내용은 통역관이 번역한 미군의 기술교범을 교관이 실물과 비교하면서 시동 거는 법과 조종훈련을 실시하는 정도였고 포술은 포병간부후보생들과 같이 2주간 포병훈련장에서 훈련받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7도선까지 후퇴하자 전차과는 해체되고 교육받던 12명의 장교들은 각각 타 부대로 전출되었다.  


전세가 호전되자 기갑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는 군의 강한 의지로 51년 4월 15일 육군보병학교(육군종합학교가 51년 2월16일부로 육군보병학교로 됨) 학생연대에 M36전차 38대와 M32 구난차2대를 장비한 전차대대를 창설하여 동래 기장 사이의 금사리에 교육장을 설치하고 최초 전차과에서 교육중이던 종합학교 10기생을 포함하여 제 1기 기갑 초등군사반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대대편성은 일본군 전차병출신인 조남철 중령 예하에 일본군 전차병출신 및 수도사단 기갑연대 출신 장교 등 10여명의 교관과 병기장교 1명, 고문관 수명, 전차장교중대장 안문성, 전차병중대장 박상석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기 초등군사반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51년 10월 5일 제51및 제52전차중대(각 4개소대, 전차22대)를 창설하여 51중대는 10월 말 동해안의 제 1군단에, 52중대는 중부전선의 각 사단에 배속되어 최초로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육군보병학교가 전남 광주로 이동함에 따라 전차대대도 이동하여 52년 1월 7일에는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전차과와 학생연대 전차대대를 통합하여 장교 61명,사병 225명으로 전차교육대로 개편하여 육군보병학교에 예속시키고 2월 1일에는 제 53전차중대를 창설하였다.


53년 1월 25일에는 제 52, 55, 58중대를 예속받아 제1전차대대를 편성, 제2군단에 배속시켜 오성산 저격능선, 949고지, 피의 능선 및 수도고지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53년 4월 5일에는 제 2전차대대를 창설하여 강원도 속초로 이동 후 제 51, 56, 60전차중대를 예속받아 제 1군단에 배속시켰다.


4월 25일에는 제 3전차대대를 창설하여 금화, 철원, 연천 등에서 운용중이던, 제 53, 57, 59전차중대를 예속받아 제 3군단에 배속시킴으로써 1개 군단마다 1개 전차중대 배속운용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각 전차중대의 참가전투를 간단히 정리하면 51전차중대는 1군단에 배속되어 351고지전투와 154고지전투에 참전하였고 52전차중대는 중부전선에 투입되어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전투에, 53 및 59전차중대는 2사단의 저격능선전투, 9사단의 저격능선 전투 및 북진능선전투, 금화지구방어전 등에 참전하였다.


56전차중대는 15사단의 351고지부근전투에, 2군단에 배속된 1전차대대의 각 중대는 적의 7.13 공세시 6사단의 교암산전투, 5사단의 백암산전투, 3사단의 금성천부근전투, 8사단의 금성 동남지구전투, 11산단의 적근산-삼현지구 반격전에 참가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차부대들은 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개전 초기의 비애를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전차대대장이었던 조남철 중령에 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본다. 전쟁전 어느날 지휘관회의에서의 일이다.

 

채병덕총장: 우리 방어선은 철통 같다.

 

조남철소령: (뒷 좌석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적은 전차가 200여대인데 우리는 한대도 없습니다. 전차파괴무기도 없습니다. 대전차방어가 안 되는 방어는 철통이 아니라 목간통만도 못합니다.

 

채병덕총장: 어느놈이야? 헌병! 저놈을 체포하여 즉시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조남철소령: 각하. 저는 우국충정에서 한 말일 뿐입니다.

 

김홍일장군: 총장님. 진정하십시요. 젊은 혈기에서 나온 순간적 실수 같습니다. 정중히 사과 받도록 하시고 헌병은 내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송호성장군: 젊은 객기로 보아주시고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결례를 하였으니 총장께 사과 드려라.
 

조소령은 일본군 전차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군조(중사?)로 해방을 맞았다.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하자 전차에 관련있는 부서를 지원하여 장갑차중대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는 적의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전차나 전차를 파괴할 만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여러번 상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반응이 없자 회의장에 뛰어들어가 국군의 솔직한 취약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참고자료
실록 6.25한국전쟁과 육군종합학교
노병들의 증언

 

글출처: DEFENCE KOREA 금성천님.

사진출처: 위키백과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기갑부대원들과 M36 잭슨 대전차자주포의 모습입니다. 한국군 기갑부대가 전쟁중에 어떻게 창설되었는지를 이야기한 글입니다. 중간에 한 일화가 있는데.. 역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진상이군요.. 전차의위협을 간과하고 대응할 무기체계 확보를 할 생각은 안하고 정신주의나 이야기하고 있으니 원.. 그나마 두 광복군 장성들께서 잘 마무리 하시는 일화도 포함되어 있어서 한번 일화를 보실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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