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우 차승원 탑 권상우 출현의 포화속으로가 6월에 개봉된다
포항여중전투의 실화이며 학도병 47명이 수백명의 인민군을 막다 전사한 사건을 실화를 영화로 옮겼다
3일만에 서울이 함락하고 남쪽으로 진군한 인민군을 맞써 부산이 함락되면 대한민국영토는 인민군 손에 들어가므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영천(영산강)/안강/포항(형산강)/대구(낙동강) 마지막 마지노선을 목숨을 바쳐 학도병의 희생으로 막아냈다
그들의 희생으로 이후 포항은 다시 수복되었고 전쟁의 승리의 발판을 이루었다
--------- 1950 년 8월 10일 목요일 날씨 쾌청 ----------------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읍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읍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언어와 같은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 그럼.........
이 일기는 1950년 8월 포항전투에서 숨진 소년병 이우근의 일기다.
이우근은 국군 제3사단 소년병으로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전사했다.
피가 흠뻑 묻은 이일기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71명의 학도병은 전원 전멸하고 말았다.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한 노병을 통해 당시의 참상과 아픔을 전해들었다.
"당시 형산강은 혈(血)산강이었어" "젊은이들이, 내 전우들이 수천 명씩 죽어가는 걸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지…"
75살 최봉소 할아버지, 최 할아버지에게 10월 1일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날이다.
지난 1950년 6.25 발발 당시 17살의 나이로 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한 할아버지는 먼저 간 전우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상업학교에 다니던 할아버지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격으로 별다른 고민 없이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전우들이 잇따라 탈영했고 부모 몰래 온 군대에서 외로움과 공포가 계속됐다.
"매일 탈영병이 이어졌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 매일매일 울었어요" "보급도 안 나와서 며칠씩 굶고 그야말로 공포와 외로움이 이어지는 참상이었지요"
할아버지는 당시 참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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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지난 이후 학도병을 위한 작은 비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추신: 그 당시 형산강(포항)에의 강줄기는 피로 물들었다 형산강이 아닌 혈산강으로 불리울 정도 였다 우리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는 포항토박이신데 피난을 가려 형산강 강둑을 걷지 못할 정도 였었다고 한다 시체가 너무 많아 형산강은 온통 피로 물들고 시체를 그야 말로 밟고 가셨다고 했다
이후...형산강에선 아직도 유골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옛날 포항 형산강에 사는 한 어부가 형산강 하류에서 유골 한점을 걷어 올렸다고 한다 그는 심심치 않게 유골을 많이 봐온 터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는데
꿈에서 낡은 군복을 입은 한국군 젊디 젊은이가 자신의 손을 꼭 붙잡더니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후 딸내미가 취업도 순조롭게 하였고 어획량도 엄청 늘어나 그 젊은이께 오히려 고마움을 표했다는 기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