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고 서울발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시위 군중은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까지 행진했다. 서울 거리는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경찰과 군은 봉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18일자(제331호), 노보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인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7일이 지난 3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실린 보도 내용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군대의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로이터통신의 블라디보스토크발(發) 3월 6일 뉴스를 토대로 이 기사를 작성했다. 3·1독립운동이 중국, 미국, 터키 언론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언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이 3·1독립운동을 보도했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sa jr)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를 주간조선에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와 3·1독립운동 관련기사.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이 신문이 두 번째로 한국의 3·1독립운동을 보도한 것은 첫 번째 보도가 나가고 열흘 뒤였다. ‘일본과 한국의 운동’ 만주, 3월 22일.
일본의 조선총독은 “한국은 일본 통치 아래에 남을 것이며 한국의 국익은 존중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총독은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은 스스로 혼자서는 문명화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서 “한국은 인접한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하며 한국은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큰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감옥에 수감된 1000명의 한국인 중에서 600명 이상이 석방되었고, 나머지는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28일자(제340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
세 번째 보도가 나간 것은 두 번째 보도가 나간 지 46일 만이었다.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4월 7일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은 혁명 잡지를 인쇄한 비밀 인쇄시설을 찾아냈다. 모든 인쇄기계는 즉각 군법회의에 귀속됐다. 도쿄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것으로 보인다. 2000명의 한국 노동자가 무자비하게 검거되었고 그중 절반은 재판에 회부된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5월 13일(제377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
독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가 인쇄된 장소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인쇄 장소가 체코슬로바키아가 아닌 러시아였을까? 러시아에서도 왜 인쇄처가 날짜별로 다를까 하는 의문이다. 무소속 부대로 전락한 체코 망명군대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에 의해 창간되었다. 1917년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에 놓여있을 시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1916년 러시아에서 창설한 군부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세계대전 중 연합국(영국·프랑스) 편인 제정(帝政) 러시아군대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6만명 규모.
▲ 열차로 이동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이 군대는 이동 중에 전투를 벌이고 신문을 발행했다. / photo 주한체코대사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복잡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성공하면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됐다. 러시아 전역은 적군(赤軍)의 수중에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고 또 외국군대가 러시아에 속속 상륙하면서 상황은 혼미해졌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활동하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졸지에 ‘무소속 부대’로 전락했다. 이에 미국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프랑스 측과 협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프랑스군에 배속시킨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어떻게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시키느냐 하는 것. 우크라이나 서쪽은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완전 장악된 상태였다. 거리상으로는 서쪽으로 가는 게 가까웠으나 그것은 볼셰비키 적군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우회시키기로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소비에트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무장한 상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올샤 대사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동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면서 “러시아 서쪽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에 전투를 하면서 신문을 편집 인쇄해 배포했다”고 말했다.
1919년 3월 13일자 이 신문은 아무르강 지방의 볼셰비키와 일본군의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이날자 신문은 옴스크(Omsk)에서 인쇄되었다. 옴스크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이후 신문은 동시베리아 노보니콜라예브스크(Novonikolayevsk)에서 발행되었고 다시 바이칼호 인근 도시인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찍는다. 신문의 인쇄처가 옴스크→노보니콜라예브스크→이르쿠츠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라디보스토크, 체코와 한국의 첫 만남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제1진(약 1만5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18년 4월 말. 소비에트정권이 극동 러시아까지 장악한 상태였지만 망명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했다. 배편을 이용해 프랑스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시차를 두고 속속 시베리아에서 극동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으로 집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18년 4월부터 1920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하며 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했고 망명군대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전선이 아닌 막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민주공화국이 됐다.
역사적으로 아무런 교류가 없던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접촉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졌다. 1918년이면 이미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지방에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던 시점. 간도는 당시 한국인 약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어 해외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한국·체코 접촉과 관련된 연구는 체코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프라하의 역사학자 즈덴카 클로슬로바(Zdenka Klosl쮤v쮅)는 2002년과 2003년 프라하에서 발행된 계간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구’에 ‘러시아의 체코 군대와 한국 독립운동’과 ‘한국독립투사에 들어간 체코무기’를 각각 게재했다. 클로슬로바는 체코 기록보관소의 자료와 러시아 측 자료를 수집했다. 여기에 한국 측 자료로 역사학자 신용하의 ‘북로군정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사 연구’와 ‘한국근대 민족운동사 연구’, 역사학자 박용석의 ‘일제하 만주·노령 지역에서의 독립군의 연구’, 이기백의 ‘신한국사’를 참고했다. 클로슬로바의 연구 논문을 보면 체코신문이 어떤 경위로 한국의 3·1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보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체코군, 같은 식민지 한국에 연민 느껴”
러시아 연해주의 한국 독립투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대기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무기로 무장이 절실했던 독립운동조직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소비에트 적군과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서둘러 무기를 팔고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무기를 팔기로 한 데는 러시아를 떠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무기가 소비에트 군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이유도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독립투사들에게도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절실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대일투쟁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기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간도지방의 최대 독립운동조직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역시 러시아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북로군정서 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한국 독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무기 구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1차대전 중 독일·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 자유민주국가가 되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동유럽의 최전선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유럽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독립을 되찾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권총 200정 등 무기수송에 230명 동원
이범석 대장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한국 독립투사에 무기를 팔기로 결정한 주된 이유가 같은 피압박 민족인 한국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범석 외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무기 구입과 관련한 증언자는 이우석이 있다. 당시 북간도에서 북로군정서에 참여하고 있던 이우석은 25세였다. 이우석은 192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간도로 수송하는 부대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우석은 85세이던 1980년, 역사학자 박용석에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 230명은 200정의 권총,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진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무기 거래는 무엇보다 일본군을 자극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이와 관련된 소식이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 매우 심각한 상황을 불러왔다. 1920년 3월 7일자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본군 이나하기 대장이 러시아 당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일본에 예속된 한국이 러시아 영토에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일본대장은 이 서한에서 “1월 20일 (소련)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의 무기 구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여전히 서류상으로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대장은 “만일 러시아 당국이 조치를 취하기를 꺼리거나 할 수 없다면 일본군이 어쩔 수 없이 상황 통제를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 / photo 주한체코대사관 러시아와 일본군 사이의 긴장 고조는 일본군이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해 점령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군사적 조치가 만주와 한국에서 반일 선전활동을 지원한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정당화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 거주지역인 신한촌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한국인 130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부상한 신한촌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승리 공신은 체코군 무기
무장독립운동사의 자랑이 1920년 10월 21~26일의 청산리 전투다.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가 이끄는 무장독립군 2500명은 일본군 5000명을 몰살했다. 신용하, 박용석 등 한국 역사학자들은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구입한 고성능 신형 병기로 인해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는 요인이 됐다고 강조한다. 청산리전투의 빛나는 승리의 일등공신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사들인 무기였다는 얘기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종간(終刊)됐다. 올샤 대사는 “1919년 당시 미국 시카고에는 최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코뮤니티가 있었다”면서 “여기서 체코신문이 두 개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이 신문들도 3·1독립운동을 보도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918년 10월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지도자 토마시 마사릭(Masaryk). 마사릭 박사는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곧바로 조국으로 가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격려했다. 올샤 대사는 “마사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한반도를 종단해 부산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고 말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
대사 내정된 후 프라하도서관·고서점 뒤져 한국자료 수집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원본은 현재 주한체코대사인 야로슬라브 올샤 2세가 소장하고 있다. 올샤 대사는 프라하 카를대학 출신으로 올해 46세. 2008년 9월 한국에 부임한 올샤 대사는 2007년에 한국대사로 내정되었다. 한국은 올샤 대사의 두 번째 대사 부임지. 한국에 오기 전 올샤 대사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 3국 대사로 6년간 근무했다. 2008년에 체코에서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대사로 내정된 직후, 올샤는 프라하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져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이렇게 수집한 서적은 100권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올샤 대사는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1919년 신문을 구할 수 있었다.
올샤 대사의 부친 역시 대사를 지냈다. 부친은 16세 때 처음 인도네시아어를 접했고 1960년대부터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벨벳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3년 첫 주인도네시아 체코대사로 부임했다. 당시 하벨 대통령은 대사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외교관 경력보다는 주재국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았다. 부친은 인도네시아어 전문성을 인정받아 초대 주인도네시아 대사로 6년간 근무할 수 있었다. 부친은 2003년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제1권을 펴냈다. 올해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2권을 출간했다.
올샤 대사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왔다. 1989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2년부터 외교부 근무를 시작했다
-청산리 대첩의 승인중 이런 배경이 있는건 이 기사 보고 첨 알아서 흥미로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