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총 가져가라." 박동진 이등병조의 마지막 유언.
안녕하세요? 블루페이퍼입니다.
위 제목의 유언이 나온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획득의 교두보를 확보한 한국 해군의 영흥도와 덕적도 탈환 작전입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영흥도와 덕적도 위치를 아실 수 있도록 우리에게 친숙한 네이버 지도를 캡쳐해 보았습니다.
네이버 지도를 다른 처리 없이 그대로 캡쳐했는데요.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항로들이 바다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길목에 자리한 섬이 덕적도와 영흥도입니다. 이 섬들을 장악하면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항로상의 선박을 감시 또는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됩니다. 아울러 인천항의 모습도 관측이 가능한 위치입니다.
6.25 전쟁시 적 지상군은 남으로 침공하면서 연안 가까이에 있던 섬들을 점령했는데, 이때에 북한군이 영흥도와 덕적도도 점령을 했었습니다. 북한군은 이때 점령한 섬들을 연합군 해군의 함정을 감시하는 기지로 사용했었는데요. 이에 대응해 우리 해군은 8월부터 도서 탈환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덕적도에는 적 병력 약 30명이 전개되어 주둔했었는데요. 섬을 탈환하기 위해 우리 해군은 함정 장병 중 약 100명의 인원을 차출하여 상륙반을 편성했습니다. 해병대가 1949년에 창설되긴 했습니다만, 병력이 많지 않았고, 이 시기에는 낙동강 전선에 주로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8월 18일 06시경 상륙반은 우리 해군의 함포와 연합군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상륙을 시도했고, 오후 2시경에 덕적도를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덕적도를 점령한 상륙반은 이어 영흥도 탈환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90명으로 상륙반을 편성했는데요. 8월 20일 오전 6시경에 상륙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상륙반은 3개 소대로 구성되었는데요. 1소대 병력 중 적과 교전하다가 박동진 이등병조 등 2명이 전사했습니다. 당시 1소대장이었던 오윤경 소위의 2010년 증언에 따르면, 박동진 이등병조 등은 적의 총을 맞으면서도 무장이 부족했던 아군 동료들을 생각해 “총 가져가라”며 아군쪽으로 총을 던지며 전사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전사하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동료들을 걱정한 그 마음은 우리 후배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우리 육전대는 영흥도 상륙을 위해 영국 및 케냐 군함으로부터 옆으로 탄창을 끼우는 기관단총 30여 정을 빌려 소대당 몇 정씩 나누어 휴대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소대 공용화기였던 셈이죠. 박동진 이등병조가 가져가라고 한 총이 그 기관단총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덕적도, 영흥도 탈환 이후의 해군 육전대 장병들. 1950. 8.20)
당시 상륙반은 잔적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적 사살 6명, 포로 33명, 무기 28정 등을 노획했지만 아군도 네 명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 해군이 진행한 덕적도, 영흥도 탈환 작전은 인천으로 진입하는 항로상의 주요 거점으로, 이를 우리 해군이 점령함으로써 적의 연합국 해군에 대한 정보 수집을 방지하며, 동시에 우리 해군이 인천항을 방어중인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해군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인천상륙을 위한 정보수집을 지시한 것이 8월 12일이었고, 첩보대가 조직 및 준비, 이동하여 영흥도에 투입된 것이 8월 24일 이었습니다. 첩보대는 불과 3일전에 영흥도를 점령한 한국해군의 상륙반 덕에 안전하게 영흥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해군이 미리 영흥도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첩보대가 영흥도에 거점을 마련하는 데 교전이 있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해군의 상륙반과 첩보대의 활약으로 연합국 해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6.25전쟁의 양상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블루페이퍼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오른쪽 아래 섬이 월미도)
해군블로그 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