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4 개월만에 개발해낸 사상 최고 전투기

babyARA 작성일 13.05.30 23: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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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4 개월만에 개발해낸 사상 최고 전투기 

 

-설계에서 생산까지 4개월, P-51 무스탕 전투기.

 

P-51 무스탕 - 제 2차 세계 대전의 최강 전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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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시공을 넘어선 사상 최고의 전투기 
를 선정한 프로를 내 보낸 일이 있었다.

제트기나 프로펠러기나 기술이나 성능에 상관없이 같이 놓고
비교한 특이한 프로였다.

동시대 다른 전투기들을 압도한 최고의 전투기들로서 
최고의 전적을 쌓았고 사용국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선정의 기준이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월남전의 팬텀도 나오고 이차 세계대전의 
스피트화이어도 나오고 한국전의 세이버도 나왔었다.

그래서 최종으로 역사상 최고의 전투기로 선정된 것은 
이차세계 대전 후반기 하늘을 누빈 미국의 P-51 
무스탕 전투기였다.

무스탕은 전쟁 후반 태평양 전선은 물론이고 
전 유럽전선에서 대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기는 한국 전쟁 때 한 미 공군의 대지 공격기로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도 눈이 익다.

무스탕은 한국 전쟁 때 활약하던 F-86을 제작한 
미국 노스 아메리칸사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런 우수한 전투기의 탄생에 여러 진기한 기록이 있다.

1. 미군의 주력 전투기였지만 미군이 무스탕을 제조 항공사에 
개발이나 구매를 절대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무스탕 전투기 개발에 단 일 달라도 내지 않았었다.

 
2.이 전투기를 최초에 구매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무스탕이란 기명도 미국이 아닌 영국이 명명했다.
그러나 영국도 이런 최고의 일류 전투기를 개발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일류 전투기인 스피트화이어가 있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지 2선에서 여러 잡일을 할 다목적기였다. 
그러니까 허드렛 일을 할 B급 2류의 성능만 가지면 
되는 전투기였다. 

 
3.첫 설계에서 일호기 생산까지 단 4개월이 걸렸다.
졸속에 가까운 신속한 개발이었다.


4. 설계에는 생산비 인하와 생산기간 단축을 위한 원가 절감의 
컨셉이 적용되어 있었다.

나중의 무스탕의 대활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허접스럽게 
만들어졌다고 할 만한 컨셉이었다.


5.따라서 이 미제 전투기가 최초로 취역한 곳은 미군이 아니라 
영국군이었다.그리고 공중전 임무가 아니라 정찰과 대지 공격의 
2 류 임무였다.


6.미군도 무스탕을 채용했지만 전투기가 아니라 
독일 스투카와 같은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 된 것이었다.


7. 무스탕은 영국공군이 시험 삼아 영국제 스피트화이어 
전투기의 롤스 로이스 엔진을 부착해보고서야  최고의 전투기임이 
'발견' 되어 단숨에 최고 전투기로 재탄생했다.

위에서 소개한대로 역대 최고 전투기 무스탕은 정말 
주변 여러 환경이 기막힌 조합으로 합쳐져 탄생시킨 
기적 같은 걸작이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투기 항공업계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돌연변이가 출현했다고 보아야 했었다.

단지 그 돌연변이가 초 우량종의 슈퍼 돌연변이 종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무스탕의 개발은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 하게 된 영국이 
도저히 자신들의 생산력으로 감당 할 수 없었던 부족 전투기를 
미국에서 추가 구입을 하려고 한 1939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 생각한 괜찮은 미국제 전투기는 커티스 항공기 회사의 
P-40 토마호크 전투기였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미 이 회사에 1,780 기의 
전투기를 발주 해놓은 상태였다. 
대전이 터지고 얼마 안 되어서 금방 구식이 되었지만 그 무렵의 
P-40은 그런대로 괜찮은 미국의 최신 전투기였다.

 


영국 공군이 운용하던 미제 커티스 P-40토마호크 기.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전투기 제로와 힘겨운 격전을 벌린
전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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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전투가 치열해지던 영국은 더 많은 전투기가 필요했다.

허나 커티스 사는 급증한 미국 국방성 주문 납품에 대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산력을 풀가동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적기에 
영국에게 전투기를 공급할 여력이 없었다.

 

다급한 영국 전투기 구매부서는 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이 연습기 T-6( 한국 공군의 초기 건국기)기를 200기 구매했던 
미국 노스 아메리칸 사와는 구면이라 잘 통하는 사이였다.

노스 아메리칸 사가 제작한 T-6 하바드 훈련기.
한국 공군이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최초 주력기로서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맞선 건국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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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노스 아메리칸사의 사장 제임스 H.킨델버그를 찾아갔다. 
그들의 요청은 커티스사의 P-40을 라이센스 생산 해달라는 것이었다. 
커티스에 라이센스 빌리는 돈을 지불하고 그 설계도를 
가져다가 꼭 같은 P-40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었다.

 
말이 조금 진행되자 노스 아메리칸의 사장 킨델버그는 
대담한 제안을 해왔다.

P-40과 같은 엔진인 1250 마력의 에리슨 엔진인 V-1710-39를 
부착하면서도 P-40보다는 훨씬 더 나은 전투기를 8 개월 내에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안 되어서 기본 개념을 담은 신형 전투기의 
상상도를 보여주었다.

 
영국은 긴가민가하면서 주저했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했고 
개발할 전투기의 개념도 괜찮아 보여1940년 5월29일 
노스 아메리칸이 NA-73라는 형식 번호를 붙이 신형 전투기
320기에 대한 발주 계약을 했다.

 
그러나 킨델버그 사장이 자사의 설계팀에게 영국에 납품할 전투기의
설계를 물론 시험기까지 만드는 시한을 준 것은 단지 120일 뿐이었다. 
이것은 숨통을 막아 놓은 듯 한 엄명이었다. 
그러나 이 큰 계약의 실행은 회사 운명을 가를 만큼 엄중했다.

다음 날인 1940년 5월 30일을D-120로 삼고 노스 아메리칸 사의 
에드가 슈멜과 레이몬드 라이스가 이끄는 설계팀은 휴일을 반납하고 
밤낮없이 새로운 전투기 설계에 돌입했다..


회사의 운명을 걸고 밤낮없이 피땀흘려 노력했던 117일 만에 개발팀과 
생산 팀은 드디어 시작기(試作機))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그 당시 전투기 개발이 전시라서 매우 빠르게 추진된다 해도 
거의 일 년이 넘게 걸린 사실을 보면 믿기 어려운 단기간이다.

이 점은 노스 아메리칸이 그 때까지 고성능 전투기라고는 
만들어 보지 못한 작은 항공기 제조회사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하여튼 신형 전투기 NA-73는 항공역학의 모든 효율성을 극대화 한 
설계의 개념을 그대로 살린 것으로서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여 
전투기의 속도와 운동성을 극대화 한 것이었다.

더해서 전시 급박한 생산 상황을 감안하여 생산비와 생산기간이 
더 긴 곡선 형태를 배제하고 직선 형태를 최대화 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무스탕의 수직 날개와 수직 날개가 이 개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

 
우아한 곡선의 스피트화이어가 실은 높은 생산비와 
긴 생산 기간의 숨겨진 단점이 있다는 사실과 대조가 된다. 
항공공학의 걸작기에 금상첨화의 보너스적인 장점까지 가진 
전투기가 이래서 탄생하였다.


심플한 직선을 최대로 살린 무스탕기.- 아래 곡선의 미를 가진 
스피트화이어기와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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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시제품 전투기는 1940년 10월 26일 첫 영국 
평가단 앞에서 시험 비행을 했다.

항공 역학을 진수를 다한 이 전투기는 첫 선에서부터 
경악스러운 성능을 발휘했다.

같은 엔진을 쓰는 P-40보다 25마일이 빨랐고 당시 세계 최고의 
전투기인 영국 스핏트화이어 V 보다 35마일이 빨랐다.

 
이 첫 시범 비행은 결국 시험 조종사의 실수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끝났지만 첫 비행에서 무스탕은 참관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영국 공군 구매단은 즉시 재 상담에 들어가 350기 주문을 620기로 
늘리고 더해서 전투기의 이름을 무스탕이라고 명명까지 하였다.

 
세월이 너무 지나서 그때 왜 무스탕이라고 명명했는지 그 연유를 알 수가 
힘들게 되었으나 1930년대 유행했던 한 팝송에서 오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우세하다.
(무스탕은 야생마를 일컫는 멕시코식 스페인어인 MESTENGO가 
변화한 것이다.)

 

야생마 무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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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군이 감동하여 추가 주문을 하고 떠난 것을 본 
미 육군 항공대(USAAC- 미공군의 전신 )도 무스탕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신형기에 아파치라는 다른 명명을 하고 
두 기를 시험용으로 납품하도록 주문했다.

그러나 미 육군 항공대는 다가오는 전쟁을 예감하고 P-38, P-47, 
P-40등의 여러 전투기들의 원형을 테스트 중이었기 때문에 
무스탕은 그저 그들 관심의 말석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미국이 시험 평가한 무스탕 초기기 - 영국에 납품한 무스탕과 유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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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주문한 첫 노스 아메리칸 의 무스탕 전투기는 다음 해 
1941년 10월 영국의 리버풀 항에 도착했다.

개발을 번개 같은 속도로 해냈지만 양산체제를 위해서 공장 증설, 
부품 확보, 인력 확보 등에 걸리는 시간은 단축하기가 난감했기에 
생각보다 늦어졌다. 
영국인들은 무스탕이 생각보다 빠르고 성능도 좋으나 
한계도 있음도 발견했다.

 

무스탕에 부착된 1250마력 에리슨 엔진에는 
슈퍼 차저(supercharger)가 없어서 해발 13,000피트 이상의 
고공에서는 성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슈퍼차저는 공기가 희박한 고공에서 엔진에 더 많은 공기를 
유입시키는 2단계 압축 분출 장치이며 이 장치는 스피트화이어나 
메사슈미트기에 다 장비되어있었다. 

그러나 초기 엘리슨 엔진에는 이 장치가 없었다.

이런 제한된 엔진의 성능 때문에 무스탕은 무장 정찰 임무가 주어졌다. 
전투가 아닌 사진 촬영이 무스탕 기의 주 기능이었다. 
후세에 명전투기로 유럽 하늘을 휩쓴 무스탕에게 주어진 임무치고 
너무 하찮은 것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무스탕에 첫 전투 출격은 1942년 5월10일에 있었다. 
프랑스 해안 일대를 정찰하는 비교적 단순한 업무였다.

그러나 이 정찰 임무에 출격했던 영국군 조종사들은 
정찰 업무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지상 목표들을 기총 소사를 했다.

 

이 시험 출격의 결과를 바탕으로 무스탕으로만 이루어진 
영국 공군 14 협동 비행대가 구성되었다.

정찰이나 대지 지원 공격이 이 편대의 주요 임무였었다. 
조종사들은 적기를 만나도 공중전은 하지 않도록 엄명을 받았다. 
무스탕의 열등한 고공 성능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전투 출격을 해보고 비행기의 성능에 감탄한 
조종사들은 설사 적기를 만나도 공중전을 피하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1942년 10월 무스탕은 유럽 전사에서 한 기록을 세웠다. 
영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단발 전투기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영토인 
도르트 문트와 엘름 지역까지 날아가서 정찰과 촬영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당시로는 전투기의 대단한 장거리 비행이었다.

 
실제 전투 출격에서 여러 가지로 숨은 잠재 능력을 보여준 무스탕은 
아직도 최고의 전투기로서 실체를 인정 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무스탕은 여러 테스트를 마치고 정식으로 P-51이라는 
전투기 명칭이 주어졌고 미군에 채택이 되었다. 
그러나 전투기가 아니라 급강하 폭격을 위한 대지 공격기로 
채택 되었다.

 
무스탕의 진가를 아직 모르던 미군은 무스탕을 전투기가 아닌 
독일의 스투카 폭격기 같이 급강하 폭격기로 임무를 
부여해서 북 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역(戰域)에서 활용했다.
A-36이라는 이름이 전투기(P로 시작)가 아니라 
대지 공격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스탕은 폭격기로서도 그 빠른 급강하 속도로서 폭격 임무를 
훌륭히 해내어 미군들을 크게 만족하게 만들었다.


미군에 전투기 아닌 대지 공격의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A-36기. 
무스탕이라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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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다크 호스였으면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무스탕이 드디어 
자신을 세계 최고의 전투기로 재탄생 시켜 줄 기회를 맞았다.

사실 무스탕은 실전 투입전인 1942년 롤스 로이스의 기술진이 
무스탕을 조종해보고 한 제안을 했었다

기체가 뛰어났지만 엔진이 문제가 있으니 스피트화이어에 
장착하는 롤스 로이스 사의 멀린 엔진으로 교체해서 한번 테스트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멀린 엔진은 1650마력을 가진 우수한 엔진이었다.

 

무스탕의 새 엔진 영국 롤스 로이스 사의 멀린 엔진 -1650마력 .
길이가 미제 애리슨 엔진보다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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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된 아이디어는 영국 공군 기술진에게 받아들여져 추진되었다.

드디어 1942년 10월 머린 엔진과 또 보트의 노와 같이 
커다란 날개가 네 개 붙어있는 해밀턴 프로펠러가 장착된 새로운 
무스탕이 탄생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해밀턴 프로펠러의 대형 크기.
--아래 스피트화이어기의 것과 크기의 비교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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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곡선의 스피트화이어기. 
무스탕과 같은 엔진이면서도 프로펠러가 작았고 
속도도 조금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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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속도가 미제 앨리슨 엔진을 장착했을 때의 384마일에서 
무려 435마일로 껑충 뛰었고 고공에서의 성능도 대폭 상승했다. 
무스탕의 비행거리는 1,000마일 이었지만 기체에 
대형 연료 탱크를 달면 무려 2,600마일까지 날아 갈 수가 있었다.

조종석의 캐노피도 더 유선형인 신형으로 바뀌어서 
후방 시야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

영국이 영국제 멀린 엔진으로 기막히게 성능 좋은 신 무스탕을 탄생시킨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영국은 자신들의 엔진을 부착한 전투기를 미군에게 평가 해보도록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게 영국이 개량한 전투기를 미국은 P-51B라고 명명하고 
즉시 생산에 착수했다.롤스 로이스의 멀린 엔진은 미국 
팩카드 엔진 회사에서 라이센스 프로덕션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은 곰처럼 춤을 추고 돈은 
왕서방 격인 미국이 다 벌었다고 하겠다.

 

미군이 채택한 P-51B기.- 초기의 무스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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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 생각지도 않게 굴러 들어온 횡재 같은 전투기를 
대뜸 2,200대나 주문했다.

새로운 무스탕의 출현은 공군 전략의 변화를 유도했다. 
그 무렵 독일 주간 폭격을 미 8공군의 손실은 기대이상 높았다. 
그들을 독일 깊숙한 내륙까지 엄호해줄 전투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전투기는 폭격기를 호위하고 비행해 오다가 
그들의 비행거리가 다 하면 중도에서 폭격기들에게 행운을 빌고 
돌아와야 했다.

 

작열하는 대공 화망을 결사적으로 통과하는 B-17 폭격기 편대. 
화망을 벗어나면 독일 공군기들이 마귀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호위기 없이 감행했던 독일 슈바인프르트 볼 베어링 공장 
폭격 작전의 사진이다.

작전동원 291기중 60기가 격추되고 700명의 승무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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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은 무거운 폭탄을 싣고 전투기 
호위도 없이 나타난 미군의 B-17 폭격기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했다. 
미 8공군의 손실율은 무려 11%나 되었다.

1940년대 초까지는 4발 중폭격기의 항속거리를 
가지는 단발 전투기의 개발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피해 많은 주간 폭격을 포기 할 것을 고민할 때 독일 영토 
깊숙이 베를린 넘어 까지 중폭격기를 호위해 줄 전투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과도 같았다.

 

1943년11월 미 8공군의 영국주둔 354전투 비행단이 최초로 
장거리 전투기 P-51B를 수령하여 장비하는 부대가 되었다. 
일단 기종 전환 훈련을 마친 부대는 마침내 1943년 12월13일, 
독일 킬 시로 폭격 출격한 B-17 폭격대를 첫 호위 출격을 했다.

B-17기의 드문 야간 폭격- 영국 공군은 야간폭격을 
주로 했지만 미 항공대는 주간 폭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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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격에서 무스탕들은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첫 합을 겨루었다.

그러나 전투는 격추도 피격도 없는 무승부로 끝났다. 
사흘 뒤 같은 편대의 찰스 검 중위가 독일 브레멘 상공에서 독일의 
쌍발 전투기 Me-110기를 격추시켜 무스탕의 첫 전과를 기록했다. 
이 12월 출격으로부터 그 겨울 동안 무스탕은 폭격기들의 독일 
내륙 폭격의 호위 임무를 쉬지 않고 해냈다.

 

독일 메사슈미트 110기 복좌 쌍발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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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문제점도 들어나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 장시간 고공비행에서는 오일과 윤활유가 
동결되기 일쑤였다.

전투기가 장비한 4정의 Cal 50 기관포 실탄 탄대가 격심한 
기동 중에는 흩어지고 결과 송탄과 장전 불량을 일으켜 공중전에 
중대한 문제를 주었다.

다음으로 멀리서 보면 무스탕의 실루엣이 적기 메사슈미트
Me-109와 비슷해서 곧장 폭격기의 기총 사수들로부터 
자주 오인 사격을 받았다.

 오인 문제는 무스탕의 엔진 부분에 왕벌처럼 동그란 테두리를 
그려 넣고 날개에 흰 막대를 그려 넣어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에게는 기체에 대폭적인 개량이 있어야 했다.

무스탕이 자신들을 출격부터 귀환까지 줄곧 호위 할 수 있게 되자 
폭격기 조종사들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다.

사기진작에 따라서폭격시의 조종사와 폭격수의 심리적 
안정감은 폭격의 정확한 조준을 가능케 했고 따라서 
폭격 명중의 확률을 크게 높였다.

1943년 12월부터 시작된 무스탕 장거리 호위는 폭격기들의 
손실율을 크게 격감시켰다.

1월과 2월에 손실율을 4.9%로 낮추었고 점점 더 많은 무스탕이 
호위에 나서자 1944년 말에는 3.1%로 낮추어졌다.

폭격기 승무원들과 무스탕 조종사들의 유대도 대단히 높았다. 
피격당한 폭격기가 홀로 비틀거리고 따라오면 본대의 전투기들이 
돌아와서 쇄도하는 적기들로부터 낙오된 폭격기를 엄호했다.

 

 

 

영국과 이태리 기지, 그리고 러시아의 중간 기지를 이용하면
독일의 전역은 무스탕의 비행거리안에 들어있다. 
폭격기들은 독일 어느 곳이건 전투기의 호위를 받아가며 
폭격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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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실은 이 폭격기와 전투기의 전우애를 말해준다. 
354전투 비행단의 제임스 하워드 소령은 오스쉬르벤과 
할버스타드 지역을 폭격하던 폭격기대를 호위 임무에 나섰다가 
치열한 적의 저항에 그만 동료 기들과 헤어져서 홀로 날게 되었다.

 

단독 비행 귀환 중 그는 역시 자신과 같이 본대에서 떨어져서 
비행하고 있던 4기의 B-17 폭격기들을 발견하고 접근했다. 
그 순간 독일 쌍발 전투기(메사슈미트 110)들이 습격해왔다. 
폭격기들도 기관총으로 응사했지만 하워드 소령은 단독 영격에 
나서서 다수의 적기들을 겁 없이 공격했다.

 
그는 30분 동안의 전투에서 치열한 공중전에서 
4 정의 기관총 중 두 정이 송탄 불량으로 고장이 났지만 
6기의 메사슈미트 ME -110을 격추했다. 
그는 이 전공으로 미국 최고의 무공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았다.

P-51B가 선전하면서도 문제도 들어나자 노스 아메리칸 
항공기 회사는 개량에 착수했다. 
먼저 후방 시야 불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행기 뒷부분을 
수평으로 깎아낸 듯한 개조를 하고 캐노피도 사방이 잘 보이는 
티어드롭 형(눈물 방울 형)으로 바꾸었다.

 
탄대를 자주 송탄 불량의 문제점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기관총도 설치 방법을 개량했다.

여기에 더해서 기총수도 6정으로 증설했다. 
이 무스탕은 P-51D형이라고 명명되었다. 
D형은 무스탕의 결정판이었다. 
이 D형은 무려 8,000기나 생산되었다.

 

무스탕 P-51D형, 조종석 후방이 더 유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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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무스탕 전투기들이 폭격기들을
목표 상공에까지 따라와서 틈을 보이지 않고 이들을 
철통 수비하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루프트바페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베를린 상공에 
무스탕이나타나서 난비하는 것을 보고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어 졌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제 8공군의 비행단들이 앞 다투어서 P-47이나 P-38기들을 
새로 출고되는 날렵한 무스탕 전투기들로 교체하자 그들의 
적기 격파 전과도 오르기 시작했다.

새로 배치되기 시작한 무스탕은 100회 출격마다 적기를 
13기 꼴로 (지상 격파 포함) 격추했는데 이는 P-47이나 
말썽 많던 초기 형 P-38들이 이룬 성과보다 세배나 높은 전과였다.

무스탕의 숫자와 활동이 늘어나고 폭격기 호위의 경험이 
축적되자 무스탕 부대의 전술에도 변화가 있었다.

초기 폭격기에 밀착해서 호위하던 것을 그들은 4기 또는 8기의 
전투기들이 폭격기의 전위에서 앞서 비행하다가 영격 나오는 
독일 공군기들을 앞서서 공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전술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적기에 의한 폭격기의 피격을 
크게 축소했다.

무스탕은 독일이 가진 전투기들인 메사슈미트 Me - 109 보다 
50마일이나 더 빨랐고 더 신형인 포케울프 FW- 190보다 
더 빠르게 급강하할 수가 있었다. 
금상첨화로 고공 전투의 능력도 양 독일 전투기들을 능가했다.

 

독일 메사슈미트 Me-10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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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부대의 대 활약은 독일을 영국 본토 폭격 같은 공격 전략에서 
독일 영공을 방어하는 급급한 소극적인 방어 전략으로 변환하게 했고 
그런 소극적인 전략은 독일이 도저히감내 할 수 없는 연합국과의 
소모전에 말려들게 하였다.

 

독일 포케울프 FW-190기.
미 해군 최우수 F-8 베어캣 전투기의 개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우수한 전투기였지만 무스탕의 성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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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에 나선 1943년 12월서부터 1944 3월 사이에 
무스탕 부대 단독으로 격추시킨 전투기들을 몰던 530명의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이 목숨을잃었다.

무스탕에 의해서 소모되는 독일 조종사들은 신참 조종사들로 
대치되었는데 이들 역시 더 경험을 쌓은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더 쉬운 먹이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독일이 유럽전선의 제공권을 
완전 상실했던 것은 미 공군의 무스탕 투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비록 무스탕이 태평양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무스탕의 진가가 발휘되고 또 최대의 전과를 거둔 곳은 
유럽 전선이었다.

무스탕은 공중전에서 연합국 측의 어떤 전투기보다도 
많은 4,950기의 독일 기를 격추했다.

무스탕의 출현은 거의 벽에 막힌 미 공군 폭격대의 주간 
폭격 전략을 살려냈고 유럽 전선의 폭격 제공권을 잡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연히라고 할 수 없었던 인연으로 무스탕을 개발한 
노스 아메리칸 사는 모든 형의 무스탕을 15,586기를 생산하고 
전쟁의 종언과 함께 생산을 중단했다. 
노스 아메리칸 사는 뜻하지 않던 무스탕의 개발로 국가의
전쟁수행에 크게 이바지했고 자신들도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노스 아메리칸은 무스탕으로 쌓은 실적으로 한국 전쟁때 대 활약을 
명 전투기 F-86기를 개발해서 또 다른 명성을 떨쳤다.

 

한국 전쟁에서 큰 활약을 F-86 세이버 형. 
역시 노스 아메리칸 사의 히트 전투기로서 세계 각지에서 
5,500기가 생산되고 사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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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무스탕은 미군은 물론 세계 각국의 공군에 계속 활동했었다. 
한국 전쟁 때도 활약했지만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전공을 세웠다.

 

한국 공군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도입해서 운용했던 무스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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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차 세계 대전 때 생산된 무스탕 중에 280기가 생존해서 
각 국제 항공 레이스대회나 민간 애호가들에 의하여 사랑받고 있다.

 

그저 B급 전투기로 탄생했던 무스탕이 우연에 의해서 숨겨진 
진면목이 발휘되어 유럽 하늘의 맹주로 활약한 스토리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한국 속담에 정확이 맞는 경이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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