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참패, 크레시 전투

찐만두두빵 작성일 24.12.18 11: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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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1337년 백년전쟁이 시작된 이후 프랑스 왕국은 프랑스 북부 전역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양측 모두 손실이 컸고, 정전 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1341년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양국은 다시 갈등을 빗게 되고 정전 협정은 파기된다.

 

134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북부를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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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보급에 불리한 원정군 특성상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고

 

초토화로 인해 프랑스군이 전투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로

 

급하게 잉글랜드 군과 일전을 벌이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프랑스는 병력들의 소집을 완료할 때까지 잉글랜드 군의 약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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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전력이 모이자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군을 격멸하기 위해 출발했다.

 

결국 두 군대는 크레시에서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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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군은 미리 전장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수일을 내리 행군해 지쳐있는 상태였다.

 

또한 갑자기 큰 폭풍우가 몰아쳐 전장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은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무려 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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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군의 2배가 넘는 규모로

 

1만 2천 명에 달하는 중기병대와 약 6천 명의 제노바 석궁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만 2천 명의 중기병들은 많은 기사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정면에서 막을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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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 군은 약 1만 2천 명 정도의 규모로

 

약 7천 명의 장궁병과 3천 명의 맨앳암즈, 2천 명의 장창병으로 이루어졌다.

 

장궁병들은 역 V자 형태로 양익에 배치되었다.

 

또한 기병에 대비하기 위해 구덩이와 통나무들을 설치했다.

 

격전이 벌어질 최전방의 보병 부대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전투의 승패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잉글랜드 장궁병과 제노바 석궁병들의 사격전으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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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격전은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시기 엄청난 무게의 석궁은 한 발로 땅을 짚고, 균형을 잡아 당겨서 장전해야 했다.

 

그러나 직전에 몰아친 폭풍우로 전장이 진흙탕으로 변해

 

땅이 미끄러워 도저히 석궁을 장전할 수 없던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잉글랜드 장궁병에 얻어맞은 제노바 석궁병은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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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노바 석궁병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필리프 6세는 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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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도망치는 제노바인들이 프랑스를 배신했다 생각했다.

 

분노한 프랑스 중기병들은 도망치던 제노바 석궁병들을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6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의 궁병 전력은 팀킬에 의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 중기병대는 제노바 석궁병들을 학살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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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전열을 정비하고, 대열을 이뤄 잉글랜드 군에게 돌격했다.

 

돌격하는 프랑스 중기병대를 향해 장궁병들은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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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장궁이어도 프랑스 기사들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기사들의 갑옷을 효과적으로 뚫을 수 있는 병기는 화약 병기뿐으로

 

이 시기에는 아직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역 V자로 양익에 배치된 장궁병들은 측면에서 화살을 발사했고

 

이들은 기사들의 말을 노렸다.

 

말들은 마갑으로 보호되지 않는 측면에 화살들을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측면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 중기병들은 점점 중앙으로 몰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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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속에서 먼저 쓰러진 말들과 기사들이 뒤엉킨 채 난장판이 되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 압사당하거나

 

진흙으로 인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기 일쑤였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은 잉글랜드 군의 하마기사와 맨앳암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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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해머와 도끼를 들고 진흙탕에서 발버둥 치는 프랑스 기사들을 향해 돌격했다.

 

프랑스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몰살당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격했던 후속 기사들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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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4만 명의 대군 중 3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려 1200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전사했다.

 

그 당시 기사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고려해 보면, 회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피해였다.

 

프랑스 귀족 3분의 1이 사망했으며, 국왕의 동생마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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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사도 시대의 종말을 알리게 되었다.

 

이 전투 도중 많은 부상자와 포로들이 즉결 처형당했고

 

이것은 기사도 정신에 완벽하게 위배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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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은 엄청난 참패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알았을까?

 

프랑스의 패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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