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내곁에-김현식
이노래을 처음 접했을땐 18살(고3,,,신문배달 알바했던) 1991년이었다...
무심코 고향..홍천,,읍내 ,,에서 들려오는 끌리던 멜로디.
그후 군입대전 까지 나의18번 노래가 되어있었다.....짜옹생각...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내 사랑 내 곁에 중.
1990년 11월 1일은 음악과 술, 그리고 외로움에 절어 살던
가수 김현식이 세상을 뜬 날이다.
어느 새 그가 서른두 살의 나이에 간경화로 죽은 지19년이 흘렀다.
그냥 가수로 부르기엔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족적이 너무도 깊고 컸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거목이라고 부른다.
갈라지고 탁한, 악을 쓰며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듣는 이들의 심장에 그대로 절절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그 거친 목소리의 아름다움, 그의 삶,
음악에서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원초적 고독과 슬픔,
분노가 청취자에 고스란히 이식되는 순간들이었다.
고 김현식의 15주기를 기려 지난 10월 29일 연세대 대강당에서는 추모공연이 열렸다.
권인하, 우순실 등 동료가수들이 그를 위해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고
어느덧 중년이 된 팬들이 그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영화감독 육상효에 따르면 그가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시절에 만난 김현식은
주벽과 기벽이 심했는데 늘 세상의 소외계층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계급적 소외계층보다 넓은 의미로 소외계층이라는 말을 생각한다며
자신은 실연 당한 사람들도
세상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소외계층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기타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보성중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정릉의 큰집에서 사촌형들과 함께 살았는데
홍익대 내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었던
사촌형 양국정이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줬다.
음악에 빠지면서 모범생이던 김현식의 성적은 급강하했다.
경기고에 낙방한 후 후기 명지고에 들어가 밴드부 활동을 하다가 자퇴하는 수순을 밟았다.
곧바로 종로에 있던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는데 차츰 학원에 나가는 일보다는
종로통의 깡패들과 어울리는 날이 많았다.
노래가 하고 싶었던 그는 업소의 오디션을 통과해 종로의 벌판,
명동의 쉘브로, 썸씽 등에서 노래를 불렀고
당대 스타 가수 이장희의 친동생인 이승희와 듀엣을 이뤄 당시 송창식 등
스타들이 드나들던 최고의 나이트클럽이었던 국도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도 섰다.
이승희와 헤어진 뒤에는 신촌 블루스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김동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김동환은 가수는 선천적 목청을 타고난 가수와 후천적 발성 노력에 의해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가수 두 종류가 있는데
김현식은 전자에 속할 것이라며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채 스물도 안 됐는데
웬 양아치 같은 녀석이 노래는 기막히게 잘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김현식의 첫 앨범 발매 시도는 1978년, 당시 사업가,
음악기획자로도 한국 가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장희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녹음이 거의 끝나고 마스터 테이프가 나올 즈음 이장희가 사업부도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무산됐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 가요계에 만연한 대마초 사건으로 김현식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현식의 첫 독집 앨범은 이장희가 착수한 때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80년 서라벌레코드사를 통해서 나왔다.
앨범 출시 후 색소폰으로 유명한 정성조가 이끄는 메신저스라는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이 즈음 부인 김경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듬해에는 그가 나의 분신이라며 끔찍이 사랑한 아들 완제가 태어났다.
이 시기 메신저스와 결별하고 검은 나비라는 그룹의 리드싱어를 맡았고
주저하지 말아요라는 곡을 만들어 동료가수 방미에게 주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음반만을 전문적으로 기획 제작하던 동아기획이
그를 스카웃 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어 어둠 그 별빛, 바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의 모습 등으로 구성된 2집 앨범, 사랑했어요가 출반 돼 폭발적 반응을 얻었으나
같은 동아기획에서 곧바로 나온 들국화 앨범이 더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김현식의 2집은 주춤했다. 2집 후에 김현식은 그룹 여가겨울을 조직했고
그 멤버는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그리고 역시 요절한 가수 유재하였다.
육상효를 비롯한 김현식의 주변 사람들은 이 시기 그의 주벽과 자유분방함을 견디지 못한
아내와 별거하면서 김현식은 가장 불운한 시간들을 보냈다며
술만 취하면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면서 아들 완제를 보러 갔다고 전했다.
내사랑 내곁에는 세상 뜬 후 히트 하였다. 김현식의 3집 앨범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시절 나왔다.
빗속의 연가,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와 단둘이서 등이 담겼고
유재하는 자신이 만든 가리워진 길을 선물했다.
3집 앨범에는 김현식의 최대 히트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머릿곡으로 실려 있다.
3집 앨범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김현식은 대중에게 얼굴 없는 가수였다.
좀처럼 TV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TV 녹화를 앞두고
연출자의 이래라 저래라 하는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방송을 팽개치고 가버렸다는
김현식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가수였다.
1987년 가을 그는 다시 대마초 상용혐의로 구속됐고
그로부터 5개월 만인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삭발한 채 재기 콘서트를 가졌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음으로 그의 몸은 날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갔다.
그런 와중에 비오는 어느 저녁,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와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이 수록된 4집 앨범을 냈다.
1988년 말에는 음반판매량이 가장 큰 시상의 기준이 되는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폭음과 과로로 그의 육체는 허물어지고 목소리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다.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나온 5집 앨범은
그래서 어느 앨범보다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 나온다.
공전의 히트곡 내사랑 내곁에 등이 실린 6집 앨범은 그가 세상을 뜬 후 햇빛을 보았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1980년대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김현식이 지니는 의미의 핵심은
서구 대중음악의 수용이 한국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총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김현식의 음악은 포크와 이지 리스닝 팝, 록과 블루스, 퓨전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분석이다.
강씨는 또 언더그라운드의 상대적 자유로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만의 독특한 음색을
분만하게 했고 이 음색에 이르러 그의 개성은 비로소 완성됐다며
전인권의 그것과도 다른 그의 음색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대중음악의 왕관을 결정적으로 찬탈한 일군의 젊은 발라드 싱어들의
이정표가 됐다고 덧붙였다.
내사랑 내곁에 / 김현식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 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을 모르고 애써 웃음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저 여린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을 힘겨운 날에 너 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 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출처 : 이종격투기 카페 - 세계정복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