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시위가 많은 나라다.
그도 그럴 것이 12억 인구에 공식 언어만 22개, 상이한 인종 집단, 다양한 문화적 전통에 카스트 제도에 따른 계층 집단 등 저마다의 요구와 주장이 다종다기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재벌’이 'chaebol'이라는 영어로 통용되는 것처럼 인도에서 파업, 집회, 시위 등을 일컫는 ‘bandh' , 'gherao', 'dhama' 라는 단어도 영어 사전에 올라가 있다. 심지어 사무실 임대차 계약에도 시위로 인해 사무실 이용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건물주는 이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어떻게 하나의 국가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인도지만 선거를 통해 정권의 담당세력이 결정되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고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또한 광범위하게 향유된다. 오히려 과잉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
▲ 하위카스트 입학 할당에 반대하는 시위
▲ 수돗물 중단에 항의하는 시위
▲ 카슈미르 자유를 요구하는 무슬림 시위
지난 4월 1일 뉴델리에서는 좀 특이한 시위가 열렸다. 어린이 2백 여명이 아동 노동의 근절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인도를 비롯해 주변국 정상들이 모두 모여 회담을 하는 날이었다. 국가적으로 수치스러울 수 있는 ‘아동 노동’이 시위의 주제이고 외국 정상들까지 모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어린이 시위대의 도로 행진을 허용했고 회담장 앞에만 바리케이드를 쳐서 회담장 진입을 막았다.
지난 4월 17일 베이징올림픽 성화가 뉴델리에서 봉송됐다. 인도는 망명 티베트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다. 그래서 봉송 전부터 최대 난코스라는 말이 나왔다. 인도 정부는 봉송 시각을 행사 직전까지 비밀에 부치고 봉송 코스 주변에는 군과 경찰이 3겹의 방어망을 치는 등 철저한 조치를 취했다.
‘시위 조짐만 보여도 모두 잡아가겠지..’
그러나 이런 필자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봉송 코스 저 멀리서 2천 명은 됨직한 티베트인들이 도로의 한 쪽을 차지한 채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경찰의 태도였다. 이들을 해산시키기는 커녕 시위대를 앞 뒤 양쪽에서 지키면서 함께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날 경찰은 봉송 행사장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티베트인들만 체포했다.
외국 정상들이 회담을 하는데 어린이들이 국가적 수치인 ‘아동 노동’ 문제로 시위를 하고, 제 나라 국민도 아닌 티베트인들도 자신들의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지금 고국에서는 미국소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문제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찰이 유언비어 유포자를 찾아내 사법 처리하겠다고 하고 실제로 학교에까지 찾아가 고등학생을 조사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제 나라 국민들의 집단적 의사 표현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언비어 유포자를 사법처리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전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설령 정확치 않는 사실들이 섞여 있다 한들 그것이 사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상대로 한 문제 제기라면 그 자유는 폭넓게 허용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모든 목소리를 일단 들을 의무가 있다. 듣고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과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그런 목소리가 안 나오게 하려고 하는 것 같다. ‘5공 시대’로 상징되는 거짓 민주주의적 발상이다.
또 하나, 교육 당국과 학교들은 청소년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무슨 금기를 깬 것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나라에서 참으로 수치스러운 행태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겠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민주 시민은,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적 의사 결정 과정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시민이 많을수록 사회는 건강해지고 투명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민주 시민을 기른다는 학교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너희들은 나랏일에는 신경 끄고 입시 공부나 하라’는 것이니 얼마나 황당한가?
인도에 살다보면 ‘한국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일이 지천에 널려 있다. 그런데 지금 촛불 집회를 두고 고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우리 대통령과 정부가 이 알량한 나라만도 못한 수준인 것 같아서 낯이 뜨겁다.
어린이도 외국인도 자유롭게 집회 시위를 하는 이 나라는 지금 국민소득이 800 여 달러, 문맹률이 39%,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극빈층이 4억 명이다.
명색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함께 이룬 대한민국인데 헐벗고 굶주리는 인도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2008. 05. 15. 인도뉴델리 특파원 이재강
자료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