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태어난 년도와 월이 같다???
빌클린턴 :
1946년 8월 19일
노무현:
1946년 8월 6일
2.탄핵위기에 처했었다???
빌클린턴:
미국의 제42대 대통령(1993~2001)으로서 미국이 가장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에 재임했고 아이티와 중동, 그리고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적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 인턴 직원과의 혼외정사 때문에 미국 역사상 앤드루 존슨에 이어 2번째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노무현:
2004년 3월 12일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했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이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계속 갈등을 빚어왔는데, 두 정당은 3월 9일 측근비리, 경제파탄, 선거법 위반 등의 사유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결국 3월 12일 열린우리당의 물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러자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촛불시위와 시민단체들의 탄핵철회운동이 거세지면서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분노의 결과는 4월 15일 제17대 총선에서 나타났다. 노무현을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해온 열린우리당이 결국 원내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또한 5월 14일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의 권한을 회복했다. 노무현은 비록 대통령 탄핵 사태에 휘말렸지만 결국 대통령의 권한도 회복하고, 그를 지지하는 열린우리당도 압승하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은 결과가 되었다.
3.그래도 이후에 당선된 대통령보다는 나았다???
조지부시
이명박
4.불행한 성장기를 겪었으며 정치입문도 비범했다???
빌클린턴: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후 어머니가 로저 클린턴과 재혼했는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혼했다가 재결합하는 등 굴곡 많은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들 블라이드는 성(姓)을 의붓아버지의 성인 클린턴으로 바꾸었다. 외할머니가 그의 양육을 맡은 적도 있었다. 클린턴은 어려서부터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클린턴 자신의 말에 의하면 1963년 7월 J.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게 되었을 때 정치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에 입학했고, 1968년 국제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클린턴은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는데, 징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장차 정치가로서 자신의 경력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써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1968~70) 클린턴은 뒷날 자신이 재직하게 된 아칸소대학교 법학과 대학원에 있는 예비장교 훈련단(ROTC) 단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훈련단장에게 군대에 가지 않게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이 훗날의 '정치적 생존'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노심초사했다며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후일 클린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편지를 그의 권력욕과 권모술수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했다. 클린턴은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 대마초를 피우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는 당시 대마초 연기를 들이마시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클린턴은 예일대학교 법과 대학원에 진학해 1973년 졸업한 뒤 1976년까지 아칸소대학교 법과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클린턴은 텍사스 주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의 대통령 선거운동(1972)과 아칸소 주에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선거운동(1976)을 이끌었고, 1974년에는 하원 후보로 나섰으나 실패했다. 1975년 예일대학교 법과 대학원 동창생인 변호사 힐러리 로댐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클린턴의 정계 진출을 위해 활약했다. 다음해 그는 아칸소 주의 검찰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78년에는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에서는 40년 만에 등장한 최연소 주지사가 되었다.
-------너무 길어서 나머지내용은 다음에서 클린턴으로 검색하면 나오니 거기서 읽어보길;;;-------------
노무현:
성장기와 정치 입문
노무현은 8·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화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뼈저린 가난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3·15부정선거, 1960)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한 해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쳤으며, 지방 명문이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이후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해 곧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고시 준비생 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소탕작전에 따라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열정적인 인권변호사의 출현을 알렸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동료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지적하고 군사독재 정권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재평가를 재판부에 요구했다.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그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의 주요 시국·노동사건 변론과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1984),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1985) 활동을 통해 용기 있고 신망 받는 재야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어(1985)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노동운동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8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을 수습하다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여론의 강한 반발에 힘입어 20여 일 만에 풀려났으나, 변호사 업무정지처분이라는 정치 보복을 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대중적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2·12사태(1979)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의 당선으로 귀착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전국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6월민주화운동은 물론 이 운동의 야전사령관 격이었던 그에게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듬해(1988)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박해받는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낙선을 우려해 맞대결을 기피하던 신군부 실세 허삼수 민정당 후보의 대항마를 자청해 부산 동구에 출마, 승리함으로써 화려한 정계 입문 의식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종원 전 법무장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이들의 습관성 '기억상실증'과 위증(僞證)·발뺌에 쐐기를 박으며 궁지에 몰아넣어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분도 너무길다... 이건 일부에 불과하다...----------------------------------
5. 여전히 자국 국민들은 그들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