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여대생의 죽음(펌글) 마음이 짠해지네요.

명불허전 작성일 08.08.05 0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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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긴박하다. 좁은 골목길, 자욱한 최루탄이 시야를 흐린다. 축축히 젖은 아스팔트 위로 짝 잃은 운동화와 뭉그러진 손수건, 주인 잃은 가방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다. 가만,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악,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사람이 죽어가요.”
“야, 그만 때려. 사람이 죽는다고.”

대한극장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백골단과 전경들의 ‘토끼몰이’ 진압방식에 쫓겨 골목길에 가둬진 학생들은 사과탄과 무차별한 폭력 앞에 하나 둘 쓰러졌다. 그 현장에서 崇高숭고한 젊음이 散華산화했다. 烈士열사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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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5월이 오면 가슴에서 되살아나는 김귀정 열사. 생김새만큼이나 단아한 표정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2005 김귀정추모사업회

1991년 비 내리는 5월 25일에 산화해 간 김귀정 열사에 대한 회상이다. 그렇다. 어느덧 벌써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는 그날의 긴박함을 ‘벌써’ 과거의 기억으로 떠올리고 있다.

1991년, 나는 대학새내기였다. 새내기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3월과 4월은 친구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였다. 선배들을 쫓아 다니며 대학의 문화를 익히는 과정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막걸리와 소주를 벗삼으며 인생의 자유를 논했다. 대학교정의 낭만을 이야기했다. 봄날의 햇살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렴풋한 자유와 낭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4월 26일 명지대 신입생인 강경대 열사가 학원자주화투쟁과 노태우 정권의 비리를 규탄하던 학내시위 중 백골단의 폭력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날 이후,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는 연일 계속되는 열사의 죽음으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 정상순에 이르기까지 열사들의 죽음은 계속됐다. ‘분신정국’이라 칭하던 그 ‘현실’은 참으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새내기의 머리에는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선과 악은 구분되는가, 나라는 정직한가, 권력은 정당한가, 생명이 소중하긴 한가, 사회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그리고 5월 25일, 김귀정 열사의 죽음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열사의 죽음에 분노한 우리들은 새내기, 복학생 가릴 것 없이 노태우 정권의 타살을 규탄하며 매일 같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우리들은 외로웠다. 전대협 출범식이 진행되고 대학교에선 축제가 한창이던 시기라 다른 학교 학생들의 동참이 없었다.

그때 교육은 학교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현장은 길거리였다. 스승은 지하철을 거점으로 서울을 장악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삶의 동반자는, 타살이 아닌 사고라고 주장하며 시신을 탈취하려는 백골단의 폭력에 맞서 열사의 시신을 사수했던 수많은 동지들이었다.

그렇게 싸우기를 수 십 일, 현장 교육의 힘이었을까? 김귀정 열사와 함께 하며 나는 사회를 인식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해야 했다. 인식의 과정에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었다.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이 있었다.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새벽>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가 있었다. 그리고 김귀정 열사의 ‘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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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석 모란공원에 모셔진 김귀정 열사의 묘소 앞에 놓인 영정사진.



ⓒ2005 김귀정추모사업회

열사는 일기에서 "몸이 열 개라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학생활과 아르바이트 생활의 연속,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을 들어왔는데 그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 나는 공부를 제쳐두고 돈을 벌러 다닌다"고 현실의 고단함을 말했다.

열사는 1966년 태어나 어머님이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대에 합격하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중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사를 도왔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면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고 1988년 성균관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렇게 힘들지만 열심히 대학생활을 하던 1991년 5월 25일, 열사는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폭력에 의해 운명했다.

열사는 한 고교친구를 만나고 난 뒤 "내가 이렇게 편히 지내고 있을 동안 어느 곳을 헤매고 다녔을지 모르는 그 아이는 고등학교 때 내 짝이었고 그저 평범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그야말로 보통 대학생이었다. '데모'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특별하게 보이던 때에 내가 그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어떻게 저리 많이 변할 수가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너 또한 한낱 감상주의에 빠져 있는 운동권 학생일 거야'였다”라고 소감을 적었다.

하지만 이어서 “그러다 시간이 흘렀고 두 번째 다니게 된 성균관대. 그리고 심산연구회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데모란 것이 '운동'이라는 것이 결코 생소하지도 어색하지 않게 되면서 조그맣고 눈이 작은 내 친구 현주는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는 수배학생이 되어버렸다. 부끄럽다. 미안하다는 변명만을 되풀이하면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채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고 수배자가 된 친구를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내 심장에는 열사가 일기에 남긴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물음이 끓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위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라는 열사의 다짐이 있다.

날마다 반성하고 날마다 진보하여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바꾸어가며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고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끈임 없이 역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자
그래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위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김귀정 열사가 남긴 일기 ‘10년 후에 나는’ 전문

당시 함께 활동했던 동아리 선배는 열사를 이렇게 평했다.

"엄지손가락만큼 작다 하여, 어느 만화 여주인공만큼 착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가졌다 하여 '엄지'라 불리던 나의 동아리 후배, 가난했으나 사랑 하나는 마음껏 베푼 아이, 사람 없는 공간을 마음 아프게 지켜나갔던 아이, 어떤 일로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을 때 겸허하고 솔직하게 반성하는 아이, 밤을 새며 토론하는 전투적인 아이, 그 아이가 열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열사라 하여 특출한 영웅의 모습은 아니며, 단지 식민지 조국의 이름 없는 모든 전사들과 같은 모습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현장엔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환경 개선을 부르짖던 동대문 평화시장 현장엔 전태일 열사가 있었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이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한 현장엔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가 있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화를 외치던 현장엔 최루탄에 숨져 간 이한열 열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역사의 ‘기록’으로 기억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1991년 5월 25일 내 ‘현실’에는 김귀정 열사가 온전히 자리하고 있다. 당시 현실은 못 견디게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열사의 정신은 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스무 살에 만난 김귀정 열사. 열사는 내게 현실을 바라보는 ‘아픔’을 주었다. 그 아픔은 열 아홉 해 동안 사회의 방관자에 머물던 나를 현실의 참여자로 바꿔 놓았다. 대학의 진정한 낭만은 연애와 막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지성을 갖추는 데 있음을 깨닫게 했다.

열사는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축복도 주었다. 사회를 인식하면서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하도록 자극했고, “一身일신만을 위해 好衣好食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열사가 끝내 답하지 못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출처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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