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내용이라 짱공유 여러분도 보시고 의견좀 구합니다..- 가자서
이젠 진실을 알아야 한다 [아고라 beck님 글]
학병시절 일본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옆에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1944년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사관후보생으로 입대.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 받음.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에는 이 사진에 대해서
"1941 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해 4월에는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사실 그 무렵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 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1944년에 들어 모든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하였다." 라고 씌어있었다.
-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김수환 추기경 발자취' 중에서 -
그런데
위 사진에서 화살표를 봐라.
아니 저것이 무엇인가? 지휘봉아닌가?
일본군복을 입은것이 자랑스러운가?
일본군복입고 기념사진 찍는 것도 모자라 지휘봉까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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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그는 진짜 민주화의 수호자 였을까?
그의 회색분자같은 삶을 잘 보시라.
두루 알다시피 김 추기경은 원로가 드문 한국사회에서 노상 '원로'로 꼽혀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서울 명동성당이 지닌 상징성―언젠가부터 시나브로 빛바래가고 있지만―과 추기경이라는 '권위'가 이어졌기에 더욱 그랬다.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그만큼 이 땅의 '영혼'이 가난해서였다.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평가, 과장된 대목 많다
하지만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이제 더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시절
1979년 4월9일 사형당한 인혁당사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당시 미국인 신부였던 시노트주교가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에게 구명요청을 했으나
<1975년 4월9일> 발간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 뒤의 ‘인혁당 사건 조작’ 기록
드디어 빛 봐
무고한 시민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인혁당 사건. 유신정권의 사건 조작을 처음 폭로한 건 파란 눈의 신부였다. 그가 남긴 기록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됐다.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지난 1974년
5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혐의로 도예종·서도원·하재완·
송상진· 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된 뒤 19시 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인혁당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했던 시노트 신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선배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했다. (사진/ 류우종 기자)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저
항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처형된 8
명은 국가 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
차 들어보지 못 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박 정권은
살인적인 고문으로 이들한테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완벽한 공안사건을 만 들어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 사건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다. 조작 사실
이 드러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됐고 결국 5년
뒤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간첩조작 폭로 뒤 한국서 쫓겨나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의 미
국인 신부였다. 사건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했던 제임스 시노트(76)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시노트 신부는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될 예정인
<1975년 4월9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밝혔다. 1975년 4월9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
형된 날이다. 시노트 신부는 같은 해 4월30일 한국에
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인혁당 사건
발생 무렵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지난 2001년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굴’돼 최근 빛을
보게 됐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발표 한달 전인 1974년
4월 한 미국 대사관 직원한테서 “곧 대규모 간첩사
건이 일어 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를 막 발표한 시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 직원을 평소 알고
지내던 미 군무원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충
격적 인 얘기를 한 겁니다.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의 정보요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
습니다.
나는 깜 짝 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
라며 ‘얼마나 잘 꾸며내 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는데, 당시 미 대사관
이 한국 정부의 못된 짓을 수수방관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그 직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달 뒤 그 직원의 말은 사실로 입증
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잘 꾸며대는지 나도 속을
뻔했어요. 그 신직수라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를 계기로 국내 천주
교 신부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힘썼다. 그때는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 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을 두
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 조용했
습니다.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
었죠.”
시노트 신부의 외침은 함세웅 신부 등 젊은 사제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노트 신부와 뜻을 같이한
외 국인 신부들은 함 신부 등 국내 젊은 사제들과 함께 기도회 등을 열며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리
말 실력이 뛰어난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지원한 미 정부 상대로 투쟁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년 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 선고를 직접 지켜봤는데, 사형 확정을 선고하는 민복기 대법관의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처럼 작았습니다. 자기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거죠. 법대에 앉아 있는 대법관들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형은 대법원 선고 뒤 19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그날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박정희 정권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투사가 됐다. 1961년 인천 영종도 성당의 주임 신부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전까지는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던 평범한 신부였다. 그는 인혁당 사건 이후 각종 민주화 집회에 참석해 당시 외신에 보도된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폭정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전했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결국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지 20여일 만에 강제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하고 나서 미국의 교회와 학교, 기타 여러 모임에서 박 정권의 폭정을 고발했습니다. 미국 정부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박 정권의 비리를 얘기해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박 정권이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박 정권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미국 정부가 문제였던 겁니다.” 그 뒤 시노트 신부의 투쟁 대상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각종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10번이나 구속당했다.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던 1979년 어느 날 박정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마음의 고향인 한국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들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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