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아내도, 대통령의 아내도, 무죄입니다.

가자서 작성일 09.04.18 18:24:32
댓글 11조회 978추천 7

 

 

 

독립군의 아내도, 대통령의 아내도, 무죄입니다.


북새통 선생 2009.04.14

 

독립군의 아내도, 대통령의 아내도, 무죄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신 조차 상해에서 동포들의 이집 저집을 돌아다녀 한 끼 식사를 얻어 먹으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자서전 백범일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민국 6년(1924)에 처를 잃었고, 7년에는 모친께서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그후 상해에서 나 혼자 인을 데리고 지냈는데, 모친의 명령에 의하여 인이마저 본국으로 보냈다.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아내되는 최준례 여사님은 아들 신을 낳은 후 몸이 채 튼튼치 못하였을 때 어머님께 세숫물을 버려 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실족하셨고 그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 몇 년을 고생하다 어린 아이들만 남겨놓고 떠납니다.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형편이 어려워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구 폐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일본 조계지였기 때문에 백범은 부인이 위독하는 연락을 받고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일에 공허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다음과 같이 집안일에 있어서는 열백 배의 권위로 며느리의 편을 들어주신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님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 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듯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 대부분이 가정을 돌볼 수가 없어 그 아내는 물론이요 후손들도 과히 넉넉치 못한 빈곤한 생활에 빠진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시 되찾은 후에 넉넉하게 보상을 하고 그 후손의 교육을 국가에서 전적으로 책임지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만 물러났을 뿐 그들이 키워놓은 친일세력은 그대로 남아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형성되면서 그런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살펴보면 70년대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셨고 부산에서 뛰어난 변호사이셨으니 물질적으로는 최상층의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지만 나랏일을 하겠다고 그것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에 한 번 당선된 이후로는 줄곧 의기의 도전을 하시다가 패배만 반복을 하셨는데 제대로 가정을 넉넉하게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아내되는 권양숙 여사님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집안일을 책임지면서 힘들었던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연차로부터 받은 돈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요긴하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신경쓰지 못하는 일에 있어서 부인으로서 책임지셔야 할 씀씀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님도 박연차로부터 5천만원의 백화점 상품권을 수수했다고 합니다. 대선자금 문제로 형을 살고 나온 이후 2005년 정치활동을 하지 않던 시기에 받았다고 합니다. 청와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치활동을 하지도 못하고 갈 데 없는 처지에 생계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1월 안희정님의 출판 기념회에 보낸 영상에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했지요. 나는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안희정님의 희생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진실한 고마움을 말로서 표명하는 것 뿐이고 정치 비자금 등 검은 돈을 한 몫 챙겨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노 전 대통령은 빚을 지었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 안희정님의 또 다른 도전을 응원하고 안희정님은 그 고백과 응원을 들으며 울컥하셔서 눈물을 보이는 게 이 분들의 정치 이야기입니다.

 

유시민님은 얼마 전까지 책 팔러 다녔습니다.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 부르면서 집필하고 강연하고 사인회를 열면서 돌아 다니시다가 이번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시국강연을 중단합니다. 많이 아픕니다. 그 분과 함께 최선을 다해 한 시대를 살았다는 자부심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의연하게 이 풍파를 헤쳐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활동을 중단하셨습니다.

 

유시민님도 빚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열렬한 지지자들의 성원으로 대선 예비후보로도 나오시고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하시고 아름다운 선전을 했지만 낙선하시면서 최소한의 선거비용만을 사용하시면서도 빚은 많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독자층이 두껍게 형성된 저자로서 책을 집필하고 강연하며 삶을 꾸려 나가셨는데 이것 마저 당분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


 

정치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돈이 말썽을 많이 일으킵니다. 특혜가 결합될 수도 있고 돈으로 표를 사서 국민의 정확한 판단력을 흐려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혜 없고 돈으로 표를 사는 정치가 아닌 새로운 시대의 정치를 해보자고 희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비자금 없이 정치하는 시대를 열어보려고 꿈을 꾸었습니다. 금권정치를 끝내자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거법도 새로 만들고 정차자금법도 고치면서 소액의 후원금을 모아 정치를 하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당비를 내는 열린우리당의 진성당원은 그런 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렬하지만 소수에 불과한 진성당원만으로는 선거에 들어가는 고비용의 구조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유시민님은 어떻게든 이 꿈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재빠르게 포기하고 방향을 바꾼 분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새시대를 같이 열었던 몇몇 분들이 영리하게도 아래로부터의 정치에 대한 곤궁함을 재빠르게 깨닫고 구시대의 계파정치로 선회하며 이 노력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또한 금권선거를 배제하자는 취지로 만든 선거법(또는 정치자금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돈 있는 사람만 합법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구조를 탄탄히 구축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국회의원이 아닌 새로 정치를 시작하는 신인들에게는 높은 진입장벽의 역할도 합니다. 친박연대의 어느 비례대표 국회의원처럼 자격 없는 졸부가 돈으로 공천을 흥정할 수 있게 만들고 서민은 진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현역 정치인이 아니면 당장 생계부터 걱정하기 바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장벽도 높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과열을 방지하고 돈이 적게 드는 선거를 하자는 취지로 선거운동 기간을 극히 짧게 만들어 놓았는데 오히려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마저 배제하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인터넷 게시물들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삭제당했습니다. 금권을 배제한다는 취지가 국민의 입만 봉쇄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지금의 선거법(또는 정치자금법)으로 자금을 모아 정치를 하려면 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됩니다. 소액의 당비와 후원금을 받아 정치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이기적이면서 또한 그로 인해 어리석습니다. 돈으로 좌우되는 정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돈을 지갑에서 꺼내는 데 인색합니다. 뭉칫돈을 내는 돈 있는 분들의 입김만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불하는 만큼 정치에 영향력도 높일 수 있고 정치인이 의견을 경청할텐데 대다수의 국민은 불만은 많지만 그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참여는 극히 미약합니다. 

 


재정으로 말하면, 본국 동포들의 비밀 연납과 미주·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세금 명목 상납으로 충당했는데, 왜의 강압과 운동의 퇴조로 원년(1919)보다 2년(1920)의 숫자가 감소되고, 그후 점점 더 감소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직무도 정지되고 총장·차장 들 중에서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그 아랫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며, 그 중요 원인은 경제적 곤란이었다.


  

한나라당과 거대 족벌언론은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희망을 주기 보다는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를 심각하게 만연시켰습니다. 국민의 짧은 인내력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에 대한 회의는 참여를 약화시키고 다수로부터 소액의 돈이 모이는 것을 막기 때문에 결국 돈 있는 사람들만이 정치를 할 수 있고, 돈 있는 사람들만의 뭉칫돈을 받아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진성당원을 통한 열린우리당의 아래로부터의 정치는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물론 성공한 곳도 있습니다. 민노당은 뚜렷한 지지기반이 있습니다.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과 민노총이라는 기반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여유롭지는 않아도 검은 돈에 손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민노당의 한계는 뚜렷합니다. 민노당이 대변할 수 있는 영역은 좁아졌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은 충실히 대변하지만 그에 밀려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당연히 지불하는 쪽의 영향력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나라당은 원래 돈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돈 많은 분들의 후원도 상당하고, 민노당은 확실한 기반이 존재하는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일반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정치인들은 현실적인 기반을 응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희정님이나 유시민님이나 그래서 정치만을 계속하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를 하면서 가정까지 남 부럽지 않게 넉넉히 꾸려나가는 것이 벅찰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러했습니다. 음성적인 정치 비자금을 배척하였지만 일반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새로운 정치를 하려는 노력은 우여곡절 끝에 후일로 미루어지고 곤궁하였을 것입니다.

 

돼지저금통으로 모금하는 것 조차 불법으로 만드는 선거법은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데 일반 국민의 영향력을 미미하게 만듭니다. 일반 국민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자들이 원하는 대로 선거법이 철저히 국민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 의사는 거대 자본이나 족벌 언론에 의해 결정되고 일반 국민은 그들의 교묘한 선전으로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진 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처지로 스스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영향력은 겨우 짧은 선거기간에 갇혀버린 셈입니다. 돼지저금통처럼 다수 국민으로부터의 소액 모금은 대가성이 생기기도 어렵고 국민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음에도 선거법이 이를 금지하여 국민 다수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활은 부족하게 되더라도 신경쓰지 않고 우선 국가부터 생각하는 분들만이 정치에 참여하여 일반 국민의 넓은 스펙트럼을 대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합리한 구조를 어떻게 개선할 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이미 실패한 적도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국민 의식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기대하면서 방치하고 두고 볼 일만은 아닙니다. 단지 명목상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선거일 당일에 투표 용지에 도장 찍는 일만 달랑 국민의 역할로 묶어놓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생각 없고 참여 없는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조차 안하면 점점 더 실질적인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고 과거로 후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적어도 몇백 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 그전의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어떠한 곤란 중이라도 14년 동안 연중 행사로 실행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

 

이 무렵 내가 연구·실행했던 사무가 하나 있으니, 곧 편지정책이다. 당시 사방을 돌아보아도 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략)

 

이 거사로 인하여 미주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이 대단하였다. 동경 사건(이봉창 의사)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민족혼을 떨친 터에, 이번 홍구 사건(윤봉길 의사)이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나에 대한 후원은 급격하게 증가하여, 점차 사업이 확장되는 단계로 나가게 되었다.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를 위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뒷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를 그 자신 스스로 근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 스스로는 국가에서 대통령으로 봉사한 이후의 삶에 대비하여 충분히 넉넉한 여유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분과 뜻을 같이한 동지적 관계의 여러 정치인들도 정치 비자금을 근절한 대신, 그 대안으로서 추구했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라는 목표조차 국민의 적극적 참여 의지의 결여와 참여하려는 국민조차 묶어놓는 선거법 그리고 한나라당과 족벌언론의 집요한 흔들기로 좌절되었기 때문에, 곤궁한 처지에서 일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의 필요까지 충분히 만족할 정도에 못 미쳤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퇴임 후 고향에서 농촌활동을 하시면서 살 집조차 돈을 빌려 마련해야 했습니다. 퇴임 후 국가를 위한 활동조차도 여유롭게 수행하기 힘들었던 넉넉치 못한 생활 속에서 대통령의 아내되시는 권양숙 여사님도 아내로서나 어머니로서나 또는 사회인으로서나 남편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임시로 변통하여 사용할 돈이 필요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대통령의 아내라는 위치에 있으시면서도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있는 것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뜻만 높이 세우다 매번 낙선만 했던 바보 정치인의 아내로서 그리고 대통령의 아내로서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안살림을 책임지는 위치에서는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으로 비호하고 그 대가로 검은 돈을 받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필요성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구차하면서도 국민에게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사실대로 가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밝힌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한 답변으로 국민들이 더 이상 정권의 시녀와 족벌 언론이 주고받는 농탕질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관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라기 보다도 비관적인 편이 더 많았다. 나에 대한 한인 교포들의 유일한 불만은, 4·29 사건(윤봉길 의사) 이후 신변이 위험하여 내가 평소 친지들의 면담 요구에 함부로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차 검표원으로 별명이 박대장이란 사리원 출신 젊은이의 청첩을 받고, 그의 혼인잔치에 축하차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도착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부인들을 보고,

 

"나는 속히 가야겠으니, 빨리 국수 한 그릇만 말아 달라."

 

고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냉면 한 그릇을 받아서 급히 먹고,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고 곧장 그 집을 나왔다. 그 집 문간을 나서면 바로 이웃하여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왔던 길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가게에 들어가 미처 앉기도 전에, 주인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손으로 하비로를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니 왜경 10여 명이 길에 늘어서서 전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달리 피할 곳이 없어 유리창으로 왜놈의 동향을 주시하였더니, 그들이 쏜살같이 박대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급히 그 가게를 빠져나와  전차 선로를 따라 김의한 군의 집으로 가, 그 부인을 박대장 집으로 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전의 왜놈이 들어와서는,

 

"방금 들어온 김구가 어디 있는가?"

 

하고 다그쳐 물으면서 집안을 수색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아궁이 속까지 뒤지고 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누구나 다 아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저는 독립군의 아내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가 대통령의 아내에게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후손이 광복 후에도 대우를 받기 보다는 친일 세력으로부터의 모멸과 차별을 당했던 것과 같은 역사도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의 아름다운 활동을 즐길 국민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전직 대통령 내외분을 모략질로 수모하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퇴임 후 고향에서 구상한 일들을 다시 자유롭게 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시 환하게 웃으며 고향에서 손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국민도 마음껏 누릴 권리입니다. 왜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의 환한 웃음조차 빼앗지 못해 안달입니까? 그야말로 아궁이 속까지 뒤지고 있습니다.

 

유시민 전 장관님도 다시 지식소매상으로 강연도 재개하시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최선을 다했던 한 시대를 아름다운 추억은로 간직한 채 또다른 새로운 도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님도 희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펼쳐가기를 바랍니다. 강금원 회장님도 정치 탄압에서 속히 벗어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하려던 일을 마음 놓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끝맺는 문단을 남기면서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님이 스스로의 곤궁한 삶을 읊조린 한 문단을 인용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일제를 몰아내고 광복을 맞이한 후 조국으로 귀향하여 UN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내고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였습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여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남한 총선거에 불참하고 북한의 단정수립에도 반대하였습니다. 

 

광복 후 이러한 활동을 하시던 중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하셨습니다. 그 분이 쓰러지신 원인은 일제가 아니었습니다. 일제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백범 김구 선생님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우리 안의 누군가에 의해 쓰러지셨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반복되는 과거에 절망하여야 합니까? 이제는 극복할 때가 되었습니다.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살아온 분이 오늘날 또 우리 안의 누군가에 의해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참고)

 

독장수셈 : 옹기장수가 잠이 들어 꿈에 큰 부자가 되어 좋아서 뛰는 바람에 지게를 걷어차 독이 모두 깨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 부질없는 헛된 계산.

 

송궁문 : 역경을 견디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결의를 우화적으로 다짐하는 글.

 

우궁문 : 궁함을 떨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벗하며 살겠다는 뜻.

가자서의 최근 게시물

정치·경제·사회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