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선혁명선언 - 故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사건

합참의장™ 작성일 09.05.27 23: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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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선혁명선언 - 故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사건

 

 

■ 들어가면서

 

지금으로 부터 약 80여년 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신채호 선생은 새로운 조선의 건설은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집필했다. 전문 6,400여 자에 달하는 선언의 내용은 일제의 강도정치를 고발하고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강조한 반면 이승만의 독립외교론·준비론을 철저히 비판했다.

 

지금의 시대에서 그것을 바라보노라면, 나라가 빼앗긴 것도 아니요,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정착된 마당에 무슨 혁명이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은 아직까지도 친일세력의 잔재하에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본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사건>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단순히 보복권력의 희생양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분의 비보를 접한 후 3일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지지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를 지지했다.

 

왜?

 

그를 알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싫어 할 수 없는 <인간 노무현>이 되어 버리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언론, 방송의 마수에 빠져서

그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당연시 되었다.


그놈의 언론이 무엇이기에?
그놈의 방송이 무엇이기에?

 

그 분이 다른 세상으로 가시고 나서야,
그 분을 알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지.
그렇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
운명이다.
화장해라.
오래된 생각이다.
...

 

- 유서중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 대통령 출마선언 연설중

 

 

위의 두 글에서 뭔가 오버랩 되고 있는게 보이지 않는가?

그가 퇴임 뒤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압박의 나날이 상상이 되는가?

 

도대체 그는 무얼 그리도 잘못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그런데, 사실, 그 혼자만의 고통과 압박으로 끝난것도 아니고, 그의 가족은 사실상 폐족되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그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패가망신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반복 되어야 할 것인가?

 

어디서 부터 문제였나?

누구의 문제였나?

 

 

■ 우리나라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언론기관은?

 

때는 1939년 4월29일.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 바,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무슨말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마치 봉건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인듯 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상은 항상 빗나간다.


이 글은 조선일보가 1939년 4월29일치 사설(전문 3면)에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쓴 생일축하문이다.

일본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언론의 사설.

 

풉.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하고,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라 하며, <충성>도 양에 차지 않은 듯 <극충극성>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이라고까지 부르는 이 사설이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에 버젓이 실린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때는 1932년 1월8일. 조선일보 1면 타이틀은?

 

폭탄테러, 범인은 경성생, 이봉창!

 

국내외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본제국 편에 서서 이 의사를 <범인>이라고 딱지 붙인 것이다.


40년 4월 조선일보는 일왕 생일을 맞아 이제껏 신민(臣民)이라고 하던 조선 백성을 신자(臣子)로 불렀다. 그리하여 조선 백성은 일거에 일왕의 자식이 돼 버렸다. 그리고,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조선통치 30년을 기념하면서 <지금부터 만 30년 전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해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했다>고 경술국치를 왜곡했다. 또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고 무단통치의 장본인을 찬양하였다.

 

이쯤되고, 광복을 맞이했다면, 조선일보와 조선일보를 위해서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말살되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러한 일을 했던 사람과 그 후손, 그리고 그러한 경향과 사상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 우리나라 최대판매부수, 최대언론파워 일간지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다.

 

 

■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장수권력을 유지한 집단?

 

고 박정희 대통령. 헌법을 자신의 집권도구로 사용하며 수명을 연장해온 고 박정희 대통령.

 

당신은 이 분에게 향수를 느끼는가?

 

그런 분들은 좀 더 알고서 말을 했으면 한다.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709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였다. 당시 전략적 차원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사람은 박정희였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이다.


정도에 따라 이를 등급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에게는 1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으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조선인으로 일본군사학교에 자진하여 혈서를 쓰고 맹세하며 입학한다. 그리고 철저한 일본군인으로서 이른바 <조센징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치게 된다.

 

이는 시작일 뿐이다. 그곳에서 1등으로 졸업한 그는 일본육사를 거쳐간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생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절망도 잠시였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이것은 박쥐보다 더한, 완전 설치류새끼의 성향이 아닌가?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덧 5.16 군사혁명에 성공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혁명 직후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일본이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도 일본이었고,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한·일 교섭의 재개였다.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나아가, 그의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돈을 받는다는 자체도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는데,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공식적으로, 일본은 사과는 커녕, 돈 한푼도 내놓지 않을 근거가 생긴것이다. 모두 걸작품이다.

 

1979년 10월26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김재규>열사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그리고 유흥문화를 즐기다가 사망한 그는 건국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이러한 일본권력인, 박정희에게 대항했던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정치인이 있다.

 

장준하!

 

1915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돼 만주에 파병됐다. 6개월만에 일본 병영을 탈출한 그는 중국 대륙을 반 바퀴 도는 6천리 대장정 끝에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갔으며, 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았다. 30대 청년 지식인으로서 신생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어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통일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장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 무려 열 번이 넘게 투옥당하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은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박정희와 장준하의 만남은 처음부터 악연으로 시작한다.

 

박정희는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자신이 근무하던 제8연대가 무장해제되자 군복을 벗고 탈출,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간다. 장준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박정희와 장준하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장준하는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본군을 탈출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일본군 장교로서 계속 독립투사를 잡는 일을 했을 것이라며 박정희의 기회주의를 심하게 면박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장준하에 대해 씻기 어려운 감정의 앙금을 갖게 된다.

 

장준하 선생의 말말말

 

"박정희는 한국 청년의 피를 파는 매혈자" - 월남파병에 대해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 - 66년 10월 15일,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규탄대회에서

그 후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박정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 67년 4월 대통령 선거 지원유세에서

그 후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다.

 

 

1975년 1월 8일, <박정희 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에서 민주헌정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후 7개월후, 계속되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장준하는 75년 8월 17일, 의문의 실족사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의문의 실족사. 

 

 

다시금, 아래 글이 오버랩 되지 않는가?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 고 노무현 전대통령 출마선언 연설중

 


가장 저질적인 친일파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파쇼로 통치를 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2009년 5월을 살아가는 지금의 세태와 무엇이 다를바 이더냐? 난 현정권의 행위에 대해서 별로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지만, 군사파쇼정치를 했던 그 쥐새끼 같은 분과 상당히 닮아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싶다. 다만 그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우리가 언론, 방송의 통제아래 잘 몰랐을 뿐이다.

 

 

■ 해방이후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

 

 약 1년전에 내가 봤던 감동영상이다. 아래 영상을 이미 본 사람이라도 재생하면서 스크롤을 내렸으면 한다.

 

 ▲ 슬픔과 노여움 - 노무현 대통령 연설 (출처: 유튜브검색)

 

조선 건국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줬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고 했다.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뤄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 노무현 대통령 출마선언 명연설 중

 


해방이후 최대의 실수는,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잔재에 의해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독립투사 횽내만 내던 기회주의자인 이승만씨가 해방이후 국가원수가 되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 잔재 청산을 위하여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1년사이 온데간데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대상이 되었던 뼈속까지 친일파였던 그들은 재벌향연과 언론장악향연에 동참하게 된다.

 

이게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그 역사가 4.19 혁명으로 인해 와해되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나타난 군인신분의<일본인>이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리고 나타난 군부세력집단은 언론과 방송, 재계를 장악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집권한다.

그 뒤에 나타난 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정부)이 행했던 일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항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 역사를 한번 바꿔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끊임없이 계란으로 바위를 쳤다.

지금까지 우리 권력을 장악해 왔던 기득권층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상대로 계란의 바위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기득권층과 완전 다른 서민출신의 계란이 2002년12월에 역사적인 바위가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그것은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던 인간 노무현.

그 바위의 힘은 국민이 되어야 한다면서, 정작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 국민 뒤로 물러났다.

 

그 분의 업적이라면 정말 눈부시다.

언론의 갖은 술수에 의해 그 업적을 기만하고, 국민을 우롱했다.

항상 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한 그의 행동이기에, 본인은 보수 기득권층에 반대했던 그의 정책에 거의 찬성했다.

 

비판받는 정책이라면, 수도권 집값문제와 자이툰파병을 많이 거론한다.

 

어제도, tv에서는 비판받는 업적으로 수도권 집값을 잡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서울시장(현 국가원수)의 정책을 먼저 탓해야지 않을까? 그리고, 수도이전정책은 정말 그러한 서울시장의 기세를 꺽을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보수파의 말도 안되는 논리(관습헌법)에 의해 꺽이긴 했지만.

 

여기서 여러분들은 완전히 비슷하지는 않지만, 한양에 자리잡고 있던 기존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정조>가 수원화성으로 도성을 옮기는 정책을 시행하다 독살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러한 상황이 오버랩 되지 않는가? 물론 공식적인 국사책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해방이후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던 인물들이 거의 친일파였다고 하니, 우리 역사의 왜곡도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정통성부터 새롭게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요즘은 현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국사교과서로 재편한다고 하지 않는가.

 

시대를 통탄할 일이다. 

 

너도 나도 문제삼는 자이툰파병은 현실적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이 분명 뭔지 모를 어떤 칼을 들이밀고 요구했을 것이다. 거기에 반대 했을 경우에 오는 파장을 비교하여 결정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그래서 지도자의 자리는 힘든 것이다. 

 

웹에서 찾아본 그가 재임할 당시의 경제 관련 지표를 비교한 것이다. 참고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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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출처 : 무역통계 (kotis), imf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후에야 알려진 일화 몇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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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새도록 일하는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일이 세배가 많아졌다고 하오.
보통 보좌관들이 하는 일보다 세배는 많아져서 밤을 새고 새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고 하오.
소햏 교수님의 친구분은 그게 너무 힘들어서 어느날은 서류를 보다보다 지쳐서
몇개를 좀 덜 읽고 정리해서 노무현 대통령께 보냈다고 하오..

그런데 청와대에는 그쪽에서 사용하는 전용 전화가 있다고 하오.
새벽 3시에 그 보좌관이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었소..
일을 왜 이렇게 대충 처리했느냐, 다 틀리지 않았냐.
이거 하나 잘못되면 얼마나 큰일이냐. 다시 해와라.

정말 호되게 혼났다고 하오. 노무현 대통령은 새벽 세시가 넘도록
밤새도록 보좌관들이 정리한 자료들을 보고 보고 또 보고 일을 밤새도록 보았다고하오.
역대 대통령중에 그만큼 열심히 일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소.
변호사 출신이라 자료를 정말 끝내주게 잘 잡아내고 정리했다 하더이다.



 - 프리토킹

원래 청와대에서 회의할때는 항상 대통령이 위주로 말하고, 아래 사람들은 그냥 멍하니 듣는게 먼저인데
노무현 대통령때는 그런거 안했다고 하오...
프리토킹으로 누구든지 먼저 나서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셨다고하오...
이런 대통령은 단 한번도 나온적이 없다더이다.



 - 화상회의 시스템

외국에는 화상회의 시스템 기계가 있다고 하오.
노무현 대통령은 그걸 엄청나게 부러워해서 그 기계를 매일 구경만 하면서
많이 사고싶어 하셨는데..
그게 3억정도라고 하오.
그깟 3억, 충분히 들어오는 돈을 대충 빼다가 쓰면 살 수있는건데
노무현 대통령은 절대로 안샀다고 하오.
3억이라는 말을 들으면
"에이, 아직 아니지?"하면서 절대로 안쓰고..
끝까지 사고싶어만 하시고, 절대로 나라에 필요한 돈을 사비에 이용하지 않으셨다 하오.

 


 - 저는 자이툰부대 출신자 입니다.

향수를 뿌리치고 멀고 먼 타지 이라크라는곳에서 7개월을보냈죠
해외 다녀오신분들은 누구나 아시겠지만 3개월지나면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전 그랬습니다. 해외에 놀러간게 아니라 내 한목숨걸고 자랑스러운 태극기
어깨에붙여 나라에서 보내준 파병이었으니까요 근데 4개월쯔음 파병생활을 하고 있을때였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부모님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리웠죠 근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저희 자이툰을 방문해주셨습니다.
많은 격려와 찬사를 쏟아주셨죠 그러던 와중 어떤 자이툰 장병한명이
단상으로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님께 '아버지!'라고 외치며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래도 일개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군인신분으로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자리입니다.
경호원들도 어쩔줄 몰라했었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손짓한번으로 재빠르게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막으시고
그 장병을 꽉 껴안아주시며 '그래 아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군들이 울기시작합니다. 감동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전 그때를 그순간을 잊을수가없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 15년전의 일화

95년쯤으로 기억됩니다.
부산 남산동에 살던 저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주부였던 어머니는 당시에 시위하러 자주 다니셨습니다.
주부가 무슨 시위인고 하니..
남산동 근처에 화장장이 건립되는 문제였고 어머니는 단순히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당시에 꽤 강력하게 시위를 했다고 합니다.
버스를 전세해서 여의도 국회 앞까지 갈 정도로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님비 적이고 이기적인 시위지만 집 하나 가진 서민으로서는 꽤나 절실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노무현 당시 민주당 의원이 시위 현장에 와서 이런 말을 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심정 백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화장장 건립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고 여러분의 이런 집단 시위로 바뀔 정도의 사안이 아닙니다.
집행자들은 여러분의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이 화장장으로 말미암아 손실을 본다 생각하시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떤지요?
재산상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이유로 요구를 하십시오.
도서관, 체육관 등의 문화시설을 유치함으로써 화장장이 가깝다는 인식보다 살기 좋고 문화시설이 있는 동네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격렬히 시위를 해도 화장장은 결국 생기겠지만, 문화시설 유치를 위한 시위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대로 그 이후 시위의 방향을 180도 바꿨으며, 후에 금정구에는 도서관과 체육관과 문화회관이 생겼습니다.
어머니께 당시 이 말을 들으며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실리적이며 현명하다고 생각을 했었네요.
지금이야 혐오시설 유치대신 돈을 받든지 아니면 저런 문화시설을 확보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그 당시는 드물었습니다.
위 일화는 그냥 제 기억 속의 한 단편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위 일화로 호불호를 말하고자 할 의도는 없습니다.
훌륭했던 노 전 대통령의 일면을 같이 공유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슴 한 편이 너무나 공허하고 저립니다.



 - 옛날에 모호텔 일식당에 근무했을 때 국회의원 시절에 오셨었죠..

많은 정,재계인사들이 자주 식사를 하셨는데..
주로 접대를 받으셨죠..
전부 항상 최고급회나 고급양주들을 드시니까
그 날도 주방은 최고급 횟감을 준비했고 저도 그러려니 하고
"무얼 드시겠습니까?" 그러니
"아가씨 죽 한 그릇만 주세요.."
"네???"   
기업대표가   " 아 왜 그럽니까.. 아가* 맛나고 비싼 걸로 줘"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었죠....
" 아가씨 나는 얻어 먹는 건 너무 싫고 내 돈 주고 먹을라니까 호텔에서 죽 한 그릇 먹을 돈 밖에 없어.."
그러고 매번 오실 때 마다 죽 한 그릇 드시고 계산도 따로 하셨죠...ㅠ
전 믿어요..그리고 존경합니다~
- 싸이월드 권보영씨글 (05.23 14:57)

 


 - 기억하시나요??

예전 부산 시장 출마 하셨을때.. 비오는 날 꼬마 하나가 우산없이 걸어가자 슬쩍 오셔서..
"꼬마야 이름이 머꼬??"
".....데요"
"꼬마야 비오는데 우산도 없이 가노?? 집이 어디고 ?? 그 앞에까지 같이 우산쓰자.."
아무말 없이 우산을 같이 쓰고 비맞을까 어깨를 감싸주시던 그 손길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 어린 꼬마가 이제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세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서거 소식을 듣던 날.. 갑자기 눈물이 왜이리 쏟아 지던지요.. 참 좋은 아저씨다..
라고 생각했던 분인데.. 대통령을 떠나 참.. 좋은 아저씨였는데.. 정말정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선 늘 편안하고 따듯한 웃음만 있으시길....

 

 

 - 나는 대전에서 사는 평범한 직장인 입니다...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우연히 노무현님의 초임 법관시절 얘기를 듣고 콧등이 시큰해 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분을 가까이서 같이 근무한 법원 직원(지금은 퇴직한)이 전한 말입니다.
노무현님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젊은 나이에 처음 근무한 곳이 대전 지방법원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군대가고 군대제대하면 예비군 훈련을 받고 예비군을 마치면 민방위로 편성되어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요....
당시 노무현님은 예비군이었답니다
당시 법원직원의 말씀
"법관으로써 한번도 예비군 훈련을 빠지지 않은 사람은 노무현 뿐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훈련을 받아야죠. 그러나, 당시 빽있고 힘있다는 사람들의 권세를 상상할때 이는 실로 신선한
충격을 넘어 법원 직원들이 인정한대로 대단한 분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군요.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말 "그는 아무리 하위 직원이라도 함부로 대한적이 없었으며 권위를 부리지 않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대하여 준 누구나 존경받는 법관이었다."

 

 

 - 아마도 87년 쯤이었을 것입니다.

전 86-88년 까지 군생활을 부산에서 했습니다. 그것도 악명높은 백골단이었었죠. 남포동 부영극장으로 기억합니다.
그당시 우리부대는 워낙 인기(?)가 높아 부산시 전역을 카바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더러운 인기였지요 그만큼 진압이 빡시었으니까요.
그 날 우리에게 내려진 특명은 지도부 체포였습니다.
예의 진압방식대로 우린 깊숙히 침투했고 최루탄 소리와 동시에 지도부를 잡았습니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가 남포동 하늘을 감싸고 비명이 메아리친다음 우린 습관처럼 전리품들을 차에 실으려 했습니다.
그때 사라진 최루탄 연기사이로 어떤 사람이 보였습니다. 눈물이 범벅이 된채로 그이는 외쳤습니다.
'이놈들아 내가 노무현이다 나를 잡아가라 노동자가 저 힘없는 저 양반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를 잡아가라 ....'
우는게 아니라 울부짖었습니다. 얼굴은 눈물 범벅이되어 제대로 떠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전 노무현님을 만났습니다.
 중대장은 그러대요. '저 새끼는 잡지마라 독종이니까' 아마도 그 당시는 허삼수니 하는 사람이 중심인 사회였던걸로 기억 합니다.
그리곤 그 골수분자였던 사람이 정주영씨를 증인으로 세우고 정말 힘없는 노동자의 편이되어 눈물을 흘리며 정주영씨를 몰아 부치는걸 봤습니다.

 


 - 자주가는 세차장에 세차하러 갔는데

 

사장님이 저보구 "대선 누구뽑을꺼냐??" 하시더군여..
바로 당연히 노무현이죠..할려다가 무슨얘기하나 들어볼려구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구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내가 옛날얘기 하나 해줄께..하시더군여..그러니까 사장님 나이가 한 35세~ 40세 추정되는데 정확히는 잘모릅니다.
젤 처음하는 말이.."난 노무현한테 죄를 진사람이야.."하데요..
깜짝놀래서 그게 무슨얘기냐고 물었더니 아저씨왈
"내가 군생활을 의경으로 했는데 자대가 경남 마산에 기동대로 떨어진거야..
매일같이 닭장차(의경들타는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시위막으러 가는데 하루하루 참 힘들고
그때는 시위하고 데모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젤 나쁜놈들이라고 생각했지..
왜냐면 내 몸이 힘드니까..
하루는 울산인가..그곳에서 데모한데길래 또 버스를 타고 거길 간거야..
다들 내려서 대열정비하고 서있는데 누가 마이크잡고 큰 소리로 막 소리치는거야..
그래서 우리부대 전체가 그사람얘기하는 걸 들었지..
그 사람 입속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가슴에 다가오던지..
말속에 진실이 묻어나왔어..진짜 그사람 피눈물 흘리는거 같더라구..
우리는 그 사람 얘기 들으면서 한참을 그곳에 침묵하고 있었어..
대원들끼리 여기저기 수군수군 대드라구..
저사람이 누구냐..저사람 말이 다 맞는거 아니냐.. 저사람 좀 멋있다....뭐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갔어..
난 그때 쫄병이라 조용히 있었지만 속으로는 저런 사람도 대한민국에 있구나..그런생각을 했지.
그러던중에 시위가 거세지고 한번 붙었는데 우리가 개스를 쐈어.. 그사람 있는쪽이었지..
근데 그사람 그 독한가스 마시면서도 얘기를 계속하는거야..
다른 사람은 개스피해서 뛰는데 그 사람은 그곳에서 개스에 목이메어도 계속 소리를 지르는거야..
우리는 다 뭐 저런사람이 다 있냐고 그랬지..
그 날 밤에 내무반에 왔는데 모두 그사람 얘기하더라구 오늘 그사람이 누구냐?
노조간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뭐 부산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들 얘기하고 개스 쏘고나서 미안해서 혼났다고도 하고
바보같이 피해야지 거서 마이크 잡고있는놈이 어딨냐고도 하고 온통 그사람 얘기였어..
그후로 몇번을 봤는데 그사람은 똑같애..하나도 안틀리고 매번 똑같더라구.. 좀 바보같다는 생각도 좀 했지..
제대하고 나서 하루는 집에서 티비를 보는데 많이 본사람이 있는거야..
국회의원이라고 하데.. 하는데 내가 국회의원중에 아는 사람이 어디있겠냐 싶어서 잘못봤나..했는데
유심히 보니까 우리가 깨스쏠때 서있던 바보라고 생각한 그사람인거야~~
난 깜짝놀래서 있는데 이름이 노무현 이라고 나오더라구..
아..노무현이구나..그때 그사람이 노무현이구나..
근데 그사람 티비에 나올때마다 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거야..
우리가 쏜 깨스 그사람이 다 마셨잖냐..
그래서 손님들 오면 지금 이 얘기 해주면서 노무현 한표 부탁한다고 선거운동하지..
나한테는 최소한 그사람한테 진 빚 갚는 유일한 방법이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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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출처 : 다음게시판검색

 


 

■ 계란으로 바위치기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던 인간 노무현.

그 바위의 힘은 국민이 되어야 한다면서, 정작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 국민 뒤로 물러났다.

 

그 뒤에 당선된 인물은 쓰키야마 아키히로(월산명박).

박정희와 상당히 유사성을 가진 그에 관해서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것이다.

신기하게도 그의 정책 기조는 상당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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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왕에게 고개 숙이며 악수하는 어떤분(이분은 상대방을 천황이라 표현했다.)

 

이 분에 관해서는 일일이 나열 하는 것조차 입아플 정도이고, 또 그 나열할 행위가 너무 많아서 다 쓸수조차도 없다.

그냥 생략하겠다.

 

그런데, 위에 나온 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우리역사의 기득권층이었던 분들이 다시 바위가 된후에 우리의 영웅인 그를 바로 그 바위에서 절벽으로 떠밀었다. 본인의 소견으로 볼때, 한편으로는 떠밀린 것이지만, 그 분의 역사의식으로 고려해보면, 마지막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것이다.

 

스무길 아래 바윗덩이를 온몸으로 때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껴안고 대한민국의 존엄을 지켜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유시민 전 장관의 표현을 빌렸는데, 정말 여러분들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가?
본인은 이 사건을 단순히 서거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방이후에 기존권력에 대항했던 역사적 사건중에 하나라고 평하고 싶다.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진실이란 것을 국민들이 뼈져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란 말이다.

 

모든 국민이 그와 그가 대항했던 세력 그리고 역사에 대해 좀더 제대로 알게 되는 사건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의 언론, 방송, 권력기관, 기득권층...

 

언론을 통해 아무리 날조하고 편집해도,

이제 국민은 더이상 바보가 아니다.

이제 국민들은 1960년대, 1970년대 국민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무리 언론이 떠들고 다녀도,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 때인 것이다.


3년반 이후의 다음 정권에 대한 선택은 국민이 할 것이다.

뼈져리게 느끼고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권력기관을 앞세운 정치보복의 문제라고만 보는가?

그의 행위는 훗날 역사가 평가를 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번 노무현전대통령의 서거사건을 온몸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실천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지금으로 부터 약 80여년 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신채호 선생은 새로운 조선의 건설은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집필했다.
전문 6,400여 자에 달하는 선언의 내용은 일제의 강도정치를 고발하고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강조한 반면 이승만의 독립외교론·준비론을 철저히 비판했다.

 

지금의 시대에서 그것을 바라보노라면, 고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사건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조선혁명선언이라 칭하고 싶다.

 

 

 

 ▲ 슬픔과 노여움 - 노무현 대통령 연설 (출처: 유튜브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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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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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당신을 처음부터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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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당신을 끝까지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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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가 기억하는 단 한명의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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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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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무말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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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무말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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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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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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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사이트: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백과사전검색, 위키백과, 웹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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