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추석 연휴가 시작된 18일 오전 서울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오전 8시께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명절대목을 겨냥한 장사에 들어갔다.
진열장에 놓인 상품들의 때깔을 내기 위해 저마다 먼지털이개를 놀리는 상인들의 손길은 분주했다. 하지만 수년째 이어진 불경기의 여파인지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한때 국내인들을 대신해 남대문시장 최대 고객으로 자리잡았던 일본인 관광객이 그래도 눈에 띄었지만 요새는 자기네 나라의 불황이 영향을 * 듯 '아이쇼핑'에 더 열을 올린다고 상인들은 전했다.
상인들에 따르면 시장이 만들어진 이래 최악의 불황이었다는 지난해까지만해도 일부 상점들은 '엔고(高)' 덕을 봐 그럭저럭 고비를 넘겼단다. 하지만 올해는 엔고 효과마저도 사라져 이제는 죄다 깊은 불황을 겪고 있다고 한다. 최근 정부가 잇따라 발표하는 객관적 경기지표들은 경기상승을 증거하고 있지만 남대문 상인들에게는 '먼 나라 일'일 뿐인 것 같았다.
과일가게만 18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최정일씨(49)는 "사과 8개짜리 한 상자에 2만5000원에 떼서 3만원에 팔고 있는데 그래도 사는 사람들이 없다"며 "추석 대목은 솔직히 10년 전 얘기"라고 말했다.
'군산 브로이다'(닭의 미국식 표현)란 독특한 상호의 닭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이동씨(58)는 "imf 전만해도 하루 300~400마리 팔았는데 요샌 15마리나 팔린다고 해야할까? 한 마리당 5000원 정도인데, 수지가 맞을리 없다"고 말했다.
40여년 째 건어물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장기수씨(70)는 "대기업들은 수출을 많이 해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인다고 하지만 우리들처럼 밑바닥은 경기 좋은 줄 모른다"며 "옛날 같은 호황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말로는 대목인데, 평상시 보다 더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한때 명절특수를 노려 마련했다는 '옥춘사탕(제삿상에 놓는 전통 사탕)'을 내놓았다.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비닐봉투 속 옥춘사탕은 특유의 분홍색이 탈색돼 있었다. 장씨는 "10년째 견본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현역 5번출구 앞에서 31년째 김밥 장사를 하고 있다는 문선숙씨(53·여)는 "새벽 1시에 나와 오전 11시쯤 집으로 들어간다. 작년에 비해 30% 유동인구가 줄었고 그로인해 수입도 30% 줄었다"고 말했다.
불황의 그늘은 남대문 시장에서도 가장 영세업자라 할 수 있는 지게꾼들에게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게일을 4년째 해오고 있다는 김모씨(43)는 요즘 최악의 불황을 실감하고 있단다.
그는 "오늘 새벽 4시에 나왔는데 일거리가 3000원짜리랑 4000원짜리 두 개 있었다. 자꾸만 남대문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하니 우리같은 지게꾼들은 바로 직격탄을 받는다. 추석 대목이라서 잔뜩 기대 했었는데 허탈하다. 정부는 도대체 뭐하는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이같은 반응이 '밑지고 판다' 또는 '날마다 적자'란 장사꾼 특유의 과장이 빚어낸 결과는 아닐까.
남대문시장 한복판에 1평 남짓한 공간을 마련해 시장상인들을 상대로 20여년 째 커피와 음료 등을 팔고 있는 김모씨(42)와 이모씨(41·여) 부부는 장사꾼 특유의 '엄살'이 일부 사실이라면서도 불황은 불황이라도 단언했다.
이곳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장기수씨는 "상인들이 과장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라면 솔직히 액면가로 보면 매출액은 비슷하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10년 전만해도 하루 10만원어치를 팔면 많이 판다고 했다. 하지만 요새 하루 10만원어치를 팔면 이것저것 따지고 나면 적자가 뻔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상인들이 이같은 불황을 마냥 경기탓으로만 돌리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상인들은 전통시장의 쇠퇴가 시대적 흐름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현대화된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는 좁은 도로, 협소한 주차장, 조악한 화장실은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과제들이라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주택가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대기업 마트가 그나마 남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대기업이 전통시장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자영씨(56·여)는 "서울역에 큰 기업체(l마트)가 생겨서 장사가 더 안 된다. 이제 대목이란 말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야. 요즘에는 ssm도 많고 사람들이 시장에 잘 안 나오니까 (불황은)어쩔 수가 없는 거다. 외국으로라도 나갈 수만 있으면 그저 떠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통시장을 살리려는 정부차원의 캠페인도 이들에게는 좀처럼 반가운 일만은 아니란다. 지자체에서 나오는 전통시장 상품권 이용이 드문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속옷가게 '대도'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51·여)는 "어제 한나라당에서 나경원이 하고, 안상수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도로만 좁히고 정리하느라 힘만 든다. 다음엔 아예 안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당 의원들의 '행차'가 언짢아 보인다는 김씨는 그래도 지난해 이곳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이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이후 서민들을 최고로 생각하는 대통령"이라며 "그래도 (전통시장을 살려주길)기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20일 오전 서울역에서 귀성객들에게 인사를 하다 3남매의 어머니인 한 귀성객 앞에서 저출산 시대에 진정한 애국자라며 만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불황이 만성화됐지만 상인들은 그래도 남대문 시장이 '시장중의 시장'이라는 자부심은 숨기지는 않았다.
장민수씨는 "남대문에서 중부시장이 나왔고, 가락동시장이 나왔다"며 "서울 시장의 원조는 바로 남대문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남대문 시장서 졸업할 날만 남았지만 아직 힘이 있는 만큼 돈이 되든 안되든 끝까지 가볼 것"이라고 말했다.
1968년부터 시장 한 귀퉁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해 번 돈으로 큰아들을 서울대학교에 보냈다는 김병록씨(74). 그 역시 사고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힘 닿는 데까지 손님들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에 비교적 젊은 축인 심혜경씨(37·여) "추석이라 부모님한테 손자 예쁜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서 1만5000원짜리 흰색티랑 쫄쫄이바지 묶어서 파는 것을 2000원 깎아서 샀다"며 뿌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장민수씨는 심씨같은 이들이 상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운 존재이자 눈에 불을 켜고 붙잡아야할 고객이이라고 전했다.
그는 "우린 그래, 3000원짜리를 팔더라도 목숨을 바칠 것처럼 판다"고 말했다.
부풀린 기대로 맞지만 그래서 더 씁쓸한 남대문 시장 상인들의 추석연휴는 전쟁처럼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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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