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버스와 '재매개'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 독설 닷컴의 고재열 기자가 언젠가 자신의 트윗 계정에 내걸었던 모토다. 당시 이 모토가 몇 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던 모양이다. 인터넷에는 금방 ‘트위터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반론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얼마 뒤 중동에는 이른바 ‘SNS 혁명’이 일어나 수십년 동안 장기집권했던 독재자들이 줄줄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물론 그 혁명을 SNS가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SNS가 기존의 통치에 균열을 내 중동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이 이른바 ‘희망버스’를 타고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6월10일의 1차 희망버스 행사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배우 김여진씨의 참여로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현장에 있던 이들의 트윗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그렇게 올라온 트윗을 시민들은 역시 실시간으로 리트윗하여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슈의 초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7월10일에 실시된 2차 ‘희망버스’ 프로젝트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195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부산에 도착한 1만여명의 시민들은 부산역에서 집회를 마치고 영도까지 행진을 한 뒤 조선소로 진입을 시도했다. 보수언론과 보수정치는 이 상황에 상당히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한나라당의 김형오 의원은 “정권의 위기가 부산에서 오고 있다”고 경고했고, 부산시와 영도구 의회는 3차 희망버스에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으며, 보수언론에서는 연일 희망버스로 인한 영도구 주민의 피해를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한진중공업은 조선업의 미래를 고작 필리핀의 싼 노동력에서 찾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형해화한 영도조선소를 그저 ‘한국’의 기업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위해 껍데기로 유지하게 된 것이다. 영도 주민의 입장에서는 기업의 해외 이탈이 반가울 리 없다. 지역경제의 공동화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 대폭 축소된 규모로나마 조선소가 빨리 정상화되는 게 낫다는 바람도 있다. 한진중공업을 비난하면서도 희망버스에도 반대하는 김형오 의원의 애매한 태도는 지역구민의 이 엇갈리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희망버스 기획의 미디어론적 특성
희망버스의 아이디어는 송경동 시인에게서 나왔다. 삶과 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그의 문학이라면 희망버스야말로 그가 쓴 여느 작품 못지않게 ‘시적인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망버스 기획의 미디어론적 특성이다. 똑같은 85호 크레인에 올랐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에게는 8년 전 김주익 지회장에게는 없었던 게 있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김주익씨가 그곳에 고립되어 철저한 고독 속에서 결국 목을 매야 했다면 김진숙씨는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바깥 세상과 소통하며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김여진이라는 ‘트친’이 있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배우의 트위터를 통해 85호 크레인 위의 상황은 트위터리언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미디어 이론가 귄터 안더스가 냉소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그 때문에 김주익의 농성은 ‘사건’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목숨을 끊었을 때에야 고작 1단짜리 짤막한 기사 속에 존재할 수 있었다. 대중매체의 시대에 사건을 ‘사건’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복제(가령 리트윗)다.
언론의 침묵 속에서도 적어도 트위터에서만은 김진숙의 크레인 투쟁이 뜨거운 이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에 속한다. 현실에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SNS 속의 여론을 어떻게 현실의 물리력으로 바꾸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희망버스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대중을 영도조선소 앞으로 결집시켜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버스는 온라인 SNS의 네트워크를 전통적인 오프라인의 투쟁방식으로 전화한 최초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에 ‘재매개’(remediation)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뉴미디어는 처음에는 올드 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뉴미디어는 모방에서 벗어나 자기 고유의 전략을 갖게 된다. 그때쯤이면 거꾸로 올드 미디어가 외려 뉴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가령 사진이 처음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회화의 전략을 차용했다. 하지만 사진이 자신의 전략을 갖게 되자 그때부터 회화가 외려 사진의 전략을 베끼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의 전통적 노동운동은 ‘희망버스’라는 아날로그 운송수단을 통해 디지털의 네트워크로 묶인 대중을 현실의 공간 속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조직(organization)의 운동, 즉 한 작업장에서(장소의 일치) 같은 작업라인(시간의 일치)에 따라 일하는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 반면, SNS의 운동(?)은 각각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는 대중의 느슨한 망(network)이다. 희망버스는 이 디지털의 전략을 재매개함으로써 가상현실에 갇혀 있던 네트워크를 성공적으로 물질화해낸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희망버스는 SNS(뉴미디어)의 운동이 현장지원이라는 조직(올드 미디어)의 투쟁을 재매개했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김진숙과 김여진이 트친이 된 것은 조직과 네트워크의 이 행복한 결합을 상징한다. SNS는 85호 크레인을 방문한 김여진을 통해 육중한 현실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한 반면, 노동운동은 스마트폰을 손에 든 김진숙을 통해 SNS라는 가상세계의 수많은 거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김여진이 현장에 오지 않았거나 김진숙이 스마트폰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한진중공업 사태는 ‘사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현실의 존재론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디지털 대중의 자발성이다. 과거에 대중은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의 수용자에 불과했으나, 오늘날 대중은 외려 매체에 정보를 제공하는 송신자로 변했다. 매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오늘날,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 기사가 될 수 없다. 대중이 링크를 걸어 리트윗을 해줘야 비로소 기사는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오늘날 대중은 댓글과 멘션과 리트윗을 통해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사건을 기꺼이 ‘사건’으로 등록시키려 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한진중공업 사태를 ‘사건’으로 만들어냈다.
희망버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현실(reality)의 개념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상이 현실로 나아가고, 현실이 가상으로 들어와 복잡하게 뒤엉키는 혼합현실(mixed reality).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들어 사는 새로운 현실의 정체다. 귄터 안더스는 “사건이 원본보다 복제된 형태로 더 큰 사회적 중요성을 띠는 것”을 빌어먹을 현실이라 성토했으나, 그의 푸념에 아랑곳없이 오늘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결합된 혼합현실은 이미 우리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바로 그 새로운 현실의 존재론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 글: ⓒ진중권, 출처: 씨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