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의의 편의를 위해 해방이후 학생운동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겠다. 제 1세대 : 4.19 ~ 6.3 세대 (1960년대) 제 2세대 : 민청학련-긴급조치세대 (1970년대) 제 3세대 : 386 1기, 소위 모래시계 세대 (1970년대 말~ 1980년대 중반) 제 4세대 : 386 2기, 전대협 세대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제 5세대 : 한총련 세대 (1990년대 후반)
해방이후 좌우익의 치열한 대립이 한국전쟁 이후 온건 사민주의자까지 포함한 일체의 좌파세력의 소멸로 이어진 이후, 70년대 제 2세대까지의 학생운동은 좌파적 지향이 아닌 "온건 보수적 브루주아 민주주의의 정상화" 를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물론 일부 좌파적 성격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지하에서 아주 미약하게 존재했을 뿐이며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등 지하조직의 존재와 북한, 그리고 오늘날 남한내 주사파와의 연결점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흐름이 현재 주사파들과 직결된다고 보기엔 애매한 점이 많다고 본다. (뭐 남민전 출신 김남주 시인의 시가 현재 주사파들의 대중선동에 이용되고 있다던지.. 하는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유신의 폭압속에서 돌파구를 찾던 제 2세대 운동의 큰 흐름이 있었는데 한국 모든 기득권의 메카이자, 그 기득권에 도전하는 운동권의 메카이기도 했던 서울대에서 그 연원을 찾아보자면
인문대의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를 중심으로 제기된 정치투쟁론과 사회과학대의 한국사회연구회(한사연)을 중심으로 제기된 현장론이 그것이다.
아주 거칠게 분류하면 정치투쟁론은 훗날의 pd(평등파), 현장론은 훗날의 nl(자주파)와 맥락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그들이 그런 식의 지향을 가졌다는 것도 아니고 인적, 사상적으로 일관되게 연결되는 것도 전혀 아니다.
다만 보다 과격하게 근본적, 직접적인 전면투쟁을 요구했던 정치투쟁론의 흐름이 80년대 학림- 전망- 깃발, MT- CA- PD 로 이어지는 선도투쟁론의 맥을 이어 가게 되고
조직 역량을 보존하며 대중들 속에서 힘을 키워나가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흐름이 80년대 무림- 야비-반깃발, MC- NL 로 이어지는 대중투쟁론의 맥을 잇게 된다.
70년대 현장론자가 나중에 NL이 된다는 식으로 인적구성이나 조직구성면에서 흐름을 이어간다는게 아니라 투쟁 방식에 대한 견해차이, 대중관 등에 있어서 흐름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치투쟁론자는 현장론을 개량주의, 사실상 투쟁을 포기한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했고 현장론자는 정치투쟁론을 시위만능주의, 좌경모험주의로 비판하고..
80년대에도 이런 갈등이 되풀이되어 학림-서울대 민민투-PD로 이어지는 그룹은 끊임없이 모든 역량을 시위에 맞추는 "투쟁위원회" 형식의 조직을 내세우며 끊임없는 거리시위를 주장했고 무림-서울대 자민투-NL로 이어지는 그룹은 비교적 온건한 대중적 조직인 "학생회" 건설을 내세우며 학원자주화운동을 밀고 나갔는데 바로 여기서 PD와 NL의 운명이 갈린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80년 광주.. 악마와 손잡고서라도 기필코 용서하지 않겠다, 전두환!
서울의 봄이 오고, 제 3세대가 등장한다. 이때 학생회를 장악한 과거 현장론의 맥을 이은 소위 "단계적 투쟁론" 자들이 정세에 대해 결정적 오판을 하며 군부의 개입을 피하겠다고 서울역 회군을 한다. 이 회군은 오히려 군부에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곧이어 광주는 피로 물든다.
80년 광주는 이후 모든 운동을 추동하는 시작이자 끝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때 서울역 회군의 오판을 스스로 비판하며 정치투쟁론의 맥을 이는 전면적 투쟁론자들이 "학림 - MT - 민민투"로 이어지며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때는 주체사상이 도입되거나 학림이라고 계급문제만 고민하고, 무림이라고 민족모순에만 천착하는 때는 아니었다. 한국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볼 수 있는 이런 근본적 이념의 분립은 그 이후의 일이고, 이때의 학생운동내부의 갈등은 그때 그때의 정세에 따른 투쟁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현실은 온건론에 가까운 현장론-무림계열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시대라지만 무조건 시위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계란으로 바위만 들입다치자며 투쟁위 꾸리고 시위하다가 잡혀가는 식의 선도투쟁론은 그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대중적 호응을 얻기는 힘들다. 대중은 원래 결정적 순간이 오기전까지는 극단적 선택을 주저하기 마련이니까..
결국 명분이나 논리상에서 학림계열이 상대적으로 우세를 보이며 학생운동 지도부의 상층을 점하긴 했지만 실제 캠퍼스 내에서는 대중조직인 학생회를 건설해 학내부터 자주화하자는 무림계열이 대중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충격적인 무기가 던져졌으니 그것이 바로 "주체사상"이다.. 지금은 조갑제랑 사이좋게 극우질하고 있는 강철 김영환 따위가 단파 라디오 들으며 열심히 베껴서 밀수입한 주체사상...
그리고 이 말도 안되는 사상은 일군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고 대중조직부터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3. 주체사상은 어떻게 운동의 패권을 장악했는가?
필자는 그 이유를 세가지로 보는데
첫째, 민족모순에 대해 명쾌한 해석과 답을 내놓은 점 둘째, 북한의 군중노선에 입각한 대중노선 셋째, 품성론과 닥치고 단결주의이다.
우선 미국을 광주학살의 주범으로 제시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규정하며 전두환 정권을 미국의 괴뢰로 명시한 후 구체적 대안으로 친미정권 타도, 미제 축출, 연방제 통일이란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내놓은 NL이론은 무엇보다도 대중이 이해하기 쉬웠다.
운동가들의 레닌 왈, 맑스 왈 하며 주절대는 소련 사투리보다는 함경도 사투리가 더 귀에 쏙쏙 들어왔던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 경향은 젊은 학생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즉 전두환 정권 타도에 "민족문제"를 쉽고 단호하게 결부시킴으로서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고 호응을 얻은 것이다.
둘째, 대중노선.. 이게 참 아이러니컬 하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일반 좌파보다 훨씬 과격해보이는 주사파가 알고보면 현장론-단계적투쟁론-무림으로 이어지는 학생운동 온건파 논리에 편승했다는 점이 말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방법론적 온건함은 그 근본사상의 과격함과 별개의 차원이니까.. NL에 잡초같은 생명력을 불어넣은 한결같은 대중노선은 선도적, 전위적 혁명가를 지향하던 PD들을 영원한 소수파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지들끼리만 알아먹을 현학적 헛소리들을 찍찍거리며 때론 무지한 대중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뭔가 가르치려 드는 듯한, 엘리트주의적인 PD들과 달리 NL들은 대중의 정서에 철저하게 아부하면서 맨투맨방식, 눈높이 교육으로 대중들을 장악했다. PD들이 꿈꾼 혁명적 조직에 모인 것은 수준높고 결의높으신 소수 혁명가들과 이론가들이었고 NL들이 일궈낸 대중조직인 학생회에는 학생대중들이 몰려들었다.
셋째, 어찌보면 참 뻔하고도 쉬운 이론이지만 운동가의 "품성"을 강조하며 이를 끊임없이 세뇌에 가깝게 달달 위우고 실천한 점도 NL 패권에 일조한다. 위의 대중노선과 결부되는 이야기지만 한마디로 "싸가지 있어 보이는.." " 좀 멍청해 보여도 사람은 진국인 " NL운동가들이 설렁설렁 술쳐먹이고 눈물좀 같이 흘려주고, 어지간한건 단결하자고 덮어주며 인간미로 디밀고 들어가면서 기층 대중들을 홀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지만 이에 대한 지적에는 "동지에 등에 칼을 꽂는" 운운으로 "인정" 에 호소하여 얼버무리며 불리하면 착한 얼굴로 "단결"을 외치고, 유리하면 역시 착한 얼굴로 지들 패권을 밀고 나가는 방식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통했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가장 잘통하는 방식.. 그게 바로 NL 방식이었다. 김일성이 괜히 신이 된게 아니다. 사람 홀리고 휘어잡는 법을 극대화한 것,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되고, 굉장히 촌스러운 어법을 구사함에도 그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장악하는, 모양새는 구리지만 일단 맛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굉장히 세련된 대중선동 기법.. 그게 북한지배층, 그리고 NL이 각각 대중들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힘이다.
4. 어떻게 그런 막장 사상이 설득력을 가졌는가?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일반대중들이야 주사파의 실체를 모르고 사람좋아 보이는 놈들이 "민족", " 통일"이란 가슴뜨거운 말을 눈물을 흘려가며 부르짖어대니까 그게 무슨 민족주의적진보로 착각하고 따라다닌다지만, 정작 주사파의 정체를 알만큼 아는 소위 운동권들은 어떻게 그 실체를 알면서도 주사파들의 손과 발 노릇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북한같은 막장 체제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예전에 유시민이 말지에 기고했던 글이 떠오르는데 아마 "내가 주사파가 되지 않은 이유" 였던가.. 그런 글이었을게다. 그가 설명하는 그 당시의 분위기는 "전두환을 타도하고 광주의 한을 갚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심지어 유시민조차 한때 북한이 하나의 대안이자 남한 운동의 동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니까..
게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의 경제 격차라는게 그리 크지 않았다. 남한이 1인당 국민소득에서 북한을 추월한것은 70년대 중반.. 그로부터 10년도 채 안된 시기의 북한은 지금처럼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지는 나라도 아니었고, 식량난에 허덕이는 나라도 아니었다.
미국의 보수적 역사학자이자 주일대사까지 역임한 하버드대의 라이샤워, 페어뱅크 등이 저술한 동양사의 고전 "동양문화사"의 80년대 말 개정판에서도 북한을 억압적 체제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의 "동독"이라 부를만한, 아시아 공산권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공업국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 부채질한게 바로 남한의 꼴통극우정권.. 남한이 북한보다 못살던 5,60년대부터 계속 선전한게 북한은 징글징글맞게 못산다..는 거짓말이었고, 북한문제 뿐 아니라 국내문제에서도 늘 은폐하고 왜곡하고 거짓말하는 게 일과였던 남한 정권이니만큼 제도권 교육,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북한 = 생지옥 이라는 주장 자체를 믿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체제면에서 더 나았는가 하면,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한도 어차피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막장체제이긴 마찬가지였으니 북한=독재라는 비판도 먹힐 수가 없었다...
유시민의 경우는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해보려 했고 마침 그들의 선전방송이 들리는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그 기회에 북한에 대해 알아보려고 그 선전에 귀를 기울여봤고 그 덕분에 주사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 하도 끊임없이 지들이 얼마나 잘났고 수령님이 얼마나 성군이신지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그런 체제일 수록 못나고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임을 직관적으로 꿰뚫었기 때문에..
어쨌든 유시민처럼 얍삽하고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도 흔들릴만큼 당시 상황은 암울했고, 게다가 남북한간 체제의 격차도 그닥 크지 않았던 만큼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주사파가 설득력을 갖고 학생운동을 장악해 나간 것은 어찌보면 그리 황당한 일은 아니다. 현재의 현실을 놓고 보면 황당하지만, 주사파가 퍼지기 시작한 그때는 80년대 중반.. 그때의 현실을 놓고 보면 그닥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단 이야기다.
5. 좌파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주사파와 동거해왔는가?
그렇다.. 문제는 좌파, PD 운동권이었다.
혹자는 종북주의 반대하는 PD들이 도대체 왜 NL들과 20년 씩이나 주댕이로만 갈등하고 투쟁은 함께 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사실 좌파란 작자들이 주사파와 공존한다는 자체가 이미 좌파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사정은 있다.
어차피 어떤 이념이든 현존하는, 또는 존재했던 사회적 모델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데 서양의 제국들은 "로마"를,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우익은 "미국"을, 박통은 "만주국과 대일본제국"을, 사민주의자는 "북유럽"을 모델로 삼고 제 이념의 준거지표로 의지한다.
문제는 좌파들이 모델로 삼은건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짱인 "소련"이었다는 것이다. 엉터리 번역으로 거의 방언에 가까운 현학적 소련제 헛소리를 줄줄 외우는 좌파의 모습이나 함경도 사투리로 무한 반복하는 수령찬양, 민족타령 북한제 헛소리에 감동먹는 주사파의 모습이나 사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황당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골때리기가 난형난제였던 모습이었다.
PD들이 얼마나 웃긴 짓을 했느냐 하면 천안문 사태때는 인민해방군 탱크 밑에 깔려죽는 시민들을 보며 " 브루주아 반동분자들의 폭동 " 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릴 해대고 소련이 붕괴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나중에 옐친이 부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공산당 보수파 군부의 잠깐동안의 쿠데타 소식에 환호하는 등... 주사파랑 별반 다를 것 없는 꼴통성을 보였다.
물론 PD라는게 NL과 대립되는 지향을 가진 주사파 이외의 제반 좌파들을 망라한 것으로 어떤 통일된 이념을 가진 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PD 전체가 소련을 추종하고 공산당 독재를 찬양한 꼴통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소련과 구 공산권의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대며 사민주의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면 개량주의자, 자유주의자로 몰려 손가락질 당하는 분위기가 좌파내에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 " 자유주의자 " 라는게 욕으로 쓰였던게 당시 혁명적이신 좌파들의 분위기였다.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물론 정신 못차리고 지금도 러시아 혁명, 스탈린 독재의 부활을 꿈꾸는 볍진 좌파도 극소수 있긴 하다. ) 자유, 평등,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며 현실적으로 변화하고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운동 등 서구적인 다양한 운동들로 분화하여 정상화된 건 사실상 소련이 망한 이후부터이다.
문제는 북한은 망하지 않았단 것이다.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구 좌파가 아무리 혁명적 망상을 거듭해도 이미 "소련"은 사라졌다. 결국 현실이 망상을 이긴 것이고 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리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어도 "존재"한다. 이 경우 " 북한은 천국이고, 북한이 너덜너덜 걸레란 것은 반동들의 모함" 이라는 망상만 계속하고 있으면 그 신념이 흔들릴 일이 없다.
두 경우를 종교로 비유하자면 둘 다 번제물을 바쳤는데 좌파쪽에는 신이 강림했다가 쫄딱 죽어버렸고, 주사파쪽에는 신이 강림해서 제물을 쪽쪽 빨아먹고 다음에 또 온다고 하곤 승천한 차이다.
좌파의 경우 현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지만 주사파는 신이 존재함을 증명한 이상 그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신이 사실은 "사악한 마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마음 속에서 그 신은 전능하신 선한 하나님이고, 일단 그 존재자체는 증명이 된거니까..
6. 주사파의 몰락 그리고 생존
일단 주사파는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과 노사모의 산실이된 전대협 중심의 제 4세대 운동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다. 전대협 출범식에 10만명씩 모여 꼬마 김일성 흉내내는 "의장님"의 총폭탄이 되고자 쇠파이프 지켜든 해방전사질을 하던 그 시절.. 학생운동이 군대식 편제와 문화, 봉건적 신분질서, 촌스럽고 생경한 이북식 어휘, 꼴통스럽기 짝이없는 맹목적 운동으로 변질되버린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 절차적 민주화가 확보되고 광주 및 전두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자리를 잡으며 북한의 현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달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의 탈이념 시대를 경과하면서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변신한 제 5세대 운동은 서서히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학생운동에 3대 핵폭탄이 떨어지니 바로 학부제, 프락치치사, IMF라 할 수 있다. 학부제는 과학생회를 기초로 신입 운동권을 양성하고 일반 대중과 일상적으로 교통하는 NL운동의 재생산구조, 인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이렇게 축소된 물적 기반 위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치명상을 입은 것이 바로 97년의 이석씨 프락치 치사사건.. 혹자는 96년 연세대사태를 들기도 하지만, 그 사태는 NL운동권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격동시키고 결집시켰다. 그들이 박살난것은 97년 민간인 고문치사 사건 이후다.. 마지막으로 확인사살에 들어간 것이 IMF.. 청년이 이념이나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시대, 이상을 꿈꾸는 자는 낙오자 취급하고 오직 돈만이 최고의 선이자 절대 진리인 시대가 되면서 NL 뿐 아니라 운동권 자체가 이제 대학사회에서 더 이상 유의미한 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문제는 전대협 세대~90년대 중반 한총련 세대 까지를 아우르는 NL꼴통들이 대학에서도 점점 발붙이기 힘들어지고 사회에서 당장 갈 곳이 없어지자 당이라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 민노당에 대거 입당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NL 꼴통들 따라다니던 순진한 NL 대중들은 멀쩡히 사회생활 잘하다가 왕년에 의장님 맹종하던 광신도의 달콤함을 다시 맛보고 싶었는지, 2002년 노사모를 결성해 의장님, 아니 대통령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마저 감미롭다는 꼴통짓을 재현했고 이후 황우석 논쟁, 영화 한반도 논쟁, 디워 논쟁 등 시기시기 마다 NL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황빠, 디빠 노릇에 매진하여 386 들이 얼마나 수준 낮은지, 왜 한국의 민족주의가 비판받는지를 온몸으로 입증했다는 점이다.
이런 NL 대중과 차별화된 "직업운동권 NL 백수 및 주사파, 자원봉사간첩 "들은 대중들과 어울려 열린우리당에서 공작질하기엔 자존심이 좀 안땡겼던지 대거 민노당에 쳐기어들어가 당을 완전 걸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NL이 낑궈들어가면 반드시 그 꼴이 난다. 학생운동이건, 중도보수정권이건, 진보정당이건...
하기사 2000만 동포를 아프리카 수준의 막장봉건사회에서 살게 만드는 장군님의 경영능력을 배운 자들이니.. 다세포 소녀에 나오는 가난을 등에 업고 다니는 소녀처럼 그들은 붕괴 또는 파토를 등에 없고 다니는 세력들임에 분명하다.
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 학번 중 학생운동 좀 했다거나 운동은 아니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다거나 하는 이들은 한번쯤 자기 머릿속을 좀 점검해보기 바란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꼴통들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황우석, 디워 논쟁 때를 되짚어보면 의외로 자신의 꼴통스러움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발견해서 치료하기 바란다.
그냥 대충 흉내만 냈던 일반 NL 대중이야 사회 나가서 뺑이치면서 알아서 정상화 되겠지만
주사파.. 그리고 NL꼴통들은 너무 멀리 나갔기에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그들은 이미 몰락했다. 하지만 결코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길은 두가지 뿐이다.
계속 그렇게 진보를 참칭하여 진보의 입지를 좁혀, 자신이 기생할 숙주를 망가뜨리며 자신도 죽어가든가.. 아니면 원조 주사파들의 모범 따라 극에서 극으로 전향하여 극우질을 하던가.
내가 보기엔 후자가 더 잘 어울릴 듯 하다. 사실 주사파들의 지도자숭배, 군중노선, 맹목성, 단순무식함, 박박 우기기, 눈가리고아웅하기 등등의 품성이나 사상자체가 극우와 찰떡 궁합이다. 이는 북한 자체가 간판만 사회주의에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 뿐 사실은 군주제 봉건파시즘에 불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이다.
그 숭배의 대상을 이북의 장군님이 아닌 남한의 누군가에게 쏟아부어 그 활활 타오르는 애국심, 민족지상주의를 꽃피우면 그게 바로 북한식 기형 파시즘이 아닌 남한식 파시즘이 되는 것이다.
선배 주사파들은 장군님에서 다카키 소위로 말을 갈아타서 주사파쇼질에서 조갑제따까리 파쇼질로 전향했던데 우리 후배 주사파들은 기생할 숙주 다 죽이고 갈 곳 없어지면 어디로 전향할까?
그러고보니 김완섭이도 한때 주사파였다고 제 입으로 그러더라. 기왕 모시는거 뽀대나게 "천황폐하"를 모시는 건 어떨까? 주사파와 궁합이 잘맞는 환단고기를 주사파 식으로 달달 외워라. 그리고 믿어라.
환빠들에 따르면 일본은 백제다. 천황폐하는 백제의 황손이므로 길게 보면 가우리 추모성제님의 현손이시며 더 길게 보며 대쥬신제국 22대 단제이신 색불루 단제님의 후손이시자 환국, 배달국, 쥬신의 맥을 잇는 정통황가의 후예이니
일장기도 곧 대동이의 깃발이오, 태극기도 곧 대동이의 깃발이라. 주사파들이 구다라(백제)의 덴노헤이까 밑에서 조국통일(한일합방) 및 고토회복(만주침략), 동이민족공영(대동아공영권)의 꿈을 향해 달려갔던 1940년대의 그 길을 다시 걷자고 선동질 해댈 그 날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