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이 본 곽노현 교육감
구속 수감중인 서울시교육청 곽노현 교육감(@nohyunkwak)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준비한 <곽노현을 말하다> 시리즈 세 번째 글을 소개합니다.
이번 글은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상임이사(@laegoon61)가 쓴 공개탄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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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곽노현
인권활동가들의 경제사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형편없다. 아마도 경제적 수준만을 고려한다면 인권활동가들은 우리 사회 빈곤층에 해당할 것이다. 많은 활동가들이 단체에서 주는 활동비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알바를 운명처럼 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인권활동가들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곽노현 교수는 늘 활동가들에게 미안해했다. 밥과 차비를 챙겨주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은 교수다.
[인권운동가 박래군 시 (출처=연합뉴스)]
나는 결혼해서 딸이 둘인데,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방송대를 일이 있어서 들렀더니 아빠 노릇은 하냐며, 아이들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이전의 술자리에서 나도 아이들 장난감이라도 사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며 말꼬리를 흐린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든 봉투를 주셨다. 혹여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성의를 받아달라고 했다. 꼭 아이들을 위해서 쓰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나는 감사하며 그 돈을 받았지만, 막상 그 돈 봉투를 아이들을 위해 쓰지 못했다. 당장 단체 사정이 안 좋은데 꽤나 큰 목돈을 아이들 장난감 사는데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곽노현 교수는 나를 비롯해 후배들에게 존칭을 놓은 적이 없다. 늘 박 선생이라면서 존대했다. 만난 지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는 늘 내게 박 선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호칭에서만이 아니었다. 한참 어린 인권활동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격의 없는 대화를 갖고, 활동가들의 의견도 잘 들어주었다.
후배라고 해서 무시한 적이 없다. 그에게 지금까지 무시당해본 기억이 없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인권활동가들을 후배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활동가로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할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인권활동가들은 그에게 충분히 국가인권위에 대한 불만을 거의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는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
소탈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결함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고, 꾸미는 사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보여주고, 들어준다. 그는 꾸밈없는 대화와 토론을 즐기는 사람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다. 법을 전공하시는 분이지만, 곽노현 교수나 강경선 교수를 볼 때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란 이들이란 느낌을 갖고는 했다.
2000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 초까지 인권활동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을 위한 명동성당 들머리 노상단식농성을 진행했다. 그해 겨울은 30년 만의 강추위와 폭설이 몰아치던 때였다. 그 강추위와 폭설을 이겨내고 인권활동가들은 13일을 명동성당의 들머리 계단에서 천막도 없이 침낭과 비닐을 덮고 견뎌낼 때였다.
많은 분들이 방문을 하고 돌아가고는 했지만, 곽 교수는 매일 찾아와서는 우리와 같이 그 농성장을 지켰다. 절반 이상은 밤에 잠자리도 같이 했다.
물론 그는 국가인권위 설립을 위한 공대위의 집행위원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법안이 무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므로 인권활동가들과 한뎃잠을 자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바쁜 일정을 마치고는 농성장을 찾아와 우리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걱정해주고 함께 해주었던 교수는 곽 교수뿐이었다.
용산참사 관련한 투쟁으로 순천향병원과 명동성당에서 수배를 당할 때다. 당시 두 곳에서 머물 때 문밖에는 경찰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서 밖에는 전혀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10개월 갇혀 살아야 할 때였다. 그는 여러 차례 불쑥 찾아와서는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묻고는 했다.
그때마다 밖에 나가서는 바리바리 먹을 것을 사왔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이 세상사를 주제로 활달한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매일 변함이 없는 지루한 수배생활에 그의 방문은 활력소였다.
2009년 12월 10일, 곽노현 교수는 다시 명동성당 영안실을 불쑥 찾아주었다. 꽃다발과 함께 치킨과 도넛 등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서다. 그날이 마침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고, 그날 나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인권상을 받는 날이었다.
수배 중이 아니면 당연히 그 자리에 갔어야 하는데, 수배로 묶인 몸인지라 명동성당 밖을 나가지 못하던 때였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면 인권단체로서 이런저런 기념행사들을 하는데 얼마나 갑갑하겠냐며 위로해주고 갔다.
그날은 마침 찾아주는 사람도 없을 때였는데, 그는 마치 그런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와서는 꽃다발을 안기고는 또 몇 시간 재미있는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고 홀연히 떠났다. 늘 그는 쾌활했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그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전염시킬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경 력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4.9통일평화재단 이사
에바다복지회 이사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 집행위원장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로서,
이주노동자에서부터 의문사 진상규명까지 ‘인간의 존엄’과 관계되는 모든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에바다 농아원 사태 때 비리 재단 쪽이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싸웠다.
그는 평택 대추리 ‘평택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었다.
또한 ‘용산참사 진상규명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었다 1년여 만에 풀려났으며, 최근에는 ‘희망버스’와 관련 집시법으로 기소되었다.
특히 올해 내에 인권센터 건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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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배경내 씨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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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경 교수의 공개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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