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봤으면 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글

가자서 작성일 12.09.06 19: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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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봤으면 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글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추가했다. 즉,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또는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이 국정전반에 걸쳐서 긴급조치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판단해서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면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긴급조치를 취해 사람들을 조질 수 있게 한 것이 긴급조치이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민간인이고 계엄령 치하가 아님에도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군인이 민간인을 재판한 것이다. 유신이 독사라면 긴급조치는 그 독이빨이었다. 박정희는 죽기 전까지 긴급조치를 무려 9번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든 일체 의견을 금지시킨 것이다. 의사표현마저 무시한 초헌법적 횡포였다. 그리고 그 첫 구속자가 광복군 출신 재야지도자 장준하선생과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다. 장준하선생은 유신헌법을 비방했다고 무려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것도 조국근대화이고 수출100억불 문제이겠는가! 1974년 고 김근태 의원 등이 구속되었던 민청학련 사건 당시 발동한 긴급조치 4호의 내용은 경악할 지경이다.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여도 사형·무기징역·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 9호의 경우 4년 6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쉽게 말해 계엄령이 4년 반 정도 지속된 것이다. 유신이 사실상 계엄과 다름없는데 거기에 긴급조치라는 보너스 계엄이 추가되었다. 한마디로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가 유신시대였다. 그것을 박정희는 총력안보라고 불렀다. 이것이 잘 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협박한 박정희의 유신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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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에 맞서다 박해를 당하고 끝내 의문사한 '재야 대통령' 장준하 선생(맨 오른쪽)


잘 살기 위한 유신? 누가 잘 살았나?

어디 유신독재가 일인 독재에 그치겠는가. 잘 살기 위해 유신을 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경제성장의 주역인 노동자들이 유신시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당시 생산직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1970년에 51.6시간, 1975년 50시간, 1978년 월 260시간으로 주당 65시간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이었다. “근로자를 가족같이 직장을 내 집같이” 구호 아래 일어난 일이었다. 유신 전야인 1960년대 말 청계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2만 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보조노동자)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이 편지를 전태일은 끝내 부치지 못했다. 1969년 전태일은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장을 보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12시간으로 1개월 특(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대답도 없었다. 마침내 전태일은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고 분신자살로서 항의하고 노동자의 자각을 촉구했다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노동자들이 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으로부터 80년 지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전태일은 8시간도 아니고 16시간에서 12시간을 요구하는 이 비참한 절규가 박정희 시대 노동자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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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를 지키려다 사측의 구사대가 끼얹은 똥물을 뒤집어 쓴 동일방적 노동자들


홍사덕씨 말대로 1970년대 수출의 주요 역할을 했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은 어떠했던가. 1977년 7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강제 진압에 나선 경찰들에 맞서 옷을 벗고 알몸으로 저항했다. 설마 이런데 경찰이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개들은 잔인했다. 알몸의 여성노동자들을 짓밟고 강제연행했다. 

1978년에는 회사가 한 수 더 떴다. 남성노동자들을 매수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을 퍼붓고 젖가슴과 입에다 똥을 집어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이를 구경만 했고 회사는 조합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이것이 “직장을 내집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슬로건 하의 노동자의 현실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동요시킨 결정적 계기도 수출역군에 의해서였다. 1979년 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87명이 회사의 위장 폐업조치로 거리에 나앉게 되자 당시 야당인 신민당사에 가서 최후의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무려 10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1명이 추락 사망했다. 홍사덕이 수출 주역이라고 추켜세운 가발업체의 여공들이 조국근대화에 대해 박정희로부터 돌려받은 보답이 이것뿐이었다! 

홍사덕씨는 말해야 한다. 1970년대 필자 또한 체험했듯이 박정희의 퇴폐·향락풍조 일소 사회기강 확립 지침에 따라 경찰들이 줄자와 가위를 들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머리가 귀를 덮기만 하면 줄줄이 파출소로 끌려가 강제로 뒷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지나가던 아가씨의 허벅지에 줄자를 대어 치마 길이가 규정을 어기면 길에서 팻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어야 했던 그 짐승의 시대를 당신은 조국근대화의 시대라고 부를 것인가. 청량리역과 서울역에 경찰을 배치해 놀러가는 청춘남녀들이 들고 가던 기타마저 사회기강 확립이란 구실로 사그리 압수했다. 

도대체 홍사덕씨가 말하는 경제성장을 위한 수출100억불은 씻고 찾아보래야 볼 길이 없다. 이 지랄같은 것들이 100억불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지. 이 어처구니없는 짐승의 폭력이 난무한 유신시대는 오직 한 사람 박정희만을 위한 시대였다. 

이렇듯 장시간 중노동 저임금 비인간적 처우에 시달리면서 산업전사라는 이름 아래 전사해 간 노동자들의 피 위에서 한국 경제는 성장했고, 그 과실은 몽땅 재벌과 소수의 권력자에게 돌아갔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된다는 ‘빈익빈부익부’가 그 시절 유행어 아니던가. 

그런 범죄집단의 후계조직이 이제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한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며 느닷없이 추켜세우는 추태를 부리고 있다. 정말 타임머신이 있다면 간곡하게 희망한다. 홍사덕씨가 유신 시절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던 가발공장 여공이나 청계피복공장 노동자로서 한 번 살아보기를.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에게 의무를 다해야 할 정치인들이 국가나 헌법이나 정강정책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정치일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충성 대상은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박근혜 개인이다. 과거 박정희의 친위조직인 유신정우회가 자연 연상된다.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심복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 당당히 외치던 말,! 

“우리는 박정희대통령을 모시는 박정희교의 신도들이다!”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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