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은 누구를 추모하는 날인가... [바람부는언덕님 글]
어제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장은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정계인사, 보수단체 회원 등 1만여 명의 추모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최영철 추도위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민족의 자존심 회복이 박정희 국정철학의 핵심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리더십을 흠집내는 것은 자해행위"라고 열변을 토해낸다. 뒤를 이어 임방현 전 청와대 대변인은 "박 전 대통령이 공들여 다져놓으신 기반 위에서 우리는 88올림픽에 이어 G20, 친환경 녹색성장 서울정상회의와 핵안보세계정상회의를 주최했다"며 그를 예찬한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후보가 이날 추도식의 정점을 찍는다. 그녀는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는 국민께 돌려드리고 그 때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며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고 말한다. "마음의 상처와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며 고개를 숙인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힘없던 나라의 지도자였으며, 그 당시 절실했던 생존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최고의 가치이자 철학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특히 "경제개발의 종자돈이 없어 다른 나라에 머리를 숙여 도움을 청해야 했고, 열사의 땅과 정글 속에 뿌려진 우리 국민의 피와 땀으로 고속도로를 닦고 공장을 건설하면서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셨던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였다"며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와는 다른 곳, 다른 시간인 이날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는 '유신 40년 박정희 정권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민주행동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관제 빨갱이로 몰려 말 못할 고문을 당하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이 셀 수 없이 많으며, 개발독재의 피해자로 자신과 가족이 파탄을 맞은 사례들도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정도"라며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한다. 이와 함께 "정작 우리가 추모해야 할 것은 가해자 박정희일까, 박정희 정권 하에서 희생당한 피해자들일까"라는 의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전혀 다른 기억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땅 대한민국...
한쪽은 가해자이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은 다 누리며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로 권력의 눈치를 보며 아픔과 고통 속에 수 십년의 세월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 기약 없는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마음의 상처와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며 이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이야기 하자는 박근혜 후보, 그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잊는 것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그저 잊는 것만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 차라리 그럴 수만 있었다면 저분들이 질곡의 모진 세월, 마르지 않는 눈물과 응어리진 한 속에서 그리 살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박근혜 후보가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저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는 가해자이면서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해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절대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박정희 시대를 살아오며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다. 박근혜 후보는 그 과정은 철저히 생략한 채, 화해를 말하고, 미래를 이야기 한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진정성이 없는 까닭이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대법 판결과 정수장학회에 대한 법원판결 조차 임의대로 해석해 버리는 그녀의 오만과 독선, 혹은 무지. 그리고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일자 자신이 보여주었던 과거사 인식을 180도 바꾸며 대국민 사과를 하는 그녀는 대단히 유연하고 폭넓은 사고 체계를 지니고 있거나, 혹은 대단히 위선적이거나 둘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이를, 박 후보가 “아버지의 대한민국’이란 미분화된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로 인식해온 그에게는 아버지가 정리하고 합리화했던 틀을 넘어 세상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합리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의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다...
세상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합리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
아...
그러나, 박정희의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어디 박근혜 후보 뿐이더냐...
이미 신화가 되어 버린 박정희와 그 신화를 복원시키고 다시 만들어 가길 원하는 딸, 그리고 그 신기루 같은 허상을 쫒아 다시 모여드는 사람들...
그래서 필자는 박근혜 후보 보다...
박정희, 그 신화적 세계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솔직히 더 두렵다...
10월 26일, 이날...
한쪽에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행사가, 다른 한쪽에선 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정작 우리가 추모해야 할 것은 가해자 박정희인가...
아니면 박정희 정권 하에서 희생당한 피해자들인가...
P.S...
10.26은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기도 합니다...
1909년 10월 26일과 1979년 10월 26일,
참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