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박정희 과거사 얘기나와서 재업합니다

아랑공자 작성일 12.11.29 23: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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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박정희 취재노트'를 꺼낸 까닭

자료함에 보관해 오던 ‘박정희 취재노트’를 오랫만에 다시 꺼냈다. 지난 2004년 10월 <실록 군인 박정희>를 출간한 지 꼭 3년만이다. 오늘은 박정희를 다시 살필 요량으로 이걸 꺼낸 게 아니다. 신문에 실린 한 군 원로의 부음기사를 보고서 그가 살다간 삶과 증언을 ‘기록’해 두고자 함이다.

어제(16일) 조간 동정란에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예비역 해병중장) 장군이 92세로 미국에서 타계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는 그를 생전에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냥 스치듯 만난 게 아니라 당시 경기도 화성에 있던 그의 자택에서 두어 시간 인터뷰를 했고, 거기서 중요한 증언도 몇 들었다. 그를 찾아가기에 앞서 나는 그의 자서전 <노해병의 회고록>(가톨릭출판사, 1989)을 먼저 읽었었다. 떳떳치 못한 자신의 행적을 비교적 양심적으로 기록한 걸로 봐 나는 왠지 그가 인터뷰에 응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실지로 그는 인터뷰 허락은 물론 문답 내내 친절하고 솔직했던 걸로 기억된다.

내가 그를 찾아간 것은 박정희 일로서였다. 1997년 당시 나는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에 소속돼 ‘실록 박정희 시대’ 연재팀의 일원으로 있었다. 거기서 내가 맡은 부분은 박정희 전반부, 즉 5.16쿠데타 이전까지였다. 즉 박정희의 출생, 학창시절, 교사시절, 만주 군관학교 및 일본 육사생도 시절, 이어 만주군 복무 및 해방 후 한국군 근무시절, 그리고 5.16 전후 상황 등이었다. 박정희의 전력과 관련해 주로 논란이 돼왔던 일제하 행적과 좌익연루 부분이 포함돼 있어 보기나름으로는 예민한 내용들이었다.

'회고록'에 기록된 일제하 만주군 행적

1915년 경북 금릉 출신인 그는 박정희보다 두 살 위였고, 군 경력으로도 선배다. 그가 4세이던 1919년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1928년 하얼삔보통학교에 입교했다가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는 17세 되던 해인 1932년 ‘입을 하나 줄이고 능력을 발휘해보고자’ 만주군에 들어갔다. 하얼삔 남강 주둔 일본군 14사단 참모 다데이시 대위 전속통역으로 ‘취직’을 하게 됐다. 중국 현지에서 자라면서 중국말을 배워둔 게 당시로선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1932년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는 장교양성을 위해 봉천(현 심양)에 1년 과정의 군관학교를 세웠다. 그는 1936년 4월 이곳 제5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9월에 졸업했다. 한국인 동기생 중에는 송석하(예비역 소장, 작고), 전해창 등이 있었는데, 송석하는 군관학교 졸업 때 수석을 하여 만주국 황제(부의)가 내리는 금시계를 하사품으로 받았다.(송석하는 해방 후 귀국해 육사 2기생으로 입교해 박정희와는 동기생이다) 전해창은 독립군 비밀지령 입교혐의로 중도에 퇴교처분을 당했다.

1937년 10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5교도대 예하 보병 제5단에 몇 개월 근무하다가 이듬해 말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선발됐다.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만주(간도)지역 항일투쟁세력을 소탕할 목적으로 1939년 3월 1일 명월구에서 창설한 특설부대로, 사병 전원이 조선인이었다. 그는 1940년 12월 훈춘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전배되기까지 2년 가까이 간도특설대 창설멤버로 근무했다. (창설 당시 조선인 장교는 강재호, 김백일(이상 봉천군관학교 4기생), 신현준, 군의관 마동악 등 4명이었다)

박정희와의 만남, 그리고 귀국

1943년 4월 간도특성대로 원대복귀한 그는 이 해 연말 후배 백선엽(예비역 대장, 봉천군관학교 9기생)과 함께 팔로군 토벌에 출동하기도 했는데, 이듬해 3월 1일 작전 도중 상위(대위)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5개월 뒤 보병8단 6연장(중대장)으로 전보돼 거기서 박정희 소위(해방 당시에는 중위)를 처음 만났다. 그는 지휘관이었고,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내근이어서 자주 만날 기회는 드물었지만, 해방 때까지 같은 부대에 근무했다.

당시 보병8단에는 조선인 장교가 그를 포함해 방원철(신경군관학교 1기생, 육군대령 예편, 작고), 이주일(신경 2기생, 감사원장 역임, 작고), 박정희(신경 2기생, 전 대통령, 작고) 등 총 4명이었다. 일제 패망 후 그는 박정희, 이주일 등과 북경으로 나와(방원철은 별도로 평천을 거쳐 북행함) ‘해방 후 광복군’에 들어가 9개월 가량 머물다가 이듬해 1946년 5월 미군 LST편으로 귀국했다. 그가 타고온 ‘귀국선’에는 교보생명 창업주 신용호(작고)도 함께 타고 있었다.

한편 위 내용들은 그가 일제말기 일본군의 하수인격인 만주군에 근무한 기록으로, 말하자면 ‘친일행적’으로 분류되는 사항들이다. 이런 내용들은 필자가 어렵게 조사해 밝혀낸 것들이 아니라 그의 자서전에 실린 것을 요약한 것이다. 그와 유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렇지 않다. 대개는 자서전, 회고록 등에서 일제하의 행적을 누락시키거나, 아주 간략히 언급하거나, 아니면 합리화, 변명, 심지어는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의 일제하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그는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현석호의 친일행적 '고백'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 가운데 일제하의 행적을 비교적 양심적으로 기록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고등문관 출신으로 경부, 군수를 거쳐 일제 말 전남도 광공부장을 지냈고, 2공화국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한 삶의 고백>이라는 회고록에서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관리로서 거취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나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며 자신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 솔직히 고백, 참회했다.

자신에 관한 사항은 유불리를 떠나 증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타인에 관한 사항은 좀체 증언하길 꺼리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의 주역이었거나, 또는 역사적 현장을 목격했던 인사들 가운데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간 사람이 적지 않다. 사안에 따라서는 인정하고 동의할만한 점도 없지 않으리라. 그러나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시키거나 역사 왜곡이 확실시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들이 증언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사항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비밀광복군' 논란에 종지부를 찍다

만주군에서 1년 가까이 박정희와 같이 지낸 그는 박정희를 둘러싼 구구한 논란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명쾌하게 증언했다. 지난 97년 필자가 그를 방문한 것은 박정희의 만주행적과 그를 둘러싼 논란의 진위 확인차였다. 핵심은 박정희의 조선인 항일군 토벌 여부, 광복군과의 내통설 등 두 가지였다. 이를 문답으로 재구성해보자.

문-박정희가 조선인 항일군 토벌에 참여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답-“1944년 8월 1일부로 보병8단에 전임해 보니 박정희가 나보다 한 달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단장 부관이었는데, 심부름을 하는 정도가 아니고 중요한 직책인 것 같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부관이어서 일선부대에 (전투하러)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나는 중대장이어서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투를 했다”

문-박정희가 비밀리에 광복군과 내통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답-“8단에 있을 때는 광복군은 생각조차 못했다. 북경에 가서 비로소 광복군의 존재를 알았다. 광복군에 들어갈 때도 들어갈까 말까 판단하기가 힘들어서 서로 상의하고 조정해서 들어갔다. 8단 시절 (박정희가) 광복군과 내통했다는 것은 전연 사실무근이다”

박정희의 ‘비밀광복군설’은 지난 1967년 박영만이라는 자가 소설 형식으로 <광복군>(상, 하)이라는 책을 펴낸 데서 비롯됐다. 이 책의 하편에는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로 있으면서 비밀광복군 활동을 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이는 엄연히 사실과 다르다. 심지어 당사자인 박정희조차 이 책을 보고 대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설 같은 얘기가 책으로 나온 지 20년이 지난 시점인 1986년 8월호 <월간조선> 기사(‘박정희의 만군인맥’)에서 마치 사실인양 인용, 보도되면서 다시 진위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들은 90년대 들어 신현준, 방원철 등 박정희의 만주시절 동료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종지부를 찍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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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있는 신현준 사령관



우리 근현대사에서 ‘신현준’이라는 이름은 ‘귀신잡는 해병대’의 초대 사령관, 또는 ‘해병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래서 20일로 예정된 그의 장례는 해병대장(葬)으로 치러진다. 1946년 6월 조선해안경비대 견습사관으로 한국군에 입대한 이래 그는 15년간을 군문에서 보냈는데, 해병대 창설은 물론 6.25전쟁 때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예편 후에는 모로코 대사, 바티칸 대사 등을 역임했는데,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지난 2004년에는 해병대 창설 44주년을 맞아 전 재산 1억원을 해병대 발전기금으로 기탁했는데, 해병대사령부는 이를 기초로 ‘신현준장학회’를 설립, 운영 중이라고 한다.

'공과' 엄정히 평가될 것... '기록' 남긴 점 별도 평가를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청춘기를 보내야 했고, 다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침략군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근 30년만에 패장의 모습으로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냉정히 얘기하면 식민지 시절에 보낸 그의 청년기는 자랑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식민지 시절이었다고는하나 그 시절에도 항일투쟁 대열에 나선 지사와 청년이 수도 없이 많았으며, 심지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의 만주군 복무 경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적될 것이지만, 다만 이것이 그 개인의 책임만으로 돌리기에는 당시 시대상황이 엄혹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고백, 참회했다고 해서 그 행적의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해방 전후를 통한 그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 공과를 후세 역사가들이 엄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내가 덧붙이고 싶은 점은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마저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겨 후세인들에게 판단 자료로 남긴 점은 또다른 차원에서 평가돼야할 것이라고 본다.

끝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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