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말 한마디에 경찰-검찰은 생사람 잡았다 [오주르디님 편집글]
▲정원섭 목사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가 한 말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요? 1961년 군사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손에 넣은 박정희는 ‘혁명이 성공하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1963년 대통령이 됩니다. 헌법상 한번의 중임이 허용되니 권력 유지는 1971년까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장기 집권의 야욕을 드러냅니다.
‘3선 12년’도 성에 차지 않았던 박정희
1969년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고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출마를 했지요. 민심이 좋지 않았습니다. 헌법을 비틀어서까지 또 출마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독재자도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읍소하게 된 겁니다.
1971년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되자 아예 종신집권을 꿈꿉니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을 중단시키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달 27일 ‘유신헌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집니다. 유신헌법의 골자는 대통령 간선제였습니다. ‘통일주제국민회의’라는 어용기관이 ‘거수기 선거’를 통해 임기 6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지요.
▲유신독재 헌법 개정에 투표하는 박정희 일가(육영수, 박근혜, 박정희) / 출처: 동아일보
‘10월 유신’ 바로 직전 강원도 춘천에서 초등학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9살 된 딸이 성폭행을 당한 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유신독재를 준비하던 박정희 정권이 이 사건에 주목합니다.
‘10월 유신’ 직전 발생한 파출소장 딸 강간살해사건
‘10월 거사’를 며칠 앞둔 시점에 치안을 책임져야 할 경찰 간부의 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국민을 꽁꽁 묶어둘 수 있는 강력한 치안력이 요구되는 판에 경찰간부의 딸이 흉한에게 잔혹한 짓들 당했다는 게 대단히 찝찝했던 모양입니다.
1972년 9월 30일 박정희는 김현옥 내무부장관을 청와대로 부릅니다. 그리고는 ‘빨리 (춘천 성폭행 사건을) 해결하라’며 크게 역정을 냅니다. '각하'의 불호령에 잔뜩 긴장한 내무장관은 이 사건을 ‘전국 4대 강력사건’으로 규정하고 치안본부장(현재 경찰청장)에게 “열흘 안에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한다”고 호통을 칩니다.
‘각하’의 역정과 내무부장관의 호통 그대로 정말10일 만에 범인이 검거됩니다. 경찰이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살해당한 어린이가 자주 들리던 만화 가게 주인 정원섭(당시 38세)씨. 경찰이 제시한 증거는 ‘사건 당일 피해 어린이를 데리고 나가는 걸 봤다’는 만화 가게 종업원의 증언과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 한 자루가 고작이었습니다.
▲정원섭씨 사건 현장 검증(1972/출처: 동아일보)
‘각하’의 호통에 놀란 경찰, 선량한 시민 고문해 범인으로
경찰은 정씨의 아들에게 그 연필을 보여주며 “이게 네 연필이냐?”고 묻습니다. 어린이는 “그렇다”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정씨가 강간살해범이 돼 옥살이를 하게 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합니다. 교회 전도사이기도 했던 정씨는 졸지에 반인륜적인 흉악범으로 낙인찍혀 구속됩니다.
억울했지만 경찰의 시나리오대로 범행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씨를 끌고 간 경찰은 5일 동안 물고문 등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가합니다. 고문에 못이겨 허위자백을 하자 경찰은 “범인이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며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법정에서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다”며 무죄를 주장하지만 법원은 정씨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1973년 11월 정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됩니다. 각하의 말 한마디가 선량한 시민을 흉악한 미성년자 강간살해범으로 만든 셈입니다. ‘유신독재’ 시절 인권이 파리 목숨 같았다는 사실을 잘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정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경찰 발표가 미심쩍다는 투의 기사를 실었다.
암울했던 시절, ‘생사람 잡기’는 다반사
이전에도 정씨는 독재정권으로부터 황당한 일을 경험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에서 지급되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자비량 목회’를 꿈꾸던 정씨는 사진관을 운영하며 몇몇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를 합니다.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입니다. 자신이 만든 여름성경학교 현수막의 문구 때문에 곤혹을 치르게 됩니다. 문제의 문구는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였습니다.
경찰이 찾아옵니다. “동무야”라는 문구가 북한을 연상시킨다며 그를 붙잡아 갔고, 그는 하루 동안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풀려납니다. 얼마 후 교회에 새 신자가 등록합니다. 그 새 신자는 정씨를 끌고갔던 파출소장의 부인이었습니다. 감시하기 위해 보낸 것이지요.
졸지에 무기수가 된 정씨는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감형을 받아 15년 만인 지난 1987년 출감하게 됩니다. 이후 목사가 된 정씨는 1999년부터 명예회복을 위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합니다. 하지만 법원은 끝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사연 귀 담아 들어준 노무현 정부
낙심하던 정 목사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정 목사의 사연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침내 만화 가게 종업원의 당시 증언이 경찰의 협박와 회유, 감금과 폭행에 의한 것이라는 진술을 확보합니다. 결정적인 증거도 나옵니다. 살해당한 주검에서 검출된 정액을 통해 밝혀진 범인의 혈액형은 A형이었지만 정 목사는 B형이었습니다. 애당초 경찰과 검찰이 정 목사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이쯤 되자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입니다. 2008년 11월 춘천지법은 “법원마저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고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하지 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무죄를 선고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검찰은 법원의 결정에 불복하고 항소를 합니다.
▲36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법원을 나서는 정원섭 목사(출처: 국민일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2011년 10월에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옵니다.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정 목사는 먼저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바로 아내입니다. 감옥살이 15년 동안 2남 2녀의 자식들과 함께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옆에서 힘을 준 집사람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이게 네 연필이냐”고 묻는 경찰에게 거짓말 하지 않고 ‘맞다’라고 대답했던 정 목사의 큰아들 정재호 씨도 ‘나 때문에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는 압박감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을 강간살해범으로 만든 경찰과 검찰에 대한 정 목사의 소회는 어떨까요?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하다가 이집트에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사과 직원들을 용서하도록, 그리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 목사 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 지금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