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희 과장의 분노와 라면상무의 분노 [다람쥐주인님 글]
<'아름다운 분노'를 보여준 권은희 수사과장. 연합뉴스>
좋은 분노와 나쁜 분노
지난 주말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의 분노가 SNS와 온라인공간을 후끈 달궜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추악한 민낯을 고발하여 국민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진상고객의 끝을 보여주며 국민들의 혈압을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대한항공 국제선에 탑승한 모 대기업 임원 왕모 씨는 라면이 짜다는 이유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의 모서리로 승무원의 눈을 가격하는 등 난동을 부렸습니다. 결국 이 분노남은 미국 현지경찰과 FBI에 인계된 뒤 강제귀국됐고 항공사에게 고발당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사건초기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던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1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사 초기부터 경찰 고위층의 지속적인 사건 축소·은폐 정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바로 전날 경찰이 사건의 정치개입은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황당한 수사결론을 내린 것에 대한 분노어린 폭로입니다. 그녀의 용기에 야권과 시민사회,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찬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둘의 분노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얼마나 분노했는가'가 아닌 '무엇에 분노했는가'입니다. 한 사람은 승무원이 끓여온 라면의 상태에 대해 분노했고, 한 사람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두 사건은 인간의 '좋은 분노'와 '나쁜 분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분노에는 비난과 조롱이 쏟아지며, 다른 한 사람의 분노에는 찬사와 격려, 응원이 쏟아집니다. 이처럼 적절한 분노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적절한 문노는 사람을 천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분노가 갖는 유일한 공통점은 ‘예외성’입니다. 라면이 짜다는 이유로 FBI를 출동시킨 왕모 씨의 분노는 일반적인 정서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권은희 과장의 분노 역시 그것만큼이나 예외적입니다. 이 초대형 사건에 매달렸을 수십명의 경찰관들은 권력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순응했고 결과적으로 권 과장의 용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 되었습니다. 라면상무의 예외성은 본인의 미숙한 인격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권은희 과장의 예외성은 다수의 동료경찰관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정치하려고?"
용기있는 의인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질문입니다. 변희재라는 트위터리안은 어제 자신의 트위터에 권 과장의 폭로가 정계진출을 노린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습니다.
이 불쾌한 트윗에 언급된 백혜련 변호사는 지난 2011년 대구지검 검사로 근무하던 중 이명박 정권치하의 정치검찰화에 일침을 가하고 사표를 제출한 인물입니다. 수사기관의 양심적 내부고발자라는 점에서 권은희 과장의 선배격인 셈입니다. 불의에 정면으로 항거한 '의인'들의 용기에 고작 "정치하려고?"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 트위터리안의 천박함에 실소가 나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혐오를 보이면서, 동시에 반대로 가장 정치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1920년을 살았다면 유관순 열사에게도, 1970년을 살았다면 전태일 열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가 우려하는 대로 이런 분들이 하루 빨리 정계에 입문하길 기대합니다. 백혜련 변호사나 권은희 과장과 같은 용기와 정의감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정계에 진출한다면 우리 정치는 한층 정의로워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용기가 실종된 우리정치에는 이런 인물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스턴트 분노'의 시대
시민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분노와 마주합니다. 학교, 직장에서 받는 부당한 차별에 분노하기도 하고 무례한 손님에게 분노하기도 하며, 연예인의 말실수에 분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상의 분노를 통제하기에도 벅찬 시민들에게 공적인 이슈에 대해 충분한 분노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갖는 분노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것 같습니다. 한쪽에서 분노하면 다른 한쪽의 분노는 금새 사그러져 갑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분노의 사이클은 음악프로그램 1위보다도 짧습니다. 가요계의 '대세'는 최소 1~2주를 유지하지만, 다이나믹한 대한민국의 뉴스는 하루이틀 사이에 메인 이슈가 달라집니다. 어제는 진주의료원 사태에 분노했다가 오늘은 라면상무사건에 분노하고, 내일은 또 어떤 분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극심하게 변하는 분노의 대상들은 사람들에게 분노불감증을 유발하고, 분노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케합니다
불과 5년전 수십만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미국산 쇠고기사태와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사건을 비교할때 어느 쪽이 더 엄중한 사안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백보양보해 그것들의 무게가 같다고 하더라도 제가 느끼기에 당시 시민들의 분노와 지금 시민들의 분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이것은 지난 5년간 너무나 많은 크고 작은 분노에 노출되어 분노감수성이 무뎌진 탓일수도 있고, 이젠 바꿀 수 없다는 패배감 탓일지도 모릅니다.
<국정원여직원 '잠금'현장의 권은희 과장>
무엇에 분노하는가?
이럴 때일수록 '분노에 대한 분별'은 중요합니다. 지난 주말 포스코의 홈페이지는 네티즌들의 융단폭격을 맞아 기능불능상태에 빠졌습니다. 국정원 홈페이지는 여전히 '건강'합니다. 라면상무에 대한 저의 분노가 1이라면 진주의료원사태에 대한 분노는 100쯤되고, 국정원사건에 대한 분노는 그보다 100배쯤 더 큽니다. 제가 만약 라면상무에게 '격노'했다면 국정원사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
라면상무의 만행이 천인공노할 행동이긴 하지만, 몰지각한 인물을 개인의 차원에서 규탄하는 것과 이 나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국정원사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4.19와 6.29도, 워터게이트나 오렌지혁명도 모두 공적인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적절한' 분노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약 당시의 시민들이 권력의 부정보다 자극적인 이슈나 가십거리에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사회정의는 시민들의 공적인 분노에 의해 구현됩니다.
이런 점에서 권은희 과장의 폭로는 충격적인 내용만큼이나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시민들은 권 과장에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찬사들은 숙연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눈앞의 불이익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용기있게 불의와 마주한 그녀의 패기는 시민들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지금이 무엇에 분노해야 할 때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권은희 과장의 폭로 이후 야당과 시민사회, 시민들은 그녀를 반드시 지키겠다 약속하고 있지만, 국가의 막강한 물리력 앞에서 정말로 그녀를 지켜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듭니다. 권 과장의 운명은 아마도 국정원사건의 진상규명과 같이 할 것입니다.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히 밝혀진다면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의 운명역시 이 나라의 민주주의만큼이나 가혹해 질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