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 권13 고려기(東國通鑑 卷13 高麗紀)
태조
태조 26년
고려 태조 26년 태조가 후인에게 전하는 훈요(訓要) 10조
1. 우리나라를 일으킨 대업(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이 보호하는 가피력에 힘입은 것이다. 선(禪)·교(敎)의 사원(寺院)을 새로 세워 주지(住持)를 뽑아 보내어 도를 닦아 각각 본업에 종사케 하였다. 후세에 간사한 신하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중들의 청탁에 따라서 각자 맡은 사사(寺社)를 다투어 서로 바꾸고 빼앗을 것이니, 일체 이를 금하게 하라.
이건 왕건의 선견위대함이 느껴지는 대목임 십알단 세끼들 다쳐죽일 놈들임
2. 여러 사원(寺院)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개창(開創)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외에 함부로 창건(創建)하는 일이 있게 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서 왕업이 영원하지 못하리라.’하였다. 짐(朕)이 생각건대, 뒷세상의 국왕(國王)·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칭하면서 더 창건하게 된다면 크게 근심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신라 말기(末期)에 사탑(寺塔)을 다투어 만들어 지덕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경계하지 않겠는가?
3. 적자(嫡子)·적손(嫡孫)에게 나라와 가문을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라 하지만, 그러나 단주(丹朱)가 불초(不肖)하여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선위(禪位)하였음은 실로 공정한 마음이라 할 것이다. 무릇 원자(元子)가 불초하면 그 차자(次子)에게 전해주고, 차자가 모두 불초하면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이 추대하는 자에게 전해주어서 대통(大統)을 잇게 하라.
4. 오직 우리 동방은 예부터 당(唐)나라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을 모두 그들 제도에 따랐으나, 지방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이 같지 않으므로 구태여 꼭 동일하게 할 것까지는 없다.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 제도(衣冠制度)를 절대로 본받지 말도록 하라.
5. 짐(朕)은 삼한(三韓)의 산천이 가만히 도움을 힘입어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중년(四仲年,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순행하여 백일(百日)이 지나도록 머물러 (국가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6.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神靈)과 오악(五嶽)의 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교한 신하들이 가감(加減)할 것을 건의(建議)하면 일체 금지해야 할 것이다. 나도 또한 당초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회일(會日)에 국기(國忌)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였으니, 마땅히 이를 존중하여 시행토록 하라.
7.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간함을 따르고 참소하는 것을 멀리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간함을 따르면 성군이 되어지고, 참소하는 말은 꿀과 같으나 (이를) 믿지 않으면 참소가 저절로 그쳐질 것이다. 또 때에 맞추어 백성을 부리되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은 일의 어려움을 알아주면 저절로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어 나라가 부하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향기로운 미끼에 반드시 고기를 낚음이 있고, 중한 상을 주어야 훌륭한 장수가 있게 되며, 활시위를 당기는 앞에는 새가 피하게 마련이고, 인덕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賞罰)이 치우치지 않으면 음양(陰陽)이 순조로울 것이다.
8. 차현(車峴) 이남으로서 공주강(公州江)의 바깥은 산세와 지형이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어 인심(人心) 또한 그러하다. 그곳 아래의 주(州)·군(郡)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나 국척(國戚)과 더불어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統合)한 원한을 품고서 어가(御駕)에 범하여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또 일찍이 관사(官寺)의 노비(奴婢)나 진(津)·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더라도, 혹은 권세에 의탁해 신분을 바꿔 요역을 면하고, 혹은 왕후나 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로 권세를 희롱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아무리 양민(良民)이라도 관직에 있게 하여 일을 꾸미게 하지 말라.
9. 모든 제후(諸侯)와 여러 관료의 녹은 나라의 크고 작음에 견주어 이미 정제(定制)를 삼았으니,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다. 또 고전(古典)에 이르기를, ‘공적(功績)으로써 녹을 정하고 관작을 사사로이 하지 않는다.’하였다.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이나 친척 또는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으로 헛되이 천록(天祿)을 받게 되면 하민(下民)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도 또한 영원히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할 것이니, 일체 이를 경계할 것이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하여도 위태함을 잊을 수가 없다. 병졸(兵卒)들은 마땅히 보호하여 구휼하고 요역을 상량하여 면제할 것이며, 매년 가을에 무예를 검열하여 무리에 뛰어난 자는 적합하게 올려서 제수하도록 하라.
10. 국가를 유지하려면 근심이 없을 때를 경계해야 할 것이니, 경서와 사기를 널리 보아서 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라.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은 《서경(書經)》의 무일(無逸) 1편(篇)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 두고 드나들며 살펴보도록 하라.
10훈(訓)의 끝에는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로 마감하였는데, 이로부터 왕위를 이어받는 이는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1. 우리나라는 부처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으로 사원을 짓고 승려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여라.
2. 도선이 선정한 곳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 것을 경계하여라.
3. 적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이 상례이지만 맏아들이 착하지 못할 경우에는 신망이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도록 하여라.
4. 당나라의 풍습에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고 거란의 풍습은 아예 본받지 말아라.
5. 서경(西京)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국왕은 100일 이상 서경에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라.
6. 연등회와 팔관회를 지금과 같이 시행하여라.
7. 간언(諫言 :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충고)을 따르고 참소(讒訴 : 남을 헐뜯어서 잘못이나 죄를 있는 듯이 꾸며 고해 바치는 일)를 멀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인민의 신망을 얻도록 노력하여라.
8. 차현 이남 공주강 외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아라.
9. 신료들의 녹봉은 현재의 것을 증감하지 말고, 평화 시에도 군대를 양성하는 데 힘써라.
10. 경사를 널리 읽어서 옛날을 거울삼아 현재를 경계하여라.
‘훈요 10조’의 8조는 조작되었거나, 곡해되었을 수 있어…
왕건의 정책 중에서 실책으로 여겨지는 일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훈요 10조’의 제8조에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바깥은 배역(背逆)할 지세이니 이곳 사람을 기용하지 마라.”라고 한 점이다. 차현을 차령산맥으로, 공주강을 금강으로 본다면 오늘날 전라도의 거의 전 지역이 소위 배역의 땅에 포함된다. 오늘날까지 문제가 많은 지역감정의 원조격이 아닌가?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생을 한반도의 화해와 통합에 힘쓴 왕건이 이런 유훈을 남겼다고? 그래서 ‘훈요 10조’는, 적어도 이 8조는 왕건이 쓴 것이 아니고 조작되었다는 설도 나왔다. 실제로 왕건의 신하 중에도 전라도 출신이 적지 않았고(‘훈요 10조’를 태조에게 전해받았다는 박술희도 전라도 출신이었다.), 이후에도 고려왕조에서 전라도 출신이 차별받은 흔적이 별로 없음을 볼 때 ‘조작설’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이는 조작이라기보다 잘못된 해석에 따른 오해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충청남도에 있었던 고개 이름이고, 공주강은 금강이 아니라 공주 어귀를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왕건이 특정 지역을 차별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은 사실이나, 그 대상은 전라도가 아니라 충청남도의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좁은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지역 일대의 호족들이 왕건 즉위 후 반발하여 후백제에 투항했을 뿐 아니라 이흔암?환선길?진선 등도 모두 이 지역과 그 주변 출신의 인물들로 반역을 꾀했으므로, 왕건으로서는 “반역의 고장”으로 볼만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한동안 이 지역 인물들은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좁은 지역일망정 포용하기보다 배격하는 유훈을 남긴 점은 그리 칭찬할 수 없지만, 겨우 이룩한 왕업이 혹시라도 반역으로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했던 늙은 왕이 후손들에게 남긴 노파심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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