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 실종사건, 범인이 누구일까? [다람쥐주인님 글]
아직 장마도 끝나지 않았는데 정치권에서는 납량특집이 시작됐다. 어제 여야 열람위원들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열람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을 방문했으나 그곳에 회의록 원본이 보관돼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가기록원에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오싹하다.
붕어빵엔 붕어가 없어도 되지만, 국가기록원에 기록이 없어서는 안된다.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다면 누군가 그것을 파기했거나 은폐했다는 뜻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로 인해 이득을 얻게 될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지난해부터 이어진 대화록 관련 논란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련의 흐름을 보면 초기 'NLL 포기발언 논란'을 제외하고는 회의록 관련 논란이 새누리당과 청와대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알 수 있다. 당초 민주당에게 불리한 듯 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 논란조차 국정원이 회의록을 무단공개하면서 사실관계가 드러나자 전세가 역전됐다. 지난달 실시된 여론조사결과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2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의 '살신성인'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이후 회의록과 관련한 전선은 엉뚱한 방향으로 확장됐다. 남재준 원장의 회의록 무단공개는 오히려 국정원의 회의록 위조 의혹을 불러왔고, 김무성, 권영세 등 새누리당 인사들의 회의록 사전인지 의혹과 서상기-정문헌 의원의 의원직 사퇴번복 논란 등이 연이어 터져나오면서 의혹의 화살은 새누리당을 향해 되돌아왔다. 결국 유일하게 새누리당에게 유리한 이슈였던 NLL 포기발언 논란이 '헛발질'로 정리된 반면, 국정원과 새누리당 의원들이 받고 있는 의혹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갈수록 쟁점이 확대되고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자 정치권에서는 이참에 회의록 원본을 공개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의혹제기의 완급조절에 실패한 새누리당은 공개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고, 민주당 역시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져버렸다. 그렇게해서 여야는 지난달 정상회담 회의록 부분공개에 찬성했고, 이를 위해 어제 열람위원들이 국가기록원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국가기록원에는 회의록이 없었다. 여야는 이미 증발해버린 회의록을 두고 8개월을 넘게 입씨름을 벌여온 것이다.
어렵지 않은 퍼즐맞추기
회의록을 먼저 언급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 했던 쪽은 언제나 새누리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의록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원문이 공개될 경우 새누리당 측은 여러모로 난감해진다. 이것이 공개될 경우 국정원이 공개한 회의록 사본의 위조여부와 함께 서상기-정문헌 의원의 사퇴 논란 역시 다시 불붙을게 뻔하다. 여기에 지난 대선 당시 김무성 의원의 회의록 관련 발언과의 대조가 이루어질 경우 정상회담 회의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 김무성 의원 뿐 아니라 권영세 주중대사, 정문헌-서상기 의원 등 복수의 입을 통해 대선 이전에 회의록이 유출됐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민주당이 회의록 공개로 딱히 잃을게 없는 반면, 이중 하나라도 사실로 밝혀진다면 박근혜 정부는 치명상을 입는다. 새누리당과 청와대 입장에서 볼 때 회의록 공개는 아무리 따져봐도 득보다 실이 많다.
새누리당이 이런 불리함을 안고서 회의록 원본 공개에 찬성한 것은 회의록 공개 자체가 목적이 아닌, 발등에 떨어진 국정원정국을 회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물타기전략이 더 큰 파국을 몰고올지도 모르겠다.
<'기록'없는 국가기록원>
참여정부는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회의록 2부를 만들어 청와대와 국정원에 1부씩을 각각 넘겼다. 이 중 청와대가 갖고 있던 회의록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국가기록원에 이관됐다. 최근 'NLL 논란'이 벌어진 가운데 2007년 10월에 청와대가 국정원에 넘긴 회의록은 파기되고 대신 국정원이 2008년 1월에 만든 회의록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남재준 국정원장에 의해 공개된 회의록이 바로 그 사본이다. 그런데, 지난달 공개된 회의록 사본은 방북에 참여했던 참여정부인사들에 의해 위조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회의록 곳곳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자세외교'를 강조하기 위해 문구가 조작된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의혹은 문재인 의원과 민주당측이 적극적으로 회의록 공개를 요구했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들을 대조해야 원본이 사라졌다. 원본이 없다면 국정원의 회의록 위조여부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다. 또, 회의록 유출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던 김무성-권영세-정문헌-서상기 등의 회의록 발언과의 대조도 불가능해진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청와대가 받고 있는 의혹을 증명할 유일한 증거가 사라진 것이다. 여기서 누굴 의심하는게 합리적일까?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기밀에 접근이 가능한 사람은 이전 정권과 현 정권을 통틀어 몇이 되지 않는다. 이 퍼즐맞추기 게임이 그리 어려운 게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가기록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회의록 실종만큼이나 의아한 것이 국가기록원의 태도다. 어제 국가기록원 측은 자신들도 대화록의 존재여부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설사 회의록을 발견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기록물을 보관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록원이라면 "애초에 받지 않았다”거나 "받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상식적인 태도다. 그런데 기록원측은 “우리가 갖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국가기록원이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한가지는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기 싫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저런 식의 무책임한 '백치작전'을 정치적 중립으로 바라볼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한가지 해석은 저들이 회의록 원본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거나, 회의록 실종에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다. 저들의 비정상적인 태도를 볼 때 이 역시 합리적인 의심이다. 국가기록원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회의록 찾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회의록 실종이 확인된 이상 여야의 공방은 상대에게 회의록 실종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에게 "너희가 넘기지 않았다", "너희가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판이다.
어제 노무현 재단 김경수 봉하사업본부장은 "참여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던 문서는 당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이지원(e-知園)' 시스템과 함께 100%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넘어갔다. 국정원에도 남긴 기록을 대통령기록관에 넘기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차분히 짚어보자. 회의록을 넘긴 쪽은 "확실히 넘겼다"고 주장하고, 그걸 받은 쪽은 “내가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누굴 의심하는게 순리일까?
금도를 한참 넘은 행위
2007년 정상회담의 기록을 담은 회의록이 국가정보원과 국기기록원에 각각 한부씩 넘겨졌다. 6년 뒤 한쪽은 대화록을 무단공개해 외교적 망신을 자초했고, 다른 한 쪽은 대화록의 존재를 모른다며 갑자기 맹구가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국가기밀을 취급하는 양대 기관이 권력에 부역하거나 눈치를 보고 있다. 이쯤되면 현 정권 아래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국가기관은 단 한곳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석달 전 NLL 논란이 재점화됐을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국정원사건을 물타기하려는 새누리당의 전략쯤으로 바라봤고,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여겨왔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쯤되면 대화록 유출?실종 사건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에 버금가는 국기문란사건이다. 아무리 도덕을 배우지 못한 정치세력일지라도 정상회담 대화록에까지 손을 댄다는 것은 금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은 행위다.
가장 큰 공포는 '예측불가능함'에서 온다. 저런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는 자들은 둘 중 하나의 부류일 것이다. 겁날 것이 없는 자들이거나, 잔뜩 겁에 질려있는 자들이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들이란 점에서 어느 쪽이든 다르지 않다. 공포스럽다. 누가 회의록에 손을 댔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저런 위험천만한 자들이 권력 중심부에 머물고 있는 이상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