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는 촛불 없고 국민들은 어이 없네" [오주르디님 편집글]
지난 주말(10일) 서울광장에 5만여개의 촛불이 모였다. 전국적으로는 10만개의 촛불이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국정원 불법선거에 대해 박근혜 정부와 여권의 책임을 추궁했다. 국정원 시국회의 촛불문화제 첫 순서를 연 가수 이지상씨의 노랫말이 인상적이었다.
“언론에는 촛불이 없네, 국민들은 어이가 없네”
“국정원에는 비밀이 없고 기록원에는 기록이 없네. 새누리는 양심이 없고 나뭇잎 같은 민주당은 용기가 없네. 대통령은 대답이 없고 언론에는 촛불이 없네. 다 아는 국민들은 어이가 없네.”
서울광장 건너편 대한문 앞에도 촛불을 든 시민들이 모였다. 경찰이 버스로 차벽을 만들어 서울광장 진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프라자 호텔에서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길도 경찰에 의해 차단됐지만 시민들은 떠나지 않고 광장 주변 곳곳에서 촛불을 들었다.
언론들은 10만개의 촛불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이토록 많은 시민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언론으로서는 대단한 기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은 “쫄지 말라” 전병헌 발언 위안 삼아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촛불집회를 축소·왜곡해 보도했다. 보수언론들은 촛불이 외치는 함성을 외면한 채 촛불의 의미를 물타기하는 기사만 쏟아냈다.
조선일보는 10만 촛불이 지난 대선 선거결과와 박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간 촛불집회를 외면해온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세 꼭지의 기사를 할애했지만 촛불의 의미를 축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한 말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전병헌 與·靑 선거결과 바꾸자는 것 아니니 쫄지말라’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촛불집회의 목적이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 대표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됐나 보다.
‘시민 촛불’과 민주당의 ‘장외투쟁’ 오버랩시키며 '물타기'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촛불집회 단상에 올라 “민주당의, 국민의, 민심의 요구는 단호하고 명쾌하다”며 “선거결과를 바꾸자고 하는 것은 아니니 쫄지 말라”라고 말해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또 촛불집회가 12.19 부정선거를 겨냥한 게 아니라 여당에게 불만이 많은 야당의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느라 애를 썼다. 조선일보는 ‘김한길 강경파에 떠밀려 광장에 나온 것은 맞다 그런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민주당이 당내 강경파의 성화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촛불을 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촛불을 왜곡시키려 안달이었다. 여야 단독 영수회담 제안이 거부당한 것과 최근 정부 세제개편안에 대한 불만 때문에 야당이 시민과 함께 촛불을 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핵심은 피하면서 언저리만 제 입맛에 맞게 각색해 보도한 것이다.
"주말 촛불은 민주당의 총동원령에 의한 것”... 왜곡 투성이
동아일보는 촛불의 의미를 ‘어설픈 야당의 장외투쟁’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려는 억지를 부렸다. 촛불이 민주당의 전략의 일환에 불구하다는 주장도 했다. 민주당이 “NLL 포기 의혹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함께 다룬 새누리당의 전략에 깊숙이 말려들어가며 전략부재를 노출시켰다”고 강조한 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장외투쟁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민주당 내에서도 ‘고육지책이지만 타이밍이 늦었다’는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다”는 말로 민주당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촛불의 의미를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KBS도 촛불집회를 뉴스로 다뤘지만 촛불을 든 시민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야당의 명분 없는 정치투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서울광장을 밝힌 5만 촛불이 민주당의 ‘총동원령’에 의한 것인 양 호도하기도 했다.
촛불집회를 보도했지만 ‘촛불’은 없었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세금폭탄을 저지하는데 앞장 설 것”이라는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말을 토막으로 인용한 뒤 촛불집회와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동일시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구태정치의 산물이자 민생을 외면하는 공치공세”에 불과하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을 내보내며 이 문장의 주어가 민주당 장외투쟁이 아니라 촛불집회인 양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촛불을 민주당 장외투쟁의 ‘소품’ 취급한 MBC
MBC도 본질을 흐리는 보도를 했다. 10만 촛불집회의 함성이 여야 대치정국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도록 애썼다. 촛불을 민주당 장외투쟁에 동원된 소품처럼 취급했다.
“민주당이 명분 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을 부각시키며 촛불의 명분을 호도하려 했다. “여당의 거듭된 양보로 국정원 국정조사도 정상화됐고 결산국회 등 현안도 산적해 있다”며 “(민주당이) 구태정치의 산물인 장외투쟁을 접고 국회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멘트를 촛불집회와 오버랩시켰다.
TV조선은 작심하고 촛불의 의미를 비꼬았다. ‘세금 폭탄 뇌관 잡은 민주당...10만 집회 총동원령’이라는 기사는 제목부터 황당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주장하는 내용이 국정원에서 ‘증세’로 공격대상을 옮겼다”고 강조하면서 “폭염과 호우에 ‘국정원 촛불’만으로 장외집회를 이어가기에는 부담스러웠던 민주당에게 ‘증세 논란’은 호재”라고 덧붙였다.
세제개편 반발과 촛불을 한 꾸러미로 엮은 종편
촛불을 든 시민의 주장을 ‘증세논란’과 ‘장외투쟁’으로 물타기한 것이다. 엉뚱한 말도 했다. “새누리당이 더 이상 ‘불길’이 번지지 않게 샐러리맨들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새제개편안을 수정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들이 민주당과 함께 촛불을 든 이유가 정부의 세제개편에 대한 반발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편집한 것이다.
JTBC의 논조도 TV조선과 다를 게 없었다. 촛불집회와 연관해 4꼭지의 보도를 내보냈지만 ‘세금폭탄 뇌관 잡은 민주당’ ‘세법 불똥 촛불로 튈라...장외투쟁 중단해야’ 등의 기사에서 민주당과 세제개편안에 방점을 찍으며 촛불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했다.
채널A는 서울광장의 5만 촛불 시민을 우롱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촛불집회에 앞서 열렸던 민주당의 2차 국민보고대회와 야당 대표의 주장 등을 짧게 보도한 뒤 청와대의 영수회담 거부와 정부의 세금 폭탄 등에 항의하기 위해 민주당이 10만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 보수단체가 서울광장 주변에서 촛불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보수단체들도 맞불집회를 하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강조해 서울광장이 촛불과 촛불반대의 각축장으로 보이도록 호도했다.
촛불 더 커지고 더 밝아져야 한다
촛불의 의미와 촛불을 든 시민의 주장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 매체는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 언론들은 민주당 장외투쟁, 세금폭탄, 여야의 정쟁, 청와대 영수회담 거부 등을 촛불에 덧씌워 촛불의 본질을 흐리는데 지면과 시간을 할애했다.
언론이 어쩌나 이 지경이 된 걸까. 권력에 의해 보도통제가 되던 과거 그 시절과 별반 다를게 없다. 많고 많은 신문과 방송 중에서 촛불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사는 10곳 중 한 곳 정도에 불과하다.
촛불이 더 커지고 더 밝아져야 한다. 그래서 권력의 어둠뿐 아니라 언론의 먹구름까지 죄다 거둬내야 한다.
촛불이 거대한 물결을 이뤄야 한다. 그러면 잘못된 언론들도 시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