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제외하고 제일존경하는사람!!

나샷nasa 작성일 14.01.10 18: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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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해외에 나가 있던 박태준을 급히 부른 박정희는 말했다

"자네 제철소를 하나 만들어 봐라"

"예?"

박태준은 막막했지만 각하의 명령이기에 한번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포항제철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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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은 1927년 경남 양산(현 부산 기장)에서 태어났다. 조센징이라 멸시받는 조국의 현실과 가난 속에서 해방이 찾아왔다

그는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재학하는데 이때 사관학교 교관이던 박정희 소령과 처음 만난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박태준은 육군 소위로 임관, 6.25전쟁에 참전한다

 

1960년 육군본부 인사과장으로 복무중이던 박태준 대령 앞에 박정희가 다시 나타났다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자네가 나를 참모장으로서 보좌해 달라"

박태준은 두말없이 박정희를 따라 나섰고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그는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태준은 민간 기업을 맡아 탁월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고 박정희는 더더욱 박태준을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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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협약을 맺는다.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매국협상이라며 정부를 비난했다

일본으로부터 대일청구권자금을 얻어낸 박정희는 이를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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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를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철강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술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아는게 전혀 없었다

39명의 조촐한 인원으로 포항제철 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장은 박태준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연생산량 2천만톤의 제철소였다(현재 포스코의 연간생산량은 3천만톤급).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욕을 먹어 가며 일본에게서 받아온 돈을 죄다 쏟아부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박태준은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로 일하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기술을 알려주기를 꺼리는 해외 제철소들을 쫓아다니며 굴욕과 수모를 겪으며 기술을 익혔다

일본 제철소 회장이 마침내 박태준을 인정하고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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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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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9일 오전 5시 30분. 뜨거운 용광로에서 굉음을 내며 마침내 벌건 쇳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연생산량 103만톤의 포항제철소 1기였다. 박태준과 모여든 직원들은 눈물 속에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제 우리 손으로도 자동차, 배, 가전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후 포항제철소 4기와 광양제철소 1기를 세우며 1992년 마침내

연간 생산량 2천만톤이 되는 순간까지의 초석을 빚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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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왕 카네기는 35년에 걸쳐 1천만 톤의 제철소를 만들었다. 박태준은 25년만에 밑바닥에서 연간 2100만톤급의 제철소를 이룩했다

1978년 일본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 였다

박태준은 1987년 철강의 노벨상으로 일컫어지는 베세머 금상을 받았고 1992년 세계적 철강상은 윌리코프 상을 수여받는다

그외 그가 받은 상으로는 충무무공장, 화랑무공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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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박태준은 포항제철 임직원들과 박정희의 영전을 찾는다

영전 앞에서 박태준은 붓글씨로 보고서를 작성한 뒤 읽어내기리 시작한다. 마침내 연간 2100만톤의 제철소를 이룩했음을 알리는 '보고'였다

국회의원과 포철 명예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1993년 문민정부가 시작되자 명예회장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997년 포항시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며 다시 정계로 돌아온 그는 자민련 총재등을 지내며 김대중 정부 초창기 시절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4개월간 짧은 총리직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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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3일. 급성 폐손상 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향년 85세였다

유언은 '박정희 각하 곁에 묻어달라'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이름으로는 집 한 채나 주식 단 한 주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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