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현대조선)

이밥에고깃국 작성일 14.05.25 02: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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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나의 마지막 꿈은 바다 밑에 공원묘지 만드는 것”

“김정일은 기분 좋게 해주고 뭘 달라는데, 여기서는 시원찮은 것들(국회의원)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4주기가 지났다. 나는 정 명예회장을 2001년 작고할 때까지 10여 차례나 만났다. 방송작품 집필 때문에 회고가 필요하다면 그는 최대한 시간을 내줬다. 이렇게 해서 총 10시간 분량의 테이프가 현재 남아 있다. 이를 요약해 정리해 본다.

정 명예회장은 1998년 북한을 다녀온 뒤 인터뷰를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화를 공개하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웃겼다. 정 명예회장의 성음(聲音)은 상당히 독특하다. 목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에도 흉내 내기가 고생스러울 정도로 특이한 리듬이 있다. 대화를 스스로 풀어주는 부사인 ‘일테면’은 특허처럼 들어간다. 아마 ‘거… 저… 일테면…’하면서 더듬거릴 때면 정 명예회장은 뭔가를 번개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김 위원장이) 나보고 정주영 ‘회장선생님’이라고 하면서 회장 밑에 선생님이라는 쟁반 하나 더 받쳐서 불러줬거든. 기념사진 찍을 때도 연장자라고 내가 가운데 서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놓고는 나한테 발전소를 지어주고, 중유 좀 달래, 하하항. 그래도 뭐 여기서는 ‘5공 청문회’할 때 시원찮은 것들(국회의원들을 지칭)이 막 그냥 증인 어쩌고 하면서 손가락질까지 하며 대들고 그랬는데.

북한에선 나를 기분 좋게 해줘 놓고 발전소를 지어달라 하고 기름을 좀 달래니까 밉지는 않잖아! 그러고는 나한테 ‘회장선생님은 어째 그리 정력적이시냐고’하며 아주 부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그랬지. 나는 손만 잡아도 아기가 생길 정도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백두산 정기가 몽땅 회장선생님한테 다 갔구먼 기래요!’ 이러는 거야 하하항. 자기(김 위원장)는 시원찮대 요즘. 하하항.”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도중에 유언과도 같은 말을 종종 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절대 화장을 못 하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 자신이 평생 하지 않았던 사업과 앞으로 국가를 위해 꼭 해야 될 사업 등을 말했다. 자신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면서 평생 주례를 서지 않은 이유도 말했다.

이런 말들은 이제 모두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평생토록 하지 않았던 사업이 세 가지 있다고 밝혔다.

첫째, 목축업이었다. 현대그룹 내부에서도 한때 목축업을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목축업 사업계획서를 받아보고는 휙 던져 버렸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생리적으로 살생을 거부한다고 했다.

소를 키우다가 팔게 되면 도살장으로 보내는 셈이 되니까 결국 살생을 하는 사업이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에겐 서산목장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사업적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는 소를 길러 식용으로 판 적이 결코 없다고 강조했다.

둘째, 농민에게 고통을 주거나 걱정을 끼치는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비료공장이었다. 그래서 현대그룹은 비료공장을 갖지 않았다. 그는 “건국 후 지금까지 오르기만 했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던 비료 값을 생각하면서 비료공장 건설 추진 자체를 막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솔직하게 “비료공장을 짓고도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경쟁하기 위해) 손해를 보더라도 원가에 비료를 공급하게 될 테니 기존 사업자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내가 그 사업을 하면 결국 도산하는 업체가 나올 것이 뻔해 비료공장 생각을 접었다”고 했다.

정 명예회장은 가족사를 얘기할 때 항상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부친에 대해서는 ‘일등 농사꾼’으로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부친을 자랑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한번은 인터뷰 중 서산농장 이야기를 했다.

“서산농장이 완전하게 조성되면 조그맣게 아버지 동상을 세우려고 해요. 일등 농사꾼이셨던 아버지에게 헌납식을 하려고 그래요. 평생 농사만 지으셨죠. 그 많은 논과 밭을 일구시면서 한 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농사를 지어 동생들과 자식들을 다 키우셨지요. 그래서 서산농장을 하늘에서도 풍족하게 바라보시면서 지내시라고 아버지께 헌납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마지막 셋째는 장의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그는 특별히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우리는 안 만들어요”라고 했다.

특히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때마다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해야겠다며 마지막까지 집념을 보였던 사업이 있었다. 바로 거대한 ‘해저(海底) 가족공원묘지’ 건설이었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해금강에 해저 공원묘지를 건설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즉흥적으로 구상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해저 시설을 살피고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많은 자문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유훈이 됐다. 다음은 정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회장님은 사후에 화장(火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철학에서 나온 생각이십니까?

“회장 다음은 화장인가? 하하항…. 물론 나는 화장을 원하지 않지요. 일테면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으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화장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없애는 거다 해서 난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화장해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땅에 묻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살과 뼈는 전부 흙이 되어버리니까 말이지요.”(그렇다면 해저 가족공원묘지 건설 구상과는 다르지 않으냐고 했더니 ‘사람에 따라 화장을 원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는 말로 일축했다.)

며느리를 볼 때 특별한 합격 기준이 있었나요.

“그런 것 없어요. 나는 회사 일이든 뭐든 치밀하게 관여하는데, 아들들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혼이거든요. 따라서 부모가 선정해 줘서 피차 의견이 잘 안 맞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부모의 책임이 너무 크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부가 만나는 것은 운명이니까 너희 운명은 너희가 정하는 게 좋다.’ 나는 자식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해 왔습니다.

나는 ‘인생의 세 가지는 운명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 이건 본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집안, 어떤 가정을 마음대로 선택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다는 거지요. 어린애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운명으로 되는 거다 그거지요.

둘째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 나라 그 사회에 수많은 결혼 적령기 남녀가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딱 하나를 골라 결혼하게 되는지, 그게 다 만남의 운명이지요. 특히 운명이라는 것이 시간 아닙니까? 그 시간에 그 배우자가 나타나서, 일테면 서로 좋아서 결혼하게 된다는 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겁니까?

그래서 좋은 부부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만나지는 게 아니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정해 가지고 아버지는 인생 경험이 많으니까 아버지한테 이러저러한 여자인데 제가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양해만 구해라. 그러면 내가 참고할 얘기는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전부 자기들이 찾아서 결혼했지 부모가 여자를 찾아서 결혼시킨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세 가지 중 마지막은 죽어가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죽어가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못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노력으로 죽음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겁니다. 지금 집사람(변중석 여사)이 병석에 누워 있는데 말도 없이 저렇게…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되고. 어디 구경 가고 싶으냐 해도 말이 없고…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아 화 좀 내보라 해도 그냥 표정이 없고… 자기 친구가 부탁한다고 24평짜리 현대아파트 하나만 당첨되게 해달라고 할 때 왜 화를 내고 그걸 못해줬는지…

생각하면 참으로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안하고… 내가 아무리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도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쩌다 병에 걸려 죽고, 좋지 않은 암에 걸린다거나 또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거나, 어떤 모양으로 죽든 그건 운명이니까 슬퍼하지 말자고 합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자식의 죽음을 몇 번 봤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아비의 가슴보다 더 아픈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아비도 막을 수 없는 자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고 인명은 재천이다. 모든 게 운명이니까 어떤 죽음이 선택되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소화해 왔습니다.” (여기서 정 명예회장은 잠시 눈빛을 내리고 소파의 팔걸이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마도 솟구치는 회한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들이 여자를 선택해 오면 회장님께서는 꼭 말씀을 해주신다던데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 여자의 학벌이나 가문은 보지 않아요.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더 사귀어 보라고 합니다. 피차 장단점을 깊이 알고 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후회 없도록 하기 위해 더 사귀어 보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몇 달 사귀고 나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더 사귀어 봐라’고 해서 우리 아이들은 거의 다 1년 이상이나 끌었지요. 서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다 결혼했는데, 아직 우리 집안 애들은 파경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또 부모가 신중을 기하라고 권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지요. 부모 말 잘 들어 손해 보는 자식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내 말을 안 들으면 안 도와주는 거지 뭐, 지가 무슨 수로 큰 회사 회장이 돼요. 하하항….”

깊이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여자가 바뀐 경우도 있습니까?

“있죠. 좋다고 결혼하겠다는 걸 안 된다, 잘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바뀐 경우가) 한 두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부가 되지 않은 여자는 그 여자도 불행을 막은 셈이지요.”

그 여자는 재벌가 며느리가 안 된 것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철없는 여자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몇째가 그랬습니까.

“녹음기 끄면 내가 얘기하지요 하하하. (끄겠다고 했더니 ‘우리 ○○ 회장이 알면 괴로워할 거 아니야. 며느리도 괜히 좋은 마음 안 생기고. 그래서 과거는 아무 쓸모가 없어’라고 했다. 그러곤 약속을 했다.) 인연이 안 되려니까. 나는 괜찮아 보이는데 성사가 안 된 적도 있지요. 다 운명이지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여자를 선택한 뒤 장단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더 사귀라는 것이니까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애들 엄마는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애들이 여자를 데리고 오면 손도 잡아주고 등도 토닥거려 주고 해서 내가 어떨 땐 한소리 하지요. 그렇게 하면 그 여자애가 며느리가 되는 줄 알고 혼동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만 인기 떨어지고, 하하하.”

안 된다고 하신 것은 관상적으로나 회장님께서 보시기에 마땅치 않아서였습니까.

“나는 관상 같은 거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엉덩이가 크면 좋다고 그래요, 하하하.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엉덩이가 커야 자식을 수월하게 낳을 수 있다고. 엉덩이가 작으면 듬직해 보이지 않지요. 남자가 큰일을 하는데 집안을 꾸려야 하는 여자가 가볍게 쏘다니면 안 되잖아요. 엉덩이가 가벼우면 발딱발딱 일어날 거 아니에요, 하하항. 사고 내서 신문에도 나고 대통령한테 불려가서 혼이 난 회장, 높은 양반들을 보면 다 부인들이 엉덩이가 작더래, 하하하항!”

세 가지 운명론은 새로 인생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는데. 주례를 서본 일이 있으십니까?

“결혼식 주례는 평생 한 번도 안 섰습니다. 나는 거짓말과 위선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는 30대에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도 좋다고 생각해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례를 선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평생) 주례를 한 번도 안 섰습니다. 자기가 표본이 될 만해 가지고 주례를 서야지, 과거 30대에 탈선했던 사람이 무슨 주례를 서느냐 싶어 자책감 때문에 주례를 안 섭니다. 그건 위선이고 전도양양한 젊은 사람 앞에서 주례는 안 되지요. 주례는 성직자나 아주 고결한 스승이나 그런 사람이 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중요하고 신성한 결혼식에, 더구나 많은 하객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교훈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름이 좀 있다고 해서, 아니면 직위가 좀 높다고 해서 젊은 사람 앞에 위선이나 거짓을 해선 절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회장님의 근검절약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지런하거나 근면해야 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몸에 밴 거지요. 우리 집 가난을 쫓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해 수입을 도와야 했고, 또 수입이 있다고 해서 헤프게 다 쓰면 열심히 일해 얻은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어렵고 힘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소년 시절을 지내다 보니까 근면하고 검소해야 한다는 게 생활이 됐고 내 철학처럼 된 거지요. 그래서 나도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거죠.

나는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일생을 통해 몸에 배고 자기화(自己化)되는 것은 생활의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생활 습관이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내가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근검하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그 일념으로 생활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어려운 사람은 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첫째로 근면하고 둘째로 절약하는 생활이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2>…“대통령들이 나한테 자기 집 고쳐 달라고 했어요”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신문에서 많은 걸 배워 학력에다 ‘신문대학’나왔다고 한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시간 넘는 육성 테이프는 내용이 많아 한 주 더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경제인이지만 ‘한국 정치가 썩어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며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따라서 인터뷰 중 역대 대통령에 대한 소회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대통령을 여러 명 경험해 봤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자신의 집을 고쳐야 되겠다는 말을 안 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한 분뿐이었습니다. 전부 다 집이 좁다, 오래됐다, 퇴임 후가 어쩌고 하면서 집 얘기를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물론 대통령 앞이니까 심각하게 물을 수는 없지요. 농담처럼 물어보는 거지요. ‘집이 좁다고 하시는데 식구가 늘어났습니까, 세간이 늘어났습니까?’ 그랬더니 ‘경호 문제도 있고…’ 그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지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게 뭡니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집 좁은 거 걱정하고 있어요 그래? 나라를 부강시키고 어떡하든 국민이 잘살게 하면 물러나서 집 걱정을 왜 합니까? 설령 집이 좁아 누울 자리가 못되면 나부터라도 달려가 큰 집 지어 드려요. 에이 참….”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도중 문득 박 전 대통령과의 추억이 떠오른 듯 재미있는 한마디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제일 고민했던 게 뭔지 알아요? 영식인 지만군이 외롭다는 거예요. 그건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박 전 대통령 세대에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자꾸 지만군 주위가 허전하게 보이시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청와대 무도관 준공식 때나 크고 작은 공사를 끝내고 테이프 커팅을 할 때 보면 지만군을 자주 대동하시거든? 진해 가실 때도 보면 꼭 데려가시고. 근데 하루는 코를 찡긋하시면서, 거 왜 박 전 대통령 보면 말수도 적으시고 참 순진한 면이 있으시잖아요? 어색하거나 누구 좀 도와주라고 하실 때 보면 참… 머뭇머뭇하시고 그런 어른이지요.

근데 하루는 ‘정 회장, 정 회장은 어떤 재주가 있어서 아들이 그리 많고 다복해요?’ 그러시잖아요. 지만군을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 다른 말씀을 드릴 수 있어요? 나도 각하 심정이 되는데. 잠시 있다가 그랬지. ‘각하, 새벽에 하십시오’ 하하항. ‘나는 새벽에 아들을 다 만들었습니다’ 그 얘기지, 하하항. (회장실 앞 응접실이 흔들릴 정도로 웃었다고나 할까) 허전해 하시는데 무슨 얘기를 드리겠어요. 그랬더니 그 어른이 박장대소를 하시면서도 ‘자기 피알(PR) 되게 하네. 새벽까지 일한다 그 말이구먼’ 이러시는 거예요. 박 전 대통령은 그런 분이에요. 다른 기업가한테는 모르겠어요. 누구보다 내가 제일 많이 뵈었을 텐데 나는 그 어른을 아주 존경해요. 단 한번도 뭐, 추한 말씀이 없으셨지요.”

대통령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정치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말을 대통령이 직접 (회장들한테) 합니까?

“그런 소리를 나한테 하지 않은 대통령도 박 전 대통령밖에 없어요. (다들) 직접 하지요. 근데 그런 소리 하기 전에 꼭 묻는 말이 있단 말이야. ‘기업이 참 어렵지요?’ 이래 놓고는 돈 달라니 말이지, 하하하. 그리고 제일 난감한 게 있어요. 방위성금이니 새마을성금이니 평화의 댐이니 해서 청와대에 가져가면 많이 낸 회장부터 순서대로 대통령 옆자리에 앉도록 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이건 평화의 댐에 쓰라고 가지고 온 거지요?’ 이러거든. 아주 난감하지요. ‘성금만 가져왔느냐’ 이런 소리거든. 나 참…. ‘기업이 참 어렵지요?’하는 소리나 하지 말든가 말이지, 하하하.”

회장님을 일컬어 대한민국 제1의 재벌이라고 하는데. 회장님댁은 왜 해변의 여인숙처럼 허름한 겁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그래도 내가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습니다. 사는 집이 불편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지나치게 화려할 이유가 없지요. 우리 집을 봤으니까 알겠지만 마당이 좀 넓고 잔디를 잘 가꾸어 놓은 것은 우리 식솔들이 그거 안 하면 밥 먹을 이유가 없어서 자기들이 그렇게 가꾸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날 큰 사업을 해서 다소 부유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누리고 싶은 대로 호화 생활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내가 한국 제1의 재산가다, 신문들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현대가 제1 재산가지 정주영이가 제1 재산가는 아닙니다. 그래서 식구들까지 분수없이 살게 되면 사회가 사치해지고 마지막에는 국가를 멸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집안 애들 교육을 위해서도 나는 항상 부족한 듯 모자라게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애들이 부족한 걸 모르고 성장하면 절대 창의력이 없고 미래가 없는 법이에요. 나는 정치 지도자들도 절약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정치 지도자들이 권위의식을 가지고 화려하게 사는 것이 마치 권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국민은 다 압니다. 국민이 웃지요.”

머리는 어렸을 때부터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나쁘면 기업을 어떻게 해요, 하하하. 사실 나는 송전보통학교 다닐 때 실컷 놀았어요. 비록 1등은 못했지만 쭉 2등을 했어요. 1등은 왜 못했는가 하면, 그때 습자라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붓글씨죠. 붓글씨는 글자를 천천히 힘을 넣어 써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글씨를 못 써요. 그때 1등을 했던 애는 글씨도 잘 쓰고 창가도 잘했어요. 옛날에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해야지 순사 시험이나 형무소 간수 시험을 치르는데 그 애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원산형무소 간수가 된 애예요. 그 녀석이 그 후 서울에 와서 죽었지만. 그 녀석 때문에 나는 1등을 한번도 못했죠.”

어릴 적을 회고하는 정 명예회장의 입가에는 연방 웃음이 맴돌았다. 그런데 그는 송전보통학교 졸업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특히 해외에서 자신의 학력에 대해 자꾸 묻는데 그때마다 자신은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문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배우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소년 시절부터 아버님은 회장님에게 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걸 가르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그걸 내가 어려서부터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맏아들이고 또 동생이 많으니까 당신처럼 똑같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거죠. 뭐 말씀을 그렇게 하신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으니까요.

아버지는 그처럼 고생스럽게 논을 만들고 소를 팔고 하면서 재산을 모았는데, 아버지의 동생들이 살림을 낼 때는 아낌없이 그걸 나눠 주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자식들이 커 가니까 되도록 동생 분들한테는 조금만 주고 당신 아들들한테는 많이 주려고 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낌없이 주고 또 만들고, 또 주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오늘날 사업을 하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정신을 본받은 것 같아요. 내가 생산 공장으로는 맨 처음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셋째(순영)한테 아낌없이 주었지요.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회사를 만들면 동생들한테 전부 하나씩 줬습니다. 내가 그렇게 줄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정신을 본받아서 한 거죠. 만약에 그러지 않았으면 동생들을 하나씩 독립시켜 큰 사업가로 만들 수 없었죠. 물론 내 동생들도 잘하고 능력이 있으니까 번창하겠지만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았으면 내가 그렇게 못하지요. 그래서 동생들을 독립시킨 것이나 근면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결국 아버지가 주신 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큰 사업을 할 때나 큰 공사를 수주할 때는 꼭 아버지 꿈을 꿉니다. 10억 달러나 되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할 때도 누구나 전부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된다고 확신했어요. 이런 얘기 처음 하는데 그때 아버지 꿈을 꾼 거예요. 그래서 바로 밑 동생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회사가 망한다고까지 했는데도 나는 된다고 밀어붙인 거예요. 1970년대 그때 10억 달러 공사면 어마어마했지요. 그러니 실패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소리도 나올 만했지만 나는 반드시 성공해 우리 현대가 확 일어난다고 확신했어요. 그게 아버지 꿈을 꾸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아버지는 나를 지켜주시는 신이지요. 그래서 아버지 동상을 서산농장에 세우려고 하는 거예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치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꼽고 있는데, 그때 대통령이 회장님에게 특별히 당부한 내용이 있었습니까?

“전 전 대통령의 치적? 허헝. 원래 올림픽 유치는 박 전 대통령 때부터 해보려고 애썼지만 국가 형편이 안 돼서 못했고요. 그래서 박종규씨가 나서서 세계사격대회를 유치한 게 전부예요. 전통(전 전 대통령)의 당부? 당부고 뭐고 그런 건 전연 없었고요. 이규호 전 문교부 장관이… 그때는 체육부가 문교부 안에 있었죠? 이 장관이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고. 우리 정부에서는 당시 남덕우씨가 총리였는데 총리가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습니다. 나한테 분명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바덴바덴으로 떠난다고 해도 전통한테서 전화 한 통 없었고요.

‘총리가 올림픽을 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 재정이 바닥나서 나라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서울시장도 남덕우 총리 감독 하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시장도 올림픽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어렵게 출발한 거예요. 그런데 유치하려면 그곳에 선전관을 차리고 선전 영화를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서울을 알리고 표를 모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총리한테 그 돈 달라니까 돈 없다 이거지요. 이건 뭐 완전히 돌아앉은 거예요. 말은 예산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추가경정예산에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 그랬어요. 그것도 안 된대. 그러니 할 수 있어요? 그럼 내가 입체(立替·일시적으로 대신 지급함)해 줄 테니까 내년 예산에서 달라고 했죠.”

그땐 뭐라고 대답이 왔습니까.

“대답이 뭐 있어요?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수고하시오, 그것뿐이지. 그렇게 돼서 내가 일체 모든 걸 다 만든 거예요. 내 돈을 가지고. (선전관만 당시 금액으로 약 40만 달러가 든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올림픽 끝나고 나니까 도장 가지고 오래요. 돈을 주려고 하나 보다 하고 갔지요. 가니까 내가 쓴 돈을 몽땅 정부에 기부채납하라지 뭐야. 어이가 없어서 나 참… 했지요 뭐.”

정 전 명예회장이 남긴 일화는 무수히 많다. 재계뿐 아니라 정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정계에서도 돌풍을 일으키며 14대 국회 때는 30명이 넘는 의원을 당선시켰으니 오죽 많은 일화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대선 때 참여했던 윤하정 전 외무부 차관이 전하는 내용도 정 전 명예회장의 간접 증언 형태가 될 것 같다. 다음은 윤 전 차관의 녹취록이다.

윤 전 차관께서는 정 전 명예회장의 대선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영(永)자 항렬 동생들이 청운동 집에 다 모였죠. 정 전 명예회장은 동생들에게 대선 얘기라면 꺼내지도 말라고 하면서 ‘불알 두 쪽만 차고 (서울로) 내려와서 이만큼 했는데 망해도 불알 두 쪽은 남을 거 아니냐’고 단단히 각오하라는 뜻만 전했습니다.

“나는 김동조 장관(전 외무부 장관)이 부탁해서 갔지요. 김 전 장관이 정 전 명예회장 사돈 아닙니까. 자기 사위(정몽준)도 있고 하니 (정주영이)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도와 달라고 해서 갔어요. 정 전 회장이 소련도 가고 중국도 가고 했지만 외교 문제에 관해 참모가 필요한가 싶어서 만났는데, 대뜸 그럽디다.

‘내가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또 정계에 엄청나게 바쳤다. 노태우한테만 200억원을 바쳤다. 국회의원들한테는 얼마가 갔는지 기억에 담아 두지도 않았다. 근데 이 자식들이 한 일이 뭐냐. 이래 가지고는 나라가 안 된다. 나는 돈 안 먹고 깨끗한 정치를 해서 이 나라를 확 고치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 자신이 있다. 이번에 총선(14대 국회) 출마한 사람들한테 어디 가서 손 내밀지 말라고 전부 2억6000(만원)씩 줬다. 내 돈 줬다.’ 사실 그랬어요. 정 전 명예회장이 자기 돈을 썼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기업을 못할 정도로 썩어서 출마를 결심했다는 겁니다.”

후보로 내보낸 사람들에게 그렇게 줬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공천한 후보들은 무조건 2억6000만원씩 줬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그거 갖고 잘했죠. 26명이나 당선되고 전국구를 합해 30명 되지 않았어요? 세계 정치사상 그런 유례가 없었대요. 창당해서 4개월 만에 선거를 했는데 그 정도나 당선시킨 것이 말이지요.”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상당히 실망했던 모양이군요. 그렇지만 정 전 명예회장이 깨끗한 정치를 외쳤으면서도 막상 자신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2000억원이 넘는 돈을 썼다는 얘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선거자금을 손 벌려서 받은 게 아니라 자기 돈을 쓴 거니까 선거법에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한 정치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구상하는 것 하고 자기 돈 쓴 거는 이전과는 다르지요. 정 전 명예회장이 대선에서는 공천 후보들한테 준 것보다 천배 넘게, 2600억원 정도 썼다고 직접 그럽디다.”

박태준씨는 왜 정 전 명예회장 때문에 김영삼(YS) 전 대통령한테 정치보복을 더 심하게 당했다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겁니까? 정 전 명예회장과 박태준 전 회장 사이에 정치적 물밑 거래가 있었습니까?

“그 사람이 보통 말할 때는 거침이 없어요. 유식한 말은 아니지만 ‘메이크센스’, 센스가 있는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인기가 막 올라갔지. 그런데 인기가 오르니까 연설문 중에 없는 말도 막 하는데. 그중에 박태준씨를 총리 시키겠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박태준씨는 YS가 삼고초려할 정도로 공을 들이면서 자기 캠프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거절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랬는데 거절한 이유가 정치를 안 하겠다고 딱 잘랐는데 정 전 명예회장이 막 불어대니까 YS로서는 굉장한 배신감을 느꼈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정 전 명예회장이 정치에 미숙했던 거지요.”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도박도 목숨 거는 도박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차관 얻는 데 실패…박정희 대통령, “도망가지 마라”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①

우리나라 조선업은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전 국민이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산업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과욕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강력한 리더십과 개척자 정신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심에 산업 발전에 사활을 걸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이라는 걸출한 사업가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타는 의지가 울산 앞바다를 한국 경제의 전진기지로 만들었고, 지금 세계 조선업 1위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부터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기를 연재한다. 그의 불굴의 투지가 CEO들과 독자에게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 조선업계가 2006년 9월 15일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세계 최강 조선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도 변변한 기념일이 없었는데, 2004년 국내 조선업 수주가 1000만GT를 달성한 9월 15일을 기념해 ‘조선의 날’을 제정하고 제3회 기념식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의 위용이 어떤가. 세계적인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영국의 클랙슨이 발표한 세계 조선소 순위에서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이 1위에서 5위까지 독식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대표’ 산업으로 조선은 전자와 함께 굴절 없는 성장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200억 달러 수출 고지를 돌파하고 동시에 수주액도 4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한 실적을 기록했다.

“배 건조가 토끼 임신보다 빨라”

한국의 조선업이 양적인 성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조선업계를 긴장시킨 지 오래됐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조선업계가 꿈꾸어오던 무(無)도크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무도크 건조 현장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 것이 2004년 10월.

현대중공업이 러시아 노보십에서 수주한 10만5000t급 원유 운반선을 육상에서 건조해 진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도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인식을 일거에 가능한 현실로 증명해보인 것.

한국 조선업의 기술적 향상은 특수선 제작에서도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새 ‘꿈의 상선’으로 불리는 1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시대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1만TEU급(1TEU는 길이 20피트 컨테이너)이라면 통상적으로 컨테이너 박스 1만 개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이다. 갑판 면적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2배가 넘는 초대형으로 추측하면 된다.

세계 최초라는 말을 하도 여러 번 써서 이젠 싱겁다고 할 정도가 됐지만 또 한번 이 기록을 경신하는 초유의 사건을 현대중공업이 저질러버렸다. 1만2000TEU급 컨테이너선 개발을 어느새 끝냈다고 발표했다. 기술적 성장세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누구도 예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세계적인 선주들이 남긴 말이 있다.

“현대중공업 제1야드에서 제2야드를 다 돌아보기도 전에 벌써 세계 기록이 경신되는 것 같다. 배를 건조하는 게 토끼가 임신을 시키는 것보다 빠르고 번갯불로 찍어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선업계는 여기서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황무지처럼 내버려두었던 요트 건조에 뛰어든 것이다. 막강한 조선 기술에다 정보기술(IT)을 결합한 고부가 제품을 만들어 요트 분야까지 석권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얘기다.

요트는 레저·경기용 딩기(Dinghy: 6m 이하) 급과 연안·대양 항해용 크루저(Cruiser) 급으로 나뉜다. 현재 세계 요트 시장은 미국(2만여 척)과 프랑스(8000여 척)·영국(3000여 척)이 주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요트 시장이 2004년에 151억 달러(약 14조원) 정도였지만 2010년에 이르면 210억 달러로 예상된다고 했다. 이 엄청난 시장을 우리 조선업계가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한국의 조선 산업 성과는 분명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야심 찬 의기투합에서 그 질주의 시동이 걸리게 됐다고 해도 무리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이 나라 조선 산업을 부흥시킨 주역이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고 할 때 부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을까? 기자가 조선소와 관련해 정주영 회장을 만나 취재한 것은 꽤 오래 전이다. 조선 산업의 태동기부터 듣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는 86년부터 92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이다.

조선 大國 만든 두 사람

지금은 비교도 안 되는 규모지만 세계에서 7개국밖에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50만t급 조선소 건설을 우리 정부에서 계획했던 것이 1972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한국의 산업 형태를 중화학공업으로 선회하지 않으면 미래의 산업 중흥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조선소 건설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하하하.”당시 정부는 조선소가 완공되면 연간 2억5000만 달러의 외화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전망을 했고, 그 시점에 우리나라 수출 총액이 11억73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춰볼 때 엄청난 금액인데, 과연 조선 산업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겠습니다. 그 중차대한 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이 회장님에게 추진하라고 할 때는 각별히 당부한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당부고 뭐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잽힌 거지요. 못 피우는 담배까지 대통령 앞에서 뻑뻑 피워대면서 버티기도 했고 말이지요. 담배는 대통령이 피우라고 주시니까 피할 수 없어서 피웠지만. (웃음 속에서 잠시 회상하다가) 사실은 조선 산업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그 얘기하면 내용이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고 있는데, 처음에 박 대통령이 고민을 무척 하셨습니다. 1, 2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수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16년 동안이나 끌어왔던 무역 및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도 하지 않았어요? 근데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사력을 다해보았지만 GATT에 가입했어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 당시 경공업 중심의 노동집약 산업으로는 수출도 어렵고 경제 성장의 한계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돌파구는 중화학공업을 추진해야 된다, 그렇게 판단하신 거예요. 그래서 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화학공업을 가시적으로 역동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그러자면 우선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되는 게 뭐냐, 그게 조선이니까 1단계로 조선 산업을 선택한 겁니다.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해요. 조선 산업을 하게 되면 물론 초기는 단순한 조선 공업 수준이 된다 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 거거든? 거대한 조선소를 만들고 초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만 있게 된다면 일시에 기계·철강·전기·전자·해운 등 수많은 연관 산업을 급성장시킬 수 있잖아요. 그걸 내다보신 거지요. 대단한 양반이셨지요.”

박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정부로부터 조선 산업에 대한 구상이나 정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들으신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구요, 그냥 정부가 처음에는 4대 핵공장(4大 核工場)을 한다고 그랬어요. 4대 핵공장이라는 건 핵폭탄을 만드는 공장이 에이구요, 1968년에 박 대통령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 제철·종합기계·석유화학·조선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설정하고 최대한 정부가 중점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잖아요? 그게 4대 핵공장이지요. 그래가지고 조선소 얘기도 나온 건데, 첨에는 김학렬(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씨가 운을 뗐어요.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었지요.”

“도망치려다 잽힌 것”

왜 회의적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조선소가 그냥 됩니까? 사람들이 울산에 현대조선소를 보러 와서는 얼마나 어렵게 건설했는지도 모르고 본래부터 조선소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해서 그냥 웃었지만, 조선소 얘기가 나온 그때만 해도 부산에 ‘대한조선공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대충 1만여t급 배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게 창업 이래 계속 적자를 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파산하고, 파산 후에는 한진으로 넘어갔는데 생각해 보세요. 대한조선공사가 한번도 흑자를 보지 못하고 파산했을 정도니까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겠어요? 결코 쉬운 게 아니지요. 물론 조선기술자라는 것도 없었고 말이지요.”

그런 정도의 국내 여건에서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말씀입니까?“ (회고해 보니 기막힌 시작이었기 때문인지) 허허헝, 도박도 돈을 거는 도박이 에이고 명(命)을 거는 도박이에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고비가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하여간 정부의 강력한 의지도 있었지만 내가 반대를 하니까 하루는 김학렬씨가 대통령께서 찾는다는 겁니다. 그럴 땐 판단이 빨라야 해요. 아이고, 도망이다 하구선 도망갔다가 잽혔지요, 하하항. 근데 대통령의 의지가 여간 강하신 게 아니에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첨에는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워낙 눈빛부터 무서우니까 그러면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지요. 그런데 조선소를 하려면 뭣보다 차관을 얻어야 해요. 우리도 그만한 돈이 없고 정부도 돈이 없으니까. 그러니 차관을 얻으려고 이웃부터 다녔어요. 미국이 우리하고 가깝지 않습니까? 일본하고 미국을 열심히 찾아대녔습니다.”

반응이 냉담했을 것 같은데요.

“일본이나 미국이, 너희는 후진국이고 그런 배를 만들 능력이 없다, 그렇게 나와요. 한번 시작해보겠다 했는데 그렇게 나오니까 영 맥이 풀려서 발길이 안 떨어져요. 그렇지만 한두 번 거절당했다고 멈출 수 있어요? 다시 여러 사람 찾아대녔는데 결국 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다시 대통령을 만나서 여기저기 다녔던 얘기를 하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랬더니 ‘도망가지 마시오! 절대 해야 돼!’ 이러시면서 호통을 치시잖아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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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②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일제 치하였던 1929년의 ‘방어진 철공소’가 효시였다. 그 후 1937년, 대한조선공사의 전신인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1만t급 건조 능력을 갖추고 태동했다. 그러나 조선중공업은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큰 발전을 하지 못한 채 자유당 정부를 거쳐 5·16 군사정부까지 이어갔다.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1차 5개년 스케줄에도 경공업 우선정책에 밀려 조선 공업은 주요 육성산업 부문에서 제외됐다. 그러다가 67년 국내 조선을 진흥시킨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조선공업진흥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그나마도 60년대 말까지 소형 강선만 제작할 수 있었을 뿐 자금과 기술력 부족으로 대형 선박 건조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60년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70년대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정부는 제3차 5개년 계획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경제 부흥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조선 공업을 주요 육성 산업으로 지정하면서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이라는 긴 정책안을 마련하는데, 물론 기본계획의 주요 골자는 청와대 비서실이 작성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각에서 조선 공업이 부정적이라는 보고가 올라오자 대통령이 장예준 당시 건설부 장관을 불러 질책하면서 ‘이래도 안 된다는 거냐’고 보여준 것이 그 문건이었다.

“무조건 해보란 말이오!”

“국무위원이라는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지는 않고 경제 수준이 함량 미달이라는 반론에 밀려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다면 누가 이 나라 경제를 부흥시킨단 말이오! 1단계로 조선소를 만들어 초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기계·철강·전기·전자·해운 같은 연관 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조성된다는데 왜 전부 안 된다고만 하느냔 말이오! 해보란 말이오! 해보지도 않고 왜 전부 부정적이야!”

금속성 고성을 내지르면서 대통령이 던지듯이 내놓은 계획안에는 정부의 종합국토개발 계획과 임해공업단지개발 계획에 맞춰 조선소 부지를 정하되 생산 규모는 1차 20만t 2척, 15만t 2척, 도크는 20만t급을 건조할 수 있는 규모와 수리선 도크도 같은 규모로 건설한다고 돼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정 회장은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읽고 차관부터 얻기 위해 애를 써봤지만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통령이 느끼는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장께서 보기에도 조선 산업이 사양 산업이었습니까?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경제학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 했어요! 그때는요, 사양 산업이고 성장 산업이고가 어딨어요? 수출도 못하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 형편에 맞춰야지 자급자족에 겨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를 지났는데 돈만 되면 다 하는 거지 우리가 선진국이야? 강대국이에요?”

정 회장은 “찬밥 더운 밥 가려서 먹을 형편이 아니다”며 “사양 산업이라고 하는 건 선진국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거예요!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차관 때문에 나갔다가 빈손으로 오니까 그때 대통령 경제자문 교수단이라고 있었어요. 그이들이 김학렬 부총리하고 얘기하다가 ‘것 보라고, 사양 사업이라서 돈 꾸어 줄 나라가 없을 거라고 하지 않더냐고.’ 이러잖아요. 지들이 돈 꾸러 나가봤어? 바깥에서 사양이라든 말든 왜 그걸 우리 형편에 견주느냔 말이에요. 비록 바깥에선 그런 소리 하더라도 우리나라 안에서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빈손으로 왔는데 염장 지르고 있잖아. 그럼 내가 안 될 줄 뻔히 알면서 유람 다니다가 왔다는 거야? 그 당시엔 나룻배도 돈이 되면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교수들이 생각 없이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회장님이 놀러다니다 왔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습니까?“나도 잔뜩 긴장하고 내 돈 써가면서 스타일 다 구기고 돌아왔는데 말이지. 몰라서 그렇지 박 대통령 앞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을 해야 될 입장이 돼 봐요. 백묵만 만지는 교수들은 상상도 못해요! 그럭하고 우리 같은 개발도상국가에서는 비교우위를 지니는 산업으로 분석이 됐잖아요. 특히 기계·철강·전기·해운 같은 연관 산업에 굉장한 파급 효과를 줄 수 있는 산업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더구나 한국은 3면이 바다라는 입지 조건도 좋으니까 서양 사람들이 평가하는 건 맞지가 않다고 대통령도 그러셨단 말예요.”

도망가려다 부총리에게 잡혀

정 회장은 많이 서운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조선소가 완공될 때까지 청와대 자문 교수들이 당시만 해도 제법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울산에 내려온다고 해도 일절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경제는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정주영주의’가 그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 회장은 겁이 나서 곧바로 박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다고 실토하며 웃었다. 그 때문에 김학렬 부총리에게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차관을 안 주니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얘기를 남기고 또 도망갈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 부총리가 먼저 눈치채고 딱 잡으면서 굳어버린 경상도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오히려 ‘누구 자빠지는 거 볼라고 그캅니까? 나는 정 회장 말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대통령한테 할 수는 없어요. 대통령께서는 꼭 되는 줄 알고 계세요. 4대 핵 공장이 다른 건 안 되더라도 정 회장이 맡아서 하는 건 꼭 된다, 그렇게 믿고 계시고 나도 그래 보고를 드렸는데 인제 와서 못 하겠습니다? 나는 못 합니다. 내가 대통령한테 시간을 얻을 테이까 나랑 같이 들어가서 직접 보고하세요.’ 이러더라는 거였다.

차관은 그 시점에서 얼마나 빌려야 가능했던 겁니까?

“제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되는 게 조선소 아니에요? 그때 우선 조선소를 건설하려면 부지 값은 빼놓고 처음 계획한 규모가 정부는 20만t이라고 했는데 내가 조사를 해보니 50만t급이라야 장래가 보이고 되는 거예요. 그러면 50만t급을 만들 수 있는 드라이 도크하고 900m의 의장 암벽에다가 여러 가지 중장비가 있어야 해요. 돈이 있어요? 그게 내·외자를 합쳐서 그 당시에 63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어요. 국가가 나서서 벌어들이는 돈이 몽땅 11억7000만 달러밖에 안 되는데 말이지, 하하항. 간이 부었지. 그걸로 끝나나? 배를 건조하려면 외국에서 기계를 또 사와야 해요. 기계를 사는 데만 약 8000만 달러가 있어야 했어요. 우리나라가 선박 건조에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별짓 다 하면서 돈 꾸어달라고 해봤던 거예요.”

김 부총리는 대통령의 의지를 알고 있으니까 금방 시간을 얻어낼 수 있었겠지요. 회장님은 겁이 났는데도 같이 들어가신 겁니까?

“하하항, 들어갔지. 도망친 전과가 있어서 벌써 부총리가 눈치챘어.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부총리가 아이고, 나도 참았는데 잘 됐습니다, 이래요. 같이 가자 이거지, 하하항.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까 내가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죄다 말씀드리고 분명하게 해외의 시각들이 이렇더라고 보고를 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대통령께서도 생각을 바꾸시든지 대책을 세우시지 않겠어요? 그래가지고 들어갔지요. 부총리는 내 앞에 앉고 대통령은 탁자 가운데 앉으시고. 그래서 아까 얘기한 대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일본 사업가나 미국 사업가가 상대를 안 합니다. 초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무슨 큰 조선업을 하겠다고 하느냐, 당신 나라에서 어떻게 몇십만t 배를 만든다고 감히 넘보느냐,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그러니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그랬지요.”

박 대통령이 호통칠 때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아주 무섭지요. 대통령 만나봤나요? (혼이 날 일이야 없었다고 하자) 눈에서 불이 튀어요. 경제인들 얘기 들어보면 애정이 없는 자리 같으면 그냥 뭐 조용히 웃고 대충 그러느냐고, 그런 정도로 하시는 모양인데 아주 뭐 그때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 회장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고!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나한테 왔느냐고!’ 아, 이러시는데 등에서 땀이 날 정도예요. 그런 어른이지요.”

실컷 혼내고 담뱃불 붙여줘

더 이상은 설명이 안 될 정도였습니까?

“부총리도 찍소리 못하고 나도 죽은 듯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진심으로 실망을 하시는 거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외국의 반응이 어떨 거다 하는 건 이미 예상을 하신 것 같아. 그랬기 때문에 그걸 돌파하지 못하고 왔다는 걸 화내시지? 내 평생 그렇게 혼이 나 본 건 첨이에요. 그러시더니 부총리 보고 소리를 질러요. 앞으로는 정 회장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해도 일절 다 거절하시오, 정부가 일절 상대도 하지 마라! 아, 이러시면서 앉았던 의자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앞만 딱 쳐다보고 일절 말씀이 없는 거야. 부총리도 대답을 못하는 거지요. 햐, 화가 나니까 정면만 딱 쳐다보면서 꼼짝도 않고 그러고 계시는데, 이건 내가 완전히 고문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워요. 그러니 나도 뭐 계속 허공만 쳐다보면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거지요. 버티는 건 내가 대통령보다 경험이 더 많거든. 하하항.”

그리고 침묵이 계속됐는데 박 대통령이 담배를 꺼내 정 회장에게 권하며 라이터불까지 켜주더라고 했다.

박 대통령도 애연가였다.

“사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지만 처음에도 그랬는데 대통령께서 권하니까 안 피운다는 말은 못하고 뻐끔뻐끔 빨고 앉아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한참 동안은 말씀이 없어요. 그게 박 대통령 성품이야. 참 생각이 깊은 분이야. 대통령이 담뱃불을 끄면서 하는 말씀이 그때부터가 그분의 모든 정신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돌아와서 대통령의 그 말씀을 적어두기도 했는데, ‘정 회장, 그래 한 나라 대통령하고 경제 총수인 부총리가 도와주겠다는데 그걸 못 하겠다고 체념을 해? 언제는 그 일이 쉽다 생각하고 나섰어? 어렵겠다는 각오를 하고 결심이 서서 나섰으면 끝까지 어떻게 하든 그걸 해야지 못 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돼? 우리가 모든 국력을 기울여서 성원을 할 테니까 다시 나가봐요.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봐요. 구라파를 가서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를 찾아다녀. 사업가도 찾아다니고 말이야! 언제는 그 일이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 쉬웠으면 벌써 했지. 한 번 나가서 안 되니까 손을 든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빨리 뛰어나가라고!’ 이러시니 그때는 또 들어갈 때하고는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못 하겠다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그러면 나가서 한번 더 열심히 쫓아다녀 보겠습니다. 이러고선 냉큼 나왔지 어떡해요. 김학렬씨는 누렇게 됐고. 하하항.”<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장관들에게 “이순신 장군 만나봤느냐”

‘조선소 불가’ 보고하자 박 대통령 “죽을 각오 없으면 출근하지마”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③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당부를 거절하지 못하고 청와대를 물러나왔지만 사실은 이미 일본 미쓰비시 측과 조선소 건설을 합작으로 해보자고 협의를 가졌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가 중화학공업 추진을 발표하기 전이었다.

동생이었던 고 정인영(전 한라그룹 회장) 부사장과 함께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왜 실현되지 않았을까. 그때 내용이 향후 조선소 건설의 내막을 이해할 수 있는 관심의 포인트가 될 것 같다.

“미쓰비시에 가야키 조선소가 있잖아요. 거기서 100만t 규모의 도크를 증설할 작정으로 덤비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번 해보자, 왜냐하면 일본도 그랬지만 우리 한국에 제철소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경공업이 아니라 중공업으로 간다, 박 대통령이 어떤 양반이냐, 고속도로 만든다고 밀어붙일 때 봤지 않느냐, 이건 분명히 일본처럼 제철소 다음에는 중공업이다, 그렇다면 한국도 중공업 정책으로 갈 것이고, 대표적으로 추진할 게 조선소다, 그렇게 판단한 거지요. 미쓰비시 측과 접촉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 않아요. 그러니 다시 가와사키중공업에 가서 하세가와 본부장하고 우메다 사장을 만나 똑같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설명하고 합작하자 했더니 좋다고 말이야, (손바닥을 탁 치며) 맞다, 그거야. 손바닥까지 때리면서 잘 봤다고 말이야, 하하항.”

日 미쓰비시와 합작 시도

그런데 왜 추진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운이라는 거고 타이밍이라는 거예요. 뭐냐 하면, 사실 미쓰비시 측이나 가와사키에서 합작을 추진하겠다는 내부 결심은 서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일본이 그 당시 중국하고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던 도중인데 중국에서 ‘주4원칙’을 내놓았어요. 저우언라이(周恩來) 4원칙이라고 하지요? 그때가 70년 4월인데, 그걸 발표해서 일본이 눈치를 보게 됐거든?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내놓은 4원칙이라는 게 내용상으로 보면 한국이나 대만하고 경제협력을 맺고 있거나 투자하는 회사와는 무역을 안 하겠다는 거지요.”

일본의 투자에 브레이크가 걸렸네요.

“그렇게 되니까 일본 통산성이 제동을 걸고 나온다는 거지요. 그러니 별수 있어요? 결렬되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조선소 건설을 추진할 때도 사실은 차관 도입이 주4원칙 영향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한 거예요.”

그 전에 캐나다 쪽하고도 접촉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합작이나 차관 때문이 아니고 조선소에 대한 전반적인 시장조사를 의뢰했던 거지요. 캐나다의 엑커스라는 기술회사에 시장성 조사를 의뢰했더니 조사를 한다면서 몇몇 회사하고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생긴 거예요. 하루는 우리 정부에 정보가 들어왔는데 메리도라고, 이스라엘 해운회사 팬마리타임 대표고 국회의원 출신이에요. 그이가 한국으로 찾아온다는 거지요. 나중에 나도 부총리한테 들었지만 우리나라가 차관을 도입할 때 중간에서 커미션을 크게 먹고 중개했던 아이젠버그라고, 유대인이 있어요. 메리도가 그이하고 같이 다니던 거상인데 조선소 때문에 온다는 거예요.”

아이젠버그라는 인물은 국내에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메리도라는 사람이 조선소 건설 문제를 어떻게 알고 방문을 한다는 겁니까?

“캐나다 엑커스 측에서는 우리 의뢰를 받았으니까 이스라엘의 팬마리타임 회사하고 노르웨이의 조선회사인 아커그룹과 접촉했다는 건데 팬마리타임이나 아커 측에서 생각할 때 아, 한국에서 지금 조선 산업을 추진하고 있구나,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돈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들이니까 팬마리타임 대표라는 메리도가 되지도 않을 조건을 잔뜩 들고 와서는 부총리한테 붙은 거지요. 좌우간 조건이 황당하고 50대 50 비율로 조선소 건설을 제의하다가 나중에는 조선소 운영권까지 자기들이 갖겠다고 나와요. 딴 데 가서 알아보라 했지 뭐. 그랬더니 부총리는 아이고, 놓치지 말라고 투덜거리고, 하하항. 하여간 별일이 다 있었어요.”

“왜 유독 현대에게 맡기느냐?”

당시 우선순위 첫 번째는 종합제철소 건설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도 수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금 조달 때문에 박 대통령이 직접 재일교포 사회에서 관서의 사카모토, 관동의 시게미쓰로 불리던 대표적인 실업가 서갑호씨와 신격호씨, 그리고 철공왕으로 군림하던 손달원씨한테까지 투자를 부탁했을 만큼 자금 때문에 전력투구했는데 조선소 건설을 미끼로 국제적인 로비스트들이 준동한 것도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말이지요, 경제 건설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대통령까지 정말 권위고 체면이고 다 던지셨어요. 나보고 구라파로 다시 나가보라고 하실 적에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장관이 전부 안 된다, 그간에 다양하게 다 조사를 해봤고, 가능한 방법을 죄다 찾아봤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조선소 건설을 해본 경험 있는 회사가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느냐, 도저히 조선소는 안 될 것 같다고, 전부가 그렇게 보고하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대통령께서 이순신 장군도 만나봤느냐고 소리를 질렀대요. 화가 나서 재떨이까지 집어던지면서 이순신 장군도 만나봤느냐고, 충무공이 거북선 만들 때도 경험 있는 건설회사가 있어서 가능했는지 물어봤어야 될 거 아니냐고, 막 호통을 치면서 나하고 같이 죽을 각오가 돼 있지 않은 장관들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얼마나 질책을 하셨는지 나중에 보니까 와이셔츠 단추가 두 개나 풀어져 있더라는 거지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어떡하든 해야 한다는 집념 외에 권위를 생각했겠어요, 체면을 생각했겠어요? 그런 얘기를 듣고 내가 못하겠다는 소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고 조선소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대단한 어른이셨지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70년대 초, 그 무렵만 해도 현대건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외형으로 보면 더 큰 기업들도 있었는데 왜 회장님한테 조선소 건설을 맡겼습니까?

“하하항,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고 박 대통령한테 물어봐야지요.”

정부는 왜 유독 현대에 조선소 건설을 당부했을까. 현대가 아니면 다른 기업에도 부탁했던 것인가. 조사된 자료에는 다른 기업에 요청했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지금 같으면 삼성·대우·한진 등 여러 기업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70년대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삼성은 설탕 장사, 옷감 장사 수준을 넘지 않았고 대우는 이름 없는 와이셔츠 장사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으로 돈을 번 한진이 물망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해운 쪽이지 선박 건조는 아니었다. 결국 추정해본다면 대부분의 기업이 몸을 움츠렸지만 현대가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고속도로 건설을 수주하면서 박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 같다.

훗날 현대조선소가 현대중공업으로 독립하고 조금 뒤에 입사했지만 정몽준 전 현대중공업 회장(현 국회의원)이 중역들과 담소하던 중에 나름대로 풀이했다는 내용은 이렇게 전해진다.

“박 대통령도 처음에는 조선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조금 단순히 생각하셨던 게 아닌가, 우리가 건설을 해왔기 때문에 인부들을 동원하는 데는 자신이 있을 거고, 거기다가 철골 구조? 땅 파서 도크 만드는 거? 그런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거기다가 조선이라는 것도 영어로 십빌딩(shipbuilding)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작업장도 공장이라고 안 하고 십야드(shipyard)라 하고, 더구나 배는 제조가 아니고 건조다, 우리가 얘기를 할 때도 선박을 제조한다 하지 않고 건조한다고 그런다, 선박 건조. 그러니 땅만 있으면 회장님은 해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지 않아요? 하하.”

어쨌든 정주영 회장은 참모 둘을 데리고 구라파 쪽으로 다시 자금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정 회장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지시사항이 이때에 있었다. 하나는 차관 문제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만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소를 건설할 부지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현대건설 안에 별도의 조선사업부까지 만들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는 의미였다.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었던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 회고가 들을 만했다.

“그게 안 되면 회장의 권위도 떨어지지만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게 되든 직원들한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선언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부지까지 마련하라는 말씀은 굉장한 리스크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당시가 어땠느냐, 자금 확보도 기술 제휴사도 결정 안 된 상태 아니에요? 명예회장(정주영) 명령은 떨어졌지, 현대건설에 해양대 출신이나 조선학과 출신들을 전부 조선팀으로 옮겨놓고 일을 벌이는 겁니다. 나중에 다 사장, 회장 했지만 백충기·황병주·김형벽·이정일·이정상 그런 사람들이 무조건 와야 해. 그런데 기능공이 있나? 전국에서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런 사람들까지 전부 긁어모으고 말이지, 엉망이었지 엉망.”

자금 한푼 없는데 “부지 마련하라”

정 회장을 수행해 차관 구입에 앞장섰던 백충기 전 현대건설 사장도 조선소 건설은 기막힌 상황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나부터도 건설에서 차출이 되고 보니까 조선사업부가 건설회산지 중공업회산지 구분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뿌리는 전부 건설쟁이들이지요. 그리고 내가 회장님 모시고 첨에 뉴욕하고 텔아비브에 갔을 때 처음 거대한 조선소를 봤는데 조선소 주변이 하나의 거대한 도시고, 그 주변에 사는 기능공들이 이미 엔지니어급 수준이라서 대접부터가 달라요. 그러니 저 정도는 돼야 수주도 하고 경쟁력이 있을 텐데 우리가 인적 자원도 없는데 저런 조선소를 만들 수 있겠나 싶고 말이지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거지요.”

어쨌든 참모를 데리고 나가셨는데, 대통령이 회장님한테 유럽 쪽에도 나가보라고 하실 때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러셨을까요?

“전혀 아니지요. 대통령이나 나나 답답한 심정은 똑같은데 일본하고 미국에서 차관을 못 준다고 하니까 구라파도 나가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아나선 곳이 영국이에요. 그때 우리가 영국 런던에 현대건설 지점을 설치해놓고 정희영 상무가 지점장인데 백충기 부장인가? 같이 데리고 갔을 거예요. 그런데 우린 차관이 급하잖아요. 영국에 도착했지만 무작정 어딜 두드리겠어요? 그때 아이디어를 준 사람이 평소 알고 있었던 데이비스라는 미국인 국제금융 브로커예요. 브로커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데 세계시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그 사람이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공군 조종사 출신인데 ‘우선 조선소를 만들면 기자재를 어디서 구입할 거냐. 그걸 공급하는 회사부터 정하고 그 회사가 거래하는 은행을 움직이게 해라.’ 이거예요. 정말 그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발한 방법이잖아요? 그 사람들의 주거래 은행을 소개받아라 이거지요.”<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함정이니 정부는 만나지 말라”

서독 조선업체 이중 플레이 때문에 김학렬 부총리와 대판 싸움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④

데이비스라는 국제 금융 브로커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조선 기자재를 팔아먹기 위해서도 컨설팅 회사들이 은행을 움직일 거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소개받은 곳이 영국의 애플도어(A&P Appledore)하고 스콧 리스고(Scott Lithgow)라는 선박회사였다.

정주영 회장이 유럽에서 1차로 접촉했던 서독의 아게베세 조선소하고는 내용상으로 이미 급수가 달랐다. 현대가 1971년 9월에 정식으로 기술과 판매협정 본계약을 체결하게 되지만 영국의 애플도어사는 실내 도크를 갖추고 특수 선박을 주로 건조하는 유명한 조선기술 회사였고, 스콧 리스고는 소형 특수 선박이지만 1만5000t급 선박을 매월 한 척씩 건조해 판매할 정도로 조선업계가 인정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1급 조선소였던 것이다.

“우리가 우물 안에서만 생각을 해왔다 이거예요. 구라파로 나와서 보니까 눈이 확 트이고 말이지. 애플도어라는 회사를 만나 정보를 듣다 보니 서독에서 만난 아게베세 조선소가 우리를 얼마나 봉으로 여겼는지,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술료를 요구하면서 흥정을 했었는지, 그런 걸 다 알게 되고 말이에요.”

“우릴 봉으로 알잖습니까”

아게베세 조선소가 언급됐지만 이 조선소는 정 회장만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는 정 회장을 만나고 뒤로는 재빠르게 선을 넣어 부총리에게 자기들이 조선소를 건설해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며 흥정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김학렬 부총리와 정 회장이 부닥친 것도 사실이었다.

“아게베세 조선소에서 제시한 조건의 핵심이 상당히 호조건이고 내가 생각할 때는 구미가 확 당겨요. 정 회장께서 오케이만 한다면 조선소 설계도면과 용역비로 580만 달러를 요구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협력을 해주고 판매할 때마다 판매 수수료로 선박 가격의 5%만 달라는 것이고. 이런 조건이 어디 또 있겠어요? 결국은 580만 달러로 조선소를 지어주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하하하.”(김학렬)

“사람을 바깥에 내보내 놓고 정부에서 자꾸 뒤로 만나시면 협상을 어떻게 합니까? 메리도라는 친구도 앞에서는 우릴 만나고 뒤로 부총리님을 찾아갔지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 깨지지 않았습니까? 580만 달러만 가지면 조선소가 다 되고 그게 또 훌륭한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정부에서 580만 달러 투자해서 조선소를 맨들지 뭣 때문에 이 고생을 시키십니까?”(정주영)

“아니, 좋은 조건이라면 열 번이라도 만나야 되는 것이고 정 회장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보를 주는 건데 무슨 말을 그래 해요!”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시니까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면 정부에 580만 달러가 없어서 못하십니까? 그 돈으로 될 일이라면 차관을 할 필요도 없고 지금이라도 저희가 빌려드리겠습니다.”“정 회장!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요. 정부에서 모르고 있는 내용이 있으면 설명을 해주어야지 무슨 말을 그래하고 있어요!”

“함정이 있거나 봉으로 알고 그러는 거니까 답답하시더래도 제가 결론을 볼 때까지 정부에서 자꾸 만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쨌든 1차 목표는 차관이었다. 설계나 용역이 급하지 않았다. 돈줄을 잡는 것이 절실해 애플도어사를 만났어도 기자재 상담은 뒷전이고 마음은 돈줄이었다. 그런데 국제 금융 브로커의 말이 정확했던 것이다. 상담했던 애플도어사의 롱바톰(Longbattom) 회장이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을 움직일 정도가 된다지 않는가? 정 회장으로서는 귀가 번쩍할 수밖에.

“즉각 우리가 가지고 갔던 보따리를 다 풀었지요. 보따리라는 건 우리 계획서지요. 그러면서 조선소도 만들고 선박도 건조해야 되겠으니 어떡하든 차관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애플도어하고 기술협약도 하고 용역도 의뢰하겠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롱바톰 회장이 우리 계획서를 좍 보더니 좋다고,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오케이를 해요. 그러면서 버클레이 은행에다 차관 신청을 해보자,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롱바톰 회장은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버클레이 은행에다 차관 신청을 하는 거지요.” 며칠 시간을 달라 한 건 그 사이에 현대에 대해 알아본 것 아닙니까?

“하하항, 그것도 얘기가 긴데 그런 셈이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롱바톰 회장이 그동안 거래를 많이 하고 신용이 좋았던지 은행에서 대접하는 게 달라요. 당시만 해도 우리는 외국은행에 큰 차관을 요청하는 것도 첨이고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긴장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알았는지 은행에 가니까 아주 친절하게 계획서를 두고 가라고, 충분히 검토해서 연락을 하겠다고, 그러면서 현관까지 나와요. 그걸 보면서 역시 선진국은 은행이 존재하는 목적이 다르구나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어디 그래요? 계획서를 제출해보는 것조차 어렵고 낸다고 해도 전부 턱으로 가리키며 거기 앉으슈, 거기 두슈, 보고 연락할 테니 가서 연락하거든 오슈, 이러잖아요.”

“정부와 기업 마인드 안 맞아”

계획서를 낼 때 특별한 질문은 없었습니까?

“일단 계획서를 봐야 질문을 하는 거겠지요. 다만 차 한잔 주면서 지나가는 말로, 조선소를 만들고 배를 건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 소리는 해요. 근데 나는 또 그게 면접하는 건 줄 알고 얼른 대답을 했지요, 하하항. 그만큼 얼어있었던 거예요.”

어떤 대답을 하셨는데요?

“늘 내가 주장하던 소리였지요. 좌우간 조선소라는 게 별거냐? 도크라는 건 목욕탕 욕조를 크게 만드는 것하고 똑같은 거다 생각하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고, 선박 건조는 커다란 철 그릇 속에다가 철로 만든 구조물 빌딩을 하나 세우는 거다 생각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 어렵겠느냐고, 우리가 빌딩 한두 채 지어본 게 아니라고 말이야. 설계는 아직 못하지만 영국에서 설계하고 시방서만 주면 못 만들 게 없다고 말이지. 그랬더니 막 웃으면서 재미있는 말씀이라고 그랬는데 옆에서 통역하는 눔이 쿡쿡 찌르면서 그만하셔도 된다고 그러잖아.”

사업계획서에는 조선소 규모나 건조할 수 있는 목표 물량까지 넣어두고 있었습니까?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일을 해보니까 참 장애가 많아요. 우선 정부하고 기업이 서로 마인드가 맞지 않아.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가 차관을 얻으려고 여러 나라를 교섭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각국의 대사관에 상무관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한국의 조선산업 실태를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상무관들이 어디를 통해서 실태를 조사하겠어요? 당연히 우리 정부의 관련 부처에 자료를 요청할 거 아닙니까? 그걸 알고 박 대통령은 워낙 빠른 어른이니까 즉각 외무장관을 불러 각국의 상무관들한테 오히려 브리핑을 해주라고 지시를 했어요. 그게 신뢰감도 주고 조금 부풀려도 정부 자료니까 믿을 거 아니겠어요. 근데, 그렇게 했으면 빨리 우리한테 연락해서 계획서하고 입을 맞춰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성사시키는 게 목적이잖으냐 말이야. 그런데 뭐? 정부의 3차 5개년 계획의 목표는 15만t 규모다, 이게 될 소리예요, 이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보고서가 어떻게 날아가겠어요. 차암 대가리 쓰는 거 보면 아직 한참 멀었다 싶은 거야. 정부가 기업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조선소를 못하게 막는 거나 뭐가 달라요? 작성한 보고서를 하나 봤더니 한국이 그때까지 최대 규모로 건조한 게 1만7000t급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밝힌 3차 5개년 계획의 목표는 15만t 규모다, 그러니 25만t급 이상의 대형 유조선을 만들 경우 한국에는 기술 인력이 없을뿐더러 건조 경험을 가진 중간관리자도 없는 실정이므로 사업계획서 내용은 타당성이 없다, 이렇게 돼있는 거야. 누가 차관을 해주겠어요!”

회장님이 제출한 계획서에는 그런 규모가 아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갑갑하다는 거지요! 내가 가지고 나간 사업계획서에는 부지 17만5000평, 건물 3만7611평, 건조 목표는 최대선박 50만t에 연간 25만9000t급 5척으로 되어 있고, 길이 500m, 폭 80m, 깊이 12m의 드라이 도크를 1차로 건설한다, 그럭하고 450t급 골리앗 크레인 2기를 확보하는 것이 기본 골자다, 이거거든? 근데 정부에서 목표가 15만t이라고 했으니 말이야, 이건 똥 싸놓고 매화 타령하는 꼴이지, 일을 되게끔 하자는 소리예요 이게? 더구나 그건 해명하기도 쉽지가 않아, 정부 발표니까. 해명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정부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버클레이 은행에서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검토 결과를 알려왔습니까?

“아, 역시 일 처리가 빨랐어요. 우리는 은행이 그걸 전부 심사할 동안에 턱을 괴고 기다리고 있어야 될 노릇이지 별다른 방법이 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은행 같았으면 니들이 영국에서 왔건 소련에서 왔건 알 바 아니니 심사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고 했을 거야. 근데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배려했는지 다음날인가? 바로 연락이 왔어요. 언제 들어오라고 말이지. 그러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유머도 있어요. 대체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큰 사업을 한다고 돈을 달라는 건지 통을 좀 들여다봐야겠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한번 면접 시험을 하겠다는 거지요, 하하하.”

그래도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주고 희망을 보여준 건 버클레이 은행이 처음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아주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들어오라는 날이 마침 월요일이야. 그래서 기다리고 있을 때가 일요일이기 때문에 긴장할 것 없이 시내 구경이나 나가자 했어요. 우리가 그동안 영국에 와서 차관에 전력하느라고 호텔 문밖을 하루도 나가보질 못했거든? 그러니 나하고 동행하는 직원은 항상 죽을 지경이지, 하하항. 기분 전환도 시킬겸 템스강 상류에 셰익스피어 생가가 있는데 거기에 구경을 갔어요. ”

워낙 바쁘신 분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버클레이 덕에 관광까지 하셨군요.

“그런 셈이지요.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런던 교회에 있는 윈저성도 보고 석양도 구경 했으니까요. 내가 해외를 수없이 나가지만 한번도 관광이라고는 제대로 못했어요. 정말 한번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어. 그런데 그때는 생전 첨으로 여러 가지 공부를 한 셈이 됐어요.

하여간 그렇게 하고 그 이튿날 점심시간인데 12시가 돼서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가 만나자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부총재가 직접 나왔는데 이상하게 점심시간에 부르는 거예요. 그런 게 우리하고는 문화의 차이랄까, 의식의 차이 같은데, 우리는 점심시간에 만나자고 하면 이거 밥을 사라는 얘기로구나,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야, 커피와 토스트 하나 딱 들고 먹어가면서 얘기야. 그러니 괜히 지갑만 만지작거렸지. 하하항.”<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우린 16세기에 철갑선 만들었소”

英 은행, “큰 배 보기나 했나”에 거북선 그려진 500원 지폐 보여줘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⑤

정주영 회장이 차관을 얻기 위해 접촉한 영국 버클레이은행 중역은 여러모로 정 회장을 자극시켰던 것 같다. 그들이 기업을 대할 때 어떤 자세였던가 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보여주고 있는 기본자세하고는 판이했던 것이다.

그 사이 현대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습니까?

“아, 나중에 알았지만 철저히 조사를 했어요. 첨에는 롱바톰 회장이 한국까지 와서 직접 우리 현대가 했던 발전소, 정유공장, 해외건설, 고속도로, 그런 공사들을 전부 체크하고 갔지요. 거기다가 조선소를 지을 부지까지 봤는데 거긴 내가 토목공사를 시키고 있었거든? 내가 그럴 줄 알고 전갑원이를 시켰더니 그눔이 암반이 안 나온다고 투덜거리다가 나한테 혼났지. 하하항. 하여간 그런 걸 전부 보고서 버클레이은행에 추천서를 써줬는데도 버클레이은행에서는 그보다 더 철저하게 조사를 했어요. 각종 플랜트사업에서부터 교량 건설까지 부실이 없었는지도 조사하고 그룹의 대차대조표까지 뒤지고 말이지. 심지어 한국에 질 좋은 노동력이 있느냐 하는 것까지 알아봤다니까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 금융기관들은 멀었지요.”

대단하군요. 만나시니까 어떤 내용을 궁금해 합니까?

“앉기가 바쁘게 이 양반이 얘기를 하는데 그게 면접이에요. 토스트를 먹어가며 얘기를 하는데 아주 예리해. 그렇지만 나는 대충 어떤 얘기를 할 거다 하는 걸 예상하고 나갔거든? 근데 우리가 25만t급 배를 만들겠다고 했으니까 대뜸 한국에서 25만t급 배를 보기나 했냐고 묻잖아. 난감하대…, 그냥 봤다는 대답만 해서는 대화가 끊어지잖아요. 그럴 때 순발력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게 500원짜리 지폐야. 그 당시 500원짜리에 거북선이 있었거든? 근데 내 지갑에 500원짜리가 없으면 큰일이잖아요. 근데 덜덜 떨면서 지갑을 꺼내 보니까 마침 있잖아! 하하항. 이거다 하고선 탁 내놓고 그랬지. 부총재는 16세기에 철갑선을 봤느냐고 말이야, 이게 16세기에 만든 대한민국 거북선이다, 대한민국 거북선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지폐에 새긴 거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건조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이 철갑선을 봤느냐고, 이게 지금으로 보면 유조선은 게임이 안 되는 함정이라고, 하하항. 그랬더니 부총재 눈이 팽 돌아가는 거야. 저들은 19세기에 처음으로 강선을 만들었거든? 더구나 해양대국이라는 영국인데 말이야, 그러니 눈이 안 돌아가고 배겨? 하하항.”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 주더라”

(웃으며)만약에 500원짜리 지폐가 마침 없었으면 어떡하시려고 그랬습니까? 회장님 지갑에 500원짜리도 넣고 다니세요?

“그러니까 지갑에 손이 갈 때 덜덜 떨었지, 하하항. 내 지갑에 만원짜리는 하나도 없어, 다 잔돈이지. 그러고 내 얼굴이 돈인데 뭐, 하하항. 근데 부총재가 참 인상적인 사람이에요. 거북선을 보더니 아주 진지해져요. 자기네가 해양대국이기 때문에 강선은 세계 최초인 줄 알았다면서 3세기나 뒤늦게 강선을 만들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더구나 한국한테 뒤졌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역사적 사실은 우기지 않고 인정을 해요. 그게 신사의 나라 사람들이에요.”

그것으로 인터뷰는 끝나는 셈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 다음 질문이 의외예요. 내가 예상한 건 하나도 안 물어. 정 회장은 대학 전공이 이공학입니까, 경영학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이거 또 난감하두만. 내가 비록 대학은 안 나왔지만 모든 사회 경험을 대학 나온 사람 이상으로 경륜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는 구질구질하게 하기 싫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 부총재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오히려 반문을 했지요. 부총재께서 우리 조선 사업 계획을 보셨느냐고. 부총재가 봤을 리 없죠. 금융맨이고 봐야 알 턱이 없고 다만 융자를 검토하는 단계니까 밑에서 심사한 얘기를 들었을 테지요. 근데 이 사람이 능청스럽게 봤다고 그러잖아요. 그렇다면 잘 됐다 싶어서 나도 능청스럽게 시침을 뚝 떼고 그랬지요. 내가 버클레이은행에 낸 사업계획서를 옥스퍼드대학에 먼저 내봤다. 어제가 일요일인데도 그걸 제출하니까 대번 박사학위를 주더라. 그래서 내가 옥스퍼드대학 경영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이러면서 막 웃었어요. 그러니 뭐 부총재도 막 웃고 그랬는데 그 부총재가 더 재치 있어요. 역시 옥스퍼드대학이 권위 있는 대학이라고, 왜냐하면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박사도 사실 이런 계획서를 못 만들 거라고, 그런데 정 회장 같은 사람을 골라내는 거 보니 역시 옥스퍼드대학이 유명하지 않으냐고, 이러면서 웃는 거예요.”

결국 승인을 했습니까?

“그렇죠. 여러 가지 환담을 하면서 몇 가지를 더 알아보더니 버클레이은행에서는 차관을 결정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는 차관 시스템이 은행 결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은행이 결정을 하면 최종적으로 ECGD(Export Credit Guarantee Department)라고, 수출신용보증국이라는 곳에서 승인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사실상 ECGD의 승인이 관건이었다. 영국에서는 차관을 해간 나라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영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은행에 보상을 해주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ECGD의 기준은 손톱이 들어갈 허점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은행이 사업성 평가에서 만족스럽다는 결과를 통보해도 신용보증국에서는 별도의 조사를 했고, 차관 도입국가의 신용도와 경제적 성장성까지 체크를 할 정도였다. 그러니 서류가 보증국으로 넘어가면 현대만 장래성이 있어서 될 일도 아닌 셈이었고 정부의 신용도까지 검토가 된다는 얘기였다.

“한국 빅맨이 체어맨 정 맞나”

신용보증국의 승인은 낙관 하셨습니까?

“어떻게 낙관을 해요? 우리 현대의 신용이나 장래성은 솔직히 자신이 있었지만 그 당시 우리 정부의 이미지가 엉망이었단 말이에요. 어느 나라나 노사분규 일어나면 완전히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예요. 그 회사에 대해 먹칠을 하는 게 아니고 국가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지요. 근데 그 당시 평화시장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나 거리가 시위대로 혼란스러웠지요?”

아주 난감하셨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떡해요. 어렵게 은행을 통과했는데 한국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있어요? 수출 보증국에 승인신청서를 내고 또 기다리는 수밖에요. 근데 참 희한해요. ECGD에서는 그때까지 개인기업주를 직접 인터뷰한 예가 거의 없고 대부분 정부관료를 불러 조목조목 심사를 하는데 우리 정희영 상무가 노력도 했겠지만 존 코긴스라는 ECGD 국장이 직접 나를 만나보겠다면서 연락이 왔어요. 거기 국장은 다른 부처하고 달라서 완전히 독립기구이기 때문에 장관급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결정을 하다시피 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만나자고 하니 일단 한국의 불안한 정국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검토를 해보겠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말이야, 만사를 제쳐놓고 냉큼 만났지요. 하하항.”

그러나 여기에도 비화가 있었다. 정희영 당시 런던지점장이 ‘콧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몸살을 앓아가면서’ ECGD 국장과 친밀한 사람을 찾아 온갖 노력을 다 했겠지만 ECGD 자체적으로 어느새 현대의 공사 능력과 국가의 성장 잠재력에 대해 이미 조사할 수 있는 자료는 전부 빼냈더라는 것이다. 인맥으로 대부분 융자를 해결하는 한국의 금융 시스템하고는 질적으로 달랐다는 얘기였다.

ECGD의 심사는 은행하고 차이가 있었습니까?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일단 은행에서 심사한 내용을 중복 심사하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구요, 신뢰를 하고서 자기들 의견을 얘기하는 거예요. 탁 만나니까 뭐라고 하는고 하니, 첫마디가 ‘한국의 빅맨이 체어맨 정이냐’고 그래요. 근데 이건 통역을 안 해도 내가 알아듣거든? 이런 거까지 통역하면 분위기가 깨진단 말이야. 그래서 비켜 임마, 그래놓고는 웃으면서 벌써 조사를 했냐고, 빅맨이 아니라 정주영이 자체가 자이언트라고, 그랬더니 막 웃으면서 역시 은행에서 얘기한 그대로라고 하잖아요. 하하항. 분위기가 아주 좋아진 거지요.”

정 회장의 영어 실력은 2000단어를 구사할 정도라고 했다. 그러니 웬만한 영어는 직접 메모를 하고 머리가 비상해서 중요한 협상 내용은 마치 속기를 하듯 자신만 알고 있는 특수한 부호로 적어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니까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적을 하면서 논리가 아주 정연해요. 계획서는 잘 봤다, 애플도어라는 영국의 일류 기술 회사가 현대 기술자들을 영국에 데려와서 훈련 시키고, 스콧 리스고에서 도면을 받아 그대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현대가 인력을 잘 관리하면 건조를 할 수는 있을 거다, 그거야 영국의 최대 기술 회사가 참여하는 거니까 자기네가 인정을 하겠다 이거죠. 그러면서 그래요. 배만 주문해서 만들면 수지가 맞으니까 원금과 이자는 갚을 수 있겠다 하는 것도 버클레이은행 쪽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것도 역시 그렇게 믿겠다, 다 믿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거예요.”

“누가 한국에 배 주문 하겠나?”

ECGD 측에서 의문이 있다고 하면 중요한 포인트가 됐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핵심이었어요. 뭔고 하니, 세계 선진국에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여러 조선소가 있다, 그런데 한국이 영국에서 돈을 빌려 50만~60만t급 큰 도크를 만들어 30만t급, 50만t급 등 세계 최대의 배를 만들고 그걸 팔아 원리금을 갚겠다고 했는데, 내가 선주라면 한국에 주문 하지 않겠다, 누가 후진국 조선소에 그 엄청난 배를 주문하겠느냐, 한국이 지금까지 그런 큰 배를 한번도 만들어보지 못했고 경험도 없는 그런 나라 아니냐, 그런데 정 회장 같으면 주문을 하겠느냐? 내가 선주라면 주문을 안 하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야…아찔한 겁니다. 그 순간 숨이 탁 막혀요. 그러니까 배라는 것은 다른 상품처럼 미리 만들어놓고 파는 것이 아니고 주문에 따라 제작해 파는 거니까 선주가 주문을 안 하면 만들 수도 없는 거고, 배를 만들어 팔지 못하면 돈은 갚을 수 없지 않으냐, 그런 얘기 아니에요?”

결정적인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겠군요.

“배를 주문하는 선주가 있어야 되겠다, 말하자면 배가 팔린다는 증명을 가지고 오든지 배를 주문하겠다는 선주의 계약서를 가지고 오라는 소리지요. 사실 그 얘기가 이치에 맞고 아주 사리에 맞는 얘기예요. 그러니 정말 결정적으로 탁 막히는 거지요. 그건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선박을 발주할 선주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말이에요. 눈앞이 노랗더라는 말을 그때 내가 실감했어요. 근데 우리 정부에서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도 모르고 부총리가 밤만 되면 잘돼가지요? 이러면서 전화야, 미치겠어. 하하항.”

해결책을 찾아야 했을 것 아닙니까?

“당장 방법이 없잖아요. 국장한테는 선주를 찾아보겠다 하고선 맥없이 물러나오는 거지요.”<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몽준은 연애 못해 중공업 맡겨”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데…연애 못하니까 ‘항구’가져야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⑥

아무튼 수출신용보증국(ECGD) 국장을 만나고 나온 정주영 회장은 낙담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다시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야 했다. 이 시점에서 정 회장이 흥정할 수 있는 자산이라고는 세 가지뿐이었다.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부지를 찍은 사진 한 장, 그곳을 측정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 한 장, 스콧 리스고에서 만들어준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이었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다가 만들지도 않은 배 그림만 들고 선주를 찾겠다고 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완전히 ‘봉이 정선달’이더라는 것이다.

“내가 강원도 통천에서 내려와 가지고 광화문만 한 집을 짓고 살 테니 두고 보라고 했던 것부터 남들이 들으면 봉이 정선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가 않았지 뭘 그래, 하하항. 그런 기분으로 덤벼들고 있었던 거예요.”

롱바톰 회장도 ECGD 국장이 선주 없이 차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도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는 거지요. 나도 미처 선주가 있어야 한다는 예상은 못했으니까요. 그분한테 얘기를 죽 하니까 무릎을 탁 치면서 뒤늦게 국장 말이 맞다는 거예요. 근데 롱바톰 회장이 나중에 자세히 알고 보니까 애플도어에서 단순히 회장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국 총리 밑에서 하원의원으로 있었는데 쟁쟁한 분이었어요.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은 절대 자신의 과거 얘기는 안 하거든?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미래가 없는 사람이 자기가 왕년에 뭘 했고 하면서 잔뜩 과거 얘기만 늘어놓잖아요. 롱바톰 회장은 과거를 얘기 안 하니 몰랐는데 좌우간 그렇게 됐다면 선주를 찾아보자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리스 선주를 찾아봐야겠다고 말이지.”

“말뚝이라도 박아놨어야지”

왜 하필 그리스 선주입니까?

“아, 그분의 처가가 그리스였어요. 그 당시 세계 해운업계의 흐름이 그리스가 잡느냐, 스칸디나비아 제국이 잡느냐 하는 경쟁 분위기였거든. 그러니까 과거 수백 년간 세계 해운업계를 주도했던 나라가 그리스였는데 그리스 해운사들이 가지고 있는 주력선들이 아주 낡고 노후해서 비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 판국인데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해운사들이 그 무렵 막 추격을 해온 거지요. 그러니 그리스에서는 새로운 선박들을 구입해야 경쟁력을 복원할 거 아니에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보자는 전략이었지요. 그래놓고 선주를 찾는 동안 일단 나는 서울로 잠시 들어왔어요.”

국내가 불안해서였다. 운이 좋아서 이내 선주를 찾는다고 할 경우 그들이 조선소 부지라도 보자고 한다면 즉시 안내를 해야 하는데 전갑원(전 현대건설 부사장)에게 맡겨놓은 일이 어찌 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닦달하듯 궁금해 하는 부총리도 만나봐야 했다. 그동안의 협상 내용도 보고해야 했지만 선주를 찾아서 차관이 된다면 정부 보증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울산 현장은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토목 공사쯤은 마쳤을 것으로 믿고 있었던 조선소 부지가 아직도 확정 되지 않은 상태로 줄곧 파일만 박아보는 처지였다. 난리였다. 정 회장의 성격에 초상집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여태 함마링(해머링·Hammering)도 안 하고 뭣 하고 자빠져 있는 게야! 전갑원이 어디 있어!” 전갑원 차장은 또박또박 이유를 내세웠다. 부사장을 끝으로 현대를 떠났으나 당시에 부장급만 됐어도 겁에 질려 찍소리 못했을 텐데 겁없는 차장급이라 현장 상황을 곧이곧대로 내세웠다.

“회장님께서 사진 찍어서 나가셨던 부지부터 사실은 암반 조사를 해보니까 암반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다시 실사했는데도 역시 아니고….”(전갑원)

“임마! 너는 계속 아니라는 소리만 하고 다시 찾은 곳도 또 아니라는 소리 아니야! 롱바톰 회장이 현장도 와보고 사진까지 찍어서 보여주고 왔는데 거기가 아니면 어쩌자는 거야?”(정주영)

“두 번째 부지도 아닌데 어떡합니까? 아무리 박아도 암반이 나오지 않습니다.”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찾아서 말뚝이라도 박아놨어야지! 내일 당장 선주가 온다고 하면 어쩔 작정이야?”“제 마음대로 박습니까?”“박아 임마! 박는 건 네 책임이라고 했잖아! 박았는데 안 나오는 것도 네놈 책임이야!”훗날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를 위해 정인영 사장과 담판을 짓기도 하는 전갑원이라는 인물은 해외 건설 경험이 당시로서는 가장 많았고 토목 공사에서는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그는 캐나다로 조선소 견학을 다녀온 입장이어서 그의 시각으로 부적합한 부지라고 할 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봐야 했다. 물론 그 이유가 뒤에 드러났지만 지반과 지형이 조선소 부지로는 부적합했다는 것이다.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종 선정한 장소가 지금의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미포만 일대다. 태초에 잡았던 자리는 지금 현대자동차 공장이 세워져 있다. 김학렬 부총리는 그때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서울로 돌아왔다고 연락을 하니까, 자기 방에서 만나지 말고 당장 대통령 앞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된다는 소리만 듣겠다 이거지, 하하항. 그래도 뭐 설명을 안 할 수 없고, 우선 선박을 발주할 선주를 찾는 게 시급하다고, 그게 된다고 해도 정부 보증이 있어야 차관을 해준다고 하더라, 그런 얘기를 죽 했어요. 근데 뭐 다른 얘기는 들을 생각도 안 해. 아이고 잘 됐다고, 정부 보증은 차관만 되면 열 장이라도 끊어줄 테니 됐고, 차관으로 조선소 건설 자금을 해결했다는 그런 소문만 나버리면 선박 주문이야 얼마든지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아 이러면서 당장 각하한테 보고 드리러 가자는 거예요. 완전히 거꾸로 해석을 해버리면서 너스레를 떠니 미치겠는 거라, 하하항.”당초 조선소 부지엔 현대차가 대통령한테 갔습니까?

“가긴 어떻게 가요. 지금은 반반이다, 그러니 선주를 찾는다는 전제를 하고 부총리가 경제부총리니까 확실히 보증을 보장해줄 수 있겠느냐고, 그걸 다짐해 달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되레 큰소리야. 열 장이라도 끊어준다고 하지 않느냐고 말이야! 하하항. 근데 그 양반도 보통이 넘는 사람이에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정 회장, 건설 사업은 앞으로 별 볼일 없다, 날 샜다, 조선 사업 같은 중공업이 대안이니까 이걸 꼭 잡으라고 말이야, 아 이러네? 어떡하든 조선소를 하겠다는 정부 야심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내 주력 사업이 건설인데, 경제부총리가 날 샜다고 하니 얼마나 흔들리겠어. 다시 물었지. 앞으로 별 볼일 없고 날 샜다면 그게 정부 정책이라서 그러냐고. 그랬더니 이 양반이 어찌나 빠른지 얼른 정 회장 같이 다방면에 유능한 사람은 제외하고! 이러잖아, 하하항. 그러니까 조선소밖에 생각하는 게 없었던 거야.” 사실 정 회장도 조선 산업이 하나의 대안이라는 것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건설업은 공사를 수주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기업은 활력이 넘쳐나지만 공사가 끝나면 썰물 빠지듯 흩어지고 만다. 새로운 공법과 아이템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단순 건설로는 기업의 장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60년대 말 전체 외화수입의 20% 넘게 차지했던 월남 특수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에 편승하고 연관 산업도 내다보면서 새로운 사업의 돌파구를 열 수 있다면 역시 조선 산업이었다. 더구나 풍부한 노동시장이 있고 그동안의 건설 경험까지 살려 도전해본다면 해외의 조선 물량도 넘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정 회장이 살아생전 재산분배를 할 때 유학을 시킨 정몽준(현 국회의원)에게 “바다는 네가 먹는다 생각하고 공부를 해보란 말이야”라고 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선하고는 조금 다른 얘깁니다만 몽준 회장이 조선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우리 아이들은 뭘 맡겨도 다 잘하게끔 돼있어. 내 피를 물려받았고 내 유전자(DNA)를 가지고 있는데 2등 기업을 하겠어? 하하항. 근데 몽준 의원은 연애를 잘하지 못해서 중공업을 맡긴 거예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데 연애를 못하니까 항구를 가져야 할 거 아니야. 중공업이 미포항 일대를 다 먹은 거 아니겠어? 하하항.”몽준에게 “바다는 네가 먹는다”

그 후에 다시 런던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선주는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까?

“쉽게 되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온갖 정보를 다 수집하고 별별 사람 다 만나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찾았는데 그게 선박왕이라는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라는 선주였어요.”리바노스를 만나게 되는 배경이 있었다. 롱바톰 회장의 친구인 선박 브로커가 리바노스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때마침 리바노스는 싼값에 발주할 수 있는 조선회사를 찾고 있었다. 그는 국제 해운업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리스 선단의 대표급 집안으로 1세기 이상 해운업을 해온 그리스에서도 몇 안 되는 선주였다. 그러나 당시는 저물어가는 그리스 해운업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동안 일본에서 값싼 배를 몇 번 구입해 재미를 톡톡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 신생 조선국에서 선주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현대가 싸게 해준다면 협상해 볼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이다. 훗날 두 척을 발주해놓고 달러가가 상승하자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한 척은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도 싼값 흥정의 맛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정 회장이 만난 리바노스는 ‘스타브러스 리바노스’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고 있던 ‘요르거스 리바노스’였다. 그 사람도 그리스의 대표적인 선주인데 신생 조선회사에 선뜻 발주를 하겠다고 응했습니까?

“장난감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응하겠어요? 우리가 가지고 간 울산 백사장 찍은 사진하고 스콧 리스고에서 만들어준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을 꺼내놓고 잔뜩 설명을 하는 거지요. 그러고 뭣보다 애플도어 회장이 권했고 조건도 좋으니까 유조선 두 척을 발주하겠다고 ‘일단은 오케이’를 했어요. 근데 오케이면 오케이지 일단은 뭐냐고 했지. 그랬더니 영국에서 상담을 하고 계약을 하면 자기가 배를 인수해 와도 세금이 왕창 붙게 돼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세금이 안 붙게 자기 별장이 있는 스위스 중립국으로 가자고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네 자가용 비행기를 영국으로 불러요. 그땐 나도 자가용이 없는데 되게 건방지대, 하하항.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의 리바노스 별장으로 갔지요. 몽블랑 산모리츠 소재의 그 별장이 또 스위스에서 유명한 스키장이래요. 돈 꾸러 나가서 별 곳 다 댕긴 거지요, 하하항.”<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500만 달러는 술값으로 하겠다`

그리스 선주가 `16% 깎자`…한국 정부선 `차관 보증 못해준다` 돌변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⑦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한 정주영 회장의 행보는 사실 눈물겨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모든 일이 성공한 다음의 회고는 웃음이 묻어나게 마련이지만 가난한 한국의 일개 건설업자에 불과했던 사람이 유럽의 중심부를 파고들며 차관을 하고 26만t에 달하는 유조선을 발주해달라고 선주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쳤다고 할 만큼 어려운 고행이었다. 전 현대중공업 사장이었던 유관홍 성동조선 회장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무렵은 가발 팔러 다니고 그럴 때 아닙니까? 가발 한 컨테이너 해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 물량이 12억 달러가 안 되던 때고 지금 생각하면 (2006년 12월, 세계 11번째 3000억 달러 달성)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인데, 조선업을 누가 하겠다고 했겠습니까? 조선소를 봤다고 하는 기업인도 몇이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엄청난 조선산업은 엄두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을 거라고요. 지금의 현대중공업을 보면 조선산업이 어떤 거다 하는 걸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덩치를 그 당시로 가져가서 생각한다고 해보세요. 나설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현대가 시작 안 했으면 누군가는 했겠지, 그렇게 가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자꾸 누군가는 했을 거라고 (정 명예회장을) 평가절하한다면 그건 당장 반문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정 회장의 회고는 계속됐다. 워낙 기억력이 비상한 인물이라 몇 줄의 메모만 앞에 놓고 있었을 뿐 시종 기억으로 당시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분위기를 상당히 찾는 편인데 눈 덮인 별장에서는 순순히 계약을 했습니까?“그게 참 애간장을 다 태우는 거야. 계약을 하게 될 테니까 백충기 하고 황병주, 통역하는 김준식이까지 데리고 근사한 별장에 도착을 했는데 첨에는 고급술을 좍 차려놓고 한잔 마시면서 금방 서명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아요. 자기가 본 것처럼 현대 칭찬도 막 늘어놓으면서 말이지. 그러니 런던에서 일단 좋다고 했으니까 나도 사인만 하면 된다고 믿었죠. 근데 설계도면을 다시 보자면서 펼치더니 대뜸 16%나 깎자고 그러잖아. 술이 확 깨잖아요.”“다음에 날짜 잡아서 의논하자”가격이 얼마인데 16%나 깎는다는 말입니까?“그때 25만9000t 선가(船價)를 척당 3600만 달러로 해서 유조선 2척에 7200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그렇게 나오니 말이야. 척당 근 500만 달러를 깎고 배도 2년 6개월 만에 건조해야 한다는 거라. 그런 조건을 이행 못하면 원리금 전액을 변상하기로 그렇게 계약하자는 거지요. 그러니 스위스까지 와가지고 다 됐구나 했는데 그렇게 배를 내미니 말이지, 환장하겠어. 정말 고민하는 거예요. 공기는 얼마든지 맞출 자신이 있는데 16%나 깎자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그러나 정 회장은 원가 계산에 집착해 단안을 주저하는 법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손해 보는 장사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65년도에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할 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때에도 조선소 건설 공기를 단축하고 선박 건조를 조기에 달성하면 16% 정도는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행했던 팀들이 처음부터 너무 양보했다고 버틸 것을 주문했다. 어떻게 결론을 내리셨습니까?“술이 확 깨는데 술을 한잔 더 먹고 하자 했지요. 그러면서 확 마셨어. 그랬더니 리바노스 이 친구가 첨에는 술도 부어주면서 웃고 그랬는데 점점 못마땅한 얼굴로 변해. 근데 느닷없이 리바노스가 자기가 선가를 좀 더 알아보고 다음에 날을 잡아서 다시 의논하자고, 이렇게 나오네.”계약을 미루겠다는 것 아닙니까?“리바노스도 버티는 거지요. 다음이 어디 있어? 별장까지 자기 비행기 보내 불러들였는데 다음에 하자는 생각이겠어? 자기 요구대로 할 거냐 안 할 거냐 그거야. 그리스 국민성이 또 개인적 성향이 아주 강하고 그리스·로마 시대만 해도 그리스어(헬라어)가 지금의 영어처럼 세계 공용어였잖아요. 그러니까 자존심도 강해.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한테 그리스인이라고 하면 아주 싫어해. 원래 ‘그리스’가 ‘노예’라는 뜻이거든. 좌우간 다시 날 잡자는데 미치겠어. 그게 1~2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사실 피가 마르는 거예요. 그렇지만 일어나면 끝이야. 어떡해, 내가 그냥 오케이 할 수는 없고 그랬지. 좋다고, 깎아주는 건 오늘 마신 술값으로 하자고, 우리는 동방예의지국 국민이라 남의 별장에 초대받으면 빈손으로 못 오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양보하겠다고, 그렇게 나간 거야. 그랬더니 이 친구 눈이 금방 황소만 해져. 500만 달러를 술값으로 하겠다고 했으니 말이야, 하하항.”회장님 그릇이 보통 아니라고 생각했겠네요. “어차피 양보하는 거 우리 국민성이라도 느끼게 해줘야겠다고 한 거지,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는데. 하하항. 근데 사실 그때는 16%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우리 현대가 신생 조선소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보다 첫 수주가 제일 중요해요. 그게 말하자면 조선소의 이력서가 되는 거거든. 누구로부터 몇 t급을 수주했느냐, 이걸 가지고 국제금융의 여신과 보증할 때 참고가 되고 다음 선박을 수주하는 데도 절대적 효력을 미치는 거란 말이지. 그래서 좋다고, 같이 갔던 직원들이 내 옆구리를 계속 찌르면서 좀 더 버티자고 했지만 찬스라는 게 있는 거거든.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돈으로 환산해 14억원을 수표로 받았는데 냉큼 우리 한국은행에 입금을 시켰죠. 그게 1971년 12월 5일이에요. 내 생일은 잊어버리는데 그날은 못 잊어, 하하항.”일본 언론, 우리 조선산업 매도 그야말로 대한민국에 대형 조선소가 태어날 수 있도록 잉태시킨 날이 됐군요. “그렇지요. 지체할 시간이 있어요? 그때부터 시간 싸움이고 카운트가 시작되는 거거든. 관광이 어딨어, 입금시킨 서류하고 계약서를 들고 즉각 영국으로 나와서 ECGD 국장한테 그 서류를 턱 내놓으니까 그 사람이 진짠가 해서 눈이 커지는데, 그걸 쳐다보는 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말아야, 하하항. 군소리 없이 결재를 해줘서 차관이 성립됐지요. 참 기가 막힌 과정이지만 어떻게 보면 리바노스가 우리 조선소의 한 은인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돼요. 지금도.”훗날 드러났지만 이 당시부터 이미 일본은 조선 시장에서 한국은 절대 대형 선박을 건조할 능력이 없다고 루머를 퍼뜨리고 있었다. 상무관을 동원해 선주들에게 한국의 조선업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겨우 5만t급밖에 만들지 못하니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비열한 방해공작까지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시장을 먹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언론 플레이라는 분위기를 느끼게도 했지만 일본의 대형 일간신문이 한국의 조선산업을 형편없이 부정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획기사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지난 88년 7월이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연재한 기획기사 일부는 이렇게 파들어가고 있었다. “부산시 근해 46㎞에 떠있는 거제도. 비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가운데 한국 제2위의 조선회사. 대우조선공업의 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크레인이 우뚝 솟아있다. 높이 110m, 끌어올리는 능력은 세계 최대. 미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로켓 발사대를 매입해 겨우 설치한 것이다. 발 아래에는 13만5000t 중량의 유조선 등 5척이 있었고, 근처 도크에서는 25만t의 대형 탱커(VLCC)가 건조 중이었다. 텅 빈 선대(船臺)나 도크가 일본의 조선소와는 큰 차이다. 대우는 조선업에 진출해 8년. 그동안 한번도 흑자 시기가 없었다. 영업의 신(神)으로 불리는 김우중 회장은 톱 세일즈에 착수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장미 선적 화물선 3척을 수주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거액의 적자는 쉽게 줄 것 같지 않다. 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60㎞, 세계 최대의 조선소로 성장한 울산의 현대중공업을 찾아가면 방대한 조선소의 9기(基) 도크나 선대에 13척의 탱커(VLCC)가 위용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익 없는 번영이었다. 한국조선공업협회 조사에 의하면 가맹 12개사의 지지난해 적자는 총 886억원에 이른다. 한국 조선이 왜 이러한 적자를 보게 된 것일까. 관계자가 일치되게 지적하는 원인은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1년 반 동안 원화가 18% 절상되면서도 여전히 상승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난해 ‘6·29 민주화 선언’ 후 노사분규로 임금인상 투쟁이 일어나 2년 동안 37% 상승한 것. 셋째로 철강재나 기기, 자재값이 1년에 50% 이상 오른 것, 넷째는 30~40%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수출 선박용의 기기와 자재가 엔고(円高)로 고가(高價)가 된 것이다.”보증서 받기까지 애 먹기도그러나 지금의 상황도 일본은 이렇게 부정적이기만 할까? 일본의 거대 언론들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한국의 조선산업 발전을 보며 경악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ECGD에서 승인을 했고 버클레이 은행에서도 차관을 결정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 절차는 수월했습니까?“영국에서는 완전히 오케이를 했는데 그때부터는 우리 정부하고 마찰이에요. 이건 얘기 안 하려고 했지만 당초에 부총리가 차관만 얻어내라고 말이야, 대통령께서도 직접 뭐든지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버클레이은행에서 차관을 해주려면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줘야 하는데 그 무렵 우리 정부가 수출하는 기업들한테 보증을 해줘서 부도가 나고 아주 엉망이 된 일이 있었거든? 거기에 놀라가지고 정부에서 이젠 보증 못 한다고, 현대만 왜 도와줘야 되느냐고 말이야, 아 이러고 나오니 말이지.”보증을 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내 말이 그 말이야. 보증도 보증 나름이지, 이건 국가적인 사업 아니에요. 근데 뭐 변소 갈 때 급하지 나오면 그만이라는 거 하고 똑같애, 빌어먹을 것들이 말이야. 어찌나 속이 뒤집어지는지 집어치울 생각까지 했어. 그런데 뒤에 알았지만 대통령께서는 그걸 모르고 계신 거야. 그래가지고 김학렬 부총리한테 이제 어떡할 거냐고, 확실히 보증을 보장해줄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받을 때 열 장이라도 끊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정부 보증서 없이는 글렀으니까 집어치우자고, 그랬더니 어? 이 양반은 도리어 태평이야. 걱정 말래요. 아니, 상공부에서 못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랬지요.”경제부총리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나도 나중에 알았는데 그걸 ‘그림자 보고’라고 한다는 거야. 부총리가 총리 안 거치고 직접 대통령한테 보고해서 재가를 받아버리는 거래요. 나중에는 다 알게 되지만 재가받기 전까진 뭔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정확히 모른다는 거지, 하하항. 그래가지고 얼른 보증서 보내서 차관이 성립됐지요.”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정 회장 시작이 아니라, 끝이 반이야!`

`다 됐다` 보고에 박 대통령 진노…부지 매입하다 투기꾼으로 몰리기도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⑧

1971년 12월, 정부의 보증서가 날아가자 영국의 버클레이은행을 중심으로 스페인·프랑스·독일(옛 서독)의 은행들이 참여하는 국제 차관단이 구성됐다. 곧이어 스웨덴까지 합류해 마침내 72년 4월, 근 2년을 고생하며 추진했던 차관은 당초 현대가 계획했던 금액보다 많은 5057만 달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이 얌전하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문제였다. 사실 정부는 파격적인 특혜를 현대에 제공한 셈이었다. 민간 차관에 정부가 보증을 하겠다고 한 것이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50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보증한 예는 처음이었다. 다른 기업에서 볼 때는 그것이 비록 정부의 강력한 4대 핵 공장 건설의 하나에 투입된다 하더라도 웬만한 곳은 보증신청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현대만 엄청난 보증을 한다는 것은 지나친 특혜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71년 무렵은 정부가 차관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원칙 없는 민간 상업차관 도입으로 광범위한 부실기업을 낳게 되자 정부는 69년에 이미 부실 차관기업 중 85개 회사를 은행관리로 넘겼고 123개사가 경영부실에 빠져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회까지 소란했다. 71년 6월이었다. 임시국회가 열리자 정해영 의원이 국무위원석을 향해 질타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 의원은 국회 부의장을 지내게 되지만 기업가 출신이기도 했다.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부가 특정 기업에 특혜를 준다면 기업 못할 사람 어디 있겠어요. 69년 정초부터 터져 나온 부실기업 문제는 기업이 부실을 만든 게 아니라 정부가 자초한 것이오. 두고 보시오. 부실기업 문제는 반드시 온갖 물의를 일으키다가 결국은 보증을 맡은 금융권마저 흔들어 놓을 거요. 이미 차관 업체, 직접투자 업체, 이런 외자기업들이 물건을 전부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설립을 해놓고 국제경쟁력이 없게 되니 결국은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려 71년 상반기만 해도 벌써 120여 개의 중소기업을 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 않으냐 말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중에는 어쩔 작정이오? 국민한테 빚을 전가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을 작정인가요.”차관 문제로 국회서 특혜 논란무서운 경고였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을 반추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 함축된 질타였지만 그만큼 차관 문제가 경제계를 덮고 있는 암운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현대는 6월 국회를 피해 12월에 보증을 받았다. 운이 좋다고 했지만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다. 아무리 정부 정책에 동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개인 기업이 건설하는 조선소 건설자금을 정부가 보증해 준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까 보증에 대한 남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정부의 보증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이었다. “경제를 부흥시켜야겠다는 박 대통령의 집념이 대단했던 거예요. 그런 집념이 없었으면 정부 보증도 없었겠지. 보증은 부자지간도 안 서는 거라고 하는데 그걸 정부가 나서서 서주고 할 때는 얼마나 많은 검토를 했겠어요. 무조건 빚보증을 기업한테 해줬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 얘기예요. 꼭 필요한 것만 위험을 각오하고 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국민소득 250달러 언저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정부가 보증을 안 하면 외국에서 차관을 절대 안 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던 시절인데 어떡할 거예요? 앉아서 굶어 죽어?”71년 1인당 국민소득이 250달러 정도밖에 안됐습니까?“1000달러를 겨우 턱걸이했던 게 1978년이에요. 그래서 박 대통령을 평가하는 거야. 내가 역대 대통령 다 겪어봤어. 박 대통령이 안 했어도 누군가는 했을 거라고 그러는데 대통령 바뀔 때마다 그 시대가 다르고 여건이 다르고 경제 환경이 다 달랐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특별한 성장이 있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어느 대통령이 그렇게 했어? 어느 대통령 때 해놓은 걸 가지고 지금 우리가 먹고 사느냔 말이야. 박 대통령 보증 선 거 가지고 탓하는 건 아주 나쁜 거야. 박 대통령이 있는 동안에 우리나라 모든 경제가 근대화하지 않았어요? 그건 보통사람 같으면 절대 못 하는 거예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리 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지만 아무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사업계획서만 믿고 정부에서 보증을 해주기가 쉬워요? 그 당시엔 보증을 해서 그 사업이 계획서대로 안 되고 부도가 나면 형무소에 집어넣었어. 실제로 여러 사람이 형무소에도 들어갔고. 그런 생각하면 박 대통령이 모든 규율도 추상 같았고 또 의지도 대단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가로서 이만큼 되지 않았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그러나 사후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소 건설이라는 특정 사안만을 놓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점의 정책이 거대한 정부 조직은 손발을 쉬게 해놓고 모든 가능성을 기업의 협상 결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는 것이 결국은 정경유착을 초래하는 근원이 됐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초기에는 실패였다고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는 얘기였다. 사업계획서 2년간이나 보관불모지나 다름없던 조선업에 도전한다는 것이 짧은 회고로서 모두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드라이도크 하나를 완공하기 위해 십수 명의 스파이를 일본에 밀파해야 했던 일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추억담이다. 그리고 배를 건조한다는 것은 차라리 생명을 거는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참모도 있었다. 역동했던 건설 과정은 참모들의 대화 속에 나올 것이지만 정 회장은 계속했다. 어쨌든 대통령을 만나셨을 거 아닙니까?“만났죠. 귀국해서 방금 얘기한 대로 우선 김학렬 부총리 만나서 보증 문제를 풀었는데 첨에는 대뜸 내 목이 붙어 있게 되느냐, 날아가게 되느냐 그것부터 답하라는 거야, 하하항. 그만큼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지만 명을 걸다시피 한 거예요. 그래서 염려 마시라고, 목에 깁스를 하셔도 될 거라고 했더니 막 웃고 좋아해요. 그러고선 당장 각하한테 보고를 드리겠다고 그러더니 정말 즉각 보고를 올린 모양이야. 사무실에 와있으니까 금방 대통령한테 들어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대통령께서도 궁금해 하시니까 지체할 시간 없이 청와대로 들어가 경과보고를 드렸지요.”대통령의 반응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박 대통령은 배를 주문받아야 차관이 된다는 그런 절차를 모르시잖아요. 그래서 조선 자금만 얻은 게 아니라 배 두 척까지 주문을 받아왔다고, 계약서 보시라고, 그랬더니 뭐 어디 비할 수 없이 좋아하셨죠. 파안대소하시는 거야. 그러면서 정부가 전적으로 도와줄 테니 기공식부터 곧 하라고 말이지. 하하항.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께서 탁자 서랍을 열더니 사업계획서를 꺼내시네? 우리가 처음에 대통령한테 보고한 사업계획서가 있었잖아요.”아니, 그걸 2년 가까이나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까?“그걸 대통령이 보고 계셨던 거야. 선생 출신이라서 그런지 꼼꼼하게 하나도 안 버리고 가지고 계시는 거예요. 나는 다 버리고 내용도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러니 거기에 보면 향후 20년까지 내다 본 최대 건조 능력·장비·기자재·부지 매입·건조 인력·건조 기술, 뭐 잔뜩 들어있거든? 식은땀이 나는 거야. 그걸 보고 계시니 어떤 내용을 하문하실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아니나 달라? ‘정 회장, 차관도 됐고 배도 수주했고 부지도 마련이 됐다 했고, 그럼 남은 문제는 뭐요?’ 이러시네? 부지는 물색만 했지 매입은 아직 한 게 아니란 말이야. 건조기술이니 인력이니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시에 기술자가 어딨어요? 26만t 배는 봤다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지만 원래 사업계획서는 말 그대로 계획서니까 뻥이 좀 들어가잖아, 하하항. 좌우간 대통령 앞에서 우물거릴 수도 없고 계획서 내용은 생각 안 나고 죽겠는 거야.”뻥을 좀 넣었다고 그러시지 그랬습니까?“2년씩이나 갖고 계셨는데 그게 될 소리야? 더구나 좋아하시는 양반한테 실망시켜 드릴 수 있어? 우선 하문은 피해가야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시작이 반이라는데 수주까지 해왔으니 반도 더 나간 셈이라고 큰소리쳤지. 그렇게 해서 대충 넘어가야지 어떡해. 아, 그랬더니 이 어른이 안색이 달라져요. 계획서를 덮고는 정색을 하시면서 ‘정 회장, 이 사업이 처음이고, 반드시 성공해야 되는데 시작이 반이라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런 속담 때문에 우리 제품들이 엉망이라고, 우리는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일본에는 그런 속담이 없다고, 일본에는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아예 없고 끝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고, 다 해놓고도 반밖에 못했다는 자세로 다시 살피고 검토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조선소 짓고 건조를 해야지, 그렇게 들떠서 되냐고’. 아이구…. 웃음이 싹 사라지는 거예요. 나중에 일본에 알아보라 했더니 진짜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없어. 무조건 알겠습니다 하고선 일어섰지 어떡해. 그러니 그때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조선소를 짓는 거예요, 하하항. 그 말을 잊지 못해. 아주 혼났어.”차관은 해결됐고, 그러면 조선소 건설을 본격화했을 것 아닙니까? 대통령은 부지 매입이 다 된 걸로 알고있는데 현장을 보겠다고 오시면 어떡하실 생각이셨습니까?“그래가지고 사실은 차관 얻어온 걸로 땅을 샀어요. 땅을 부랴부랴 샀는데 그때에 땅이 참 쌌죠. 전부 평당 몇천원씩 했으니까. 만약에 땅주인들이 대통령께서 현대가 부지를 확보한 걸로 알고 계신다, 그런 정보를 알았으면 땅값을 막 올렸을 거야. 땅을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니까 붙잡고 더 내라면 별수 있어요? 하하항. 근데 그걸 모르니까 그쪽에서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막 샀지. 그랬더니 난데없이 땅투기 한다고 난리 났어. 남의 속도 모르고 땅투기가 뭐야? 내 평생에 땅투기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100만 평이 넘는 땅이라야 된다 싶어가지고 막 사들인 건데 그게 될 소리예요? 근데 진짜 대통령이 내려오신다고 연락이 오잖아요.”벌판에서 기공식… 박 대통령 참석기공식이라야 도크도 없이 하는 거니까 벌판에 중장비 쭉 세워놓고 주민들 모아서 하는 것 아닙니까?“그러니깐 광활한 벌판으로 만드는 거예요. 천지개벽을 시키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놓고 거기다가 어머어마한 태극기 하나 만들어서 아주 높다랗게 꽂아놓고 이쪽에서 보탕(버튼) 딱 누르면 저 끝에서 펑하면서 오색 먼지가 치솟고, 그게 기공식이거든? 그러자니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막 미는 거지, 하하항. 그렇게 해서 대통령을 맞이했는데, 이 어른이 얼마나 흐뭇해 하시는지 기공식에서 연설 원고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하항.”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⑨ 도크도 없이 배 엉덩이부터 만들어일본 전문가들도 놀라 - 거꾸로 공법으로 세계 기록 세워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거행된 울산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의 기공식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중공업의 기공식이었다. 박 대통령은 조선 산업에 거는 기대도 남달랐겠지만 이른바 4대 핵공장 건설이 시사하는 경제적 의미를 눈으로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지 국무위원들은 물론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각국 대사들까지 기공식 현장으로 초대했다.

울산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사였다. 5000여 명이 행사장에 집결하자 식당 하나 변변하게 없던 울산에 ‘좌판식당’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저녁이 되자 밤늦도록 카바이드 가스불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행사장 입구에 내건 ‘50만t급 초대형 울산현대조선소 기공식’ 간판에 붙었던 수백 개의 풍선들도 막걸리에 취한 듯 멋대로 흔들리며 흥을 돋우었다.

연설 원고에도 없는 즉흥 연설을 할 정도로 박 대통령 기분이 좋았다면 조선소를 건설할 현장이 마음에 드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아주 흡족해 하셨지요. 기공식이 끝나고 그 많은 내빈이 단상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현장을 떠나시지 않는 거야, 하하항. 그러면서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도크를 팔 위치냐, 저기 수심은 얼마나 된다고 그래? 이러면서 관심을 보이시는데, 내가 물속에 들어가 봤어야지? 그냥 충분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이러는 거지요, 하하항.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암행까지 시키셨더라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도 몰랐지. 대통령께서 내려오셨을 때 인사를 드리니까 ‘수고가 많았다면서’ 이러시거든? 그 말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암행을 시켰다는 암시였어. 원래 울산에 공업도시를 세우자고 건의했던 사람이…앞머리가 좀 훤하게 넓은 그 사람, (기억이 가물한 듯) 아이구…그 왜 있잖아요, 대통령이 두목이라고 불렀던 사람, 몰라? 대통령이 약주만 드시면 허벅지 자꾸 찌르면서 좋은 거 불러오라고 해서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고 했던 사람, 하하항. 입에서 뱅뱅 도는데, 나중에 장관까지 했지만 대전 사람. (김용태 장관이라고 하자) 그래! 그때는 국회의원 했는데 그 사람을 내려 보내가지고 샅샅이 보고를 받으신 거야. 공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부 알아보라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김 장관은 민심탐방까지 했다는 거예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철거시키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놈들, 하루 2만 평 이상 밀지 못한 놈들, 막 조지고 그랬거든? 그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거야. 하하항. 그래도 뭐 수고했다는 거 보니까 좋게 보고를 받으신 모양이지?”

대통령에 혼쭐 난 태완선 부총리

원고에도 없는 연설을 할 때는 어떤 내용을 강조하셨습니까?“그때 김학렬씨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건설부 장관을 하던 태완선씨, 경상도 사람인데 그 사람이 부총리로서 따라왔어요. 김학렬씨가 아주 머리도 좋았지만 열정을 가지고 마음 고생을 무척 하셨는데 참 마음이 아프고 안 됐어. 부총리 석에 앉아서 진심으로 축하해줄 양반인데 말이지. 근데 재미있는 건 태완선 부총리가 대통령이 원고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니까 처음에는 가만 있더니 연설문을 자꾸 앞으로 넘겼다가 뒤로 넘겼다가 찾느라고, 하하항. 말씀의 요지는 그거야, 참 꾸밈이 없고 현실적인 얘기예요. 모든 주민들하고 어민들한테 협조하라고, 여러분 자제들은 바다에 나가 어렵게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불행도 겪고 하는데, 앞으로는 조선소에서 일하게 될 것이고, 고기 잡는 것보다 몇 배의 월급봉투를 집으로 가져가게 될 거라고, 그러면 바다에 잃어버리고 눈물을 보이는 가정도 없어질 것이고, 학교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자제들은 조선소로 보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공부시킨 자제들은 출세도 할 수 있다고, 울산에 일자리가 많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지방에서 몰려드는 인구도 늘어나고 그러면 장사하는 사람들도 얼굴이 펴질 게 아니냐, 모든 것이 다 좋은 일을 맞을 수 있으니까 현지 주민이나 모든 어민이 협조를 해주시오, 그런 말씀을 해요. 그만큼 조선소 건설에 기대와 집착이 크셨던 거지만 전부 현실적인 말씀 아니에요?”

그 당시 태완선 부총리가 조선소 건설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해서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날이야. 그것도 나중에 알았는데, 대통령이 화를 내셨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부총리 때문에 그랬다는 거지요.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가 바닷가 황무지에 천막 하나 쳐놓고 기공식을 했었으니까 거기는 대통령께서 식사할 데가 없어요. 그렇다고 식사를 따로 주문하는 것도 대통령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고. 미리 비서실에 의견을 구하니까 절대 준비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되니깐 대통령께서 기공식 끝내고 대구로 올라가서 국회의원 몇몇 하고 수행한 장관들, 대사들, 관구사령관들, 그렇게 여럿이 저녁을 하셨어요. 그때 대구 관구사령관이 채명신 장군이었을 거예요. 문제는 거기서 있었던 거야. 나는 현장에 있어야 되니까 수행을 못 하고 나중에 얘기만 들은 건데, 그때가 저녁이니까 식사를 끝내고 술을 한잔씩 할 거 아니에요?”

“도크야 큰 수영장 하나 파는 것”

부총리 발언은 은연 중에라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깐 본의 아니게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신 거예요. 부총리도 그렇지, 부총리 된 지 얼마 안 됐다 해도 그 어른이 조선소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알 거 아니에요. 4대 핵공장이라고까지 했는데 말이야. 그러니 그런 것만 봐도 박 대통령이 아니면 조선소가 될 수 없었지요. 이런 얘기는 나중에 채 장군이 내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해준 거예요. 대통령의 집념이 대단하시더라, 부총리가 한마디 했다가 대통령한테 호통을 당했다고. 하하항. 호통을 당해도 싸지, 조선소 건설이 어디 개인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더구나 기공식 현장인데도 대통령이 직접 내려오셨는데.”

영국에 가셨을 때도 조선소 도크를 목욕탕 욕조 만들 줄 알면 만들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말을 중단시키며) 아니, 그건 말이지, 일테면 이런 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쪽으로 발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야. 도크가 절대 간단치 않아요. 그거 만들면서 희생자까지 생겼어. 태어나서 구경도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 어떻게 간단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뭐든지 일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지. 지금이야 조선소가 세계적인 규모고 수주량도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니까 조선소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몰라요. 요즘 근로자들이나 일반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 해봤자 모른다구. 원래부터 있던 거 아니냐고 하는 판국에 이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그때는 뭐든지 어려울 때고 규모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엄청나다는 건 아니까 겁부터 먹고 있단 말예요. 그러니 나까지 어렵게 생각해서 되겠어요? 그래서 도크야 뭐 큰 수영장 하나 파는 거라고 했던 거지. 하하항.”

정 회장도 신이 나면 시차를 초월해 얘기할 경우가 있다. 회고 중에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세울 때 배보다 몇 배 두꺼운 강판을 용접하고 모든 것을 새지 않도록 용접했는데 배는 거기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도 했다. 현대조선소가 도크를 완공하고 1호 선박을 진수시킨 것이 1974년 6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 시대의 문을 열었던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상업운전이 78년 4월이니까 그 전에 본공사에 참여했다고 해도 시점상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 회장이 보여주는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그는 불모지에서 거대한 조선 왕국 건설을 실현시킨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것이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자금 문제를 어렵게 해결했습니다만 리바노스의 배를 공기 안에 건조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지 않습니까?

“우리 조선소는 도크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배를 짓는 것도 그렇고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어요. 자료 찾아보세요, 세계 조선사에 남아 있는 기록이에요. 72년 3월에 맨땅에다가 빔을 박기 시작해서 74년 6월에 첫배를 진수시켰으니 말이야. 그것도 26만 t이나 되는 거대한 배를 말이지. 2년 만에 도크 만들고 건조까지 한다는 건 상상을 못하는 일이지요. 그럼 그걸 어떻게 해냈느냐, 그것도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배를 거꾸로 만드는 거야. 도크도 없지, 철판 자르는 공장도 없지, 그렇다고 도크를 완공할 때까지 기다리면 세월 다 가는데 언제 배를 만들어? 원래는 도크부터 만들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를 설계대로 조립해나가는데 그게 돼? 그러니깐 배 엉덩이부터 들이밀어가지고 도크가 만들어지는 진도를 맞춰서 선수를 조립하고, 배 몸체를 들여놓고 그런 식으로 해나간 거예요. 마구 밀어붙이는 식이지만 기다려서도 안 되고 더 나가서도 안 되니까 아주 치밀하게 진도를 맞추는 거고 도크를 만들면서 배를 짓기 땜에 절대로 치밀하지 않으면 죽어! 그런 식으로 거꾸로 배를 지었기 때문에 세계 신기록을 세운 거야, 하하항.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절대 리바노스의 배를 제 공기에 맞출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도 그런 공법이 있었습니까? “있긴 뭘 있어, 다른 조선소에서는 상상도 못한 거지. 그러니깐 한번은 가와사키하고 미쓰비시에서 현대가 조선소를 만든다고 하니 격려를 해준다고 왔어요. 겉은 격려고 속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구경이나 하겠다는 심보로 온 거야. 그 친구들은 아직 도크도 완공이 안 됐으니까 건조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한 거지. 근데 현장을 보더니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예요. 갑자기 땅이 꺼졌나 근처에 다른 조선소가 있었나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지, 하하항. 도크는 도크대로 파고 있고 한쪽에선 엉덩이부터 밀어 넣고 막 용접을 하고 있거든? 이게 뭐냐 이거야. 뭐긴 뭐야, 정주영 건조법이다 그랬지. 하하항.”

그렇게까지 하자면 조선 기술이 있어야 했을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우리나라에 조선 기술자가 있기나 했나? 우린 더구나 건설회사에서 출발했잖아요. 김영주 회장(정 회장의 매제·당시 상무)이 여기 있는 친구 저리 빼고 저기 있는 친구 이리 빼내고 하면서 배를 구경만 했어도 다 끌어다가 훈련시키고 부려대느라고 완전히 십장 노릇 했지만 그것 가지고 돼요? 어림도 없지. 정말 막막하고 힘들었어요. 그때 영이(김영주 회장을 영이라고 불렀다)가 반쯤 죽었을 거야, 하하항.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전국 엿장수 죄다 울산에 왔어”

철판 잘못 잘라 고물상 좋은 일만…일본 기술 배우려 몰래 ‘눈 사진’ 찍기도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⑩

조선소 건설의 최대 장벽은 기술 문제였다.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은 첫 장벽을 넘는 것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 주머니에서 빼오는 것이라 차관 도입이 가장 넘기 어려운 장벽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조선 기술자들을 모집했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지원자들이 몰려왔지만 조선소가 원하는 기술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26만t급 선박을 건조해야 했으니 당시 형편을 들으면 누구라도 비웃을 일이었다.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의 회고도 함께 들어보았다.

“현대가 1972년 3월에 기공식을 하고 그해 연말까지도 내 기억으로는 엔지니어들을 영국하고 일본으로 교육을 보냈어요. 영국도 몇십 명이 갔지만 일본으로 많이 보냈어요. 그래 가지고 일찍 교육 갔다왔던 사람들이 배를 건조할 기능사원들을 교육하고 그랬거든요? 선박 공장도 그때 막 기초가 올라가고 완성이 안 됐고 도크도 안 돼있었으니까 기능 인력들을 그냥 놀릴 수 없어 교육을 했는데 이게 교육이 제대로 됩니까? 요즘 기능공들에 비해 순수한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성이 착했지만 심성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맞는 말이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뜨내기 인생을 사는 쟁기 쥔 농사꾼에게 용접봉을 들려줬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 당시라면 어디 가서 배울 곳도 없었을 것이고, 생활 환경도 열악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현대가 자체적으로 처음부터 막 교육을 하는 겁니다. 정말 기초부터 시켰어요. 그런데 기능공들은 나이가 천차만별이고 교육 시키는 사람은 젊잖아요? 과장, 차장급들이 시켰으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리 가르쳐도 손이 굳어버린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 해서 ‘등신같이 이것도 못하느냐’고 했다가 파업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하항. 그래도 배우겠다는 열성은 대단해서 마찰이 생겨도 금방 풀어져요.”

기술 가져오는 게 당연히 힘들었을 것 같네요. “기술을 가져야 먹고 사는데 다른 곳에서 돈도 주고 기술 가르쳐 주는 데가 있나요? 그러니 열심히 배우는 거지요. 그런 속에서 다들 성장을 했는데, 그때 조선소 앞으로는 포장이 안 돼 가지고 시내에서부터 버스가 하루에 6회 왕복밖에 안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산동네에 방을 얻은 친구들은 아침마다 마라톤이야, 늦어서. 하하항. 그러다가 조선팀이 정반 작업에 들어가면서부터 회사 주변에 간이주점, 간이식당, 여인숙, 이런 것들이 많이 생겨 그나마 조금 나아졌죠. 그때는 현대조선 식권이 현찰하고 같았어요. 식권 가져가면 밥도 주지만 담배, 술, 심지어 택시도 받아요. 식권 따먹기 화투도 많이 하고. 하하항. 배를 당장 만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현대중공업 식권 따먹기 교육은 어떤 걸 주로 시켰습니까?“그때는 두 가지예요. 자질이 좀 우수하고 경력이 많은 사람은 해외 기능 연수도 보냈어요. 그 외는 전부 기초에서부터 실습을 겸해 정반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현재 플랜트 사업본부가 있는 자리쯤 되는데, 제일 먼저 지은 게 선박 공장이거든요? 그러니까 선박 공장 밑에다 까는 격자 정반이라고, 배 몸체를 만들려면 땅바닥에다 놓고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철판으로 격자를 깔고 그 위에서 만들어야 되는데, 그 정반 만드는 실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아까운 걸 몰라요. 멀쩡한 철판이 얼마나 날아가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회장님한테 혼났지, 하하항. ”

그래도 필요한 인력은 초기부터 채워서 시작을 한 셈이군요.

“원래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체계적으로 돼 있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주로 신문 광고를 통해 모집을 했지요. 그러니까 전국에서 모여든 겁니다. 그런데 규모가 작더라도 조선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대를 해 많이 뽑았구요, 나머지는 전부 뽑은 다음에 훈련을 시켜 보충했어요. 그래서 72년 말, 그때쯤 보니까 1500명쯤 됐다가 우리가 73년 3월인가? 블록(Block)을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블록은 배의 몸체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박 공장이 채 완성되기 전부터 블록을 만들었는데 그땐 기능인력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죠. 금방 1만 명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

이런 환경에서 거대 선박을 건조하겠다고 덤벼들었으니 정주영 회장의 배짱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일을 해보겠다고 응모한 사람들은 거의 받아들이도록 지시했다면서 기능공들도 우수했지만 조선에 대한 기초교육만 받은 직원이라면 ‘한 놈도 버릴 게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을 모두 감싸며 끌고 갔다.

해외에 내보내 6개월 정도 교육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선소 건설이 가능했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지금껏 이런 소리 별로 하지 않았는데,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젊은이만큼 두뇌가 우수하고 적응력이 빠른 친구들을 보지 못했어요. 거기다가 거의 비슷하게 골고루 우수해. 눈도장 찍는다는 말 들어봤어요? 그거 아무나 못하거든? 현장을 한번만 보면 설계도면 못지않게 그대로 뽑아내. 아주 우수해요. 그건 기본이 돼 있다는 소리 아니야? 몇 번 만났다고 했던 전갑원(전 현대건설 부사장)이, 그 친구를 데리고 내가 가와사키 조선소하고 미쓰비시 가야키 조선소를 갔어요. 구경만 하기로 하고 간 거야. 사진 한장 못 찍게 하니까. 정말 구경만 하고 나왔어. 근데 숙소에 돌아오더니 전갑원이, 이 친구가 뭘 하는지 알아요? 금방 도크 규모를 그려내고 바닥 콘크리트 밑으로 수압을 밀어 올리는 유공관식이 어쩌고 하면서 드라이 도크 스케치를 해내는 거예요. 하하항. 그래서 ‘도크 규모를 어떻게 알고 그린 거야?’ 했더니 그날 전갑원이가 도크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한 바퀴 돌았거든? 그때 발걸음으로 재면서 걸었다는 거야. 하하항. 그럴 정도예요. 그런데도 아주 정확해. 나중에 미쓰비시 애들이 와서 보고는 뒤로 나자빠져요. 정말이야. 그러니 전갑원이가 그때 과장인가 그랬는데 전갑원이만 그런 게 아니에요. 김형벽(전 현대중공업 회장)이니 이정상(전 현대중공업 전무)이니, 백충기(전 미포조선 사장)니, 그중에 김형벽이는 아주 뛰어난 눔이고, 하여간 스콧리스고에 갖다 풀어놓으니까 이눔들이 걸어 다니는 사진기고 걸어 다니는 컴퓨터야, 그러고 단숨에 배워. 하하항. ”

“김형벽은 걸어다니는 사진기” 대단하군요. “진직(진작)부터 우리 국민이 우수하다는 건 알았지만 절망이 없다는 건 그런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확신했어.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네들이 무슨 고관대작들 아들이야? 특출하게 배우고 성장한 친구들이 아니잖아. 일반적인 보통 가정에서 자랐고 배운 사람들이니까 우리나라 평균 수준이라고 보면 되는데 조선소를 건설하지 않으면 니들도 죽을 각오하고 나도 같이 죽을 준비가 돼있다고 했더니 눈에서 불을 켜고 덤벼드는데, 그렇게 믿음을 줄 수가 없고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물론 교대로 60명씩 갔으니까 여러 엔지니어들이 스콧리스고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일본 사카이데 조선소에도 기술연수를 보내고 그랬지만 그네들이 제 역할을 200%, 300% 다 해냈어. 가령 김형벽이 보고 ‘기자재 구입해 와. ’ 이 소리만 하면 단 한 가지도 버릴 거 없이 싹 해왔어요. 지가 언제 대형 조선소를 보기나 했어, 25만t이 넘는 선박을 만들어보기나 했어? 그런데도 어떻게 조사를 하고 어디서 알아냈는지 그때 황 머시기라고 삼성으로 간 눔이 있는데 그눔하고 같이 구라파 각국을 다니면서 조선소를 짓는 데 필요한 크레인, 프레스, 커팅머신, 이런 기자재들을 전부 계약해서 수입해 오는 거야. 크레인만 해도 종류가 한두 가지야? 귀신들이야. 그래서 내가 그걸 보고 우리나라는 절대 안 꺼진다, 그 생각을 한 거예요, 하하항. ”

여담입니다만 건설쟁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자제분 중에 누가 가장 회장님을 많이 닮았습니까?

“나도 여담인데, 밖에서는 누구라고 그래요?(웃으며, 이건 녹음하지 말라면서) 사실 자식은 아홉을 배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사람의 몸이 아홉 구멍이 있단 말이야. 이건 조물주의 뜻인 것 같거든? 근데 구멍이 모양도 틀리고 역할도 다 틀리잖아. 그러니 누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어? 지 역할이 다 있는데. 하하항! (한참 웃다가)맹자가 그랬지? 천하의 우환 가운데 하지 말아야 될 세 가지만 지키면 대대손손 우환이 없다고 말이야. 그중에 하나가 애비가 자식들을 비교해 욕하지 않는 거래요. 누가 가장 닮았는가 얘기하면 나머지는 평생 나를 서운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모른다구 해야지. 하하항. ”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웃음). 모든 여건이 부족했지만 극복해 나가셨는데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때 전국에 있는 엿장수하고 고물 장수들은 죄다 울산에 왔을 거야, 하하항. 기술자들이 6개월 훈련하고 돌아오는 건데, 그 사이에 공장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지어져서 철판을 자르는 교육을 받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근데 이눔들이 철판을 자르는 게 미숙하니까 그걸 현장에서는 ‘기리빠시’라고 그러는데 일본 말이죠, 아주 쉬운 도면부터 앞에 놓고 자르는데도 멀쩡한 철판을 전부 조각조각 내서 기리빠시로 만들어 버리고 말이야. 그걸 또 혼날까봐 저 암벽 있는 쪽에다가 버리고. 그러니 고물장수, 엿장수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야. 엿이라도 바꿔 먹지, 엿 먹다 들키면 들통날까봐 그 짓도 못하고 말이지, 하하항. 참 순진했던 거지요. 그러니 돈도 수없이 처넣고 시행착오도 엄청 경험했지만 그렇게 조선소를 만들어 나간 거예요. ”

정 회장의 회고에는 부정적 시각이 없다. 지나간 일들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왕과 신하 사이에도 정은 끊을 수 있지만 무지를 탓하지는 않는다고 했듯이 그들을 비난했으면 몸을 던져 일할 사람들이 곁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홉 구멍과 아홉 자식

얘기를 들어 보니 건설 자재들도 착오가 많았다면서요.

“그건 부지기수예요. 국내에서 오륙십만t급 도크를 짓는다는 것부터가 건국 후 처음이니까 전부 모르는 것뿐이고 겁이 나잖아요. 그런데 의욕은 대단하니까 처음부터 최고로 만들어야 된다 해서 엉뚱한 짓을 많이 했지요. 지나고 보면 엉뚱한 짓이에요. 그런 일이 숱하게 많았어요. 일테면 자갈까지 외국에다 주문을 했어. 그래서 나중에 자갈을 갖고 왔는데 보니까 그나마 강도가 약해서 못 쓰는 거야. 그러니 그걸 전부 버리고 우리 한국 자갈을 썼어. 그렇게 서툴렀다는 거지요. ”

그런 여건에서도 기록적인 조선소 건설을 하셨으니까 해외 조선사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 엉덩이부터 들이밀어서 건조를 하고 아주 치밀하게 진도를 맞추고 그렇게 해나가는데 미쓰비시에서 말로는 격려를 해준다고 왔지만 조롱하려고 들여다보고는 나자빠진 거 아니에요. 그니깐 조선소 하나만 짓는데도 다른 나라 같으면 최소한 3년은 걸려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3년이 안 돼서 큰 조선소도 완공시켰고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배까지 건조해서 양도를 했으니까 말이지요. 이건 세계 조선사 어디에도 없지요. 그래서 세계 조선 역사에 많은 신기록을 낸 거예요, 현대 조선소가. 하하항. ”<계속>

 

`멍청한 것들 만날 시행착오야`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⑪

주문 많이 해 물자 태산같이 남아…그래도 후회한 적 한 번도 없어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⑪

전 세계 조선사들의 선박 수주와 건조 실적을 매년 발표해 온 일본의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가 공식적으로 선박 수주와 건조 물량에서 한국의 현대중공업(조선 부문)이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조선 부문 세계 1위로 선정됐다고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1985년이었다. 그 후 현재까지 몇 번의 순위다툼은 있었으나 세계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현대중공업이지만 세계 1위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13년이었다.

허허벌판에서 기공식을 한 후 13살의 나이에 세계 조선업계를 석권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적 통계를 보면 별도의 조선소 건설 기간도 없이 지난해(2006년) 말 집계로 전 세계 45개국 229개 선주로부터 1230여 척을 수주해 현대그룹 계열사가 운항하고 있는 단 1척을 제외하고 모두 성공적으로 인도했고, 여기에 선박 종류까지 살피면 만들지 않는 것은 있어도 만들지 못하는 선박은 없다고 할 정도가 된다. 이러한 저력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을까? 힘의 밑거름이 됐던 과거사를 정주영 회장은 육성으로 남기고 있다.

“스코트리스고 측에서는 선박 기술을 자문하는 거지요. 토목공사는 우리가 스코트리스고보다 나은데 자기들이 뭘 참여해요, 하하항. 입지는 언젠가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나? 남궁연씨라고 있어요. 옥포조선소라는 것을 하다가 본인은 실패하고 대우로 넘어갔지요. 나도 얘길 나중에 들었는데, 그 양반이 아주 귀한 정보자료를 가지고 있었대요. 일제 때 일본애들이 우리나라 해안, 수심, 조류, 이런 모든 걸 조사한 자료를 입수해 가지고 있다가 혁명 나고 김용태 최고위원한테 줬다는 거예요. 기공식도 하기 전에 암행을 왔다는 사람 말이에요. 그 양반이 사실상 전경련도 만들었으니까 혁명 나고 기업인들을 많이 접촉했을 거야. 김용태씨가 박정희 의장한테 건의해 울산공업단지를 구상하게 됐는데, 그때 그 자료에 보면 미포만이 최고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에서 우리나라 해안 정보는 다 가지고 있었던 거고, 그거 얘기 다 하자면 길어요.”

日, 가지마건설이 설계 맡아

일본에서 조선소는 가지마건설이 도맡아서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쿠라마 소장이 자문을 하면서 한국말을 배워가지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남겼다는데 회장님도 들으셨습니까?

“하하항, 가지마건설을 된발음으로 하면 카지마가 돼요. 우리 직원들도 카지마, 카지마, 그랬어. 그런데 울산 사람들이 경상도니까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그카지마, 그카지마, 그러거든? 근데 그때 조선소 밖에 찻집이 하나 생겼던 모양이야. 연구소장이 점잖은 사람인데 어쩌다 거기 레지 손을 한번 잡으니까 그 아가씨가 ‘그카지 마요 그카지 마요’ 그랬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소장이 ‘응, 나야, 응, 나야’ 그랬다는 거야, 하하항. 그카지 마요 하니까 자기가 그 카지마 맞다 그거지. 그래가지고 사이가 좋아져서 우리 직원들이 엄청 자료를 얻었대. 나도 얼마나 웃었는지 말이야. 하하항. 별일 다 있었지.”미쓰비시조선소도 가지마에서 짓지 않았습니까? “맞아. 미쓰비시와 가와사키 조선소도 건설은 가지마건설이 맡았어요. 우리가 처음부터 가와사키 규모 이상으로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에 가지마의 자문을 받은 거지요. 그런데 규모나 공장 레이아웃은 스코트리스고에서 자문을 했으니까 기본 도면은 영국에서 가져왔고, 건조에 필요한 상세도면이 없었는데 그것은 가와사키에서 얻었어요. 젠지 우메다 회장하고 아주 가까워서 그걸 얻은 거예요. 배를 건조하자면 반드시 있어야 되는 상세도면인데 그걸 아무나 주나? 사실 그분 덕분에 첫 배를 완성시켰어요. 상세도면에 대해 지도도 해 주고. 도면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거든. 도면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와사키가 전적으로 잘 도와주지 않았으면 첫 번 배를 제 날짜에 만족스럽게 만들어서 인도하기가 힘들었을 거예요.”당시 건조 현장에서 뒹굴었던 엔지니어들의 기억은 가와사키가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섬세한 설계를 제시해 과연 그대로 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이 많았다고 했다. 현장의 건조팀들은 가와사키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잡아먹게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도 그랬던 기억을 풀어놓았다. “우리가 6호선까지는 일본 가와사키(KHI)조선소의 설계로 제작을 했고, 7호선부터 현대도 설계에 참여해 8호선부터는 현대가 독자적으로 기본 설계를 했는데 초창기 때는 가와사키도 감독을 했지만 유럽 쪽에서 감독이 많이 왔었어요. 선박 건조를 우리가 잘 모르니까요. 그럴 때 도면상으로 요구한 것이 정밀기계 허용오차 정도로 아주 정확하게 만들라고 돼 있었단 말입니다. 그건 실제로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포항제철에서도 산소공장의 기초 같은 것을 할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기계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너무 정밀하게, 예를 들면 10배 이상으로 정밀하게 표시하는 일도 가끔 있었어요. 물론 왜 그렇게까지 요구하는 도면을 줬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골탕을 먹이고 시간을 끌게 하자는 속셈이 아니냐 하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결국은 당시 우리 엔지니어들이 너무 정밀하다 싶어서 일반적인 기준으로 해버렸거든요? 그랬더니 통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엔지니어들의 판단이 맞은 거지요.”설계도는 배를 발주하는 선주 측에서 가져오지 않습니까? “리바노스도 그랬지만 배를 수주할 당시에 선주들은 주로 중요 재원만 얘기를 하지요. 이러이러한 배다, 배기량은 얼마고, 짐은 얼마를 싣고, 엔진은 대략 어떠어떠한 것을 써라, 상세설계까지 선주가 해오는 경우도 극히 드물게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재원만 정해서 오면 그때부터 우리가 상세설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우리한테 설계를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와사키에서 완성돼 있는 설계를 가지고 와서 시작을 했지요. 그걸 일명 생산설계라고도 하는데 좌우간 시행착오라는 착오는 다 겪어가면서 한 거야.”자체적으로 설계 능력이 안 되면서 시작을 했으니 오죽 시행착오가 많았겠습니까?“발주자가 보내오는 1차 설계는 사실 설계도도 아니고 그냥 그림이거든? 자기들이야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 알지만 그걸 가지고 생산부에서 배를 만들 수는 없지요. 그래서 상세설계에 들어가는데 그때부터는 필요한 자재가 도면에 나오니까 즉시 자재 발주를 해야 되거든? 자재가 오늘 발주해서 내일 들어오는 게 아니고 구매 기간이 필요한 거니까. 철판만 해도 지금은 대부분 포항제철에서 들어오는데 그 당시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게 많아서 시간이 걸리지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자재 구매에서부터 시행착오야 멍청한 것들이 말이야, 하하항. 그래도 뭐 기업은 시행착오가 투자이기 때문에 후회는 한 적이 없지만 하여간 가와사키의 도움이 컸고 조선소 입지도 가와사키 회장이 직접 와서 나하고 같이 둘러봤던 기억이 나요.”조선소 입지는 적합성을 검토하는 일이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입지 선정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현대가 제2제철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사실은 남궁연 사장이 입수했다는 일본의 군사자료를 참고해 가로림 지역까지 조사했지만 그 많은 것을 일본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다. 여하튼 건설은 시작됐고, 공사 때마다 부닥치게 되는 기술적인 문제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진척이 될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가와사키 측이 자문을 해준다고 해도 상대는 회사가 아니라 기술자 개개인들이다. 회사의 원칙은 도와주라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기술을 쥐고 있는 엔지니어가 ‘꼬장’을 부리면 속에서 천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또 연수받으러 간 기술자들마다 재주가 있어서 기막히게 뽑아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처음에는 설계도면도 볼 줄 모르고 설계도가 없기도 해서 일본 것을 훔쳐오기도 하고, 열성들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훔쳐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훔쳐왔다고 혼낸 적도 한 번도 없고. 하하항. 일본에서 저네들끼리 술 한잔 하면서 얻어온 정보는 있을지 모르지만 훔쳐온 것은 없고, 가와사키가 협조를 잘 해주었으니까요. 다만 방금도 얘기했지만 뭣보다도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그때 수량을 뽑는 것도 보면 전부 잘못 뽑아가지고, 이를테면 철판을 주문하는데 배 6척 만들 만큼만 하면 되는데 얼마나 주문했는지 12척을 만들어도 물자가 태산같이 남았어. 그렇게 서툴렀다는 얘기예요. 당시에는 설계부장이라든가 그런 사람들이 전부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거든? 그런데 그 모양이었어. 시행착오지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나중에 현대에서 배를 하나 만든 경험이 있다 해서 삼성에서 데려갔지요. 배를 한 척도 안 지어보고 어떻게 박사가 됐는지 몰라, 하하항. 그게 다 미경험에서 오는 거예요. 지금 미포만에 가보면 당시에는 해변에 소나무 몇 개 있고 어촌이 몇 개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미포조선소 주변에만 약 20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니까 그 정도로 옛날 얘기다 그거지요.”실제로 초창기 시절을 들어보면 그 시행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은 아예 철판도 버리기 위해 자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만큼 엉성했다는 것이다. “철판이 들어오면 우선 배에 필요한 모양대로 잘라가지고 용접을 하게 돼요. 과거에는 리벳(Rivet)작업을 했지만 지금은 용접을 하지요. 그런데 이게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이, 철판 자르는 것을 부재라고 하는데, 그 부재가 수만 개가 됩니다. 그 수만 개가 각기 번호가 있고, 번호를 찾아서 맞춰주는 걸 배재(配材)라고 하는데, 이걸 끼워넣지 못하면 건조도 안 되고 엉망진창이 되거든요? 문제는 여기서 생기는 거예요. 그게 초창기고 경험이 없다 보니까 그랬는데 배재를 제대로 못 해요. 말하자면 잘라놓기는 잘라놨다고 하는데 후공 조이는 팀에서는 재료가 없다, 있어도 맞지가 않는다고 소리쳐요. 그러면 선공팀에서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잘라서 줬는데 왜 없느냐고 노상 싸워요. 그러니 시간은 급하죠, 부재 없다는 소리만 나오면 얼른 새 철판 갖다가 잘라요. 그래놓고 나중에 보면 잘라서 줬다는 게 다른 데 가서 처박혀 있고. 하하하. 철판 값이 오죽 비쌉니까? 회장님한테 혼나는 거지 뭐. 하하.”“이병철 회장도 조선소에 모셔와”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소들은 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그게 방금 얘기한 옥포조선소야. 남궁연씨가 하다가 대우로 넘어갔는데 한때 대우도 시련을 겪고 있어서 정부가 지원을 해주고 그랬지. 근데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건 미국에서 볼 때 덤핑이라는 거야. 하여간 남의 회사 얘기할 건 없고, 삼성중공업도 나중에 조선소를 만들지 않았어요? 그게 다 우리가 조선소를 만든 다음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이병철 회장을 우리 조선소에 모셨더니 ‘바로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이야, 아주 칭찬을 하면서 도와달라고, 그래서 흔쾌히 좋다 했더니 시작한 거예요. 하하항.”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삼성도 내가 권해서 조선소 했지”

현대서 회장 되면 이병철 회장에 신고…이명박 사장은 인사 가서 특강도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⑫

정주영 회장은 삼성이 조선 사업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연방 흡족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후일담이지만 정 회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하나는 기술자를 원하면 보내주겠다, 그리고 현대 계열사의 신임 회장들은 삼성에 인사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 세계에서, 더구나 사고무인(四顧無人·화려해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의 재계에선 신선한 얘기였다. 실제로 현대 계열사 회장 대부분이 삼성에 인사를 갔고, 정세영 회장이 그룹 회장이 됐을 때는 제일 먼저 이 회장에게 인사를 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건설에서 사장이 됐을 때 인사 갔다가 특강을 하라고 했던 일화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정 회장은 이 회장에게 애정을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 회장도 답례 차원에서 현대에 전자를 해보라고 권유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다. 삼성에 “맘껏 인력 뽑아가라”삼성에 조선소 사업을 권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로 들립니다. “그게 모두 현대조선소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다음이에요. 그것도 남한테 권해서만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직접 보여줘야 되거든? 그게 뭐든지 사업을 권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이고 예의예요. 우리 둘째가 인천조선소(한라중공업의 전신으로 1977년 1월 설립)를 맨든 것도 내가 해보니까 자신감이 생겨 시작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 조선업이 인제 와서 겨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데,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적자에 허덕이든 수지를 맞추든 그건 두 번째야. 중요한 건 어떤 업종이든 자꾸 부흥을 시켜야 한다는 거지요. 우리 현대조선소에서 육성된 사람 상당수가 대우조선에 흘러가고, 삼성중공업에도 갔어요. 이걸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거든. 선발 업체에서는 항상 후발 업체들에 인력을 넘겨주게 마련이지만 그만큼 현대조선소는 한국 조선업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에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삼성이 조선 사업에 뛰어든 이후 회장님이 직접 현장을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내가 현장엘 가면 이 회장이 속병이 생길 것 같아 안 갔어, 하하항. 나는 내가 생각하는 거 하고 다르면 막 혼을 내고,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라고 현장 책임자를 막 조질 테니까. 그러면 이 회장이 옆에서 보다 속에서 불이 날 거 아니야, 그래서 안 갔어. 하하항. 여러 번 자문에는 응해줬지요. ”그런데 이병철 회장님은 뭐든지 일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속마음을 풀어내는 방법이, 가만, 누구하고 비교를 하면 될까? 아, 타계했지만 동아건설 최준문 회장하고 견줘보면 아주 달라요. 하하항. 무슨 얘기냐 하면, 최 회장은 경쟁입찰을 해서 낙찰을 못 받으면 갑자기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혈압이 올라 금방 쓰러진다고 엄살을 막 부리거든? 그러면 입찰했던 우리가 ‘알았어, 알았어 당신 줄게’ 그러면 ‘정말이지?’ 이러면서 금방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야, 하하항. 그런 정도로 속상하면 재미있게 드러내놓고 떼를 쓰는데 이 회장은 전혀 그런 게 없는 양반이었어요. ”재계 회장단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농담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요?“농담은 가끔 하지만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 스타일이 다르다 그거지. 일이 안 풀려도 표정이 별로 없는 양반인데, 한번은 상의할 게 있대서 만나니까 그때가 조선소 시작하고서 2~3년쯤 됐을 거야. 77년 초쯤이니까. 조선소 가용 면적이 50만~60만 평도 안 되고 그랬을 땐데, 지금은 100만 평 가까이 될 거예요. 만나자 하고선 자꾸 딴소리를 해. 세계에서 제일 큰 도크를 지어야겠다, 도크 회전율이 어쩐다 하면서 말이야. 겨우 시작해놓고 아직 건조도 한 척 안 했는데 말이지, 하하항. 그래서 뭐가 문젠데 그러냐 했더니 우리 현대조선소를 가보고 자기네 거제조선소를 보니까 우선 규모가 작아서 되겠느냐고, 거제도를 몽땅 조선소로 만들고 싶은데 그런 얘기를 자신은 못하겠고 나보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바람 좀 넣어달라는 거예요, 하하항. 그런 양반이야. ”양에 차지 않는다는 걸 직접 표현하거나 잘 나서지를 않는 분이군요. “욕심이 있어도 최 회장처럼 넉살을 피울 줄 몰라, 하하항. 그러니까 일등은 해야겠는데 우선 규모에서 밀리니까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거지. 그래 가지고 내가 막 웃으면서 조선소 경쟁력은 땅바닥 경쟁력이 아니니까 수주부터 왕창 하라고 말이야, 그러면 내가 바람을 안 넣어도 대통령이 거제도보다 더 큰 땅도 구입할 수 있게 지원하실 거라고 말이지, 내가 이 회장 속을 알고 있거든? 그랬더니 그때서야 영업 잘하는 친구 2년만 빌려 달래, 하하항. 참 의욕적으로 했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조선 산업이 이만큼 온 거예요. 우리도 아낌없이 도와주겠다 했지만. ” 조선 산업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현대조선소가 첫 삽을 뜬 지 13년 만에 세계적인 조선사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차지했지만 정 회장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날 삼성중공업·대우조선·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등이 1위에서 5위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씨앗을 나누고 최대한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사들의 ‘중국 이전’은 우울하게 들린다. 최근 STX그룹이 중국에서 석유제품 운반선과 자동차 운반선 등 11억 달러에 달하는 선박 건조에 나서기로 했고, 그것이 2009년이면 중국 다롄 현지 조선소에서 선주들에게 인도되기 시작한다고 알려졌는데, 정 회장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하는 것은 기자만의 착잡함이 아닐 것 같다. 조선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잊지 못할 사고가 있었습니까?“큰 공사를 하면서 사고야 없을 수 없지만 그것도 70년대니까 일어난 거지 지금 같으면 그런 사고는 있을 수 없지요. 도크를 만들 때 참 충격이 컸던 사고가 있었지만 결국 해결했고 그 과정에서 지금 후랜지(한국프랜지) 하고 있는 김영주 회장이 고생을 많이 했지. ”김영주 회장이라면 회장님 매제가 되지 않습니까?“밖에서는 자꾸 집안 관계를 가지고 다들 얘기를 하는데 기업이 크면 그런 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그래서 내가 공석이든 사석이든 직책을 부르라고 불호령을 내려둔 거예요. 기업을 핏줄이 성장시키나? 김영주 회장은 내가 아도써비스(자동차 수리공장) 할 때 단골손님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기계에 관해서는 고치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신통력을 보였거든? 직원들도 아주 희한하다구 그래요. 고장 나 멈춰있던 장비도 ‘영이’(김영주 회장을 가끔 그렇게 불렀다)가 다가가기만 하면 움직이더라는 거야, 하하항. 그렇다고 영주 회장이 학문에 기초한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 학문이라는 건 항상 현장 기술보다 뒤떨어지는 건 틀림없지만 좌우간 원리나 구조를 귀신같이 짚어내는 신통력이 있어요. 경험도 많고. 그래서 도크 공사 때 사고도 영주 회장이 해결을 본 셈인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한번 들어봐요. 재미있는 내용을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거야. ”김영주 회장(한국프랜지 명예회장)이 장비만 잘 다루는 게 아니었다. 건설 현장에서도 그의 능력은 탁월하게 돋보였다. 건설 기술자로는 국내 최고를 자부한다는 서울시 건설국장이 공사 현장에서 김 회장을 만나면 소문 없이 없어진다는 것도 그의 능력 때문에 나온 소리였다. 더욱이 그는 건설 현장에 서면 무서운 존재였다. 창업주의 매제라는 점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으나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현장에서는 ‘호랑이’였다. 그런가 하면 공사 현장에서 인명 사고가 나면 언제나 송장 옆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그였고, 어려움을 당한 직원을 보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보증을 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김 회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언제나 ‘왕 상무’였다. 왕 회장은 있어도 왕 상무는 어느 조직에서도 없는 것인데 유독 그에게만 그런 칭호가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김영주 회장의 회고도 들었다. “조선소 건설할 때를 얘기한다면 이건 전쟁입니다, 전쟁…. 무기나 제대로 있나? 맨손으로 싸우는 전쟁이었다고 하면 말 다한 거지요. 배를 건조하는 것도 그렇고 도크를 파는 것도 그렇고, 기술자도 없고 경험도 없고, 그러니 회장님은 만날 복통이 터져 미치겠다고 그러셨지요. 그렇지만 착오가 있을 것이다 하는 건 예상했기 때문에 문책은 안 하셨는데, 그게 회장님의 큰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많은 블록들이 쌓이고 버려지고 하는데 그 돈이 얼마요? 더구나 차관을 들여와 하고 있는데 말이지.”정 회장님은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을 때 회장님(김영주)이 수습을 많이 하고 해결도 봤다고 하시던데요. “그게 한두 번이라야지, 하하. 내가 맨 첨에 내려온 동기가 도크 때문에 왔어요. 고속도로를 끝내고 문산 쪽에 1차 공사를 마쳤는데 회장님이 불러요. ‘니가 내려가야겠다 ’. 회장님은 딱 그 말씀밖에 안 하는 분입니다. 그러면 나도 이유 같은 거 일절 묻지 않고 무조건 ‘알겠습니다’, 이 한마디뿐이에요. 근데 그날은 ‘일본 가지마건설이 전 세계 도크 건설을 한 70% 정도 하는 회사인데 거기서는 하루 물량을 3000㎥ 처리했다고 하더라. 우리는 체면상 2000㎥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쓰는 장비를 다 주신다면 저도 3000㎥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때 재정이나 모든 면에서 가지마에 있는 그런 장비를 수입해 올 형편이 됩니까? 고속도로에서 쓰던 헌 장비를 끌어내서 전부 수선해 그걸로 도크를 팠어요. 그런데 가지마 겐조시 회장과 우리 회장님이 친하게 지내시니까 시공 조언을 해준다고 부장급 두 사람이 왔는데 한 달 반 만에 갔습니다. 왜 갔느냐, 저들은 그 좋은 장비 가지고 24시간 작업해서 3000㎥ 했는데 나는 4500㎥를 했어요. 그 구식 장비 가지고. 그러니 자문을 할 게 뭐 있어요? 누구든지 이런 얘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 피로가 몰려오질 못해요. 하루 2, 3시간씩밖에 못 자고 한 거예요. ”석 달 걸릴 일 16일 만에 해치워그러면 사고는 도크가 완공된 다음에 일어난 겁니까? “건설을 다 해서 배를 집어넣고 한참 건조하고 있을 땐데, 도크에 물이 올라와 난리가 났어요. 갑자기 작업하던 사람이 둥둥 뜨고 어떤 친구는 두꺼운 옷을 입고 용접 장비까지 들었으니 물속에 처박혀 나오지도 못하고 죽느니 사느니, 하하하. 회장님은 열이 나서 막 고함치시고, 하하하. 그래서 딱 사고 난 그 시점에 지프 한 대 갖다놓고 거기서 자고 밥먹어 가면서 16일 만에 끝냈어요. 일본 사람들이 빨라야 석 달 걸린다는 걸 16일 만에 끝냈는데, 지금까지 안전하니까요.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진짜 1초도 빈 틈을 안 주고 다음은 이걸 보수하니까 뭐 갖다 놔라, 2시간 후에는 무슨 장비가 필요하니까 무조건 대기시켜라, 3시간 후에는 무슨 장비다, 이게 착착 맞아떨어지도록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작업을 지시하니까 그 엄청난 위기를 해결하게 된 겁니다.” <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왕 회장 같은 인물 결코 못 나와요”

논리적으로 성립 안 되는 일 해내…잘 몰라서 엄청난 일에 도전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⑬

‘왕상무’ 김영주 회장은 16일 만에 도크 보수를 끝냈다. 일본의 전문가들도 3개월이 걸린다는 일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았겠지만 그 가능성은 초긴장 상태를 유지한 정신력에서 나왔다. 단 1초의 빈틈도 주지 않는 긴장 속에서 작업을 지시했기 때문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현실화시켰다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작업이 정신력만으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백지 상태에서 대형 조선소를 건설했고 동시에 대형 선박을 건조하다 보니 무사고의 욕심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안전시설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1973년 한 해만 해도 1800건이 넘는 산재 사고가 났고 34명의 근로자가 숨졌다. 담당자들 모두 사표내고 도망“그런 여건에서 사고가 안 났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요. 작업 조건도 나빴고 정신들이 해이해져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모든 안전사고는 안전시설이 미비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정신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김영주 회장님 얘기도 하셨는데 그게 전설적인 얘기처럼 남아있지만 사실이거든요. 정신 상태가 그만큼 중요했단 말입니다.”이정일 전 현대미포조선 회장의 회고를 들었지만 잊히지 않는 대형 사고는 어떤 경우에 일어났는지도 물어보았다. “(웃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아찔한 사고였어요. 물론 첫 배를 건조할 때니까 경험도 없었지만 하여간 26만t급 선박이면 폭이 한 52m 되고 길이가 320m 정도 됩니다. 여기에다 높이가 26m나 되는데 탑재할 때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때가 어떻게 됐는고 하니, 배 기관실의 경사진 부분을 탑재해 놨어요. 그런데 그걸 올려놓기만 하고, 가접이라고 해야 할까? 대충 용접을 하고 와이어 같은 걸로 기관실 블록을 떨어지지 않게 묶어놓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본체를 끼워 넣을 때 정확한 위치를 잡거든요? 그래서 위치가 딱 맞으면 그때 본격적인 용접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용접도 하기 전에 와이어가 풀어지면서 떨어져 버린 겁니다.”기관실 블록이라면 그 무게만 해도 엄청날 텐데요?“굉장했지요. 집으로 말하면 골격 공사가 올라가고 콘크리트 칠 때 전기 케이블, 전화선, 파이프 같은 걸 전부 미리 다 집어넣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기관실 블록도 완벽하게 해놓은 상태니까 중량만 해도 몇 백t은 넘었을 건데 그게 그 높은 곳에서 내리꽂히듯 떨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정신 상태가 문제였어요. 어떻게 와이어가 풀어지도록 묶어놓습니까? 좌우간 그 어마어마한 탑재물이 10m 높이에서 떨어졌으니까 얼마나 큰 사고였겠어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중량물이 10m 이상에서 떨어진 사고라면 그게 기록일 거예요.”놀라셨겠네요.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놀라고 하여간 난리가 났어요. 워낙 큰 사고니까 재산상의 손실도 크지만 그걸 다시 만들어 시작하려면 공기도 굉장히 지연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 담당자들이 전부 사표를 써놓고 도망쳤어요. 하하하.”이때 사고에 대해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그때는 반장만 돼도 살림들을 여기서(울산)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고 내고 뛰어봐야 울산 바닥이에요. 그래서 틀림없이 눈치를 보고 있을 테니까 전부 잡아오라고 그랬지. 아니나 달라? 몽땅 반나절도 안돼서 잽혀왔어, 하하항. 그런데, 사실 그때 도망간 친구들이 진짜 역군들이야. 정말 겁도 나고 허탈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표 던지고 숨었겠지만 의욕적으로 뭔가 일을 해보겠다고 덤비다가 그렇게 된 거거든? 일을 하지 않는 친구들은 사고도 내지 않는 거야. 그때는 한번 해보자, 우리 손으로도 건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긍심도 대단했고 열심히 달라붙었단 말이야. 그런데 깜빡 실수한 것 때문에 그게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하니까 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심정이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런 심정들을 내가 알지. 그렇지만 그놈들을 데리고 다시 일을 하자니 무너진 건 눈앞에 보이고, 그때는 막 쥐어박고 싶더구만, 하하항.”다시 시작할 때 회장님이 하셨던 말씀은 기억하십니까?“그때 전부 모아놓고 그랬어요. 사람이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실수는 하는데 중요한 건 실수했다고 포기하면 끝난다, 포기하는 게 더 큰 손실이다 이 말이야.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으로 생각하고 빨리 정상 복귀되도록 하고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했지. 그랬더니 엉엉 우는 녀석도 있었어. 장난치다 사고 낸 놈들 같으면 눈물이 나오겠어? 그 다음부터는 그런 사고가 한 건도 없었어요.”기관실 블록이 떨어지는 사고는 다시 없었지만 부서마다 한 번씩은 모두 경험했다고 할 정도로 시행착오로 빚어지는 사고는 다반사였다. 국가 전체적으로 산업기반이 취약한 탓도 원인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태부족의 고급 인력이었다. 특히 조선소는 고급 인력이나 현장 기술직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기관실 블록 낙하 사고도 경험 있는 현장 인력만 많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1호선을 건조할 때 처음 투입 인원을 6000명으로 책정했고, 그중에 50% 이상은 해당 직종의 유경험자로 채용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10%도 필요 요원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작업에 들어갔다. 인력의 열악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백충기 전 미포조선 사장의 회고다. “당시 하루 16시간 정도 작업을 했어요. 사무실에는 밤 늦게까지 전등이 꺼지지 않았고 아침이 훤하게 밝아야 소등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직원들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중에 신입사원 한 사람이 도장 분야를 담당했는데 어느 날 역부족을 느끼고 책임감을 통감한다면서 유서를 써놓고 자살했어요. 정말 능력 있는 사원이었는데 전 직원들이 비장한 심정이 됐지요. 그럴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있는 겁니다.”장비 구매는 김형벽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역할이었다. 그는 알려진 그대로 알래스카에 설치한 ‘허리케인 브리지’를 설계하고 제작과 설치 감독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지금도 세계 4대 브리지에 든다고 할 만큼 고속도로상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허리케인 브리지가 명성을 얻고 있는데 그걸 설계하고 설치했다면 시쳇말로 ‘알아준다’는 것이다. “토목은 현대건설이 맡아서 했지만 다리 자체는 철판을 가지고 재단을 해 용접을 하는 건데, 아주 정밀합니다. 그건 포인트와 포인트 사이가 504피트나 떨어진 곳에 아치형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칼럼을 세워 그 위에 가다를 놓는 아주 복잡한 구조지만 외형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걸 무사히 완성시켰더니 명예회장님(정주영)이 인상 깊게 보셨던지 ‘너 조선소로 와’ 하시는 겁니다. 스콧리스고에 가서 한 달간 훈련받고 귀국 길에 가와사키에 가서 2주간 조선소 견학을 잘하고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하하하.”견학을 ‘잘하라’는 건 세밀히 살피라는 뜻이었다. 김 전 회장은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그땐 군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찍히고 ‘소용없는 직원’으로 떨어지던 시댑니다. 하여간 군말 없이 세밀히 살피고 오니까 ‘잘 살펴보고 왔지? 울산 현장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니까 바로 내려가’ 하시는 겁니다. 쉬는 게 어딨어요. 아무 소리 못하고 그날로 현장에 내려가니까 현대조선 초대 생산부장으로 임명을 하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기계, 설비 같은 건 죄다 저보고 구매를 하라고 명령이 떨어져요.”이 부분은 정 회장도 사실로 확인을 해주었다. “중장비와 설비들이 그때 우리나라에 뭐가 있었어요? 우리가 들여오면 그게 전부 ‘생전 처음 보는 장비’예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지만 중장비를 도입하면 항구에서부터 마치 외국에서 국빈이나 온 것 마냥 경찰이 앞에서 사이렌을 울리고 에스코트를 했어, 하하항. 그럴 정도였는데 그걸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지요. 생각해보면 참, 기막힌 대역사를 건설한 거야, 하하항.”생산 현장이 원시적이었고 가끔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는데 장비 부족이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 아닙니까. 어떤 장비부터 구매했습니까. “(김형벽) 얘기를 다 하자면 한이 없을 겁니다. 불모지에서 시작했는데 부족한 게 하나 둘이어야지요. 그중에 조선소의 상징이라는 골리앗 크레인부터 직접 설치하고 감독을 했어요. 골리앗 크레인은 독일 PHB-JUCHO사에서 만든 걸 구입해온 건데, 그걸 설치하는 데만 8개월이 걸릴 정도로 고도의 기술을 요합니다. 통째로 갖다놓는 게 절대 아니지요. 높이가 82m 아닙니까? 엘리베이터로 꼭대기까지 1분 만에 올라갈 수 있게 설치해야 할 정도예요. 골리앗 크레인을 좌우간 왜 설치하고 감독했느냐, 기막힌 얘긴데, 할 일이 없어서 했던 겁니다. 생산부장이 할 일이 없어서 크레인을 설치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물론 꼭 필요한 거지만 정말 일이 없어서 덤빈 거예요. 그만큼 벌판이었고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얘깁니다. 그런 형편에서 시작을 했어요. 그 후에 공장 안에 들어가는 크레인들도 직접 제작하고 감독했지만 어떻게 보면 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되는 거지요. 참 대한민국 조선사를 들여다보면 눈물나는 기록들이 많습니다.”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크레인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선박 공장에서 건조 일을 시작했잖습니까. 크레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면 시작을 못 한 겁니다. 무지했기 때문에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얘기예요. 이런 걸 보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명예회장님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거지요. 교과서적으로는 도저히 성립이 안 되는 논린데 해냈거든요.”크레인 설치에만 8개월 걸려김 전 회장의 회고는 이어진다. “당시에 제가 생산부장으로서 선박을 건조했는데요, 예를 하나 들지요. 도크에 블록을 하나씩 집어넣는 작업을 골리앗 크레인으로 하는데 그 당시에 그런 크레인이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블록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큰 철판 덩어리 아닙니까? 그게 200~300t 나갑니다. 그걸 도크 밑에다 깔아놔야 하는데 깔 길이 있습니까?”트레일러로 그 엄청난 블록을 옮겼다는 겁니까?“김영주 회장님이 오시더니 당장 트레일러를 가져오라는 거예요. 트레일러를 갖다놓고는 이 블록을 유압 작키(Jack)로 들어올리게 했어요. 그러고는 거기에다가 트레일러를 밀어 넣어서 겨우겨우 트레일러에 싣는 겁니다. 그러면서 도크가 여기 있으면 흙을 갖다 부어요. ‘비탈길’을 만드는 거죠. 그래가지고 내려가는데 그나마도 트레일러로 내려가다 보면 속도가 붙어서 막 굴러가다 처박힐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뒤에서 제일 큰 불도저를 연결하고 불도저가 뒤로 땡기면서 내려가는 겁니다, 하하하. 결국은 그렇게 해서 됐어요.”그러나 더 리얼한 얘기는 따로 있다. <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박 대통령 앞에서 깜빡 졸았지” [조인스]

정신 들어 깨보니 지켜보던 대통령 “정 사장, 내가 미안하구만”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⑭

현대중공업은 1974년 1호선 명명식을 가진 후 10년 만인 84년에 231척인 1000만t을 인도하고 88년에 2000만t, 91년에 3000만t, 2005년에 1억t의 선박을 인도했다. 세계 조선 사상 최단 기간 내 최대 건조 실적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것이 결코 행운만 따라준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주영 회장의 표현대로 “모든 게 부족했지만 새벽에 현장에 내려오면 밤 10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새벽에 내려오고 하면서 막 후려대고 철저하게 바탕을 다져오지 않았으면 될 수가 없는 거”였다. 체력이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밤 10시에 서울로 올라가셨다가 다음날 또 새벽에 내려오면 잠은 언제 주무시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죽으면 매일 잠만 잘 텐데 눈 떠있을 때 일을 해야지요. 하하항. 일이 재미있으면 말이지, 잠자야지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농담이 아니고 경부고속도로 할 적에, 박정희 대통령하고 얘기 도중 깜빡 존 적이 있어요. 처음 듣지요? 박 대통령이란 분이 얼마나 무섭고 위엄있는 분입니까. 근데 그런 어른 앞에서 졸았어. 아마 내가 태어나 엿새 동안 양말을 못 갈아 신은 것이 그때가 첨일 거예요. 그럴 정도로 현장에서 날밤을 새고 그랬어요. ”당시 정 회장을 비롯해 김영주 회장, 양봉웅 회장(전 고려산업개발 회장) 등 경부고속도로 멤버들은 전부 양말을 벗겨보면 발가락 사이가 붙었을 정도였다. 정 회장은 “작업화를 벗어놓고 자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여간 그렇게 현장에서 살다가 박 대통령이 호출해서 만났으니 나도 모르게 깜박 존 거지요. 근데 그게 2~3분? 길어야 4분이 안 될 거야. 각하 말씀 듣다가 졸았으니 얼마나 됐겠어요. 근데 어찌나 맛있게 잤던지 나중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그렇게 자고 또 현장에서 밤을 새는 거예요. 잠이라는 건 그런 거야. 물론 울산을 오가면서 차 안에서 잘 때도 있지만 그렇게 일을 했으니까 나는 특별히 남한테 건강관리를 이렇게 한다 소개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일에 미치다 보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유지가 되는 것 같았어. 일을 안 하거나 마음속에 증오심을 넣고 있으면 그건 그때부터 환자예요. ”“시행착오는 위대한 유산이야”새로운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 “졸고 나니까 말이야, 참 박 대통령을 잊지 못하는 얘긴데, 소응접실 탁자가 요만해요(울산 영빈관 응접실 탁자를 가리켰는데 그다지 크지 않다). 이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말씀을 하시는데 바로 앞에서 졸았으니 말이야, 졸고 나서 내가 아주 당황했거든? 대통령께서도 말씀을 하시다 내가 졸고 있으니 기가 막혔을 거 아니야? 하던 얘기도 중단하셨을 거고 말이지. 그러니 이건 뭐 어쩔 줄을 모르겠어.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하는 거야. 그런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내가 졸고 있을 때 자리를 떴거나 언짢은 얼굴을 했을 거야. 놀래가지고 정신이 번쩍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던 대통령께서 내 손을 꾹 잡으시더니 ‘정 사장, 내가 미안하구만. ’ 이러시는 거예요. 참….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그때를 잊지 못하겠어. (분위기 바꾸며)그래서 나도 말이지, 지금 저기 내려다보이는 골리앗 크레인, 그 앞쪽이 초창기에는 밀다가 둔 산이었는데, 작업하다 저기 와서 조는 친구들이 있거든? 그러면 순시하다가 보고서도 그냥 두고 한 바퀴 돌고 와요. 그때까지도 자고 있으면 그땐 발로 툭 깨워. 기절초풍을 하고 일어서거든? 그러면 그러지. ‘내가 미안하구만.’ 하하항, 나도 감동받은 건 써먹어야 되잖아. 그 친구들도 감격했을 거야, 하하항. ”골리앗 크레인이 없어 트레일러로 블록을 옮겼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참 대단한 도전을 했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없습니까?“몇 번 죽을 고비도 넘겼어요. 무슨 얘기냐면, 장비가 부족했다, 인력이 부족했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는데 초창기에 있었던 직원들이 내 앞에서는 고생했다는 소리 한마디도 안 하면서 꼭 나 모르게 인터뷰만 하면 지들이 고생 다한 것처럼 그래, 하하항. 사실 우리 현대조선소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각오를 하고 나섰던 거니까 새삼스럽게 용맹을 떨친 것처럼 얘기할 건 없지요. 물론 대단한 도전을 했고 무수한 고생을 했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역사를 다시 쓰는데, 죽다 살아나기도 했는데, 고생했고 부족했다는 게 뭐 내세울 건가 그 말이야. 전부 몰라서 시행착오를 해놓고 말이야, 하하항. 그러고 방금 츄렐라[트레일러(trailer)의 현장 발음]를 썼다는 얘길 했는데,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요?”초창기 때 현장을 누볐던 사람들은 모두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기억하고 있던데요?“엉터리 같은 놈들 말이야, 하하항. 얘기를 들었겠지만 그건 아주 초창기 때 얘긴데 그게 어떻게 된 건고 하니, 도크를 만들면 건조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진전이 없는 거야. 내가 서울로 갈 때는 내가 내려올 때까지 몇 입방을 치고, 공장은 어떻게 하고, 일일이 지시를 해놓고 가요. 근데 진전이 없어. 그래 가지고 여기(울산) 내려와 보니까 블록을 못 옮겨 전쟁이야 전쟁. 영이(김영주 회장)한테 내려가서 좀 다그치라고 했더니 그나마 츄렐라를 동원해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것도 영주 회장 아이디어라는 거야, 하하항. 그때 골리앗 크레인을 빨리 들여오라 했더니 김형벽이 그눔이 들여와 놓고는 조립을 다 못해 애먹고 있는 거지. 나도 크레인을 몰아봤지만 그것만 있으면 간단히 되는 일을 츄렐라를 갖구 용을 쓰고 있는 거거든?”회장님이 골리앗 크레인도 운전하셨단 말씀입니까?“했지. 조선소에 들어서면 첫눈에 우뚝 솟아있는 게 골리앗 크레인 아니에요. 근데 주인이 운전을 못 하면 어떡해. 방금 얘기한 저거거든(창밖으로 보이고 있었다). TV에서 파업하는 거 찍으면 저기 올라가서 난리치는 거 찍고. 누가 그래, 하나님한테 파업 상의하러 올라간다구, 하하항. 사실 골리앗 크레인은 주로 블록 옮길 때 썼는데 도장 공장에서 전부 다 쇠를 깎아 페인트칠하면 그 블록을 도크 쪽으로 옮기거든? 그때 힘을 쓰는 게 골리앗이에요. 골리앗은 힘이 세다 해서 붙인 거고 원래 이름은 ‘컨트리 크레인’이야. 근데 골리앗 하나가 450t을 들어 올리잖아요? 그런데 블록을 하나씩 도크로 옮겨야 배가 만들어질 거 아니에요. 옮길 재간이 있나? 그게 100t, 200t씩 되는 데 말이야. 그래서 츄렐라를 동원해 가지고 용을 쓰고 있었는데, 요는 그것도 전부 모르고 서툴고 하다 보니까 난리를 치게 됐다는 거예요. 그게 시행착오야. 그래서 내가 시행착오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그러는데, 전국에 있는 작키(jack)를 다 동원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그게 무슨 말씀입니까?“하하항, 하여간 와서 보니까 쇼를 해, 쇼를. 지금은 트랜스 포터라고 해서 좋은 걸 쓰는데 그 당시에는 블록을 운반해 도크에다 갖다놓는 장비도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츄렐라를 갖다놓고 용을 쓰는데 가만 보니까 기가 막히는 거예요. 츄렐라만 갖다 놓으면 뭐하느냐 이거야. 그 엄청난 블록을 츄렐라에 들어올려야 옮길 거 아니에요. 그래 가지고 그 미련한 것들이 작키라는 작키를 다 갖다 놨어, 하하항.”현장에서는 잭을 보통 작키라고 했다. 일본식 발음이 전염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원했다는 잭도 문제가 있었다. 바깥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잭을 조선소에서 사용하겠다고 들고 온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최선책이었겠지만 코미디였다. “그걸 보니까 또 웃음이 나오고 말이야. 물론 그 당시에는 작키가 많지도 않았지만 갖다놓은 걸 보니 전부 5t, 10t짜리야. 자동차 빵꾸(펑크) 났을 때 들어 올리는 작키를 갖다놓은 거야, 하하항. 조선소가 자동차 빵꾸 막는 곳이야? 그만큼 어설프고 모든 게 서투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것들을 좀 깨닫게 해줄려고 내일 아침까지 대한민국에 있는 작키를 몽땅 갖고 오라고 소리를 질렀어. 그랬더니 어디서 긁어왔는지 하여간 수천 개가 들어오는 거야, 하하항. 장관이야 장관, 조선소 광장이 난데없이 작키 전시장이 된 거지. 그래 가지고 전부 갖고 온 걸로 들어 올려보라고, 뭐든지 직접 해보는 게 젤이지 백 번 말로 해봐야 소용 있어? 빨리 들어올리지 못하고 뭣 하느냐고, 막 후려대는데 지들이 용빼는 재주 있어요? 어떻게 그걸로 돼. 그중에 용케 서너 개가 쓸 만하고 1%도 못 써요, 하하항. 배 만드는 데 쓸래면 최소 20t에서 200t짜리래야 되거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트레일러 작업을 계속한 겁니까?“문제는 블록 아니에요? 작키도 이젠 마땅한 게 없다는 걸 알았을 거구. 그래서 우리가 이런 여건에서 하고 있다는 걸 철저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이제는 작키고 뭐고 블록을 전부 손으로 들어올리라고 그랬지. 전부 기절초풍하는 거야. 하하항. 옆에서 지켜보던 영주 회장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블록 하나가 100t이 넘고 손으로 잡을 곳이 없는데 어떻게 손으로 들어올리냐고 중얼거려. 그럼 더 호통을 치는 거야. 등신 같은 넘들 말이야, 수천 명이나 모여서 100t짜리 철판 하나를 못 드느냐고. 몸뚱아리가 전부 몇 킬로(㎏)야? 블록이 100t이면 10만㎏밖에 더 돼? 한 눔이 평균 70㎏만 돼도 1430명이면 남아돌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빨리 들어올리라고 막 조지는 거지. 블록이 선술집 과부라고 생각하면 서로 먼저 들고 튈려고 할 거 아니냐고 말이야, 하하항! 참 별일 다 있었고 결국 해냈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하면서 배우고 알게끔 한 거예요. ”“블록을 선술집 과부라고 생각해” 실제로 도크를 만들고 블록을 옮긴다는 것도 중요한 작업의 하나였지만 배를 건조하기 전에 첫 블록을 깐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를 킬렝(keellaying) 작업이라고 하는데 흔히 ‘배에 용골(龍骨)을 깐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집지을 때 용머리를 잘 올려야 하듯이 배는 머리를 올리는 게 아니라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맨 밑바닥에 1번으로 블록을 까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뜻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비록 미신이라 하더라도 선박 건조에서는 그 어떤 영적인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는다. 물론 블록으로 용골만 까는 것이 아니라 소금도 깔지만 어쨌든 그런 의미 때문에도 첫 블록을 옮길 때 트레일러까지 동원하면서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트레일러로 용골을 깔았군요. “근데 영주 회장 머리가 비상해요. 츄렐라에 실어도 도크로 옮겨야 할 거 아니겠어? 그걸 영주 회장 아이디어로 한 건데, 도크 맨 밑바닥에서부터 땅 높이까지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거야.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거지. 도크 깊이가 13.2m야. 그러니까 도크를 만들고 있는 전갑원이 그놈이 지옥에서 천당까지 도로를 만들라구 하는 게 낫지, 길을 어떻게 만드냐고 투덜거리는데, 그래도 영이가(김영주) 잔소리 말고 당장 덤프트럭을 총집결시키고 흙을 덮으라구 호령하고 말이야, 완전히 전쟁터고 그런 난리 북새통이 없었어, 하하항.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 직원들이 전부 박사가 된 거예요. 그게 중요해요. 자기가 맡은 공정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바탕부터 알고 있어야 모든 작업이 이해가 되는 거거든. ”<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인간은 회장이나 말단이나 같아” [조인스]

폼 잡는 얘기 많이 하는 전경련은 나랑 안 맞아…진수식 땐 가슴 타 들어가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⑮

정주영 회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공사를 1973년 12월까지 마쳐야 한다는 완공 시점을 정해 놓고 시간을 역산해 돌파해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군사작전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택하지 않는 이른바 ‘공기 역산 돌관 공사’였다. 자연히 희생자도 적지 않게 냈고 잔인했다는 평가도 피할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사람씩 퍽퍽 쓰러져나갔다. 그런데도 해야만 했다. 토목공사를 전담했던 전갑원 부사장(당시 부장)의 회고는 그때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아예 현장에 사무실 차려놓고, 디테일 디자인이 어떻게 나온지 압니까? 내일 시공할 거 오늘 나오고, 그런 식으로 일을 했어요. 피가 마르고 죽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전부 다 도망가요. 눈에 불을 켠다는 소리 하지 않습니까? 정말 눈에서 불이 펄펄 납니다.”시설도 열악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만 있어도 감지덕지, 일주일씩 머리 못 감는 건 다반사였다. 현장 일은 울산에 있는 김영주 회장이 전체적인 총괄을 맡았다. 토목공사 쪽은 전갑원 부사장이, 건축공사는 박재면 부사장(당시 부장)이 맡았다.“우리 명예회장님 성격 잘 아시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체 점검, 그러고 초창기 땐 거의 예고 없이 매일 내려오다시피 하셨거든요. 저희는 현장에서 먹고 자는데. 그래가지고 아침마다 회사 식당에서 밥 먹으면서 회의하고 협의했어요.”주로 어떤 내용의 협의를 합니까?“회장님이 반드시 다음주 언제까지 뭘 해 놓아라, 뭘 갖춰라, 그래놓고 올라가시는데…. 일하다 보면 무슨 차질이 나거든요. 장비나 자재도 늦게 들어오고. 그걸 보고할 수 있어요? 그게 회장님한테는 통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일주일 머리 못 감는 일은 보통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광경이다. 그렇다 보니 무리한 공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리바노스 선주로부터 주문받은 두 척을 거의 동시에 완공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2도크 사고도 그래서 돌관 공사가 원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제2도크 사고는 치명적이었다. 그 때문에 기술 지원차 파견됐던 가지마건설의 선박담당 하야시 차장이 은밀하게 정부에 호출되기도 했다. 비자 때문에 외무부에서 호출하는 것처럼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가 과연 동시에 성공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제2도크 사고 때는 전부 조선소 공사가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충격도 컸고 희생자도 많이 났지요.”전갑원 전 부사장은 당시 정 회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대형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고 한다. 다음은 사고 당시 상황을 그가 정리한 내용이다. “도대체 원인이 뭣이야!”(정주영)“바닥과 외벽에, 그러니까 도크 바닥 바깥쪽과 벽 뒤편에 균열이 생긴 게 원인인 것 같습니다.”(전갑원)“균열이 생겼으니까 도크가 불룩 떠오르지! 균열이 생긴 원인이 뭐이냔 말이야!”“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법상으로는 잘못된 게 없습니다. 나가사키조선소 도크하고 동일하고 우리 설계하고 똑같이 그대로 했는데 지금도 나가사키조선소 도크는 안전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나직이)그 공법, 완벽하게 훔쳐서 가져온 것 맞아?”“자신 있습니다! 눈 감고도 도크만큼은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가져왔습니다.”“(확)그런데 왜 사고야! 하나라도 작업을 못하게 되면 차관 4300만 달러는 고사하고 우리 정부 신용 날아가고 현대 자존심까지 전부 물속에 수장된단 말이야! 그걸 알고나 있어? 당장 방법을 찾아!”도크 밑바닥과 벽면 일부가 부력과 수압에 견디지 못해 붕괴 직전에 놓였던 사고 아니었습니까? 벽이 터지거나 바닥이 떠오르게 되면 삽시간에 도크 정도는 거대한 파도에 흔적도 없이 쓸려나갈 그런 정도였다고 하던데…. “내가 더 놀란 건 사고보다 명예회장님이었어요.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작업하다가 도망쳐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터지면 삽시간에 물이 차오르고 전부 가는 걸? 박재면 부사장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 도크 안에 있는 연장과 기자재들을 전부 끌어내라고 소리를 쳤어요. 하여간 아수라장이 되고 모조리 정신이 없는 거예요. 근데 명예회장님이 장비나 기자재에 손도 대지 말라고, 막 고함을 치시는 겁니다. 보수를 못하면 죽는 거지 그거 꺼내서 뭣 하느냐고 말이지, 이러면서 도크로 내려가시는 거라. 전부 도망쳐 나오는데 말이야. 하이구, 정말 죽겠더라구요 내가.”도크 건설은 경험이 없었는데 가와사키에서 인용했다는 설계도에는 정말 문제가 없었습니까?“제1도크는 정상적으로 건조작업이 되고 있었잖아요. 공법은 똑같아요. 명예회장님이 가와사키 회장님하고 친분이 두터운 덕분에 제가 거기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때 자료를 엄청 뺐다고요. 어떤 건 기억을 해뒀다가 스케치해서 계속 모았는데 그 분량이 울산조선소를 제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래가지고 2도크가 가와사키조선소 100만t 도크하고 거의 같습니다. 중간에 게이트 있는 것까지. 그러니 설계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지요.”그런데 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나는 돌관 공사를 하면서 콘크리트 타설할 때 하자가 있었다고 봐요. 공법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현대맨들은 이렇게 사력을 다하면서 매달렸다. 완공시점을 정해 놓고 돌관 공사를 해나갈 정도의 상황에서는 사고도 없어야 하지만 직원들의 각오도 중요했다. 그것을 정 회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던진 위력의 한 마디가 ‘나를 믿어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한 마디 같지만 직원들에게는 최대의 위력이었다. 온몸을 던져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할 때에 ‘당신들 뒤에 내가 있다’는 이 말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정 회장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필요했던 상황이라고 했다. “반드시 조선소 공사 때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은 계열사마다 다들 회장들이 있으니까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이 잘하지만 무슨 일이든 (현장 사람들이)믿는 것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거기서 모든 정신력이 나오는 거야. 현장 직원들이 처자식 걱정은 안 하게 해줘야 명을 걸어도 걸지. 그걸 회사가 보장 안 해주고 내가 안 해주면 누가 그 엄청난 현장에서 명을 걸어요. 또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야 힘이 솟는 거예요. 언젠가 내가 전경련 모임에서 그런 얘기 했더니 너무 세속적인 얘기 아니냐구 그러던데, 참 폼 잡는 소리들 너무 좋아해서 나하고는 안 맞아. 인간은 회장이나 말단이나 같은 건데 사는 것이 좀 차이가 나서 그렇지 다들 욕구가 비슷한 걸 근사하게 포장해서 말한다구 그게 달라지나?”물 차오르는데 “나를 따르라”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듣고 근로자들이 큰 의지가 됐겠습니다. “내가 직원들하고 씨름도 하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그러는 건 당신들을 사랑한다는 소리거든? 그렇게 하는 걸 내가 좋아했고. 그게 내 몸에 배어 있어. 내가 격식이나 따지고 한다면 고급스러운 자리만 나가지. 믿음을 주지 않으면 절대 큰일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 직원들도 그걸 알았을 거야. 내가 이름은 잊었는데 우리 직원 때문에 항만청장하고 대판 싸운 적도 한 번 있어요.”관료들하고도 싸우십니까?“뒤틀리면 싸우는 거지, 총리하고도 싸웠는데. 일이라는 건 되자고 하는 거지 폼 잡자고 하나? 현장은 하나도 모르면서 시찰 나와 가지고 폼만 잡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각료들이 더러 있었어. 아주 불쾌한 거야. 좌우간 항만청장하고 싸운 건 1호선 진수식을 할 때야. 1호선이라 날짜도 잊지 않고 있는데 그날이 74년 2월 15일이에요. 배를 건조하면 진수식을 먼저 하고 명명식은 기계별로 시험을 다 끝내고 해요. 그래가지고 6월 28일인가 명명식 해서 배를 인도했는데, 그 다음에 첫 진수식 할 때는 가슴이 다 탔던 것 같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 눈 감고도 할 테니까, 하하항.”진수식은 배를 건조해 처음으로 바다에 내보내는 행사 아닙니까?“바로 그거지. 말 그대로 진수식은 배가 도크에서 물로 나가는 거거든? 그래서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첫 진수식을 하는데, 생각을 해봐요.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26만t 배를 최초로 건조했는데, 이게 제대로 물에 뜰 것인지, 자빠지지는 않을지, 어마어마한 쇳덩어리나 다름없는데 과연 뜨겠느냐, 떠올라도 똑바로 균형을 잡고 뜰 것인지?”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네요. “이건 표현을 다 할 수 없어요. 도크에 물을 채우면서도 뜬다, 뜬다 하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전부 합창을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거야. 그래가지고 떠오르니까 함성을 지르고 말이야, 하하항. 좌우간 이제 수문을 열고 진수식을 하는데 그땐 국내에 26만t을 운전해 본 선장이 없어서 외국서 수입했다구, 사람을 수입했어, 하하항. 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지. 근데 진수식을 할래니까 진수식을 못한다는 거야.”항해규칙 위반으로 고발 위협어디서 진수식을 못하게 했다는 겁니까?“우리 직원이 싸우다 말고 흥분이 돼서 쫓아왔어. 항만청에서 엔진 시동을 걸기 전에 배를 움직이는 건 항해규칙 위반이기 때문에 배를 내보낼 수 없다는 거야. 만약 내보내면 책임자를 고발하겠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는 통고를 했으니까 직원 이름까지 적더래. 아니, 배를 건조하면 인도하기 전에 반드시 진수식을 해서 최종 문제점을 체크하는 건 당연한 건데, 뭐? 고발을 하고 이름까지 적어? 얼마나 분이 나고 피가 끓어오르는지 말이야. 눈앞에 있었으면 물에 처넣었을 거야. 그래가지고 무조건 하라고, 위반도 아니거든. 왜냐, 배는 명명식을 하기 전에는 배로서 인정을 하지 않아요. 명명식을 하고 선주한테 인도하는 그 순간부터 배로 인정하는 게 세계적인 규정이야. 근데 명명식이 왜 항해규칙 위반이야? 쥐뿔도 모르면서 관에 있다구 이름이나 적고 말이야.”진수식은 무사히 했습니까?“그것도 첨이라서 별 해프닝이 다 있고 아슬아슬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항만청 규칙 무시하고 했는데 멋지게 했어요. 그래놓고 나중에 청장을 만나러 간 거야. 그땐 솔직히 대통령한테 얘기할까도 했어요. 그런 정신 빠진 인간들이 어디 있어? 위반도 아니지만 설령 위반을 했다구 해도 진수식을 막을 일이에요? 국운을 걸고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청장을 만나서 당장 울산에 나와 있는 항만청 직원을 바꾸든지 잘라야 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자기도 보고를 받았는지 법대로 한 거래. 하여간 대판 붙어서 결국 교체시켰어요. 그땐 나도 팔팔했지, 하하항. 우리 직원도 기분이 아주 좋았을 거야. 사소하고 작은 일 같지만 그런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면 큰일을 시킬 수가 없지요.”<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16)

 

“내가 바다에 빠져 죽다 살아났지”

생산 야드 150만 평, 종업원 2만5000여 명, 2007년 예상 매출 15조2000억원, 수주 목표 181억 달러. 이것이 외형상 나타난 현대중공업의 현주소다. 여기에 9개의 대형 드라이 도크와 6기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을 가동하면 세계 각국에서 주문하는 어떤 종류의 선박도 건조할 수 있다. 지금은 고부가가치 선으로 각광받고 있는 선박들만 선별해 수주할 정도로 콧대도 높아졌다.

실제로 향후 3년 동안 건조할 물량도 부가가치가 높은 LNG 운반선과 초대형 LPG 운반선이다. 그것이 무려 20척에 이른다고 했다. 이런 놀라운 성장의 이면에는 초창기 멤버들의 희생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캔두(can do)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진수식을 하기 전에 국내에서는 26만t급 선박을 시운전해본 사람이 없어 수입했을 정도라면 현대조선소 초대 사장은 누가 했습니까? 외국인이었습니까?

“그랬지. 스코(J W Schou)라고 덴마크 사람인데 덴마크가 원래 농업국가지만 우리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오덴세 조선소’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어요. 거기 기술이사로 있던 스코를 사장으로 영입했어요. 그렇지만 기술사가 항해사는 아니기 때문에 그이도 진수식을 할 때는 벌벌 떨어, 하하항. 근데 스코가 고생을 많이 했어. 리바노스 측에서 파견한 감독관이 자꾸 트집을 잡으니까 노상 다투고 말이야. 선주 쪽에서 나온 녀석이라 사장 말을 잘 안 듣는 거지. 더러워서 참. 하여간 그래도 1, 2호선을 제때 진수시킬 수 있었던 건 스코 사장 노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모두가 한마음이 됐기 때문에 열악한 조건들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김형벽 전 회장은 근무 환경도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는 말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세상이 변했으니 여건도 변하고 의식도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그때는 비교할 곳이 없으니까 자연히 불평도 나올 수 없었고 무엇보다 열심히만 하면 회사가 뒤에 있다는 그런 믿음이 아주 든든하게 있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랬을 겁니다. 내 경우에 우선 출퇴근을 회사 차로 했어요. 집도 회사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부장이라는 게 4, 5명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중역만 해도 중공업에서만 몇십 명 될 겁니다. 그러니 부장들도 차가 다 있고 운전사도 붙여주고 그랬지요. 그렇지만 가정은 희생시켰습니다. 가족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까 한 달에 한 번, 1박2일로 가족 보러 갔다 오는 게 낙이었어요. 선박 건조가 시작됐을 때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래도 불만들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

하루 일과는 어떻게 짜였습니까?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되고부터는 일요일이 없었지요. 금요일 다음은 토요일이 아니고 월요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 7일인데 요일은 금요일까지밖에 없다고 얘기했어요. 월화수목금금금…. 하하하. 언젠가 코미디 프로에서 그런 소리 하는 걸 봤는데 ‘월화수목금금금’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현대 직원들이 제일 먼저 썼을 겁니다. 그러고 지금 같으면 사람 잡는다고 할 겁니다만 그때는 오전 5시에 회의가 시작됩니다. 아침을 먹어가면서 공구별로 보고도 하고 지시도 받고 그러는 거지요. 지시는 주로 김영주 회장님이 했습니다만 시작하는 시간은 있는데 끝나는 시간이 없었어요. 이것 한 가지만 가지고도 하루 일과가 다 설명되는 거 아닙니까? 밤 10시에도 끝나고 11시에도 끝나고. 끝나면 근처에 큰 술집은 아니지만 거기서 피로도 풀 겸 가족 생각도 할 겸 1시, 2시까지 마시다가 다시 5시에 또 회의하러 나오고. 그래도 불만이 없었고 가족들한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탈선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가끔 짜증이 날 때는 있었겠지요. 그때는 ‘거지발싸개 같은 현대에 들어가서 아빠만 빼앗겼다’고 투정 몇 마디 한답니다. 하하하. 모두가 그렇게 지내온 겁니다.”

진수식은 성공적이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그랬습니까.

“누가 그런 소릴 합디까? (정 회장님이 그러시더라고 하자)에고, 회장님이야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하하하. 말도 마십시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진수식을 하는 과정은 쇼도 그런 쇼가 없었습니다. 진수식도 큰 행사 중에 하나거든요? 그때만 해도 처음으로 대형 유조선을 건조했고 조선 입국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게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고요. 명명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오시게 돼 있으니까 사실상 진수식이 예행 연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근데 진수식을 한다고 하면서 검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거 아세요? 하하하. 원래 진수식은 모든 게 거의 완벽해야 하는 거거든요. 당장 운항을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가 돼야 한다고요. 그런데 검사도 끝나지 않고 진수를 했으니 해프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우리가 배를 인도하고 그동안 시행착오에 대해 통계를 내니까 무려 104가지예요, 하하하.”

그 정도면 배를 다시 만든다고 했겠습니다. 검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진수식을 했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웃으며)그게 현대 아닙니까. 날짜부터 잡아놓고 준비를 했으니 뭐.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명예회장님이지요. 가만 보니까 그냥 놔둬서는 한도 끝도 없고, 더구나 선주 쪽에서 파견한 감독관이 자꾸 트집을 잡으니 검사를 다 받고 하자면 2, 3개월이 더 걸려도 진수가 안 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진수부터 시키라고 고함을 치시는 겁니다. 스코 사장은 안 된다고 매달리고, 검사관도 나를 잡아먹으라면서 배 앞에 드러눕겠다고 아우성이고, 하하하.”

굴뚝도 없이 새벽에 선체 진수

진수식은 선주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제작사에서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옳은 얘기죠. 근데 우리는 사실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회장님은 알고 계셨더라고요. 뭔가 하면, 진수를 언제 하느냐 하는 건 순전히 조선소 측에서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왜냐, 진수를 해도 배에 이상이 있으면 뜨지 않을 것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건 결국 조선소만 손해거든요. 그러니까 검사를 다 받고 하건 안 받고 하건 진수는 야드가 판단할 일이다 그겁니다. 그걸 회장님은 벌써 알고 계셨는데 우린 바짝 쫄아서 검사관 달래느라고 절절매고 말이죠, 하하하.”

쇼도 그런 쇼가 없었다는 건 또 시행착오를 했다는 얘깁니까?

“지금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데, 진수를 생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시행착오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엉망일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진수식을 하게 되면 별의별 소리가 다 나와요. 특히 일본 애들한테서 험담이 거칠게 나옵니다. ‘만용을 부려서 건조를 한답시고 용접을 하긴 했는데 배가 뜨나 보자.’ 이런 식의 악담이 막 나와요. 평소에는 점잖았던 사람들도 이상하게 진수식만 하면 그럽디다. 좌우간 진수를 하기로 하고 그때가 새벽 1시쯤 됐어요. 도크에 물을 넣으라고 명령이 떨어졌어요. 새벽 시간을 택한 건 일기예보를 보고 바다로 보냈을 때 물결이 최대한 잔잔한 시간을 택하니까 그래요. 그러니 천지가 조용하고 주변은 암흑이고 도크 주변만 불을 밝혀놓은 겁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전부 거대한 선채만 보고 거기에 압도당해서 진수 직전까지 굴뚝이 탑재가 안 됐다는 걸 몰랐어요. 난리가 났지요, 난리가. 하하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웃음)그게 경험 미숙인데 회장님 눈빛이 독수리가 되고 이건 뭐 순식간에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을 거예요. 욕에다가 고함에다가 전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된 거예요. 더구나 굴뚝이 매우 큽니다. 굴뚝 자체만 해도 25t, 30t 이상 나가요. 그걸 탑재 안 했다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니 뭐 크레인을 동원하고 전원이 달라붙어서 굴뚝을 크레인에 매달고서 대기를 했지요. 물이 다 찰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굴뚝 높이를 정확히 측정해서 대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이번에는 또 배가 뜬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배를 뜨도록 만드는 게 조선소인데 배가 뜬다는 걸 잊어버렸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수문을 열면 도크 바닥에서 이만큼(10m정도) 배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고것을 생각 못한 거지요. 그러니까 배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높이를 측정해 대기했는데 배가 뜬 다음에 탑재를 하려니 높이가 맞습니까? 하하하. 그러니 정신 빠진 놈들이라고 회장님한테 욕먹고. 그런 정도로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하하하. 그런데도 회장님은 멋지게 진수를 했다고 그러십디까? 다행이네요.”

그러나 시행착오는 다시 하면 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 회장이 바다에 빠져 그야말로 ‘염라대왕 면담 직전까지 갔었다’는 회고담은 압권 중에 압권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국운이 있었다는 느낌도 받게 됩니다만 회장님이 바다에 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하하항, 누가 그래? 내가 죽다 살아난 건 세 사람밖에 모를 텐데. (셋 중에 한 사람한테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정일이가 얘기했구만. 그 친구가 그날 당직이었어, 하하항. 그게 어떻게 된 건고 하니, 내가 여기 내려오면 여기서만(조선소 내) 내가 직접 몰고 다니면서 타는 캐딜락이 있어요. 번호판도 없고 조그마한 차야. 그걸 몰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잘못되고 있는 게 없는지, 잘되고 있는 건 뭔지, 꼭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살펴요. 근데 그날은 비가 좀 왔어. 그래도 뭐 내 눈으로 직접 살피고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이니까 둘러보러 나갔는데, 그때 이정일이가 부장인가 그랬을 거야. 돌아보다가 중간에 그 친구한테 뭔가 지시하다가 시간이 더 지체됐어. 탓을 하자면 그눔 때문에 빠진 걸 거야, 하하항. 좌우간 야드를 전부 돌아보는데 그날따라 비가 와서 그런지 라이트를 켰는데도 앞이 잘 안 보여. 그래가지고 차에 탄 채로 바다에 빠졌지 뭐. 하하항.”

정 회장은 간단히 회고했지만 당직이었던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은 잊을 수가 없다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눈앞에서 보듯이 얘기했다. 다만 기억의 착오로 시점이 정 회장의 회고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명예회장님이 그런 말씀도 하십디까? 하하하. 회장님이 바다에 빠진 것이 1974년 봄인가, 그랬을 겁니다. 하필이면 그날이 내가 당직사령이어서 아주 죽는 줄 알았는데, 회장님이 바다에 빠졌으니 이건 뭐 내가 잘못한 것 같고 내가 끝까지 모셨으면 괜찮았을 거 아니냐 싶고 말이죠. 비상을 걸어도 중역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안절부절못하고 죽을 지경이었죠. 근데 그날도 이상하게 마음이 찜찜하더라고요.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비가 많이 왔습니까?

“그때가 초봄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비가 아주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오늘은 순시를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면서도 늘 해오시던 회장님이니까 감히 말씀도 못 드리는 거지요. 원래 회장님이 조선소에 오시면 어김없이 새벽 4시에 현장 시찰을 하세요. 한 2시간씩 혼자 현장을 샅샅이 뒤져보고 한 5분 정도 혈압 체크하고 6시부터 회의를 하십니다. 그런데 당직을 서면 당연히 회장님 동태를 살필 거 아닙니까? 말하자면 회장님 가는 코스를 지키고 있는 거죠. 비가 아무리 와도 회장님은 틀림없이 현장 시찰을 하시니까요. 그래가지고 도크 옆에 건조부라고 있는데 거기서 나는 회장님 동태를 살피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장님이 그쪽으로 오시더니 차에 타라는 거예요. 비는 억수같이 오는 새벽인데.”<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회장님은 왕발, 신발 구하기 힘들어”

바닷물서 나오자 “내 신발 말려와”…애지중지 물 빼서 영빈관으로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17)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한국의 조선 역사를 다시 썼다. 하지만 조선 산업을 부흥시킨 자신에 대한 역사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꿈이 있는 사람은 자서전을 쓰지 않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꿈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인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정 회장이 만들어낸 ‘정주영 어록’과 무수한 국내외 공사 현장에서 발휘한 ‘정주영 공법’은 많은 화제를 뿌렸고 지금도 현장에서, 또는 대학 강의실에서 회자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정리해 놓은 것은 없었다.어쨌든 그는 조선소를 바닥부터 다졌다. 광활한 필드를 지휘하며 직접 암벽을 쳐내기도 하면서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조선소 내부에 훤했다. 정 회장이 바로 그 현장에서 끝없이 내려가는 바다 속으로 빠졌다는 얘기는 섬뜩하면서도 여간 흥미 있게 들리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역시 그날도 회장님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순찰을 도신 겁니까?“(이정일 부장) 어떨 땐 기사가 차를 몰 때도 있지만 대부분 회장님이 직접 차를 몰고 순시를 하시는 거죠. 그래서 저는 회장님 옆에 앉아 사실 바짝 긴장하고 야드를 돌았어요. 회장님 옆에 앉으면 누구나 다 떨 거 아닙니까, 하하. 근데 그날은 비가 오는데도 야드에서는 골리앗 크레인으로 물건을 탑재하느라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우리가 이미 26만t 유조선 외에도 몇 척을 더 수주해서 기초 작업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그렇다면 74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무렵은 리바노스한테 인도할 유조선 때문에 전사적으로 매달릴 때 아닙니까?“아니에요, 전적으로 매달리면서도 수주 활동은 계속했지요. 작업 파트가 전부 다르니까 기초 작업은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착착 진행이 되는 거지요. 하여간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는데 내 기억은 74년 봄인 것 같아요. 봄비치고는 너무 많이 온다고 했으니까요. 근데 회장님이 작업하는 야드를 보시더니 핸들을 돌려 다시 크레인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가시더라고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당직실까지 가지도 않고 그냥 내려놓는 겁니까?“그런 거지요 뭐. 당직 잘 서고 있다는 눈도장만 찍혔으면 됐지 비가 문젭니까. 나는 얼른 내리는 게 더 좋죠, 하하. 하여간 그러고 얼마 안 됐을 겁니다. 당직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경비실에서 다급히 전화가 왔어요. 초소 근무자지요. 회장님하고 헤어진 게 아마 4시40분, 그 정도 됐을 텐데 5시가 채 못돼서 전화가 온 거예요. 이거 큰일났다는 겁니다. 회장님이 바다에 빠지셨다고.”‘무슨 얘기요! 내가 수행하다가 조금 전에 더 둘러보신다고 가셨는데!’‘회장님이 바다에 빠지셨다니깨요!’초소 경비가 숨이 꼴깍 넘어갈 듯이 외쳐대는 겁니다. ‘어느 바다요!’제2안벽이다 이거예요. 제2안벽이 제1도크 앞이에요. 거기가 아주 깊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얘기니까 웃지만 내용을 알면 기가 막히는 겁니다, 하하하.”제1도크 앞이면 바로 절벽일 텐데요?“그렇죠. 수심이 수십m 나올 겁니다. 거긴 야낚꾼(밤이 되면 숨어서 몰래 낚시하는 사람들)도 접근을 안 할 정도거든요. 정신없이 쫓아갔지요. 가서 보니까 회장님은 이미 영빈관으로 가셨고, 경비는 그때까지도 혼이 나가고 사색이 돼서 말을 못해요.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인데 기겁을 했을 거 아닙니까.”갑자기 없어진 회장님 자동차 어쩌다가 빠졌다는 겁니까?“나도 그게 젤 궁금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자초지종을 물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넋이 나갔어요. 담배만 뻑뻑 빨면서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데 헛소리까지 해요. ‘돌아가셨으면 내가 무슨 원망을 듣고 가슴에 못이 백혀 우째 살아가겠노…’하면서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는 겁니다.”쇼크가 컸던 모양이군요.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입장이 바뀌어도 그랬을 것 같더라고요. 자기가 근무 서고 있는 눈앞에서 회장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봐요, 견딜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마음은 급한데 경비 안심시키고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빨리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리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는데 진짜 옆에 보니까 찌그러진 주전자에 냉수가 있더라고요, 하하하. 하여간 이건 경비한테 들은 얘긴데, 그 시간에는 이상하게 비가 더 억수로 퍼부어댔대요. 거기가 또 해안에서 맞바람이 치는 곳이라서 바람도 굉장합니다. 막아주는 건물이 없어요. 그런데 초소에서 보니까 저쪽에서 차가 한 대 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경비 생각에 그 시간에 라이트 켜고 오는 차는 회장님 차 말고는 없거든요? 더구나 새벽 4, 5시에 허가없이 공장에서 자동차가 다니는 건 큰일난다고요.”원칙적으로 못 다니게 돼있습니까?“그럼요. 보안상으로도 통제를 했지만 작업차량이 겁나게 다닐 때가 있거든요. 차에 경광등을 달고 다니는 것도 그래섭니다. 하여간 경비들도 사실 졸다가 4시 넘으면 회장님이 순시 다니시니까 전부 비상근무를 하는데 이 사람도 헤드라이트를 보고 회장님이구나 직감하고 초소 밖으로 나갔을 것 아닙니까? 회장님을 맞이하려고 복장 단정히 해서 나갔겠지요. 그런데 막상 나와서 보니까 불빛이 없더래요.”‘이상허네….’방금 불빛을 봤는데 없어졌다 이거죠. 그래서 경비는 회장님이 플랜트 쪽으로 가셨나 하다가 그게 1, 2초 사이인데, 금방 보였다가 금방 옆길로 싹 빠져나갔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도깨비에 홀렸나 하면서 슬슬 더 나와 본 거예요. 원래 바닷가 거기에 도깨비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하하하. 하여간 차는 분명 봤는데 금방 없어졌으니까 이상하다 하면서 주위를 좀 더 살폈다는 거지요. 그래도 회장님 차가 없으니까 잘못 봤나 하고선 다시 초소로 들어갔다는 겁니다.”아니, 그 다급한 상황에서요?“회장님은 다급하셨겠지만 경비야 그걸 압니까. 그런데 초소에 들어가서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이번엔 으스스하기도 해서 몽둥이 하나 불끈 쥐고 다시 나왔대요. 그때서야 어디서 사람 소리 같은 게 들리더라는 겁니다. 그것도 회장님은 누구 없느냐고 소리를 질렀는데 비바람 치니까 작게 들렸나 봐요. 그 사이에 시간은 좀 지나간 거죠. 아마 그때까지는 회장님이 차를 탄 채로 바다에 빠졌으니까 차 안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애를 쓰신 것 같아요. 하여간 사람 소리가 나니까 경비가 소름은 싹 돋고 귀신인가 싶기도 하고 별생각이 다 나서 살살 다가갔대요. 그러고는 소리가 바다 쪽에서 들리니까 목을 빼고 내려다봤을 거 아닙니까? 바로 수직으로 그 밑이 바다니까요. 거기는 절벽 옆에 콘크리트 길이 있고 그 밑이 바로 바다잖아요. 해수면까지가 10m는 넘을 겁니다. 그런데 바다를 막을 때는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를 치잖아요. 그러면 목재 틀이 울퉁불퉁 튀어나오게 됩니다. 바로 그 목재 틀이 회장님을 살린 셈인데, 경비가 내려다보니까 주위는 어두운데 저 밑에서 누가 그걸 꼭 잡고 매달린 채 있더라는 거지요.”(웃음)이젠 살았네요. “살긴요. 그게 회장님인데 경비가 볼 때는 물에 빠졌으니 머리도 짝 붙고 옷도 짝 붙어서 완전히 미라 같지 않았겠어요? 더구나 밤이고. 거기다가 이 노인네가 귀신도 생각나고 겁도 나고 하니까 회장님 생각은 깜빡 잊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확인한다고, ‘누구요?’‘나야! 로프 가져와!’‘나가 누구요?’‘나야 이 자식아! 빨리 밧줄 가지고 오란 말이야!’‘아고 회장님이십니까! 회장님이 왜 거기 계신대요!’그때부터 이 노인네가 당황한 거죠, 하하하. 그런데 로프를 가져오라는 소리도 파도소리가 있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듣지도 못하고 당황만 하고 어쩔 줄을 모르니까, ‘야 인마! 빨리 가서 로프 가져오라는데 뭣 하고 있어!’제정신이 아니죠. 그래서 로프를 던지려고 하니까 그때 또 회장님이, ‘야 인마! 어디 갔다 왔어!’‘로프 찾으러 갔다 왔는데요?’‘빨리 안 내리고 뭘 쳐다봐 인마!’하하하, 그 판국에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긴 왜 묻습니까. 그러니 워낙 어려운 회장님인데 물으니까 대답하느라고 또 던지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거죠. 하여간 그래서 로프로 올라오셨어요. 그러더니 냅다 쥐어박더라는 거예요.”초소 근무자를요? 생명의 은인인데 쥐어박아요?“회장님은 화가 나신 거죠. 거기 매달려 있느라고 얼마나 힘을 썼겠습니까. 그러니 은인이고 뭐고 성질대로 하신 거지요, 하하. 그래놓고는 그러시더래요. ‘야 인마, 사람이 빠졌으면 건져놓고 볼 일이지 누구냐고 묻긴 왜 물어!’하하하. 그런데 보니까 신발이 젖었을 거 아닙니까? 옷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신발을 벗어던지면서 경비한테 화풀이를 하시더래요. ‘신발 물 싹 빼가지고 와!’하하하. 얼마나 웃었던지 말이죠. 그 바람에 연락받고 달려간 제가 신발 물을 다 빼가지고 영빈관으로 들고 갔지 않았겠습니까.”아니, 신발이 뭐 그리 대단했던 겁니까? “(웃으며) 그게 아니고요, 회장님 발이 워낙 커서 시중에서 찾기가 힘들어요. 그거 한 켤레 사자면 울산을 다 뒤져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목숨 구해준 근무자에 청소 대행 맡겨뒤늦게 확인된 것이지만 정 회장을 살려내고도 한 방 얻어맞은 초소 경비는 하필 같은 정씨였다. 그리고 비록 쥐어박았지만 정 회장은 은혜를 입었다면서 그를 따로 불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 없는 정씨였고, 사정을 파악한 정 회장은 현대중공업은 물론, 계열회사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 대행사를 차리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필드를 잘 아는 회장님인데, 왜 떨어졌는지 원인은 나왔습니까?“나도 이상하다 했지만, 회장님이 거기 떨어지신 건 이유가 있었어요. 비가 오니까 칠흑같이 어두운데 그 길이 그때나 지금이나 넓거든요. 그리고 회장님이 낮에 작업을 독려하면서 다니실 때는 그 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회장님실로 들어가신 후에 거기다가 철근을 잔뜩 쌓아뒀지 뭡니까. 그러니까 회장님은 새벽에 그쪽으로 가시다가 철근이 쌓여 있는 걸 보시고 순간적으로 길이 다른 쪽으로 있다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분명히 낮에 다니실 때는 철근이 없었던 길인데 철근이 잔뜩 쌓여 있으니까 길을 잘못 들었다고 판단하신 거죠. 그래가지고 핸들을 옆으로 돌리다가 순식간에 빠진 거지요.”거기에는 조명등도 없었습니까?“작업하는 야드에만 있지 거기까지는 없었지요. 더구나 아주 캄캄한 새벽이니까 라이트만 켜고 가면 콘크리트 길은 안 보입니다. 바다하고 똑같죠. 그러니 어! 하는 순간에 그대로 빠지신 거예요.”<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박 대통령 배 안쪽 보다 깜짝 놀라

첫 선박 2척 명명식 앞두고 공기 못 맞춰 쩔쩔매기도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18)

그 어두운 밤에, 더욱이 차 안에 앉은 채 빠졌으니 경황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 순간을 극복하고 차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상상만 해도 여간 아찔한 일이 아니다. 그 상황에 대해 정작 정 회장은 ‘살려니까 안 죽은 거지’라면서 태연스럽게 그 당시를 설명했다.“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거예요. 이건 과장이 아니라, ‘아차’ 하는 순간이 곧바로 물속이 되는 건데, 나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도 안 했어요. 차가 푹 빠져 들어가니까 이게 동시에 약간 붕 떠요. 비가 쏟아지고 날씨가 조금 추워서 창문을 다 닫고 운전을 했었거든? 그래서 그랬는지 자동차가 곧바로 내리꽂히는 게 아니라 붕 떴다가 꼬르륵 들어가는데, 물도 바로 들어오지는 않아요. 그러니 그때까지는 차 안이 공간이고 운전석보다는 뒤쪽이 더 넓으니까 움직이는 건 뒤가 낫겠다 생각하고 뒤쪽으로 재빨리 움직이면서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을 하는 거야. 나가야 되겠는데 만약 문을 열면 순식간에 물이 확 들어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문도 다 못 열고 죽는단 말이야. 수압 때문에 안 열려요. 그러고 물이 들어오니 질식해서 죽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판단을 했느냐, 일단 사력을 다해 내 등으로 차문을 밀어보고 수압보다 내 등판 힘이 더 세면 확 밀고 나간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젊었을 때 쌀가마니도 두 개, 세 개씩 졌으니까, 하하항.”그러면 등판으로 문을 밀쳐내고 나오신 겁니까?“차문에 등을 착 대니까 아니야. 대번에 어림없다는 걸 알겠어. 벌써 감각이 달라요. 씨름할 때 딱 잡아보면 나보다 센지 약한지 해보지 않아도 알거든? 똑같아요. 그래가지고 재빨리 그 다음에 생각한 게 창문이야. 근데 문을 등으로 밀어보려고 건드렸기 때문에 이미 발밑으로는 물이 조금씩 들어오는 거야. 그런데 내가 그때 느낀 게 있어. 이게 참 양면성이다 이거지. 수압이라는 게 밖에서 차문을 같이 미는 셈이니까 결국은 수압이 차문을 더 닫아주고 있는 거야. 그러니 물이 한꺼번에 밀려들지 않는단 말이야. 이 세상 모든 적이 상황에 따라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느끼는 거야. 적이라고 함부로 없앨 게 아니다, 수압이 나를 죽이게 돼있는데 그게 문을 압박해서 나를 살려주고 있으니 말이야, 하하항. 좌우간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였는지 몰라. 창문을 요렇게(빈틈이 생기도록) 해서 물이 조금씩 들어오게 내렸어요. 한꺼번에 확 들어오면 감당을 못하겠고 위험하니까. 그래가지고 물이 목까지 차는 순간 차 안에도 물이 꽉 찼으니까 동시에 창문을 확 내리고 바로 싹 빠져나왔지요. 그게 성공한 거야, 하하항.”“그때만큼 술 많이 마신 적 없어요”이정일 전 회장은 그 후 정 회장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래가지고 저는 당직사령이니까 돌아와서 중역들한테 전부 전화를 해야 되잖아요. 그때 김영국 사장님한테도 전화를 하고 김영주 회장님한테도 전화하고 쭉 전화해서 비상을 걸어놓고 영빈관으로 다시 갔지요. 가서 보니까 회장님은 그 사이에 물을 빼느라고 신발을 엎어놨더라고요, 하하하. 그러니 나중에 놀라서 달려오신 중역들이 물에 빠지셨다는 걸 실감이나 하겠습니까? 그런 데다가 회장님까지, ‘아직 회의시간도 안 됐는데 왜들 왔어?’ 하하하. 그때 제가 회장님을 또 한 번 다시 본 건, 회장님이 그 당시에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는데 그 무렵에 5000원짜리 새 지폐가 막 나왔을 땐가 그렇습니다. 새 돈인데 그 걸 침대 위에 주욱 널어놓고 말리고 계시는 겁니다. 수표나 만원짜리는 한 장도 없고 천원짜리 몇 장하고. 하하하.”어쨌든 그런 사고가 있은 후에도 정 회장의 새벽 순시는 매번 계속됐다고 했다.“그런 일이 있었다고 중단하면 앞으로 수주를 어떻게 하고 건조를 어떻게 할 수 있어. 회장이 죽다 살았는데도 또 돌아다닌다, 정 아무개는 물에 빠져도 물귀신이 안 된다, 그렇게 소문이 돌아야 전 직원들이 명을 걸고 덤벼들 거 아니야? 내가 월급을 많이 받아간다 적게 받아간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려운 여건이지만 마음만 합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 그런 공감대가 아주 중요했어요. 아마 내가 그때만큼 막걸리를 많이 마신 시절이 없었을 거야. 난 원래 술을 못하는 편이거든? 그래도 기분이 나쁘거나 일이 잘 안 되고 꼬이면 내 입으로 ‘노가다’라고 얘기해가면서 회식자리 만들라고 했어. 그래가지고 그때는 술을 조금 마시는 사람은 남자치고 못난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종지 그릇 같은 건 다 치우고 사발로 마시고 말이야, 하하항. ”마침내 현대조선소가 공식적으로 조선소로 공인을 받게 되는 명명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를 건조하지 않은 조선소는 조선소가 아니다. 그래서 현대조선도 사실 이때까지 준공식을 하지 않았다. 정 회장만의 유별난 고집이 있어서가 아니라 배를 건조하지 않고는 조선소로 명함을 박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물론 국내 최대의 그룹으로 성장했던 지난날의 현대그룹 계열사 중에 기공식은 있었어도 준공식을 했던 회사는 현대조선을 제외하고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특이한 전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그룹의 한쪽 기둥인 현대자동차도 그랬고 현대건설도 준공식은 없었다.“명명식 땐 울산 전체가 축제야”“준공식? 나는 안 해. 사장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자축연을 열고 준공식을 했으면 모를까 나는 안 했어. 현대중공업(현대조선)도 1호선 명명식을 하고 진수식을 해야 조선회사로 공인을 받는다구 하기 땜에 6월 28일 그날 준공식이 된 거예요. 이런 얘기 처음 듣지? 하하항. 기공식만 하면 됐지 준공식이 왜 필요해? 회사 사옥을 짓는 거라면 모르지만 나는 기공식을 하는 그날부터 이미 본 사업에 들어갔어. 공장 다 지어놓고 사업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준공식이 필요할 게 뭐야, 하하항.”명명식이 거행돼야 현대조선소가 비로소 세계 선박협회에 이름이 오르고 사실상 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명명식 행사는 대단했겠습니다.“그건 말로 다 할 수 없지. 대통령 내외분이 다 내려오시고 장관들은 물론이고 외교사절들하고 선주까지 참석하는 행사니까 말이 명명식이지 울산 전체가 축제야. 요란했어. 그러고 우리나라에서 1개 회사가 훈장하고 대통령 표창을 그렇게 많이 받은 건 유례가 없어요. 무려 55명이 받았어, 하하항. 그러니 명명식 행사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전국에 TV로 중계방송이 되고 말이야. 그때 명명식 행사는 김형벽 사장이 잘 알거야. 행사 준비를 했으니까. 만나서 직접 들어봐요. 그눔 자식들이 대통령을 놀라게 해가지고 잽혀가기도 하고 별일 다 있었으니까.”행사를 하면서 잡혀갔다는 말씀입니까?“행사를 코앞에 두고서 그랬지만 시원찮은 것들이 낭패를 당하게 했지 뭐야. 김영주 회장이나 이정일 사장도 알 거야. 만나봐요.”김형벽 전 회장은 당시 부장으로 명명식 행사를 지휘했지만 정 회장이 얘기한 것처럼 축제라고 느낄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인은 공기에 쫓겨 자살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그때가 74년도 6월 28일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행사를 진두지휘 했는데 1호선은 좀 일찍 만들어졌지만 2호선 때문에 굉장히 공기에 쫓겼습니다. 아시다시피 행사 날짜는 박 대통령이 참석하시기 때문에 미리 정해놓고 초청장을 보내지 않습니까. 선주들한테도 미리 알리고요. 그런데 2호선이 사실 완공이 덜 됐단 말입니다. 그러니 명명식 날짜는 받아놨고, 대통령께서 직접 오셔서 명명식을 한다고는 그러지, 짐작이 되겠지만 소위 건설 현장에서 용접하던 사람, 배선하던 사람, 뭐 그런 사람들 끌어 모아서 배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숙련이 돼야 얼마나 됐겠어요. 솔직히 급해지니까 블록 하나 붙이는 것도 제대로 손발이 안 맞아요. 정말 죽겠더라고. 만약에 2호선이 제대로 진수가 안 되면 나는 자살이라도 하고 없어져야 되겠다, 그런 비장한 각오가 되는 겁니다.”스틸 커팅을 자동화로 한 것도 아닐 테고, 회장님은 진척 정도를 모르고 계셨습니까?“회장님한테 일일이 보고를 못 드리지요. 언제까지 해! 이걸로 끝이니까요. 누가 나서도 2호선은 도저히 진수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거기다가 스코 사장이 절대 안 된다 이겁니다. 원칙적인 사람이니까 공정으로 봐서는 절대 진수식이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억지로 고집이냐 이거죠. 그렇다고 대통령이 오시는데 사장 말대로 접을 수 있습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통령이 온다고요!’ 만날 이러면서 싸우는 겁니다. 어차피 스코 사장은 2척이 완공되면 떠날 사람이고 회장님이나 우리는 명명식 못하면 그땐 어찌 되겠어요. 그래서 검수를 할 때 설계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건 작업에서 좀 뺐다가 진수식 끝나고 보완하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시간 때문에 도저히 안 되니까요. 그런데 또 스코 사장이 제동을 걸어요. 그래가지고 박재면 부장, 전갑원 부장까지 나서서 싸우는 거예요. 심지어 전 부장이 김영주 회장님한테 그랬다고요.‘바다가 무덤이다’는 각오로 일해‘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김 회장님도 방법이 있다니까 전 부장을 믿고 쳐다보시는 겁니다.‘강행군을 하든지 스코 사장을 돌려보내 버리든가 둘 중에 하납니다.’이럴 정도로 긴박하고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어요.”결론은 어떻게 내려졌습니까.“김 회장님도 상황을 아시니까 행사에 차질이 없는 방향으로 하라고 그러셨지요. 그러면서 어떤 얘기까지 나왔느냐 하면, 만약 스코 사장이 끝까지 진수식을 못한다고 막으면 ‘내가 점잖게 은밀한 곳으로 유인하지’ 이랬을 정도예요. 감금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분이 굉장히 유순한 성품인데 그런 정도까지 생각하셨으면 정말 그때 상황은 절박했다는 거죠.”그러면 스코 사장 없이 명명식 행사를 한 겁니까?“김 회장님이 직접 설득을 하셨는지 보고를 받은 명예회장님이 잔소리 말라고 하셨는지 스코 사장이 수용을 했어요. 정말 억지로 진수를 시켰고 예정대로 박 대통령 내외분 모시고 명명식을 가까스로 했지요. 그날 김영주 회장님을 비롯해 백충기, 전갑원, 박재면씨, 그리고 저까지 5명이 석탑산업훈장을 받았고 박 대통령께서 직접 달아주시는 그런 영광을 누렸습니다만, 하여간 진수식이 언제다, 공기가 언제까지다 하면 죽어도 거기에 맞추는 겁니다. 사실 바다가 내 무덤이다 하는 각오를 매일 했습니다.”행사를 코앞에 두고 대통령을 놀라게 해서 홍역을 치렀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이 아이디어도 냈고 현장에도 있었으니까 이 회장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이정일)잊혀지지 않는 일이지요. (웃으며)그때가 명명식 하는 날은 아니었을 거예요. 진수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는 건 맞는데. 박 대통령이 관심도 많으셨지만 초유의 26만t급 유조선을 진수시킨다고 하니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셨던지 예고 없이 내려오셨어요. 그래가지고 대통령께서 배 안쪽 밑바닥을 한번 보시겠다는 겁니다. 사실 큰 배 밑바닥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나 궁금해 합니다. 근데 대통령이 배 안에 들어가면 경호 절차가 아주 철저하고 복잡해져요. 작업자들 전부 체크하고 조사하고. 그래서 작업자들은 아예 배 안에 들어가면 못 나오게 해놓고 중역들은 바깥에서 도열해 있고 회장님만 수행을 하시는 거죠. 그런데 사건이 생긴 겁니다.”<계속>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육영수 여사가 첫 배 이름 지어

‘애틀랜틱 배런’으로 명명…오대양 누비고 인류에 기여하라 송축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19)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조선소가 정식으로 이름을 세계 조선시장에 내놓게 될 26만t급 유조선 진수식을 앞두고, 홍역을 치렀던 에피소드를 공개하고 있지만 대통령의 관심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었던가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워낙 철저하니까 뭔가 들은 얘기가 있어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그건 모르지요. 나중에 들은 얘깁니다만 일본 사람들이 하도 험담을 하고 트집을 잡아서 회장님도 불려가셨다고는 했어요. 하여간 배 밑바닥이 말이죠, 밖에서 볼 때는 삼각형이라서 좁은 줄로 아는데, 배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밑바닥이 아주 넓고 평평합니다. 운동장이에요. 폭이 50m나 되고 길이가 300m니까 대단히 넓은 거지요. 문제는 그때 발생한 겁니다. 기술자들이 뭘 생각했는가 하면, 박 대통령이 오셨는데 너무 조용하면 안 되니까 뭔가 일하는 표시를 내야 하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조용히 용접하는 것만으로는 일하는 표시가 안 나니까 유일하게 나타내는 방법은 망치 소리를 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대통령이 배 밑으로 들어가자마자 일시에 수백 명이 갑판 위에서 망치질을 한 거예요. 하하하.”명명식 TV로 전국에 생중계-그건 기술자들 스스로가 할 수 없는 행동인데요? 사전에 약속도 없이 어떻게 수백 명이 일제히 두드립니까. 누군가 지시를 했거나 신호를 보냈겠지요. “하하하, 그건 누구라고 말할 수 없어요. 좌우간 그렇게 두드리니까 배 밑에서 들으면 꼭 기관총 소리 같고 큰 망치로 때릴 땐 대포 쏘는 소리로 들려요. 순간적이죠. 난리가 났어요. 경호실장부터 놀라가지고 뛰쳐나오고 경호원들은 총까지 빼들고 소리치고 중역들도 당황해서 작업 중지다 뭐다 했지만 일은 벌어졌고 금방 중단이 됩니까? 더구나 중지하라고 소리치는 동안에도 서로 떨어져 있으니까 계속 두드려요. 그러니 박 대통령이 들어가서 나오실 때까지 난리가 났던 겁니다.”-회장님이 사색이 되셨겠어요. 현장에서 보셨을 텐데 대통령 표정은 어땠습니까. “배 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역시 박 대통령은 다르더라고요. 오히려 회장님이 화가 나서 독수리 눈이 되셨지 박 대통령은 의젓하게 나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질문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러셨어요.‘철판이 몇t 들어갔어요?’(박 대통령)‘3만2000t 들어갔습니다.’‘우리나라 철판은 정 회장이 다 먹는구먼요.’‘아닙니다. 아직 먹어야 될 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하항.’대통령도 웃고 기분 좋다고 하시면서 올라가셨어요. 여기까지는 좋았죠. 회장님이 어떤 놈 지시인지 색출하라고 불호령이 떨어지고 다음날부터는 책임자들이 전부 경호실에 불려가는 겁니다. 기술자들이 일하는 걸 좀 보여드린다는 것이 경호가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됐다고 사과했지만 그게 통합니까?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대통령께서 들어가시니까 수백 명이 망치질을 하는 건 이상하다 이거죠. 좌우간 경호실에 불려다니면서 혼쭐났습니다. 회장님은 따로 사과드리고, 하하하.”마침내 1974년 6월 28일 오전 11시 정각.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현대조선소 준공식을 겸한 26만t급 유조선에 대한 명명식과 진수식이 거행됐다. 장쾌한 군악 연주가 울려 퍼지고 수천 개의 크고 작은 풍선이 하늘을 덮고 있는 가운데 국기가 게양되는 동안 임직원들이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결코 여느 행사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벅차고 뭔가 해냈다는 환희의 눈물이 담겨 있었다. 박 대통령도 눈시울이 젖었고 그 모습을 전 국민이 봤다. 이날 정주영 회장은 짧은 개식사를 했지만 그 한마디 짧은 문장을 쓰기 위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내외분과 선주이신 리바노스 사장님, 그리고 국내외 귀빈 여러분을 모시고 새로운 조선산업의 역동을 알리는 진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수문을 열겠습니다!” 수문을 치장하며 내걸린 오색 테이프가 밀려드는 거센 물살에 터지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힘차게 밀어닥친 바닷물이 도크에 채워지기 시작하자 드디어 거대한 운동장이 일어서듯 서서히 26만t급 유조선 2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조선소의 탄생은 사실상 1호선을 명명하면서부터 고고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데 그 역사적인 선명(船名) 선포는 누가 했습니까?“1호선에 대한 명명식의 주인공은 영부인께서 맡으셨지. 얼마나 흐뭇해 하시는지 말이야, 하하항.”한복차림의 육영수 여사는 73년도에 용골을 앉힌 첫 번째 선박이라는 뜻으로 현대가 붙였던 ‘7301호선’을 대서양의 남작이라고 풀이하는 ‘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으로 명명하면서 오대양을 누비고 세계 인류에 크게 기여하라고 송축했다. 그리고 7302호선은 용선 회사인 셸 석유회사의 맥파젠 회장의 딸에 의해 대서양의 남작부인이라고 하는 애틀랜틱 배러니스(Atlantic Baroness)로 명명됐다. 선박의 명명식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왔고 항구를 떠나는 선박을 미인이 위로하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행사는 절정에 달했다. 현대조선소의 발전을 기원하는 수천 마리의 비둘기와 풍선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선장의 안내로 정주영 회장과 박 대통령은 애틀랜틱 배런호 조타실로 이동했다. 대통령은 감흥에 젖었다. “조타실의 이 조그마한 키 하나로 이 거대한 유조선을 움직이고 저 끝없는 바다를 마음대로 누빈다는 것이야?”(박 대통령)“각하, 오대양이 이 손안에 있습니다.”유조선 위에서 두 제독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신화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물론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이 진수된 것이 현대조선소만의 행사로 그 의미를 축소할 수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의 이목이 쏠릴 때 조선과 해운의 연계육성 정책을 발표했듯이, 한국 정부는 대형 유조선 건조를 전 세계에 알리는 시점에서 조선과 해운의 연계육성을 위한 종합육성방안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천 세부 계획 마련으로 76년부터 본격화되지만 조선소 건설은 해운산업의 기틀까지 마련하는 동기를 부여하면서 한국 경제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정 회장, 갑자기 신이 내렸어?”-미포조선도 그 무렵에 설립을 추진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언저리에서 했지요. 그땐 26만t 명명식을 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얘기가 재미있어. 나는 사실 1, 2호선 명명식도 중요했지만 미포조선소 허가 때문에 아주 분주하게 지냈어요. 그 당시에 3000만 달러 차관 교섭은 이미 끝냈고 정부에 외자도입 승인을 신청해 놓고 있었거든? 근데 이건 외자도입이니까 대통령 재가가 나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대통령을 만나긴 해야겠는데 꺼리가 있어야지? 하하항. 그래서 명명식 날짜를 잡아가지고 만나면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할 판이야. 대통령께서도 숙원이 조선소였으니까 당연히 참석하실 테니 잘됐다 싶은 거지요. 그래가지고 물론 미포만 일대를 이렇게 저렇게 밀어서 부지도 확보한다는 설계도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어요.” -미포조선소도 차관으로 설립을 하시겠다고 했으면 수리 조선소가 아니고 정식으로 배를 건조하는 신조(新造)회사로 구상을 하신 겁니까?“수리만 하는 조선소를 조선소라고 할 수 있어요? 수리를 전문으로 하더라도 일단 조선소는 맨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물론 초창기에는 수주를 하지 못해서 수리만 하는 조선소로 알려졌는데 욕심은 그게 아니었지. 좌우간 명명식 날짜를 잡았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아주 흡족해 하시면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하라고, 국민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크게 알리라고 말이야,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즉석에서 재가를 하셨는데 문제는 보증 때문에 대통령을 만나놓고 또 정부 보증을 서달라고 할래니까 입이 떨어져야지? 처음에 차관한 건 배를 다 지었으니 곧 갚겠지만 어쨌든 아직은 빚이 있으니까 입이 안 떨어져. 그래가지고 조선 산업이 부흥하자면 대형 조선사가 많을수록 좋다고, 그 소리만 자꾸 했어. 재가받을 생각으로 말이지, 하하항.”1975년 4월, 현대는 ‘현대미포조선소’를 설립했다. 미포조선소의 자본금 12억원은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이 출자한 25%가 포함된 금액이었다. 日 조선업계의 험악한 음모현대는 사업계획서에서 밝힌 대로 도크 확장 공사를 계속해 1975년 5월이 되자 3도크(건조능력 100만 t, 길이 640m, 폭 92m, 깊이 13.4m)를 완공할 정도로 속도를 냈고 단일 도크로는 세계 최대 건조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77년 3월에 4, 5도크, 1978년 1월에 6도크, 1979년 8월에 7도크를 완공할 만큼 사세를 확장해 거기에서 국내 최초로 2만6000t급 컨테이너선을 건조했고 1980년 5월에는 자동차 운반선을 역시 국내 처음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오면서 현재는 9개의 도크를 가진 세계 최대 조선소로 성장했는데, 그러나 성장이 있으면 반드시 시기와 질투와 험악한 음모가 있었다. -처음으로 26만t급 선박을 진수했을 때 일본 조선업계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사실상 선박 수주 경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보여집니다만. “(김형벽)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1, 2호선을 진수하고 뉴스가 막 타전되니까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의 시기는 야비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을 했는데요, 1974년도 11월이에요. 지금도 합니다만 그때도 수출 포상이 있었습니다. 수출의 날로 기억합니다. 내가 생산부장으로 일할 때지요. 서울로 갔더니 명예회장님께서 나를 불러놓고 사뭇 걱정스런 표정이세요. ‘이봐 김 부장, 청와대에서 자꾸 나오는 소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3, 4호선 배가 한 1m 정도는 휘었다고 그러는데 그게 사실이야?’느닷없는 말씀에 처음에는 무슨 얘긴지 몰랐어요. 배가 어떻게 휘어집니까? 그래서 그랬죠. ‘배가 휘었다는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엔지니어들만 모여서 만들었다면 경험이 미천해서 혹시 그렇게 될지 모르겠지만 로이드 선급협회에서 나온 수퍼바이저들이 하나하나 체크해서 오케이가 안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또 일본 놈들이 모략을 했구만.’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님이 정확히 보신 거예요. 일본 측에서 우리 야드에 와서 보고는 생동감이 돌고 물량도 확보가 돼 있고 하니까 듣던 것 하고는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이대로 나가면 선박 시장을 잠식당하게 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때부터 정말 온갖 말을 다 만들어내면서 선박시장에 악성루머를 퍼뜨린 겁니다. 방해 공작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20)

“꿈에 아버지 보이면 무조건 따냈다”

훗날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현대의 급성장은 모두 위기를 극복하고 도전으로 얻은 성취였다. 태국·베트남 진출에서도 그랬지만 조선 사업에 뛰어든 후 중동으로 진출할 때는 그야말로 위기와 맞선 최대의 결단이었다.

“내 평생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직접 사주팔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 집사람이나 여동생이 재미삼아 물어보고 얘기해준 적은 있어도 말이지. 나는 큰 입찰을 하거나 큰 공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아버지가 꿈에 보여. 그것밖에 없어. 하하항.”

자격미달 딛고 10억 달러 공사 따내

-당시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메인 공사만 1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적인 공사였지요. 그때도 입찰할 때 아버님이 꿈에 보였습니까?

“물론 주베일 산업항 때도 아버지 꿈을 꾸고 이건 우리가 먹을 수 있다고 덤빈 거예요. 1974년, 75년도에 10억 달러 공사라고 하면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공사고 난공사예요. 공사를 발주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렇고 세계적인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거야. 과연 어떤 회사가 이 공사를 수주할 거냐 해서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그때만 해도 입찰자격조차 안 되는 거야. 세계 10위권 건설사에 못 들었으니까. 그때는 사우디에서 우리 정부도 불신해 정부 보증서도 인정을 하지 않았어.”

-그런 정도로 대단한 공사였습니까?

“공사도 대단했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건설사 중에서 발주하겠다니까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회사다 하면 그 회사가 속해 있는 나라도 알 만하다 이거지. 건설회사의 힘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러니 입찰 자격은 고사하고 입찰 보증서부터 대한민국 가지고는 안 돼. 신용도가 높은 국가 보증이거나 은행 보증서를 가져가야 귀동냥이라도 하는데, 방법이 있어? 16㎜ 필름에다 시멘트 공장, 자동차 공장, 조선소 같은 걸 죄다 찍어 은행마다 찾아다니며 보증서를 끊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꿈에 보이는 거예요. 나는 인생의 한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 꿈을 꾸는데 그날 보이더란 말이야. 그러더니 다음날 은행에 가니까 2000만 달러 지급 보증서를 주잖아요. 결국 엄청난 경쟁을 했지만 10억 달러 주베일 공사를 따낸 거예요. 우리가 거기서 벌어들인 달러로 그 당시 국가의 외환 부도를 막은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

두 척의 대형 유조선을 진수시키면서 그동안의 모든 우려도 함께 실어 보내고 현대조선을 지켜온 스코 초대 사장도 76년 4월, 임기를 마치고 울산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때 정 회장은 그에게 “현대조선이 보고 싶어 오겠다고 한다면 언제라도 항공권을 포함해 모든 편리를 제공하고 환영하겠다”며 치하했다. 물론 현대조선의 발전을 자신 있게 보여주겠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스코 사장이 떠나면서 비로소 현대맨으로 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사실상 이때까지는 이름만 한국의 현대조선소였지 끌고 가는 선장이 외국인이라 마치 혼혈아를 키우듯 조선소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음을 숨길 수 없었다.

76년 8월, 정 회장은 늘 ‘왕상무’로 불렀던 김영주 부사장을 총괄사장으로 임명하고 신규 사업 담당 사장에는 정문도 부사장을 선임했다. 건설에서부터 한솥밥으로 배를 채웠던 현대맨들로 틀이 구성되면서 활력이 넘쳤다. 게다가 창업주의 매제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뒷받침돼서인지 ‘김영주 체제’는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회장님이 사실상 현대조선소 첫 사장이 되신 것 아닙니까.

“결국 구조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실전에서 뛰어본 팀들이 ‘단순히 배를 건조하는 실력만 가지고는 어렵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엔진·전기·기계 등 모든 것이 우리 기술 능력으로 맞설 정도가 안 되면 경쟁이 어렵다는 거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정 회장은 김영주 사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78년 2월, 현대조선을 현대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중공업 체제 정착을 시도한다. 이때부터 현대중공업은 새로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그동안 경영을 맡아 온 김영주 사장을 현대엔진 사장으로 보내고 78년 10월 이춘림 사장(전 현대중공업 회장) 체제를 출범시켰다.

“신군부에 1, 2등 회사만 희생”

이 사장은 현대가(家)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현대가와 동거우락(同居憂樂)해온 인물이었다. 실제로 친동생들과 같이 뒹굴고 닭싸움도 했던 그런 사이였다. 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지 정 회장은 그에 대해 “이 회장은 전공이 없어. 뭐든지 맡기면 다 잘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사장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력이 무서운 게 아니라 고객에 대한 신용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이 해고를 시키는 것보다 무서웠다고 했다.

“조선 산업은 해외 의존도가 80% 이상이기 때문에 신용을 잃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 고객은 선주인데, 납기를 준수하면서 단 하루라도 공기를 단축해주고, 거기다가 품질까지 만족스럽게 해주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만족이 곧 신용이거든. 우리 직원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을 거예요. 막 조졌거든. 하하하.”(이춘림)

그러나 79년부터 몰아닥친 2차 오일 쇼크는 또다시 최악의 위기를 몰고 왔다. 정 회장도 그 무렵은 악몽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일부 선주가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짐작이 됩니다. 그러고서도 또 신군부 때문에 몹시 고초를 겪지 않았습니까.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산업을 그때 그 인간들이 여러 개 조져놨어! 어떻게 해서 일궈놓은 산업인데. 정치물이 들어간 군인들이 뭘 안다고 통폐합이니 중화학 투자 조정이니, 가소로워서 말이지. (확)나는 평생을 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야! 평생 산업 현장을 하루도 떠나본 적이 없어! 통폐합당하고 기업을 빼앗긴 사주들 중에 어느 누가 저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 누가 누구를 치는 거야? 그동안 전부 잘해온 사람, 전부 1, 2등 하고 죄다 기업을 성공시킨 사람들만 골라서 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부도내고 쓰러질 기업을 조정하고 없애고 했다면 모르겠어, 잘하고 있는 기업을 그렇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 더구나 그렇게 치면, 당하는 기업들은 평생 고생해 놓고 국가에 해악을 끼친 몹쓸 기업처럼 인식되는 거 아니야? 정말 그런 취급 받아야 할 기업들이야? 어떤 기업인, 어떤 기업들이 당했는지 보란 말이야. 통폐합으로 희생된 건 전부 1, 2등짜리야! 에이, 부아가 치밀어서 더 얘기 못하겠어.”

위기는 계속됐다. 현대중공업은 78년부터 사업본부를 축소하고 기관차와 엔진, 중전기를 별도법인으로 독립시켰다. 79년에는 조선사업본부·플랜트사업본부·관리본부만 남기면서 나름대로 체질 강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면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됐다.

70% 이상이 조선사업본부의 실적에 좌우되는 구조에서 경기 변동에 대한 적응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면 취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수 기반이 없는데 해외 조선시장이 얼어붙으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기가 어렵게 돼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현대는 끈기와 저력이 있었다. 모두가 1등급 인재들이라고 할 만큼 유능했던 박재면·박영욱·김형벽·이정일·정태구·이현태·구영회·최병권·지주현씨 등 중간 간부들과 작업반장들까지 모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9년여 동안 중공업을 이끈 이춘림 사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발휘했다. 결과는 만족이었다. 81년 결산이 608억원이나 흑자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선박 수주액도 9억8000만 달러를 올려 비로소 차관을 쓰지 않고 10억 달러 수주를 달성하는 원년을 기록한 것이다.

“참 운이 따라줬어요. 세계 1등이다, 2등이다 하는 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설립 10여 년 만에 잠깐이라도 세계 1위 조선회사로 부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게 83년인데, 그때 선가(船價)가 바닥을 쳤다고 판단한 선주들이 비록 3만~4만t 소형 화물선이지만 대량으로 발주를 했거든? 말하자면 투기성 발주지요. 선가가 틀림없이 오른다고 본 거지. 그해에 무려 125척 440만t을 발주했으니 그런 유례가 없었지요. 세계 조선시장이 흥분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운이 참 좋았다는 것이, 그때까지는 발주가 나오면 거의 일본 조선사들이 독식하다시피 했어요. 근데 한꺼번에 물량이 쏟아져 나오니까 일본 조선사들 도크가 부족한 겁니다. 수주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전부 우리한테 몰리는 거예요.”(이춘림)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6·29 선언 후 87년부터 불어닥친 노사분규는 급기야 선가 상승을 가져왔고 원화 절상마저 겹쳐 조선 산업의 경쟁력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그해 현대중공업은 7월부터 9월까지 두 달 동안이나 혹독한 노사분규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급기야 새로운 환경에 맞는 경영과 혁신적인 체제로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정몽준 회장이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노사분규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그해 8월에 경영 일선으로 돌아왔고 ‘지긋지긋했다’는 밤샘 협상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11월, 회장에 취임했다.

몽준 회장의 취임은 두 가지 면에서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변화에 대한 순발력이 있느냐, 또 하나는 불황이 장기화되는 암울한 조선시장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 선사들 간의 출혈경쟁을 잠재우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조선과 해양·플랜트 등 중공업 전반의 불황 국면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해법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몽준 회장의 과감한 투자 결정

결과는 이상할 정도로 운이 따라주었고, 사업본부별 체계도 일원화시켜 순발력을 확산하는 시스템 구축도 성공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몽준 회장이 배운 것은 정 회장의 미래를 보는 안목이었다. 조선업계가 불황이었던 75년에 미포조선 설립을 밀어붙여 일본으로 갈 물량을 대거 흡수했듯이 훗날이지만 몽준 회장은 중역들이 모두 반대하는 중에도 8도크와 9도크 건설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미래를 보는 안목이었다.

더구나 정 회장이 대선 출마 실패로 좌절에 빠져있었음을 감안하면 몽준 회장의 오기에 가까운 집념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창업주 정 회장의 안목과 불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과감한 투자 결정은 현대중공업이 세계 1위의 조선소로 급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94년 이전까지만 해도 1조6000억원에 불과했던 조선사업본부의 매출이 9도크까지 완공된 96년부터는 2조원이 넘는 성과를 냈고 올해는 5조7000억원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을 만큼 끝없이 성장해 가고 있다.

갈매기만 찾아들던 황무지를 세계의 부호들이 찾아오는 최대의 조선소로 바꾸어 놓은 정 회장이 새삼 그리워지는 시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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