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정권기의 고도경제성장을 단순한 경제적 현상을 넘어 사회체제의 총체적 변화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할 경우 그것은 냉전체제하의 종속 및 이에 기반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반공독재와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냉전체제하의 종속이란 미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종속과 그것에 조응하여 '선택'된 한국경제의 발전전략을 의미하며, 그것은 자본 및 시장의 종속에 기반한 수출지향산업화로 구체화되고 그 결과는 국민경제의 이중구조로 인한 자율적 국민경제의 좌절을 뜻한다.
자신의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유무역제도를 세계적으로 확대하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 구상은 냉전의 격화로 대공산권 봉쇄정책의 한계 내에서 변용되어 수행되었다. 1947년의 '전도된 방침' 이래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다시 대공산권 봉쇄의 중추로 부각되었고 한국은 이를 위한 경제적 배후지로서 반공전초기지로 위치지어졌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반공전초기지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한 범위 내로 한정되어 미국은 경제성장보다 안정을 중시했고,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은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정권의 태생에서부터 정권유지를 위한 재원(국방비나 경제개발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미국에 종속적이었다.
정치·군사적 목적에 입각한 미국의 경제안정론은 일본과 지역통합을 통해 부족한 원조재원을 보완하고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선택'된 박정희정권의 196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경제안정을 위한 한국경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 속에서도 베트남전쟁 특수는 한국경제가 '이륙'할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마련했다. 베트남전쟁 특수는 1965~72년간 외환보유고의 평군 30% 가량을 점한 높은 비중이었지만,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도입되기 시작한 일본차관과 미국차관이 투자의 주종을 이루어 1962~71년간 총 투자율이 20.8%였던 데 반해 국내저축률은 9.6%에 불과하여 10.9%의 해외저축이 투자를 주도했다.
외자가 투자의 주력을 형성했으니 국내자금 동원조치도 이루어졌다.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에서 이들이 소유한 일반응행 주식을 국가로 환수함으로써 사실상 금융기관을 국유화하고 1962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관치금융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나 산업화 재원을 확보하고 금융재원을 증대하기 위해 시행한 1962년의 통화개혁이 실패한 후, 정부는 금융자원을 확보하기 위해1965년에 정기예금 이자율을 15%에서 30%로 두 배 인상했다. 그 결과 사채시장의 자금이 공금융기관으로 이전되는 효과를 가져와 1965~69년 사이 총예금은 7배나 증가하여 GNP의 10%에서 30%로 증대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의 금융자원 증가는 차관 도입과 경제성장에 의한 자연증가가 대부분이었다. 차관에 기반한 공업화는 상환을 위해 수출을 요구했는데, 수출증가율(실질)은 1962~66년간 38.6%, 1967~71년간 33.8%로 급신장했다. 1960년대 수출의 증가에는 자유무역주의 이념을 표방하며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완화한 브레튼우즈 체제, 원조가 아니라 무역확대를 통한 선진국의 후진국 지원을 주장한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의 성립 등과 같은 국제환경적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미국은 한국을 '바이 아메리칸'정책에서 제외시켜 미국시장을 개방했다. 미국시장에 대한 수출은 1961년 총수출액의 16.6%에서 1971년에는 49.8%에 달했는데, 그 중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26% 정도이던 것이 제2차 계획 기간에는 52%로 급증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공업화는 단순가공무역형이어서 자본재나 투입재 증가가 가속되어 1966년에는 3억달러, 1971년에는 10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였으며, 수출액에 대한 원리금상환액 비율도 1966년의 6.2%에서 1970년에는 31.4%로 급증했다. 금융통제를 통해 경제에 대한 개입을 강화해가던 정부의 지대(rent)배분이 비록 수출을 비롯한 생산활동과 연계되어 효율성을 추구한 측면도 있었지만, 지대를 중심으로 한 유인체계가 관료주의의 폐혜로 생산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0년대 말에 이미 부실기업문제가 대두되었고, 결국 8·3조치라는 더욱 강압정긴 국가개입을 통해 대기업에 대한 엄청난 특혜를 수반하면서 중화학공업화로 전환했다.
한편, 박정희정권에게는 1969년의 닉슨 독트린, 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 철수,미·중화해로 대변되는 냉전구조의 균열 등 국제정치환경의 변화가 1971년의 양대 선거로 표출된 그간의 경제개발전략에 대한 도전보다 더 위협저 요인이었고, 실제로 한·미간 갈등도 표면화되었다. 1970년대 카터 행정부는 효율적 봉쇄정책의 수행을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 '전도된 방침'의 연장선에서 추구된 일본에 대한 아시아지역의 책무 이전, 위험지역에 대한 개입감축 등을 대외정책의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입각하여 주한 미지상군 철수계획을 입안하면서 한·미관계는 '긴장된 동맹'의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박정희정권의 '대미자주성'과 그로인한 한·미관계의 긴장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도 기본적으로 종속관계는 유지되었고, 강력한 미국의 부활을 주장한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전두환정권은 갈등요인이었던 자주국방을 포기하고 미국과 종속적 밀월관계를 재구축했다.
국내·외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박정희정권의 대응은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고업화의 선언으로,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로 나타났다. 달러의 금태환 일시 정지를 선언한 '닉슨 쇼크'(1971)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신보호무역주의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어서 자금과 시장을 해외에 의존하며 경공업 수출위주로 재생산을 유지해가던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더욱이 선진국이 기술·지식집약형 중화학공업으로 이전하고 노동집약적 조립가공형 중화학공업을 후발국에게 이전하는 국제분업화체계의 변화는 이에 대한 적응, 곧 또 다른 종속을 요구했다.
국제환경의 변화와 함께 인플레와 불황, 국제수지 악화와 그에 따른 외채상환부담의 누적, 국내경제의 이중구조(수출산업과 내수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도시와 농촌), 부실기업문제, 취약한 금융산업 등 1970년대 초의 위기는 경제성장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추인받고자 했던 박정희정권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여기에 미군철수를 매개로 한 한·미간 갈등은 안보위협을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군수산업 육성의 견지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추구하게 했다.
유신체제하 박정희정권기에도 차관을 포함한 외자도입은 늘어갔지만 1972~81년간 총투자율 31.7%에서 국민저축률이 21.1%, 해외저축률이 10.5%를 차지하여 이전과 달리 국내자금 동원이 투자를 주도해갔다. 예금금리 인상과 함께 1967년부터 지역금융의 확장을 위해 지방은행이 신설되면서 예금수취능력이 향상되었고, 또 이들이 국가의 정책금융을 취급하게 되면서 국내저축률이 상승했다. 이 시기의 외자는 두 체례 석유사태로 인한 국제수지 적자로 해외차입이 급증하는 가운데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비중이 증대했다. 1970년대 초 차관기업의 부실화로 인해 원리금 상환의무가 없는 직접투자가 추진되었고 수출자유지역이 설치되었다.
수출증가율(실질)은 1972~76년간 29.6%, 1977~81년간 12.3%로 1960년대보다 떨어졌고 1970년대 후반기로 가면서 둔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70~75년에는 1973년을 기점으로 수입신장률이 수출신장률을 상회하여 경상수지 적자가 1973년의 3억달러에서 1974년에는 20억달러로 급상승했다. 이것은 중간재와 자본재의 높은 대외의존도가 제1차 석유사태를 계기로 적자로 이어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낮은 부가가치 창출능력 때문이기도 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제조업 전체 수출액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1975년 38.9%에서 1980년에는 52.1%로 증가했으나 동시에 수입비중도 71.5에서 81.8%로 늘어났다. 1970~78년간 제조업 전체의 수입유발계수는 0.36에서 0.39로 상승했는데, 경공업 계수가 0.34에서 0.31로 저하한 반면, 중공업 계수는 0.42에서 0.48로 상승했다. 더욱이 중화학공업은 경공업생산재를 수입대체하는 소재산업이 추구되기보다 경공업에 대한 수출대체산업의 성격인 조립가공산업으로 추구되었는데, 이것은 1960년대의 경공업과 같이 종속적 재생산구조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미관계를 중심축으로, 대일관계를 보조축으로 한 한국 자본주의의 순환구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조의 분업구조 속에서 말단의 '생산공장'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기능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정치·군사적 대미종속은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대미·대일의존에 기반한 고도성장은 정치적으로 독재권력이라는 위로부터 정치적 조직체의 완성, 즉 독재권력의 내포화를 통한 상의하달식 조직체를 완성시키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기도 했다. 독재권력의 내포화는 한편에서는 정당조직의 탈정치화, 관료조직의 개편, 기타 사회조직의 신설 및 수직적 통합을 위한 정치행정의 효율화를 통해,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조직의 이익 보장과 균점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미·대일관계의 안정화와 고도성장을 위한 '총력체제'의 유지 강화를 위해 정치권력의 독재화는 필수조건이었다.
대미·대일종속에 기반한 고도성장과 독재체제는 대북생산력 경쟁에서의 우위 확보를 요구한 냉전적 조건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다. 고도성장은 1950년대 구호 차원의 반공이데올로기를 북한에 대한 생산력 우위를 담보로 경제적 차원에서 내포화시켜 선통일론을 후퇴시키고 선건설론에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로써 분단체제의 영속화와 흡수통일을 위한 물적 토대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반공독재와 경제발전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경우, 박정희정권기의 특징은 1950년대에 정치적 구호에 머물러있던 반공을 경제적 개념으로 질적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생산력 우위를 확보하여 군사력 증강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남한 내의 계급대립을 한편으로는 정치적 억압기구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확대에 따른 결실을 부분적으로 분배하여 일부 해소함으로써 반공체제를 경제적 개념으로 전환시키고 반공체제를 내포화시킨 것이다.
최근 박정희 재평가에서 일부 나타나는 분리평가의 경향, 즉 경제적 고평가와 정치적 저평가는 냉전체제하의 종속, 반공독재체제라는 박정희정권기의 특징적 요소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분리한 것일 뿐이다. 이 두 요소는 동존의 양면과 같아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를 규정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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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부록4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입니다.
박정희와 그 시대의 경제라는 주제 자체가 이미 오랫동안 다루어졌었고 또 그에 대한 평가를 '공·과로 나누어야 한다'는 의견들도 꽤 보여서 예전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볼 겸(저도 공부할 겸)발췌해서 옮겨적습니다. 한번쯤 정독해 보시면 이것(경제적 공, 정치적 과라는 평)은 굳이 나눌수 없다라는 것에 공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총체적인 경제적 측면에서의 평가 이외에도 정치·사회적 측면에서의 내용적 정리와 평가도 필요할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할만한 서적같은걸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