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친일 의혹, 그 더러운 진실

이밥에고깃국 작성일 14.09.09 07:17:53
댓글 44조회 20,631추천 4

좌파들의 박정희 관련 날조선동의 99%는 반박 가능합니다.

유입분들이 반드시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 위인 박정희를 폄하하는 세력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문을 실은 글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떄문에 시간내서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박정희를 폄하하는 것에 반박하는 방법보다

박정희를 폄하하는 세력의 실체를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이미 박정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므로

그것부터 차근차근 반박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시작부터 종지부를 찍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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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친일파 입증 불가"

[단독]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직속위원회의 상반된 평가

09.11.06 16:04l최종 업데이트 09.11.06 16:13l박상규(comune)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밝히는 등 일제에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고 있다. 붉은색 원 안의 사진의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이다(자료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관련사진보기

 

민 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한 가운데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가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일진상규명위는 오는 30일 활동을 종료할 예정이지만, 민간연구기관과 정부기관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전혀 상반된 평가를 내린 셈이어서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20일경 발간되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핵 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관 계자는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다시 평가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위원회의 보고서는 벌써 인쇄가 들어갔고, 지금 와서 새롭게 연구하고 추가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결국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후대의 평가에 맡긴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린 셈이다. 


친일진상규명위는 2004년 12월 29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법률'이 국회에서 의결됨에 따라 이듬해 5월 31일 발족했다.


친 일진상규명위의 설치 목적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위원회의 기능은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및 결정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국내·외 자료의 수집 및 분석 ▲조사보고서 작성·발간, 사료편찬 및 사료관 건립 등이다.


이들의 활동기간은 "구성을 마친 날부터 4년(6개월 연장가능)"으로 규정돼 있어 오는 11월 30일 위원회는 정식 해산된다.


친 일진상규명위의 활동 근거가 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를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등 총 20개 항으로 나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을 두고 봤을 때, 혈서로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에 입대한 박 전 대통령의 행위가 과연 친일이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4890&CMPT_CD=P0000   141020966044146.jpg

 

노무현 직속 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 친일 근거 없다"

등록날짜 [ 2012년12월04일 22시52분 ]

 

[핫 뉴스=이승훈 기자]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다카키 마사오” 발언이 화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충성 혈서를 쓰고 친일 행위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허위 사실로 드러나 이 후보의 선거법 위반 논란이 불거졌다.

 

이 후보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1차 TV토론에 출연해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고 유신독재 철권을 휘둘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뿌리는 속일 수 없지 않겠냐”며 박 후보를 공격했다.

 

이 후보의 발언은 박 후보의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이 과거 만주군에 지원하기 위해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혈서를 써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오랜 의혹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허위 사실이다. 2005년, 즉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구로 발족했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진상규명위)’는 지난 2009년 4년 간의 조사를 마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2009년 11월 6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해당 매체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에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 또는 근거 없는 비방은 공직선거법 제250조(허위사실공표죄) 및 동법 제251조(후보자비방죄)를 위반하는 행위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후보 처벌 여부에 대해 자세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핫뉴스 이승훈 기자 (cellines@hanmail.net)

 

 

 결론 : 이에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근거라곤 민문연에서 들이민 만주신문 하나뿐인데 기사에도 나왔다시피

앞뒤 내용이 하나도 맞질 않아 학계에선 이미 사료로 취급할수 없다 결론

 

노무현 정부 시절 노무현은 박근혜를 공격하기 위해

이미 사학적으로 끝난 사실인 박정희 친일 논란을 다시 부활시켜

친일진상규명위라는 좌파사학자들 모임을 자신의 직속 기관으로 두어 조사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결과는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이라 할수없다" 였고,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만주군관학교의 박정희

 

좌파들의 주장 중에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들어갔으니 친일파라고 합니다.

지청천 장군, 백선엽 장군, 김수환 추기경 이런 사람들도 일본군 출신이었으며

워싱턴 대통령, 장개석, 간디도 영국군 출신이었습니다.

 

일본군에 복무했다고 다 친일파로 모는 게 타당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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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김백일'이라고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한 다른 분에 대한 얘기지만,

일본군에 있었다고 친일이면

워싱턴, 간디도 친영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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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 하여 항일항쟁 주도한 장개석도 여러분 말대로라면 친일파겠네요.

일본을 그토록 혐오했던 이우 황자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니까 친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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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였던 김수환 추기경도 친일파였겠군요?

 

그리고 '일본군 복무하면 닥치고 친일' 이 논리대로라면 김대중 대통령도 친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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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상고 졸업앨범입니다.

빨간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목포상고 학생회장이었던 김대중입니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이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씨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습니다.

즉, 김대중은 친일파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대일본 제국을 위해 나가서 싸우자며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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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당시 일본군복입니다. 김대중이 입고 있는 것과 100% 일치하죠.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기준을 갖고 본다면

김대중은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짤 두 개만 더 첨부할게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학생 대표로 축사를 읽었다는 말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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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대표 이름 잘 보세요.

결론. 개구라.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박정희는 일본 육사가 아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겠죠.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주군이었던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에서 두 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을까요?

어차피 충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건데요.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을까요?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나라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만주군을 일본군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만주국 경찰로 복무했던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입니다.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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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입니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겠죠.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한 겁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나요?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옵니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무슨 생각이 들까요? 마찬가지인 겁니다.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한 겁니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을 보면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습니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 김대중이고 뭐시고... 워싱턴 장제스는 그렇다 치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쓴 X끼잖아' 하겠죠.

 

자, 좋아요. 그럼 이제 박정희 혈서 들어갑니다.


박정희 혈서 진위여부 논란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일혈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되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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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 씨의 증언이 나옵니다.

 

"1938년 5월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께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①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라는 부분과

②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일단, 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은 몇 살이었을까요?

관련하여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를 확인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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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응시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증선이 증언한 바 당시 1938년이면 박정희 나이가 22세일때인데,

한 두살 낮춘다고 응시자격이 생겼을리가 없겠죠.

 

이쯤에서 유증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중앙일보 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유 선생의 지적처럼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시험을 쳤기 때문에,

그로부터 1년 5개월 전에 혈서를 보냈다는 얘기는 여러모로 의심이 가네요.

 

당시에는 모집여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1939년에야 만주군관학교 설립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유증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재학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여서

하사관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 미만까지 지원할 수 있었으므로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고민했네 어쨌네 하는 것은 개구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 믿으실까봐 증거자료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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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앞의 왜말 문서와 같습니다)

 

두번째로 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제  음력 생일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정희는 나이를 고친 적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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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 위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앞서 혈서가 공개된 신문이 1939년 만주일보라고 했는데

만주일보는 1935년에 폐간되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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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황한 민족문제연구소(박정희 혈서 떡밥을 공개한 데)는

만주일보가 아닌 만주신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알 거면 제대로 알고 까시든가...

 

게다가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건 1939년 2월 24일에 이미 만주군관학교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왜 기사는 1939년 3월 31일에 나왔을까요?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혈서 이야기는 이것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혈서지원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만주일보 사본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징모를 말그대로 풀이하면 징집과 모병을 뜻하는데,

만주국이 국병법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1년입니다.

징모라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 것이지요.

만주국 발행 정부공보를 아무리 뒤져봐도 징모과는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만주군관학교의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출한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 한번 되네요.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 정모과라는 부서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징모과와는 엄연히 다른 부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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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재신경칙위치안부군형과'라고 되어 있네요.

존재하지 않는 부서에 혈서를 제출한 박정희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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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박정희 혈서에 대한 만주일보 기사를 갖고 좌빨새끼들이 혈서 혈서 드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만주일보라는 신문사는 1935년에 이미 폐간되어 없어진 신문입니다.

 

게다가 혈서에 대한 증거물은 이 조작기사 말고는 쥐 코딱지 만큼 없음 대충 정리해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일보에서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렸다고 5년동안 주장.

근데 만주일보는 1935년에 폐간 으잌ㅋㅋㅋ


뻥카가 들통나자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일보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꿈.

근데 만주신문은 일본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주 기관지임 + 만주신문은 창간호도 없음.


근데 최근에 근데 일본 국회 도서관 마이크로필름에서 기사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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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좀들은 만주신문이 찌라시면 일본 국회 도서관에 찌라시도 있냐면서 극딜 시전


여기서 저 신문의 이상한 점을 찾자면??

 

1. 신문 원본이 없음.

2. 조작된 복사본 한장만 있음.

3. 박정의 친일혈서 기사 부분만 어떻게 딱 하나만 있을수 있을까?

4. 그 당시엔 쓰지 않던 현대 일본어 표현으로 적혀있는걸로 보아 일본어를 완벽하게 통달하지 않은 사람이 쓴것이라고 확인이 되고 있음.

5. 아까도 말했듯이 애초부터 날짜가 맞지가 않음.

혈서를 썻다고 한 날짜는 3월 29일.

근데 실제로 학교의 합격자 발표는 2월 24일..

박정희가 친일 혈서를 썻다는 진실된 근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혈서 사진도 혈서 목격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박정희가 입학한 학교는 만주육군 사관학교였는데

만주국군은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습니다.

(2년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

 

박정희 혈서의 진실 여부를 가지고 논쟁하는 자체가 악질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 프레임에 갇히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황국 신민으로 길러졌고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충성스런 황국 신민 행세를 해야 가능한 시대인데,

그 이후 실질적인 친일행적이 있나 없나를 가지고 판단해야지

안그러면 지 청천, 백 선엽 장군 등등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일단 만주군은 일왕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갈때 일왕한테 뭐 충성이니 뭐니 이딴게 없어 만주국의 군대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조선인은 그당시 일본군에 입대할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장교로 안 뽑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박정희가 교환학생 방식으로 일본육사로 건너간뒤 졸업하고도,

졸업자 명단에 일본군 장교 소위 박정희가 아니라,

만주군 장교 소위 박정희라고 나와있었지요.

그리고 저 신문자체가 조작입니다. 

 

혈서신문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이크로필로으로 복사한 사본만이 존재 합니다.

사본은 법적증거력이 매우 현저히 떨어집니다.

조작가능성 때문이지요.

원본은 없고, 사본이라는것도 현대식 일본어가 쓰여진 엉터리이고,

글을 쓴사람 행적은 오리무중입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나온 저것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는 좌파가 태반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그 짧은 기사안에 중대한 오류가 3가지 이상 밝혀졌기때문에

학계에선 신빙성을 담보할수 없다는 이유로 완전히 사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국회도서관이고 자시고 일본 국서인 일본서기 내용이 다 진실이라면 신라와 백제는 3세기부터 4세기까지 일본 식민지였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좌좀들 말대로 박정희가 혈서를 쓰고 입학했다고 해도

입학하기 위해 호소 형식으로 쓴 것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박정희를 친일파로 둔갑시키기에는 여러 증언들로 인해 명함하나 내밀 수 없지요.

 

혈서가 진짜든 아니든 문제는 우리의 인식입니다.

좌파들 역겨운 것 중의 하나가, 혈서 들먹일때 '조갑제도 혈서 썼다고 하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좌파들은 조갑제 주장에서 혈서 대목은 수긍하면서 그것이 첩보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일이라는 것과 비밀 광복군을 했다는건 부정합니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것만 보는 전형적인 진영논리지요.


‘만주신보’ 사본을 공개한(그래서 아직 진부 논란이 없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혈서 자체를 소신파 친일의 명백한 증거로 보지만, 그 자체가 억측입니다.

당시 나이 많은 시골 교사 박정희로서는 입학을 위한 편법으로 대일 충성의 수사(修辭)를 발휘했다고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즉 제스처에 불과했지요. 교사 시절의 유다른 반일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면종복배(面從腹背)의 트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앞에 복종하는 척하며 다른 꿈을 품었던 경우입니다.

앞으로 혈서 때문에 박정희 친일파 프레임에 갇히지 마세요.

혈서를 썼든 안 썼든 그것이 박정희 친일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5. 창씨개명 했다?

 

창씨개명 하면 친일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일본명 도요타 다이쥬)을 포함한 국민의 80%가 창씨개명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의 80%가 친일파겠네요.

 

김대중은 일왕이 죽었을 때 머리까지 조아린 골수 종자 인데, 왜 박정희만 물고 넘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김대중이 도요타 다이쥬 라는 창씨개명을 했다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혹자는

"창씨개명 한 게 죄가 아니라, 두 번 한 게 죄다"라고 합니다.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었는데

그 이름이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 하여

나중에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꿨다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서 잠깐,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를 반박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김병희 옹의 말을 퍼왔습니다.

 

김병기 옹의 홈페이지인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

 "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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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이 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김대중)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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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병적과 서류를 모두 뒤져보면

박정희는 광복 때까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절대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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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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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 옹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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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

 

 

왼쪽이 오카모토. 오른쪽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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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제2창씨명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의 실제 이름은 오카모토 히로시(岡本寬)이다.

實자와 寬자가 워낙 비슷해, 옮겨쓰면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35년에는 實로 표기가 되어 있고 1936~1943년까지는 寬로 표기가 되어있다.

히로시가 미노루로 둔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오카모토는 1930년 조선공립고보에서 시작하여 1932년 광주학생사건 당시 광주제일고보의 교유(敎諭)로 있었는데,

물의를 일으킨 조선학생들을 일망타진한 수훈갑의 공로가 있어 1등급 특진하고,1935년,

그러니까 박정희가 3학년이었을 때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현준혁의「교유 및 생도의 비밀결사사건」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불온사상을 특별히 감독하고 단속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 오카모토를 대구사범학교로 발령시킨 것이다.

과연 오카모토는 당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카모토가 부임한 이후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퇴학과 정학을 밥먹듯이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워낙 학생들을 개패듯이 팼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오카모토는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을 짓밟고 일어선 덕에 그 뒤로도 승승장구하여,

1940년에는 6등 授瑞寶章이라는 서훈을 받고 함경남도 道視學官을 거쳐 1944년에는 청주사범학교장을 지냈다.

평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직위까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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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박정희 ≠ 오카모토 미노루

2번 개명 안함 .

오카모토와 박정희는 다른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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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속계만 봐도 1945년까지 高木正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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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원면직 발령원부나 보고 날조를 하던가.

1940년.



충격적인 사실은,

박정희 = 오카모토 미노루’ 는

북한에서 시작된 날조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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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당한 사람들은 박정희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며 열심히 사람들을 또 선동하고 있습니다.



대선토론회에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문제

이시완 자유기고가, leeshiwan@gmail.com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보다가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가 갑자기 뜬금없는 ‘다카키 마사오’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인터넷 포털에서는 갑자기 ‘다카키 마사오’라는 검색어 순위가 급등하고,

덩달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또하나의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이름까지 검색 랭킹에 등장했다.


이것을 본 많은 네티즌들은 무책임하게 트위터, 인터넷 댓글을 양산하며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를 들고 나와 박정희와 박근혜 후보를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소동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얘기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대답은 뻔하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2001),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그리고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 ‘김형욱 회고록’(1985),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칼럼 및 저서 등이 바로 그들의 ‘근거’다. 


하지만, 그 어떤 자료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카더라’ 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점이 있다. 바로 위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서다.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와 대립했던 사람이거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측근, 혹은 친북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티 박정희’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안티박정희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근거라며 늘 가져오는 근거는 일본 측에서 발간한 ‘일본육해군 총합사전’이다.

실제 이 사전의 2판(2005)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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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해군 총합사전' 2판 (2005)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사전의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현재까지 언급되고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에 나온 ‘김형욱 회고록’인데,

필자가 발견한 그 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북한’ 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 8월11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을 보면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에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쏟아놓는데,

그때부터 ‘오카모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조선의 한 집권자는 우리 인민이 일제 침략자들에 항거하여 싸울 때 혈서를 써서

‘천황’의 ‘적자’가 될 것을 맹세맹세한 후 ‘특등 일본인으로’,

‘돌격대장’으로 ‘오까모도중위’로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애국적 인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토벌’에 110여회나 참가하였으며 조선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동포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죽이고 생매장하는

몸서리치는 만행을 손가락 하나 떨지않고 감행한 자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73년 8월11일 로동신문)

여기서 ‘오까모도’가 박정희를 지칭한다는 것은 1987년 북한의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나온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라는 책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


일본 군국주의 우두머리 한놈인 구모놈은 박정희 역적놈을 ‘가즈오료리점’에 특별히 불러내다 먹자판을 벌려놓았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자네 퍽 몰라보게 됐네”

“각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랑 받던 오까모도입니다”

“아무렴 알아보고 말구”

“그떄 선생님은 저를 돌격대장이라고 불렀지요”

“그랬지.암 돌격대장이야.

오까모도군이 지금 남조선의 실권자로 나타났지만

내 눈에는 옛날 자주빛깔 만주국군의 군관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네”

“고맙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저 역시 그 때를 자주 추억하곤 합니다”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금성청년출판사1987)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박정희를 악의적으로 ‘오까모도’ 라고 설정하여,

일본인에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단지 북한과 한국의 일본어 표기법이 달라 ‘오카모토’가 북에서는 ‘오까모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 라고 주장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비판을 위해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티박정희’ 진영이다.


문명자씨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직접 면담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으며,

김형욱씨 역시 박정희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 비판의 선봉에 섰고,

김삼웅씨는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씨가 만든 평민당 당보의 주간을 맡을 정도로 친DJ의 성향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전형적인 ‘안티 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본 ‘박정희=오카모토’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보았느냐고.

북한자료가 아니라면 당당히 밝힐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 박정희 친일설, 혈서설 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제시는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근거가 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어야 한다. 


만약 그 출처가 차마 북한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카더라’ 라고 말을 하고 싶다면

한국 사회에 무분별하게 퍼진 그 ‘설’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가져야할까?

정적 비판도 좋지만 도를 넘어서는 인신공격은 정파,

시대를 떠나 어느쪽이건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는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고산 고정일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발,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렸습니다.

그에겐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이란 근대적인 선진문화였습니다.

그즈음 선진문화 중 하나가 일본군사체제였기에 만주군관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적진 소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불을 훔치러 간 '프로메테우스 행보'입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제대륙침략선봉 황야의 늑대 이시하라 간지,

천황의 여우 기시 노부스케 두 걸물의 만주국건설 산업경제개발방략과 근대적 국가통략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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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조경한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자세한 설명은 이 짤로 대체합니다.

(오타가 났습니다. 조경환이 아니고 조경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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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한 선생은 실제로 박통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생각했더라면 친일파를 더럽게 싫어했던 조경한 선생이 그를 가까이했을 리가 없습니다.

 

 

  

좌파들은 조경한 선생님 일대기를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박정희가 친일파였다면 김학규 장군을 깍듯이 대해줬을 거 같습니까?

 

아무리 조작드립 치면서 역사를 왜곡해봤자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작 친일파 집단을 신봉하는 새끼들이 애국자를 친일파로 덮어씌우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을 공개합니다.

원문의 일부를 밑에서 언급합니다.

이곳에 가시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스압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링크를 걸었습니다.)

 

김구 선생님과 조경한 선생님의 말이 구라라면

박정희는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이름이 올라갔겠죠.

 

어떤 분이 백범 선생은 저런 글 쓴 적 없다고 하시던데,

글쎄요, 사실 저게 진위여부 논란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신 이걸 보여드리겠습니다.

김학규 장군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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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립군 토벌했나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 시절 팔로군을 공격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팔로군은 어디까지나 중국 공산당의 군대일 뿐, 독립군이 아니죠.

 

사실, 일제 말에 독립군은 만주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다 이동한 상태였다고요.

 

실제로 류연산이라는 작자가 박정희 독립군 토벌설을 제시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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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합니다 ㅇㅇ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모든 성적이 아주 우수했지만  전체 성적이 바닥이었습니다.

이유는 황국신민과목을 백지로 냈거든요.

 

박정희가 모든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으면서도

늘 전체 성적이 바닥을 헤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아리카와 당시 중좌는

박정희가 윤리 등 황국신민 과목에는 백지 답안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맺어졌으며 오래 지속된 사제지간의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군관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요?

백범김구의 백범일지에는 박정희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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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 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 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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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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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967년에 출판되었던 도서 "광복군" 중 핵심 내용을 보여주는 두 페이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소설 형식의 이 증언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소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들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독립군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 책의 내용이 정확하다.

좌빨들은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해 왔으나 이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다.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의 조종을 받은 조선인 공산당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여운형이 배심원이었던 재판으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가 독립군이 괴멸되었다. 이후 독립군은 다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 소재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국 임시수도 중경이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정규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첩보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참전국으로서의 임정 광복군의 주요임무는 비밀광복군, 즉 광복군 OSS를 통한 첩보전이었음을 광복군이 쓴 역사소설 "광복군"은 증언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음이 이제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다.

만약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역할이 없었다면 조선은 영영 독립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미국은 몇차례 일본과의 휴전을 고려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왜 미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과 휴전하였는가? 유엔군의 승리할 승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첩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그 출처가 박정희로 거슬러올라가는 첩보가 있었다. 이른바 관동군 주력부대가 남양군도로 이동하였다는 첩보였다. 연합국으로서는 이 중대한 첩보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오로지 광복군 OSS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고, 광복군은 박정희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의 고급기밀을 빼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인 만군 군관이었다.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가 바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스승이었으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진학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으며,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관동군 기밀을 빼주었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일본은 연합국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양군도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미국이 깜짝 놀랐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가 백범일지에도 실려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 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그리고, 이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에 대한 김구의 이 기록의 사실성은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2008년)에 공개한 자료로 다시 한번 확증되었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승만 박사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아시아 지부 광복군 OSS의 첩보전 만군 소위 박정희가 큰 기여를 했다는 증언은 김구 계열의 광복군 인사들만 한 것이 아니다. 우사 김규식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이 김대중 정권 시절 출간한 아래의 도서 "해방 3년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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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송남헌은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좌 빨들은 좌파 사하계의 거장 송남헌의 이 기록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기록을 부정할 때 좌파 사학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러시아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괴멸시켰던 여운형, 해방을 앞둔 시기에는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던 여운형이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색을 내려면 건국동맹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군사행동을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

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

이 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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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까기로 유명했던 송남헌이 쓴 책에 박정희가 광복군 쁘락치한 기록이 나옵니다.

 )

 

골수 좌파 지식인의 증언

포 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송남헌>이라는 사람을 두들겨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송남헌[宋南憲, 1914.4.11~2001.2.20]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 (중략) 광복 후 군사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이 정도면 극우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좌빨' 아니면 거의 '빨갱이' 수준이다.

 

특 히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2년 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런 그가 <해방 3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26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 이 글에는 <만주군 박정희 중위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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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다섯번째, 아래에서 세번째 줄 주목. 이 씨는 다음 날 (2월 10일) 저녁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자기 신변을 밝힌 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중위와 신대위에게 주었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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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네번째 줄 주목 : 이 국내 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독립군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자세히 알아보면 진짜 개병/신같은 소리입니다.

 

이글만 봐도 알겠지만,

당시 진짜 독립군은 거의 궤멸되서 만주쪽엔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싸운건 중국 만주 지역을 철권통치하던 무장한족(군벌)이었습니다.

당시 삶이 힘들어 만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받아준건 만주국이었거든요.

한족들은 조선인이 땅을 소유하는걸 엄격하게 막고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무장한족은 자기들이 점령하던 지역을 빼았겼으니 만주국과 싸우려 들겠지요?

그들의 기치가 '조선인과 일본인을 쫓아보내자'였고 그게 항일부대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일 독립군이였을지 몰라도 우리 조선인 입장에선 적군이였지요.

그러니 박정희는 그곳에서 그들과 싸우는걸 즐거워 했을 겁니다.

 

이후 박정희는 광복되기전 광복군으로 들어갔고

OSS 지금은 CIA로 불리는 조직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요?

어쨌건, 박정희를 못 까서 안달인 악마같은 좌파새끼들의 필살기라고 주장하는 친일파 증거니까,

까는건 제대로 반박해줘야겠지요.

 

박정희가 독립군에 협조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님이 인정 했고

백범 일지에 기록되어 있는 일입니다.

 

독도 팔아넘겼나?

 

대한민국에 귀화한 일본인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널리 알리고 계신 호사카 유지 교수의 말을 빌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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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일본인, 안티 박정희 세력에 일갈

 


 

독도 수호운동가

세종대 교수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유지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으로 ‘독도사수’ 운동을 벌여온 호사카 유지(사진. ほさかゆうじ) 세종대 교수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일부 세력의 ‘왜곡’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14일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지난달 말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는

‘한일협정’ 관련 심포지엄에서의 자신의 발표문을 어느 인터넷신문이 크게 왜곡해서 보도했다고 전했다.

 

발표문 내용은 <한일협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의 의제에서 제외하라”고

도쿄에 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면서 “본건은 한국 정부의 안정과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므로

만약에 한국 측이 수락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일회담을 중지해도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정부의 이런 단호한 방침에 일본 정부가 양보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겠다는 안을 거두어들였고,

독도 명칭을 교환공문에서 삭제했으며, 한국 측이 제시한 구속력이 없는 ‘조정’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최종안이 마련되었다”며 “내 발표문의 취지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만큼은 처리를 잘했고

이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사실상 독도를 포기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심포지엄 내용을 보도한 어느 인터넷신문이 내 발표문을 크게 왜곡해서 보도했다”는 것.

그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를 심하게 망가뜨렸다는 취지로 내 발표문을 소개한 것”이라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발표문과는 완전히 반대인 내용을 사실인 양 써서 보도했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심한 왜곡은 그동안 내 의견에 악성 댓글을 썼던 일본인들도 하지 않은 처사”라며

“그런데 대한민국 내에서 자신들의 취지나 노선에 맞지 않는다 해서 주제발표자의 발표내용을 심하게 왜곡해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기가 막혔다”고 했다. 

 

특히 “한·일협정 협상 당시 독도문제가 한국 측 잘못이라는 왜곡된 결론을 내면,

국제법상 독도의 위치가 위태롭게 된다”며 “그런 중대한 상황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왜곡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한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이 짧은 것이다”라고 질타했다.

 

이어 “‘나’라는 한 개인이 화가 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왜곡해서 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개인이 사회에서 신뢰를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이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울 뿐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같이 밝힌 그는, “이번 사태의 관건은 바로 ‘박정희’였다”며

“아마도 ‘박정희’가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독도문제에서 박정희가 뭔가 잘했다는 주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1965년도의 환경 속에서 박정희는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를 포기하게 만든 게 사실”이라며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실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그리고 그와 같은 신념을 관철시키고 싶다”며 “나는 한 정치가를 두둔한 것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판단해서 알렸고 내 신념대로 움직였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요약

 

박정희의 외교 덕분에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는 발표문을 발표함.

근데 그걸 한국 좌파들이 반대로 왜곡해서 보도.

 

"박정희가 독도를 팔았다" 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전부 속은것.

 

실제로 독도 영유권이 훼손된 때는

김대중 정부 때 체결한

독도를 중간수역에 넣은 신한일어업협정.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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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호사카 유지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연합국의 합의 없이 통보된 미국무성 '러스크 서한'은 무효

 

2011년 04월 18일 (월) 10:09:38 이석호 기자 dolko@hanmail.net

 


 

< 편집자주> 지난달 일본에는 강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한일 양국의 응어리진 역사를 잊고 국내는 물론 해외 동포사회도 일본에 온정의 손길을 보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본 문부과학성은 내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지리 및 사회교과서를 검정하면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한 교과서 검정본을 모두 승인했다. 다시 일본에 대한 비판여론이 뜨겁게 일고 있다. 최근 독도문제에 있어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호사카 유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를 찾았다. 

 

-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독도문제에 있어 일관되게 강조해온 ‘조용한 외교’라는 틀을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일 본은 독도가 분쟁지역화 되는 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외교’에는 저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는 평소 조용한 외교를 펼치는 한국정부가 일본 측에서 사건을 일으키면 매우 강경한 외교로 돌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재까지 하지 않았던 실효지배 법안을 갑자기 부활시키려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일본의 공세에 말려들어간 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독도지배의 정당성 논리를 확실하게 밝히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 정부의 독도공식 사이트는 외교통상부에 있는 ‘대한민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기본입장’이고 이 문서만을 보면 잘 작성되었지만 일본 외무성 사이트에 올라와있는 일본 측 독도주장과 비교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공식견해가 일본 측 주장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면 독도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법입니다. 외교통상부의 사이트뿐만이 아니라 외교부에 링크된 준 공식사이트도 문제가 많습니다.” 

 

-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논리적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론하고 있다. 

“일 본 외무성 사이트에 올려 져 있는 독도 팸플릿 등의 내용을 보면 1951년 8월10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 작성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 국무성이 미국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사실상 독도는 일본영토’라는 내용이 포함된 소위 ‘러스크 서한’을 보냈습니다. 일본 측은 이 공식서한이야말로 독도가 일본영토로 남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미국 국무성 비밀자료에 의하면 이 ‘러스크 서한’은 한국정부에게만 비밀리에 송부되었고 다른 연합국들에게 공표되지도 않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국간의 합의가 없었던 문서로 밝혀졌습니다.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당시 미국 일국만의 견해이지 연합국들의 합의를 얻어야 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규칙을 어긴 서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연합국들이 합의한 내용이 아닌 서한이 아무리 공식문서의 형식으로 한국정부로 송부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대표 10개 국가들은 모두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서한을 공표하면 다른 연합국들이 미국에게 항의할까 우려해 비밀문서로 한국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정부는 ‘러스크 서한’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증거라고 10개 국어로 세계에 발신하고 있는데 한국 측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어 문제가 큽니다.” 

 

- ‘러스크 서한’이 무효라고 처음 밝힌 것은 언제인가? 외통부도 사실을 알고 있나. 

“지 난해 9월 제가 펴낸 <대한민국 독도>(2010, 책문)를 통해 처음 공개했습니다. 올해는 곧 논문으로 발표할 것입니다. 외통부가 ‘러스크 서한’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우리나라가 독도에 대한 불리한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결 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일기본조약에는 독도문제뿐만 아니라,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협정, 문화재 반환협정, 어업협정 등이 포함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문제가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다른 모든 협정문서에 서명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이동원 외무부장관에게 강하게 명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당시 일본 사토내각은 양보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일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교환공문’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은 국제사법제판소로 독도를 회부하자고 되풀이해온 제안을 철회했고 분쟁해결방식을 ‘중재’로 바꿨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독도명칭이 문안 속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규정해 놓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중재라는 일본 측 제안도 한국 측이 승낙하지 않자 일본정부는 독도명칭을 완전히 공문에서 삭제했습니다. 타결된 교환공문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고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제3국을 통한 조정으로 해결하자는 문구로 정해졌습니다. 결국 독도는 한일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한국 측 주장은 독도명칭을 교환공문 초안에서 삭제함으로 인해 관철됐습니다. 이후 일본 외무성은 ‘이것은 한일양국이 장래 매우 평화스러운 관계를 구축했을 때 독도문제도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발언을 되풀이했습니다.” 

 

- 논리 대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도문제에 있어 가장 확실한 논리적 증거는 무엇인가. 

일 본이 역사적으로 적어도 세 번에 걸쳐서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다, 조선의 부속이다’라는 공문서를 남겼습니다. 1696년, 1870년, 1877년의 세 번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일본 측 독도논리의 핵심적 주장인 ‘고유 영토론’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1905년 이전의 일본의 공식지도가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거나 조선의 소유라고 명기까지 했습니다. 1905년의 일본에 의한 독도강제편입도 국제법으로 보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므로 무효가 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한일협정에서도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독도는 한국영토로 인정받았다고 판단됩니다. 

 

호사카 소장은 또한 1883년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발행한 공식문서인 ‘수로지(水路誌)’에서 독도를 ‘리안코르토 열암’으로 기록한 것을 강조했다. 이 명칭은 독도의 프랑스 명 ‘리앙쿠르 락스’에서 딴 것. 그리고 각종 수로지에는 독도가 ‘리앙쿠르 호’에 의해 18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정부가 역사적으로 독도를 송도(松島=마쓰시마)로 불러왔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독도가 일본고유영토라는 논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호사카 소장은 주장한다. 

 

- 한국정부가 걱정하는 것은 독도가 분쟁지역화 되어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된다는 점이다. 

“조 사한 바에 따르면,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일본은 한국정부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65년에 양국 간에서 교환공문을 맺는 과정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한일 간의 분쟁 해결방식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국제사법재판소 문제로 필요 이상으로 시끄럽습니다. 일본은 교환공문의 진실을 알면서도 마치 현재까지 계속 한국정부에게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제안하고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지요. 물론 독도에서 한일 양국 간에 국지전이 일어나면 독도문제는 UN안보리를 거쳐서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잘 다스려야 합니다.” 

 

- 제 3국과 함께 독도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는지. 

“독 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이므로 다른 나라들과 독도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일본은 앞으로 한국 측이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협상테이블에 앉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지요. 그런 일본의 전략에 말려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확실한 논리와 자료를 내면 조용하게 독도문제를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와 대립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작업이야말로 독도 조용한 외교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한편 전 세계 지도 정보 서비스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구글어스’에서 독도를 확인해 보면 독도의 이름은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라고 표기돼 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도 ‘독도’라는 주제어가 ‘리앙쿠르 암석’으로 뒤바뀌어 있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내세워 다른 국가들을 설득시키는 동안 한국은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8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해 독도문제에 전념하고 있는 호사카 소장의 조언을 되새겨 봐야할 시점이다.

 

<호사카 소장은?> 

일본에서 ‘렌즈’ 개발 사업을 해오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동경대 공학부를 수학했다. 어려서부터 서양사 등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공과 상관없이 독학으로 한일역사에 대한 공부를 했고, 재일동포사회를 알게 됐다. 

88 년 고려대어학당에서 9개월간 한국어공부를 했던 그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이후 ‘45년 이전 한일역사’에 파고든 그가 가장 궁금해 했던 역사적 명제는 “왜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했는가”였다. 그가 독도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후반부터. 세종대학교 교수인 그는 2008년 12월에 세종대에 독도종합연구소를 만들었고 소장으로 부임해 현재에 이르렀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호사카 교수의 '대한민국 독도'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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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서 보니까 사실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는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다는데요,

1965년 5월 17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독도는 1998년의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당시에 이뤄 졌습니다.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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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이런 박정희를 친일독재정권이라고 매도하며

일본이 자꾸 독도를 탐내자 박정희가 화나서 한 말인

"네놈들한테 줄 바에(다른나라에 독도를) 차라리 폭파시켜 버리는 게 낫다."라고 한 말을

독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왜곡하여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몇몇 좌파들은 박정희가 일본과 독도 밀약을 했다고 어거지를 부리는데,

참고할 것은, 독도 밀약을 해도 한국이 이득이고, 안 해도 이득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독도밀약의 내용입니다.

 

1.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 가능. 이의제기 하지마.

2. 장래에 어업구역 설정할 때 중복이면 공동 수역으로 지정.

3. 현재 한국이 점거 현상 유지. 경비원 증강 시설 증축 불가능.

4. 합의를 계속 지켜나간다.

 

이 4가지입니다.

3번을 자세히보면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합니다.

누가 지랄하고 뭐고 실효지배권은 한국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밀약을 했는데 일본이 독도 자기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효지배권이 우리에게 있는데 궤변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 밀약을 통해서 멍청한 쪽국이 돈을 쥐어줬지요. 경제발전하라고.

또한 일본정부에서는 독도밀약을 부정하고 있으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은 독도밀약 주장을 부인하네요.

독도밀약이 일본에 유리한 조약이었으면 일본이 독도밀약을 표면에 끄집어 냈어야지 왜 부정하고 있을까요?

 

11. 한일국교정상화

 

이제 좌파들은

'아 닥쳐 광복 후에 친일했잖아 굴욕외교 한일국교정상화 모르냐?' 할 겁니다.

 

글쎄요, 일단 이건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굴욕외교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국'이라고 몰아붙이기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타결합니다.

 

물론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국교정상화를 위해 돈을 많이 달라고 하면 일본이 해 줄까요?

(사실 저것도 그 당시로는 거금이었습니다만)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대일청구권? 저 돈이 적다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내야 '잘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배상액이 아무리 많은들 일본이 우리를 유린한 댓가에 턱없이 적은 것이겠죠.

일본이 갖고 있는 돈을 다 줘도 모자랄 지도 모릅니다.

 

또한, 배상액 금액 과소 여부를 떠나 

일본과의 악연을 일단 떨어버리고

 

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과 보다 더 자유로운 경제교류를 가능하게 해서

대한민국은 결국 실질적 과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괴롭혔든 안 괴롭혔든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줄 의무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빌려달라 해봤자 안빌려주면 그만인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한국에 돈을 빌려줘봤자 일본이 돈을 돌려받을 수나 있었을까요?

 

법정 스님도 수필 '광복절에 생각한다'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일본은 일단 우리의 이웃이고,

또 우리보다 더 앞서 있어 배울 점이 많기 때문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서 나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과거사에 너무 집착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셨고요.

 

그러면 법정 스님도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수십억달러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만약 '위안부 문제 보상 못 받게 한 사람이 친일파'라면

김영삼 대통령이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일본이랑 수교할 때 받은 돈 갖고 뭐했습니까?

 

미얀마, 태국 같은 나라들은 호텔이나 보트 짓고 놀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등을 만들어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쓴 거죠.

 

----------- 추가 -----------

 

김대중도 위안부 문제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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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


 

김대중은 그 돈으로 도로 짓고 제철소 지으면 우리나라 망한다고

차라리 그 돈으로 옥수수를 사 먹자고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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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장면 정부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그걸 할 만한 돈이 없어서 실패했죠.

 

스타크래프트 하시는 분들만 이해하시겠지만,

'SCV가 다 죽었는데 미네랄이 40밖에 없다'

뭐 이런 상황이었단 말입니다.

 

결국 외자의 도입이 필요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외자의 도입을 위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슬픈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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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수교 반대시위로 잡혀간 이명박의 젊은 모습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했으니 빨갱이다?

. . . . . . . ,.   아직 절반이나 더 남았는데 너무 길어 여기까지만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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