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청문회 기록을 보면 광주사태는 김대중이 일으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광주사태는 윤상원이 주동하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폭동 점화 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은 좌익 시인 김지하와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겠다던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과 김대중의 전두환 거세 음모였습니다.
아마,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의 의도에 대하여 외국 정보기관이 한국 정부에 알려주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4월 30일에 전두환 소장을 중앙정보부 서리로 임명하신 배경에 대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서리로 임명한 이유는 김재규 부하로서 잠재적 쿠데타 세력이었던 이종찬 총무국장을 정부가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몇몇 군 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던 김대중은 중앙정보부도 완전 장악하고 싶었기 때문에 전두환을 중앙정보부 서리직에서 거세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5월 22일이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예정되었던 날인데, 김재규의 반란만 막았던 전두환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김대중은 3월부터 군 장성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김영삼씨와 각목들고 싸우던 4월에 군부는 자기 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청문회 증언에서 스스로 밝히듯 전두환 소장은 김대중 특유의 흥정 거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12 사태 때 정승화 장군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거세하려 하였듯이 김대중도 1980년 5월 중순부터 전두환 중정 서리 거세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5월 15일까지는 김대중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한 시위 선동에 전념하였습니다. 대학가에서는 그 선봉에 서울대 선배학생이었던 이해찬이 있었고, 이해찬 후배들로 3학년생들 한홍구, 유시민, 심재철, 이철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5월 15일 십만명이 ???집회로 최규하 대통령 하야는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이미 고건 당시 청와대 정무 비서도 11일에 최규하 대통령께 20일을 넘기지 말고 하야 결단을 하셔야 시위 소요를 잠재울 수 있다는 진언을 최규하 대통령께 올렸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언론들이 최규하 대통령 하야 결단이 임박하였음을 보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중은 5월 16일부터 전두환 중정 서리 거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5월 22일 전국적 민중봉기(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해산시키고 대통령이 되려 예비내각 명단까지 짰는데, 전두환 중정 서리는 쿠데타에 순응하지 않고 최규하 대통령 충신으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거세하여야 했습니다. 또 한 이유는 시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 요구로 시위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이제 약발이 다떨어졌고, 5월 22일 군중을 동원하려면 약발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전두환 쿠데타설"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종찬 총무국장도 "전두환 쿠데타설"을 흘렸던 것으로 추측되는 여러가지 정황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받았던 괴전화의 발신자 배후가 간첩이 아니라면 이종찬 총무국장 조직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 전두환 중정 서리와 좋은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전두환 물러가라"는 시위 구호의 출처는 김대중이었습니다. 5월 18일 난생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윤상원에게서 들었던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울 동교동의 김대중이 지어낸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5월 18일 광주에서 나왔는지 그 과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당시 5월 22일로 예정되었던 김대중 쿠데타(전국적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학생 운동권은 19일부터는 시위 이슈를 바꾸기로 하고 그 일을 위해 5월 16일 이화여대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순경 5명을 버스로 깔아죽이면서까지 치룬 그 전날 서울역 회군 때 당시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은 작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십만 명이 서울역에 모여있다가 저녁 8시경 회군할 때 그는 마이크로 버스 위에서 마이크로 다음날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비밀연석회의가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광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전경들이 그 집회 정보를 듣고 다음날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 쿠데타(전국적 민중봉기) 계획을 경찰이 알게 되고, 총리에게 보고되어, 당시 중동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석유 외교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즉시 귀국하여 철야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5월 17일 자정에 계엄령 전국 확대를 선포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5월 16일 전국학생회장단 연석회의의 성격을 짚어 봅시다. 그 연석회의는 본래 5월 19일부터 시위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띄워 5월 22일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때 그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선생을 돕는 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 대자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본래, 대자보는 1966년 중국 문화혁명 때 모택동 홍위병들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지만 한국 대학가에서는 이렇게 김대중 홍위병들과 더불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인가요? 사실상 전두환이 중앙정보부 서리직에서 물러나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4월 30일에 임명받고 5월부터 서리 출근을 시작한지 반달밖에 안되었을 때 무슨 큰 과오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전두환 물러가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구호였습니다. 당시 시위 선동의 약발이 다 떨어졌던 때였기에 김대중의 내란(전국적 민중봉기) 예정일인 5월 22일에 전국적 민중봉기로 시위 열기를 확산시키려면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만큼 유효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에 전국 대학교 벽보에 붙이기로 되어있던 대자보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다"는 말만 있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단지 새 시위 구호 "전두환 물러가라"가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괴전화가 한홍구, 유시민, 심재철, 이철 등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속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그 괴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였는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유언비어가 운동권 학생들을 속이기 좋은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5월 10일 중국, 일본, 미국 정보기관들이 한국 정부에 북한군이 5월 20일경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고, 미국이 코렐호와 미드웨이호 두 대의 항공모함을 한국에 급파한다는 통보를 하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군부는 남침 대비 군사 이동작전을 시작하였는데, 괴전화는 그것을 군부 쿠데타라고 유언비어를 흘리니 암기력만 좋았지 판단력이 없는 386운동권이 그대로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유언비어 퍼뜨리면 시위에 선동될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양김씨가 얼마나 "군인이 정치하면 안된다"고 학생들을 세뇌시켜 놓았던지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만 흘리면 1분도 안되어 각 대학 전교생을 시위 장소에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는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 쿠데타 거사를 위해 시위 분위기 를 띄우기에 더없이 좋은 구호였습니다. 그러면, 본래 월요일인 19일에 그 구호로 전국적 시위 일으켜 전두환 중정 서리를 취임 3주만에 물러가게 하려했는데, 왜 일요일인 18일에 그 구호가 광주에서 나왔을까요?
앞에서 말한 대로 5월 16일 이화여대대강당에서 모였던 전국총학생회장연석회의에 경찰도 참여했기에 김대중 내란 음모가 발각되었으며, 주동자 수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 검거의 낌새를 챈 상당수의 학생들이 다른 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전남대로 전화걸어 밤을 새며 김대중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에 군부쿠데타 유언비어도 그래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물러가라"는 시위 구호도 그때 그대로 전해졌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수배 대상이었던 박관현은 몸을 피하기 전 광주의 노동계 운동권 윤상원 하숙방을 찾아가 30분간 회동하였습니다. 아마,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는 이때 전해진 듯합니다. 역시 광주 출신인 심재철 의원의 자서전에서 그가 광주에서 박관현을 회동하였을 때 보니 서울과 달리 광주에서는 학생 운동권과 노동계 운동권이 단합이 잘되어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여기에 윤상원이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민중봉기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윤상원 편에서는 그날 휴교령을 알리기 위해 그날 아침 6시에 전국 각대학교에 7명씩 배치된 공수부대가 광주에만 배치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진짜 군부 쿠데타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본래 사회주의 혁명의 야심이 있었던 윤상원은 아마 돌발적으로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쿠데타를 밀어붙이기로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정 그대로 5월 22일에 도청을 점령하고 시민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 총기와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와 장갑차 등을 약탈하였으며 무수한 순경들과 군인들을 죽이면서 도청을 점령하였습니다. 운동권이 퍼뜨린 유언비어와 달리 당시 시위 진압은 도청 사수였습니다. 적어도 도청 서류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을 때까지는 계엄군이 천배의 머장 시민군을 맨몸으로 막아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광주폭동은 윤상원이 주동하여 일으켰지만 그 배후에 전두환은 중정 서리를 거세하려는 김대중의 공작이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 시위 배후에 이해찬 등 김대중 선생을 돕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종찬씨가 국정원장이 되고,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이 된 것도 그들이 모두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의 동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위 분위기를 띄우는 심리전으로서 김대중이 (그리고 어쩌면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도) 흘린 군부 쿠데타설 혹은 전두환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다는 픽션 소설이 광주에서 폭동으로 점화되었습니다.
당시 광주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혹은 항쟁을 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당시 호남 인심은 주한미군 철수시키고 연방제 통일하자는 등 김대중의 정책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를 김대중보다 더 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상원이 들불야학 청소년들과 그가 의식화시킨 노돋자들을 총동원시켜도 오전 11시 30분에 겨우 300명밖에 시위대를 못 모았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전남대 학생 수는 몇 안되었습니다. 이미 운동권 학생들은 모두 산장으로 피했으며, 일요일이라 학교 오는 학생들도 없었는데, 그나마 금남로에 모여있던 학생들도 박관현 학생회장이 없으니 그냥 집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윤상원 혼자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선창하여도 별로 따라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아직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였으므로 모르는 이 물러가라는 구호가 윤상원이 끌어모은 시위대에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는 오전 11시 30분, 더구나 일요일이라 학생들이 모두 그냥 집에 가겠다며 흩어지려 하자 윤상원과 몇몇 과격 운동권은 경찰이 박관현 학생회장을 죽였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광주 시민을 속인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 거짓말이 금방 시위의 열기에 기름과 불이 되어 시위 열기가 화산처럼 폭발되게 하였습니다. 그 한마디 거짓말이 시위대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여 광주 일대의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순경들을 붙들어 묶어놓고 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날 매맞은 순경들 중에서 그 다음날부터 사망자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날 오후 5시 40분 광주 사람 정웅 소장이 광주향토사단 병력을 도동원하여 지휘한 폭동진압은 실은 순경 구출 작전이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요? 거짓말이었습니다. 김대중과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 한 조가 되었던 거짓말은 그들이 집권한 후에 다시 김정일에게 8-억불에서 15억불 사이의 외화를 핵무기 개발자금 비밀송금하기 위해 국민을 속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왜 운동권 정권들이 무능한가요? 거짓말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 일어나지도 않은 군부 쿠데타 소문을 퍼뜨린 것도 비열하였으며, 윤상원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기 단짝 친구를 경찰이 죽였다고 광주시민을 속인 것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운동권의 논리의 문제점은 거짓말이 민주화운도이라고 거짓말하는데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김대중이 광주사태 배후 인물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광주청문회 기록을 보니 김대중 스스로 꼬리가 잡히는 증언을 하였군요. 우리는 5월 19일 대학가에 나붙은 "전두환 물러가라" 대자보는 김대중의 말을 운동권 학생들이 받아쓴 것인 줄 알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김대중은 청문회에서 이렇게 거짓말합니다:
<그러고 저는 전두환씨가 중앙정보부장 겸임한 것은 중대한 사태의 악화라고 했는데> 그는 이런 말로 학생들을 선동했지만, 전두환이 그때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한 사실이 없습니다. 단지, 임시직 서리로 4월 30일에 임명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갓 임명받은 것을 가지고 군부 쿠데타라는 논리로 학생들을 현혹하였던 것입니다. 무엇이 김대중의 의도였던가요? 자신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고 있던 때에 전두환이 이종찬을 견제하지 못하게 하려고 거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김대중과 윤상원의 거짓말을 미화시키는 것이요, 국가 운영을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은 미래를 보는 눈이 흐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무현이 청문회 때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졌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되어 유전사업 비리로 79억원을 러시아에 던져 주고, 행담도 개발 비리로 500억원을 공중에 날리는데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거짓을 미화하는 논리에서 정치가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광주사태를 점화한 김대중과 윤상원의 거짓말을 더 이상 미화시키지 맙시다. 정직의 가치관 회복--그것이 애국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