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연예인들 돌연 하차, 프로그램 폐지… 당시 일 말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
DJ DOC의 멤버이자 가수 이하늘씨의 소속사 관계자 ㄱ씨는 “당시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면 조금 그런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하늘씨는 2010년 KBS TV의 토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하고 있었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한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MBC ‘무한도전’과 경쟁했지만 2010년 중순 이후 시청률이 떨어졌다. 결국 그 해 말 ‘천하무적 야구단’은 폐지됐다. 이하늘씨는 9월 11일 국정원 개혁위가 발표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82명 중 한 사람이다. 국정원 개혁위가 밝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는 이하늘씨뿐만 아니라 배우 문성근·권해효·김규리(과거 이름 김민선)씨, 코미디언 김미화·김제동씨 등 82명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가수로는 고 신해철씨 외에 윤도현·김장훈·양희은씨 등이 이름을 올렸다.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 피해자 조사를 받기 위해 9월 1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이하늘은 왜 블랙리스트에 올랐나 ㄱ씨는 프로그램이 폐지되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프로그램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지막 녹화 들어가기 얼마 전에서야 담당 PD로부터 프로그램 폐지 소식을 들었다. 담당 PD도 프로그램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고, 본부장인가 국장인가 하는 쪽에서 프로그램을 없애라고 한 것으로 안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폐지된 이후 KBS는 토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으로 군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명 받았습니다’를 신설했다. 하지만 ‘명 받았습니다’는 최고 시청률이 6.2%에 그칠 정도로 저조한 성적을 거두다가 다섯 달 만에 역시 폐지됐다.
2010년은 국정원 좌파 연예인 TF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다. 물론 ‘천하무적 야구단’ 폐지 뒤에 국정원의 입김이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당시 담당 PD는 “제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뭐하러 감추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KBS 파업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시청률 반등에 실패해 폐지가 된 것이다. 프로그램을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하늘씨 측에) 폐지 결정을 늦게 전한 것뿐”이라며 “특정 출연자 때문에 위에서 이야기를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이 건과 블랙리스트를 연결짓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하늘씨는 왜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됐을까. ㄱ씨는 “‘명랑히어로’에 쥐 티셔츠를 입고 와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씨는 2008년 6월 14일 MBC ‘명랑히어로’에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이후 인터뷰에서 이하늘씨는 “지난주에는 비슷한 콘셉트의 부시 미국 대통령 티셔츠를 입었다”며 “티셔츠를 입은 것은 재미있었기 때문이며,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자유”라고 말했다. ㄱ씨는 “제가 개인적으로 화가 나는 것은 이하늘씨가 특정 정당을 싫어하고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하늘씨는 잘못된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 당시 대통령이 잘못했으면 싫어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왜 이쪽으로 묶어버리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담당 PD의 말대로 이씨가 출연하던 프로그램은 단순히 시청률 때문에 없어졌을 뿐, 블랙리스트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이씨는 방송사는 다르지만 2011년 말까지 MBC ‘놀러와’에 고정 멤버로 출연했다. ‘놀러와’를 하차하게 된 것도 외부의 압력보다는 DJ DOC 전 멤버와의 갈등이 주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씨처럼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연예인, 방송인들은 2010년과 2011년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봤다. 국정원 개혁위가 밝힌 국정원 좌파 연예인 TF 활동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많다. 김제동·김미화씨뿐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배칠수·김장훈·윤도현씨도 이 시기에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하차하거나 출연이 취소됐다. 배우 김규리·유준상씨는 2012년 2월 전까지는 지상파 드라마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9월 15일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국정원 청사 앞에서 이명박 정부 국정원 블랙리스트 문건을 모두 공개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준헌 기자녹화까지 마친 ‘김제동쇼’ 전파 못 타 문성근·김규리씨 등은 인터뷰와 SNS를 통해 MB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심경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 시절 일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한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 영화감독은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간단히 말할 내용은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연락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한 배우 소속사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는 질문에 “그런 부분이 있긴 한데, 저희도 기사를 보고 나서 그런 일(블랙리스트 작성)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관련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어떤 입장도 없다는 게 저희 입장”이라고 말했다.
방송국 PD들은 김제동·김미화씨를 대상으로 한 것처럼 노골적 개입만을 봐서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 개입 실태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봤다. MB정부 국정원의 ‘좌파 적출’ 활동은 방송사 내부 분위기를 침체시켰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한재희 MBC PD는 “저희도 국정원과 관련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내부적으로 자료를 취합하고 있는데, 김제동·김미화씨처럼 노골적으로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신해철씨만 해도 2011년에 MBC에서 1년 이상 라디오 DJ를 했고, 양희은씨가 진행하는 ‘여성시대’도 이명박 정부 이후 윗선에서 세월호 관련한 내용을 방송에서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일은 있었지만, 양희은씨에 대해 직접적으로 압박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다”며 “국정원의 개입 이후 방송국 내부에서 자체 검열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한 PD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만 방송 출연을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가수 이승환씨나 전인권씨의 예를 들었다. “우리 내부에서 ‘이 분들은 섭외해도 방송을 못내보내겠지’ 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물론 콘서트나 비정치적인 행사에는 이 분들도 출연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서 섭외를 안 해서 못나온 것이지 정부에서 막은 건 아니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PD들이 알아서 섭외를 안 하니 블랙리스트에 안 들어간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한 PD는 MB 블랙리스트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김종배 시사평론가도 2011년쯤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정원은 출연자뿐만 아니라 방송국 내부 인사들에 대해서도 블랙리스트 비슷한 문건을 만들었다. KBS 새노조(언론노조 KBS본부)는 9월 18일,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2010년 6월 청와대에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고 밝혔다. KBS 새노조에 의하면, 당시 국정원은 KBS 내부 기자, PD의 실명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좌편향 인사로 낙인 찍었다.
방송국 PD들도 성향 분석 문건 예를 들어 국정원은 소상윤 PD에 대해 ‘과거 편파방송에 자성 없고, 좌파 세력 비호’라고 적었다. 소 PD는 국정원 문건이 나온 이후인 2011년 1월 정기인사에서 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는 “편파방송을 한 적이 없고, 거기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없는데 뭘 자성하라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소 PD는 “정연주 사장이 있을 때 ‘열린토론’이나 30분짜리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지만, 방송 포맷 자체가 편파방송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 적도 없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2010년 그때는 토론 프로그램이나 이런 걸 아예 싫어하는 것 같았다. 토론 프로그램을 싫어하니까 그런 걸 만들어오는 나를 그냥 갖다 붙인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또한 국정원은 문건에서 이상요 전 KBS PD에 대해 “정연주 추종인물”이라며 “무관용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 전 PD는 이명박 정부 들어 보직에서 내려온 뒤, 비제작부서를 전전하다가 2014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자신이 노무현 정부 시절 현대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맡은 것이 이명박 정부에 밉보인 원인이라고 봤다. 이 전 PD는 “그동안 KBS에서 현대사 관련 프로그램을 잘 안 했다. 그래서 사북 광부 이원갑씨나 여운형·문익환·함석헌 등등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을 통해 현대사 사건을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했는데, 그때도 좌편향이라는 공격이 많았고 국정감사에서도 지적하더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7년 10월 29일 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소속의 이재웅·정종복 전 의원은 이 전 PD의 이름을 콕 집어 “노조 간부 출신이 어려운 직위에 쉽게 진입한다”, “방송노조는 출세의 지름길”, “반미 친북 사상을 공영방송에서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상요 PD는 이명박 정부 이후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제작의 자율성’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는 거기에 직접적으로 이름을 올린 출연자, PD, 기자뿐만 아니라 방송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전 PD는 “PD가 진행자가 누구고 출연진이 누구인지 상부에다가 이야기는 해야겠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PD랑 간부들이 이 사람은 출연하면 된다 안된다 가지고 자질구레한 싸움이 매일매일 벌어졌다. 그렇게 싸움 벌이던 PD들이 정기인사 때 갑자기 다른 부서로 보내지거나 하는 일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그 당시에 KBS 내부 논리가 아니라 뭔가 외부에서 강요된 또 다른 제작원칙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다들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렇게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들이 나오면서 그때 추측이 맞았구나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 파업 중인 방송사 노동조합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정권의 방송 개입과 관련한 사례들을 연일 발표하고 있다. 한재희 PD는 “지금 발표된 사례는 대부분 2012년 파업 이후 수집한 것이고, MB 시절의 사례는 적다. 얼마 전 조합원들끼리 소통하던 커뮤니티를 다시 들어갔는데, 김미화씨 하차로 한창 논란이 되던 때 내부에서 어떻게 싸웠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더라”고 말했다.
이상요 전 PD는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라도 국정원 문건 공개가 시급하다며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나서 구체적인 사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국정원에서 많은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국정원 개혁위는 문건의 일부만 공개하지 말고 원문을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