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정부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한국을 공격한다’기보다, ‘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다음, 아주 열심히 이유를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로 보일 정도다. 자칫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한 조치를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지 자국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만 보기에는 사안이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아베 정부가 한국을 정말로 일본 국가안보의 주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 것은 아닐까?
지난 4월 쇼고 스즈키 교수(영국 맨체스터 대학)가 <케임브리지 국제문제 리뷰>에 게재한 논문 <일본 수정주의자와 ‘한국이라는 위협’(Japanese revisionists and the ‘Korea threat’)>에 따르면,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자(revisionist)들은 실제로 한국을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안보에 대한 위협 세력으로 느낀다.
이 논문을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자들이 집착하는 일본의 정체성은, 놀랍게도 ‘평화국가’다. 이는 역사 왜곡을 감행하는 핵심적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본질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반도를 점거하게 된 것은 지정학적 운명으로 인해 외부로의 확장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러시아 같은 열강이 한반도를 점유하면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5년의 일제강점기는 전적으로 스스로를 서방국가들로부터 지킬 힘도 갖추지 못했던 조선의 잘못이라고 간주된다.
이와 함께 수정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국가 정체성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legitimate member)’이다. 서방국가들의 승리로 마감된 냉전 종식 이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권을 옹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이 이 같은 정체성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평화국가와 ‘당당한 일원’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일본이 이른바 정상국가(합법적으로 군대를 보유하고 다른 나라와 교전권을 가지는)로 변신하고 동아시아의 지도국 지위를 둘러싸고 중국과 경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행히도, 중국은 공산당이 법률 위에 군림하는 동시에 인권침해가 만연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에 일본의 국가 정체성 및 안보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나라가 중국이나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점이다. 한국이 군사적으로 일본을 위협하지는 않는데도 그렇다. 스즈키 교수는 한국이 수정주의자들의 주적으로 떠오른 이유를 과거사 문제에서 찾는다. 한국의 과거사 거론은 평화국가라는 일본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더욱이 한국은 일본이 전쟁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국제 여론을 일으켜 인권 옹호 국가이자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대접받고 싶은 일본 수정주의자들의 염원을 짓밟는다.
물론 중국과 북한도 일본의 과거사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지만 한국의 위력에 비길 바는 아니다. 중국 역시 ‘과거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도·베트남·소련 등에 군사행동을 감행한 바 있다. 지금은 티베트과 신장에 대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펼치는 중이며, 남중국해와 센카쿠섬 등에서 위력시위를 펼친다. 인권 측면에서도 중국은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톈안먼 사태 등의 전과가 있다. 중국이 일본의 군사주의나 인권 의식을 비판하는 것은 국제사회 차원에선 일종의 ‘내로남불’로 여겨진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군사력으로 외부를 위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스즈키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활력적인 민주주의와 글로벌 경제에서 점증하는 존재감 등은 세기에 걸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감을 뒤흔들고 일본의 존재론적 안보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다”.
이에 따라 일본 수정주의자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위협’에 대처할 전략을 만들어나갔다. 예컨대 한국을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라고 비판한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벌인 민간인 학살, 독도 문제(일본인들은 자국의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했다고 주장한다) 등은 수정주의자들이 즐겨 활용하는 사례다. 심지어 한국의 ‘반일 시위’를 ‘한국인들의 감정에 치우쳐서 규범을 무시하는 성향(Korean emotionality and unruliness)’을 입증하는 증거로 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한국 폄하하기’ 전략이 국제사회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스즈키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자 수정주의자들은 급기야 2014년부터는 한국을 ‘비민주주의 국가(undemocratic state)’로 지칭하는 데 이르렀다. 그해, 극우 성향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한 칼럼을 썼다가 한국 검찰에 기소당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할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기회였다. 아베 총리는 언론들이 연일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귀국한 가토 씨를 관저로 초대해 장시간 위로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에 무게를 부여했다. 일본 언론은 한국을 “반일 감정으로 통치되는 비민주주의 국가” “풀뿌리 파시즘” 등으로 호칭했는데, 이는 일본의 공식적 외교정책에 반영된다.
2015년 3월4일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에서 “한국은 일본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국가”라는 구절을 삭제했다. 일본 외교 활동과 방침을 기록하는 연차 보고서인 2015년 외교청서(Diplomatic Bluebook) 역시 같은 구절을 제거했고, 이 상태를 2019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올해 비로소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 내지 ‘안보 유해국’으로 지정할 움직임을 보인 것이 아니다. 한국을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비민주주의 국가’이며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나라로 몰아붙이려는 우익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전략이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에 관철된 것이다. 그들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에서 한국을 축출하고 싶어 한다.
시사인 기사 원문
https://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5165&utm_source=d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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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비정상적 민주주의를 가진 일본, 그 지배층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는 한국임.
천안문사태 등 국민을 억압하고 있는 중국이나, 전제군주에 의한 왕조를 이어가는 북한과는 달리,
굉장한 활력을 가지고 고속으로 성장하는 '진짜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임
일본 우익이 원하는 '보통국가',
즉 타국과 교전권을 갖는 군대로 무장하는 동시에, '인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국제적 이미지를 구축한
'평화국가'라는 일본의 국가적 이미지를 가장 심하게 타격하는 것은
매일같이 일본을 과거사 문제로 비난하며,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부정적 인상을 공고히하는 한국임.
그래서 한국을 공격하고, 끝내는 국제 사회에서 축출하고 싶어하는 것.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베 정부가 왜 이 시점에 한국을 공격하는지 이해하지 못함.
그저 단순하거나 단기적인 문제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