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와 애국보수현재의 정당 정치구조를 만든 건 1990년의 ‘3당합당’입니다. 87년 시민항쟁으로 퇴출되어야 했으나 ‘양김 분열’로 정권을 다시 잡은 노태우와 민정당은, ‘차기’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학살을 비롯해 지은 죄가 너무 많기에, 정권 연장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고안한 해법은 신군부 군사독재 세력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자칭 유신본당인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합친 거대 정당을 만들어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까지 했던 사람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유린한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비난을 무릅쓰고 이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이로써 민주 대 반민주, 양심 대 비양심으로 나뉘어 있던 정치 구도는 이상하게 변했습니다.군사독재 시절 부패와 불공정은 너무나 일반적이었습니다.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군사독재 정권에 빌붙은 사람들이 부패와 불공정으로 획득한 부와 특권이 ‘당대의 부패 기득권’이자 현재까지 이어지는 ‘적폐’입니다. 87년 민주화운동은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을 뿐, 이 ‘부패 기득권’ 청산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의 투항으로 그 과제 달성은 요원해져 버렸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이 심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3당 통합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은 ‘민주자유당’, 일본의 ‘자유민주당’을 앞뒤만 바꾼 정당이었습니다. 일본식 자민당 1당 독재 체제에 대한 지향을 선명히 드러낸 이름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것 같았습니다. 유신 독재세력과 신군부 군사독재 세력이 저지른 반민주, 반인륜 범죄를 처벌할 길이 영영 막힌 듯했습니다.더구나 ‘3당합당’은 그때까지 ‘담론의 영역’에 있던 ‘지역감정’을 ‘정치구도’로 가시화했습니다. 유신 독재세력은 충청, 신군부 독재세력은 TK, 타협적 민주세력은 PK로 지역을 나눴습니다. 양심적이고 비타협적인 민주세력은 호남과 수도권 일부만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영남-충청 합작에 의한 호남 포위라는 정치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통일민주당에서 김영삼의 ‘투항’에 결연히 반대한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그와 행보를 같이 했습니다.민자당은 인물로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지역으로는 TK, PK, 충청이 합친 것인데, 반민주 반인륜 군사독재 세력과 타협적 민주 정치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념’이나 ‘철학’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을 묶어 준 건 '정권욕'뿐이었습니다. 민자당이 정당성을 주장할 방법은 자기들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에 ‘용공 좌경’ 낙인을 찍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김영삼은 ‘차기’를 보장받는 대가로 군사독재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국제 기준에서는 이 기묘한 혼성 정당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자기들 ‘정체성’ 자체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동원할 수 있었던 ‘정신적 자원’은 노골적인 지역주의와 근거 없는 ‘용공몰이’뿐이었습니다. 1992년의 저 유명한 “우리가 남이가?”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었습니다.민자당의 지지 기반이 된 ‘지역’의 주민들 다수도, 민자당이 구사한 지역주의와 ‘용공 낙인찍기’ 수법의 정신적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묘한 혼종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정당화’할 논리가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민자당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 정당’이라고 부르고 상대를 ‘좌경 용공세력’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스스로를 ‘애국보수’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당연히 상대방에게는 '종북좌파'나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군사독재체제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적폐 언론’들의 역할이 컸습니다.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가 꼽힙니다. 그 공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김영삼 스스로 군부독재 세력의 꼭두각시 처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일로 인해 민자당과 그 지지 세력 내부에 1차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2차 균열은 1997년 DJP연합이었습니다. 김대중은 영남-충청 합작에 의한 호남 포위를 뚫기 위해 ‘유신본당’과 손을 잡았고, IMF 관리체제라는 비상한 위기 속에서 겨우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지역감정’도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감정은 ‘애국보수 이데올로기’와 굳게 결합했습니다.지금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당의 ‘정통성’을 내세웁니다. 반면 미통당은 당사에 이승만, 박정희 사진만 걸어놓습니다. 노태우-김영삼-이회창-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진 자기 당의 최근 역사에서는 내세울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겠죠. 이는 현재의 미통당 세력이 상대를 ‘종북 좌파 빨갱이’ 프레임에 가두려다 스스로 독재 세력의 정체성으로 퇴행해 버린 결과일 겁니다. 지금의 미통당에서는 ‘김영삼의 철학’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미통당은 유신독재와 신군부 독재의 망령에 기대어 시민들을 협박하는 걸 주된 ‘선거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미통당의 핵심 지지자들은 “김대중이 정권 잡으면 공산화한다”, “노무현이 정권 잡으면 공산화한다”, “문재인이 정권 잡으면 공산화한다”, "민주당이 다수당 되면 공산화한다"는 말을 30년째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라고 해야겠죠. 세계가 변하고 나라가 달라졌는데도 저들은 아직도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정신에 호소하고 있습니다.아직 ‘지역주의’의 벽은 여전히 높고, 그와 결합한 ‘바보 이데올로기’도 여전히 강고합니다. 하지만 30년 전 ‘3당합당’ 당시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지역주의와 결합한 애국보수 이데올로기’의 기반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1992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이 얻은 의석은 97석이었으나, 3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많은 언론매체와 전문가가 ‘되살아난 지역주의’라고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 이데올로기의 퇴조’라고 하는 게 옳을 겁니다. 자기 고향을 사랑하고 자기 고향 연고팀을 응원하며 자기 고향 출신 정치인을 지지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애향심이 ‘망상’과 결합하는 게 문제죠.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의는, 30년간 지역주의와 결합하고 정치 담론을 왜곡했던 ‘망상’의 기반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이제 유신 독재 세력과 신군부 독재세력을 ‘인적’으로 청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을 청산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그 과제를 달성해야 비로소 ‘정치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유신독재와 신군부 군사독재의 정신적 후예들에게서 ‘애국보수’라는 가짜 이름을 떼어 내야, 국제 기준에서 ‘보수’가 ‘진보좌파’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불리는 ‘정치적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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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이 이글을 보면 좋은데 실직해서 나타나질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