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파업 사태 단상

날라리갱 작성일 20.08.23 10:47:07 수정일 20.08.24 10: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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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파업 사태 단상>(펌)

 

#1. 몇 년 전 안식년 기간 동안 미국에 1년간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가족들이 미국 병원에 갈 일이 꽤 있었고, 말로만 듣던 미국 의료시스템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국내에서는 5만원 정도인 치과 치료비 – 200만원. -응급실 방문 엑스레이, 반깁스, 진통제 처방 비용(그외 다른 치료 전혀 없음) – 500만원(원래 1만 달러인데 50% 할인해줌). -간단한 가정의학과 방문 진료비용 – 10만원. -영상의학과 엑스레이 비용 – 20만원, 미국 병원...친절했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여서 상담도 해주고...

 

그런데 비용은 듣던 대로였습니다. 예약을 해야 한다는 점도 불편했지요. 제 가족의 경우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금액과 시간 측면에서 대략 한국에서 받던 정도의 의료 혜택을 받으려면 최소한 한국에서 내던 건강보험료의 5배 정도는 내야된다는 답이 나오더군요. 현지에서 알게 된 어느 분의 경우 매년 약 4-5만 달러 정도의 사보험에 가입하신 분이었는데, 보험에 보장 내역으로 포함되어 있던 긴급 수술 서비스(응급 수술 상황에서 유명 대학 의료진이 거주지 지역 병원으로 출장을 와서 수술을 해주는 서비스)를 통해 생명은 건지신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와는 의료체계의 가치관이 출발점부터 다른 나라이지요. 미국에서의 정말 비싼 경험을 하면서 의료체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안식년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 마취과 전문의, 전공의 2-3명, 간호사... 마취 전에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의료진은 7-8명 정도가 3시간 정도 걸린 제 수술을 담당했었지요. 입원실비용을 제외한 수술비 자체는 100만원도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른바 국내 Big 5 병원에서 했지만, 국내 건강보험 체계상 전국 어느 곳에서 해도 동일한 수가이니 수술비 자체의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7-8명 정도의 의료진이 3시간 넘는 시간을 투입했는데 총 100만원도 안되는 수술비라... 정말 외과는 수술을 할수록 적자라는 말이 맞겠다 싶었습니다.

 

그 즈음 지인으로부터 공공의료로 유명한 캐나다 의료체계 경험담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이 암 진단을 받았는데 캐나다 의사 왈,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하는데 캐나다에서는 최소 3개월은 기다려야 하니 국적이 한국인 듯한데, 한국으로 빨리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국 후 1주일 만에 수술해서 현재는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영국, 캐나다 등 의료 공공성이 잘 되어 있는 나라. 비용은 우리보다도 낮으나 의료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미국은 비용에 따라 접근성이 달라지는 현실. 아마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에서 사망률을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는 14%, 캐나다는 7%, 미국은 3%, 우리는 2% 미만입니다. 공교롭게도 의료 공공성이 강조된 나라일수록 사망률이 높고, 차라리 ‘돈’이 있으면 치료라도 빨리 받을 수 있는 미국이 사망률이 낮더군요. 물론 여러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공공성과 자율성이 적절하게(?) 보장되어 있는 우리 의료체계가 가장 우수했구요.

 

 

 

#2. 의사 파업 사태 유례없는 수 만 명의 전공의 집단 파업, 전국 의대생의 의사국가고시 응시거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이럴 경우 국민들이 의사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잘 아면서도 매우 강경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지요. 면허 정지를 감수하겠다는 릴레이 퍼포먼스도 있구요. 의사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고 봅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도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의대를 설립한다고 해서 기피과 문제(외과의사 부족은 사실 의사수라기 보다는 수술을 할 수 있는 일자리의 부족의 문제지요), 무의촌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미 무의촌에도 보건소가 있고, 의사 수가 OECD 수준보다 낮다고 하지만 의료접근도는 이미 최고 수준이지요. 문제의 근원인 의료수가는 OECD의 1/3 수준이니 해결하려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할 텐데, 이 부분에 대한 정부 대책은 현저히 부족하고... 오히려 건강보험 재정 고갈 속도를 더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해왔고... 정부당국의 선의를 조금이라도 믿고 싶지만,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 원인에 대한 고찰, 다양한 해결책에 대한 열린 논의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현실을 지켜보니, 결국 정치적 표심의 이유로 선거 공약적 관점에서 추진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3. 911 테러 당시 모두 도망칠 때 소방관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모두가 코로나 위험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 그 한복판으로 들어간 이들... 응급실, 외과 수술, 하다 못해 감기와 독감 같은 작은 질환 같은 상시적인 각종 감염의 위험 속에서 진료를 하는 이들... 이들의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들입니다. 이렇게 의료행위는 본질적으로 생명, 신체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대부분의 다른 직업들은 시간, 비용, 노력을 통해 전문성을 쌓고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위험을 회피할 수 있게 되지만, 의사라는 직업군은 그 반대지요.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을 통해 오히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회피하고 싶은 그러한 위험에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노출시키는 업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 의사의 지위는 지금보다 낮았고, 조선시대에 의술은 중인들의 직업일 뿐이었지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데 대한 반대급부, 즉, 일정 정도의 부와 명예, 사회구성원의 존경... 등의 사회적 보상이 없으면 똑똑한 이들이 굳이 위험 감수라는 사명감이 필요한 의사라는 직을 택할 리 없겠지요.

 

물론 모든 의사가 사명감과 헌신의식으로 직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평균적 직업 윤리 수준보다 떨어지는 일부 의사들의 문제는 그 자체로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다른 모든 직업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사안이니 특정 부정적 케이스를 가지고 ‘요새 사명감을 가진 의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이야기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업무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정부의 의사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스크 부족을 호소하는 의사들에게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사들이 마스크 재고를 쌓아놓으려고 한다”고 말하고, 코로나 헌신에 한 보상은 제대로 되지 않고, 업무를 개시하지 않으면 징역형과 벌금에 처하게 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상황...협상에서 참을 인자를 세 번 쓰고 나왔다는 소리를 하고... 이번 파업을 앞두고도 면허정지, 형사처벌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이러니 의사들 사이에서 자조적으로 ‘의노’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지난 2월 코로나 사태 직후부터 보였던 보건복지부 당국자들의 의료진에 대한 무성의와 일종의 하대 정책... 그리고 지난 수년 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의료정책의 문제점들이 의사들의 분노 표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만일 정부의 엄포에 따라 의사들이 처벌이 무서워서 억지로 업무를 수행하게 하면 국민들에게 바람직할까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사명감마저 사라지게 되고 영혼 없고 열정 없는 의사들만 더 양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의료 공공성... 좋은 말이지요. 긍정적인 측면도 있구요. 하지만, 공공성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측면, 즉, 무사안일과 책임회피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공공성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지요. 의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이제 나는 의사라는 존경도 포기한다. 아니 당신들이 지금 의사를 존경 아니 존중이라고 하고 있는가?, 환자와 보호자들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려 봤는가? 의료 상황의 본질적인 문제를 언제까지 회피하고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정책을 지금 이 순간에 추진하는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필이면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의료진의 심신이 피폐해진 지금 이 상황에서, 시급하지도 않고 정책적 효과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의 회의적인 정책을 의료인과의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 추진을 하여 의사들의 극심한 분노를 초래하는 이런 상황....정말 국민을 위한 정책 추진인지 정부 당국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공권력을 가진 정부의 엄포 속에서 의사 파업이 곧 중단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설프게 봉합될 수도 있을 테구요.

 

그런데 저는 그 이후가 무서워집니다. 조금이라도 기득권을 경험해본 40대 이상 의사들은 그래도 앞으로도 사명감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주 80시간 이상의 비정상적인 업무환경을 감내해온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이 이번 사태 추이에 따라 정부의 압력에 굴복당했다고 느끼고 피해의식과 좌절감에 빠져, 혹시라도 공공성의 부정적인 측면, 즉 사명감 부족, 무사안일과 책임회피, 방어진료...등의 의식으로 가득차게 되지 않을지, 이로 인해 10년 후의 대한민국의 의료현실이 근본부터 무너지지 않을지 진심으로 우려됩니다. 정부의 엄포 속에서 만일 의사가 자신의 책임 회피만 생각하고 적극적 진료 대신 방어진료에 급급하는 현상이 만연하게 되면 결국 그 폐해는 국민에게 돌아오게 된다고 봅니다.

 

다른 사회이슈도 그렇지만 특히 의료체계에 대한 문제는 결국 우리 삶에 직결되는 일이므로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의사들에게 국민을 위한 사명감과 헌신을 요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안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주려는 정부 당국의 진정성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시작은 보여주기가 아닌 진정한 열린 태도일 것입니다. 파업으로 인한 환자의 피해가 없길 바랍니다. 의사분들도 분노를 가라앉혀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정부 당국은 무리한 정책 추진을 전면 취소하고 원점에서부터 의료계와 국민 전반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여 의료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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