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차례 A매치를 뛰어오는 동안 17골을 뽑아내며 비교적 높은 승률 69%(56승 24무 19패)를 기록했다지만 세 차례 월드컵(98·2002·2006년)과 두 차례 유럽선수권(2000·2004년)의 좌절과 원망은 고스란히 그의 책임으로 돌아가야했다.
cm 단위로 정확하게 전달되는 그의 오른발 롱패스는 지극히 영국적이다.
그만큼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선수는 없다. 다만 측면 윙어의 기본인 돌파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에다 축구보다는 각종 스캔들의 주인공에 오르다보니 평가절하된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은 LA 갤럭시의 감독으로 베컴을 지도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축구영웅 뤼트 훌리트는 예전 "베컴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고 있다"고 감싼 바 있다.
독일월드컵 이후 스티브 맥클라렌 전 잉글랜드 감독에 의해 대표팀을 떠났던 그였다.
베컴은 100경기를 채우고 싶다고 했지만 맥클라렌은 냉정했다.
하지만 유로 2008 본선 진출이 위기를 맞자 독일월드컵 이후 "잘 하는 것이라고는 오른발 프리킥과 크로스밖에 없다"던 영국 언론들은 저마다 베컴의 복귀를 바랐다.
베컴의 힘으로도 유로 2008 본선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사자 군단에 '왜 베컴이 필요한가'를 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맥클라렌의 경질.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부임.
베컴의 시련은 계속되는 듯 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베컴이 뛰던 네 시즌동안 그를 통해 4억4000만 유로(약 5545억원) 이상의 수익을 챙겼다.
하지만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카펠로 감독은 "마드리드서 베컴이 넣은 프리킥은 두 세골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며 축구 선수로서의 베컴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베컴은 배제됐고 카펠로 감독과 불화를 겪었다.
그는 지난해 초 마드리드가 자신과의 재계약 문제에 미온적이자 LA 갤럭시를 택했다. 리그 막바지 베컴의 위력이 되살아났다. 베컴의 오른발 크로스는 판 니스텔로이를 거쳐 골로 이어졌고, 스스로 골을 보태며 레알 마드리드를 4년만에 우승시켰다.
레알 마드리드 라몬 칼데론 회장이 직접 붙잡고 나섰고 카펠로 감독 역시 자존심을 구기고 그에게 잔류를 부탁했다.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베컴은 미국으로 떠났고 카펠로는 우승시키고도 경질돼야 했다.
으르렁거리던 두 사내가 잉글랜드대표팀에서 또 만났으니 이를 두고 악연이라고 부르나보다. 카펠로 감독은 지난달 7일 웸블리서 열린 스위스와의 평가전 때 베컴을 제외했다. 아직 몸이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리고 베컴은 4개월 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기회를 잡았다.
27일 오전 5시(이하 한국시간) 파리 생드니스타디움서 열리는 프랑스와의 평가전 명단 30명 안에 포함된 것이다. 물론 23명의 최종엔트리 안에 들어야 하지만 그가 프랑스전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100번째 A매치를 앞두고 베컴의 12년간의 잉글랜드 대표 생활을 돌이켜봤다.
▲7781분 뛰며 17골, 58경기서 주장완장
그는 1996년 9월 1일 몰도바전서 21세 123일의 나이로 A매치에 데뷔했다.
첫 골을 넣기까지는 무려 17경기가 걸렸는데 1998년 6월 26일 콜롬비아와의 98프랑스월드컵 조별예선 때 자신의 전매특허인 오른발 프리킥골로 데뷔골을 뽑아냈다.
99경기 7781분을 뛰며 17골을 기록했는데 최고의 골로는 2001년 10월 6일 맨체스터 올드트래포드서 열린 그리스와의 2002한일월드컵 예선전 당시 동점골이었다. 최소한 비겨야 월드컵에 직행할 수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경기 종료 직전까지 1-2로 몰리고 있었다.
90분은 훌쩍 지났고 인저리 타임도 2분을 넘어서던 그 때 잉글랜드는 아크 중앙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마지막 기회에서 베컴이 나섰다.
92분 42초를 가리키던 베컴의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를 가득 메운 이들의 바람대로 그의 슛은 골네트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2000년 11월 15일 이탈리아전서 첫 주장을 맡았다. 당시 25세 198일이었다.
이후 58경기를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다. 경고는 15차례 받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베컴이 862경기 중 통산 11차례 퇴장밖에 기록하지 않은 신사의 팀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퇴장을 두 차례 받았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98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도중 디에고 시메오네와 충돌하며 퇴장당했고, 2005년 10월 8일 오스트리아와의 월드컵 예선전서 후반 13분과 14분 잇따라 경고를 받아 필드 밖으로 쫓겨나야했다.
99경기 중 95차례를 선발로 투입됐고 풀타임 출전한 경기는 54경기였다.
그가 프랑스전을 뛰게 된다면 피터 실턴(125경기), 보비 무어(108경기), 보비 찰턴(106경기), 빌리 라이트(105경기)에 이어 5번째로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 출전)에 가입한 잉글랜드 선수에 오른다.
베컴은 독일월드컵서 1골2어시스트를 올리며 잉글랜드가 터트린 6골 중 3골에 관여했다. 3차례 월드컵과 2회의 유럽선수권서 3골 11도움을 올리며 잉글랜드가 뽑아낸 34골 중 40%를 담당해냈다.
그는 여전히 잉글랜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핵심 전력인 것이다.
※베컴이 골을 뽑아낸 국가들
에콰도르 아제르바이잔 웨일즈 우크라이나 마케도니아(2) 크로아티아 터키 슬로바키아 아르헨티나 스웨덴 그리스(2) 멕시코 핀란드 콜롬비아
▲생애 다섯번째 프랑스전 4년 전 굴욕 씻을까
만일 베컴이 프랑스전에 뛰게 된다면 1940∼50년대 잉글랜드 대표로 뛰었던 빌리 라이트와 더불어 최다 프랑스전 출전(5경기)을 기록한다.
백년전쟁으로 대변되는 앙숙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라이벌 의식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베컴의 네 차례 프랑스전은 그리 즐겁지 않은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1997년 9월 2일 몽펠리에서 열린 프랑스전이 처음이었다. 선발로 출전한 그는 전반 13분만에 경고 한 개를 받았고 후반 31분 롭 리와 교체 아웃됐다.
이 순간 지네딘 지단은 크리스토프 뒤가리와 교체 투입되고 있었으니 이날 만큼은 두 선수가 맞부딪힐 일은 없었다. 폴 개스코인, 폴 인스, 개리스 사우스게이트 등이 뛰었던 이날 잉글랜드는 후반 41분 앨런 시어러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했다. 베컴이 경험한 유일한 프랑스전 승리였다.
베컴은 이후 세 차례 프랑스전서 항상 지단과 비교돼야했다.
그리고 매번 패배자의 멍에는 베컴의 차지였다. 잉글랜드는 역대 프랑스전서 16승4무6패(65골 32실)로 압도적으로 앞서있지만 1999년 2월 1일 웸블리의 치욕을 당한 후부터는 맥을 못췄다.
이날 웸블리서 베컴과 지단은 나란히 풀타임을 뛰었지만 결과는 2-0 프랑스의 승리였다. 니콜라 아넬카가 2골을 모두 터트렸는 데 그의 골은 프랑스가 웸블리서 기록한 첫 골이었다. 하워드 윌킨스 당시 잉글랜드 감독의 운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 9월 2일 파리서 맞대결을 펼쳤는데 1-1로 비겼다. 프랑스의 프티가 후반 19분 선제골을 뽑자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이 후반 41분 극적인 동점골을 뽑았다. 베컴은 역시 풀타임을 뛰었고 지단은 후반 18분 경고를 받자 곧바로 로베르 피레와 교체아웃됐다.
베컴과 지단의 맞대결의 정점은 2004년 6월 13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스타디오 다 루즈(※벤피카의 홈구장)서 열린 유로 20004 예선전을 꼽을 수 있겠다.
결론은 88분간 베컴이 승리했고, 지단은 단 2분 이겼다. 하지만 승자는 지단이었다.
전반 38분 램퍼드의 선제골은 베컴의 크로스에서 비롯됐다. 주장을 맡은 베컴은 펄펄 날아다녔고, 잉글랜드는 경기를 지배하며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운명의 후반 28분. 웨인 루니가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이 골만 넣으면 잉글랜드의 승리는 떼논 당상인 분위기였다.
주장 베컴이 나섰다. 하지만 그의 슛은 바르테즈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분위기는 급격히 프랑스쪽으로 기울었다. 경기 종료 직전 지단의 동점골이 터졌다. 그리고 93분 티에리 앙리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지단이 성공시키며 프랑스가 역전승한다. 훗날 지단과 베컴을 비교할 때면 페널티킥이 운명을 가른 이날을 예로 들 것이다.
4년이 흘러 베컴은 다시 프랑스전을 맞이했다.
지단의 그림자를 지우고 자신의 100번째 A매치를 자축할 수 있을까.
2010남아공월드컵에 나서고 싶다는 마지막 꿈을 이루려면 베컴은 프랑스전 승리가 절실하다.
3차례 월드컵과 2회의 유럽선수권서 3골 11도움을 올리며 잉글랜드가 뽑아낸 34골 중 40%를 담당해냈다.
이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