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7월 몰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그는
블랙번 전에서 데뷔골을 장식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이적후 첫시즌을 18골로 마감하며 맨유의 중요한 골잡이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노팅엄 포레스트 전에서는 12분 동안 4골을 득점하는 진기록을 세우며
팀을 98/99 시즌 우승으로 이끈다.
그리고 축구역사상 한편의 드라마는 솔샤르와 그의 동료들의 발 끝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은 퍼거슨의 자서전의 한 부분이다.
누 캄프의 기적. (99년 챔스 우승 당시)
내 생애 기억중 가장 클래이맥스를 꼽으라면... 아직도 생생한 그 순간을 떠올릴수 밖에 없다. 난 (바르셀로나) 시체스(sitges)에 있는 해안가 리조트에 있는 우리팀의 호텔에서 전략 구상을 하고 있었고, 내 직업생활에서 최고로 흥분되는 밤을 위해 바르셀로나로 짧은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내 아들 제이슨이 와서는 “아버지, 오늘밤 아버지가 이기지 못하시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거에요. 아버진 여전히 최고의 감독이며 우리 모두는 아버질 사랑해요.”
이런 말을 듣고 두려워할자는 누군가. 난 정말 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훌륭한 아내가 있다는 데 축복 받았다고 생각해왔고, 내 세 아이들 마크, 대런, 제이슨 처럼 더 훌륭한 아이를 얻긴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아내와 세 아들, 내 동생과 아내의 언니,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과 바르셀로나에 함께 왔다는 건 그만큼 나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줬다. 1999년 5월 26일 수요일, 고통만큼이나 환희를 가져다 줄수 있는 그 갈림길에서, 나에게 따뜻한 원조를 보내준 이들과 함께한 그 순간 난 정말 기뻤다.
그날 난 우린 분명 바이에른 뮌헨에게 이길수 있고, 클럽 축구의 위대한 상을 거머쥘 수 있다고, 내가 다른 어떤 것보다 가지길 원했던 그 우승트로피를 우리 유나이티드로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로이킨과 폴 스콜스가 출장 정지라는 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분명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우린 막 리그 우승을 거둔 상태였다. 그리고 fa컵 우승까지 가져가면서 전례에 없던 트레블(treble·3관왕)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럽피안컵은 정말 손에 잡히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른 실망의 가능성에 놓인 내 마음을 굳게 다스려야 했다. 이전 두 시즌에서 우린 거의 결승에 다다를 것 같았지만, 부상 문제와 상대를 이겨버릴 수 있는 최선의 능력과 확신 부족 등이 겹쳐 우리 희망은 그대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수요일 점심 시간에 팀원들과 마지막 회의를 끝내고 시체스 호텔에 있는 베란다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우승 트로피 끄트머리도 내 손에 절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이 내 운명인가 하고 말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25년전 이스트 스틸링셔에서 시작해 지금껏 계속해온 내 감독 생활에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위로의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스트 스틸링셔에선 운동장에 내보낼 만한 충분한 선수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을 잘 꾸렸고, 스코틀랜드에서 감독직을 하면서 10개의 주요한 트로피를 가져갔으며, 유나이티드에 와선 11번의 우승컵을 따냈다. 피토드리와 올드 트래포드에서 거둔 유러피안컵 위너스컵(유럽선수권 전신) 우승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채러티 쉴드나 유러피안 수퍼컵 같은 여러 대회는 계산하지도 않았다. 단판 승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안을 해도 가시지 않았다. 만일 내가 유럽피안컵 우승에을 거두지 못한다면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에 무언가 부족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벌써 8번째 도전이다. 3번은 에버딘에서 5번은 유나이티드에서 말이다. 그리고 57세란 내 나이를 고려해볼때 또 이렇게 결승에 오를 것이다라고 장담할 만큼 내가 그렇게 뻔뻔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호텔 주변에서 한창 즐겁게 뛰어놀고 있는 우리 서포터들을 보고 있으니 그들처럼이나 즐겁고 기뻐해야 하고 싶어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우리 선수들과, 스태프진, 내가 그들에게 기쁨을 전달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태평스런 무드를 부러워하고 있기엔 너무나 내 자신이 불성실하다는 것이다. 난 내 책임감에 대해 엄청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누캄프의 웅장한 구장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일원으로 갖는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내가 무엇을 해내야 할 지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어서 월요일 부터 호텔 로비에서 장사진을 친 팬들에게 정말 무뚝뚝하게 대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선수들과 나에게 군중은 몰려들었고, 선수들을 산만하게 하는 이런 일이 이틀동안 계속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안전요원을 불러야만 했다. 아이들을 포함한 수십명의 서포터들에겐 정말 그들을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난 정말 우리 유나이티드를 사랑해주는 분들-그들이 우릴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었다-께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그분들에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내가 로비에서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내 온정신이 이기는 데 몰려있었기 때문에, 또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서 너무 신경썼기 때문이란 것을 말이다.
기다림이 드디어 끝나고 난 경기장으로 향했다. 옷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선수들이 자신 앞에 놓여있는 상황에 잘 대처할 준비가 돼 있는지 찬찬히 얼굴을 뜯어봤다. 선수들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하지만 아주 건강한 침묵이었고, 바로 온 정신을 집중할 때 가질수 있는 조용함이었다. 강한 승부욕이 존재했고, 그들이 잘해주리라고 바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자 바이에른은 정말 내가 생각했던대로 카르스텐 얀커와 알렉스 지클러 두 최전방 공격수에게 길게 볼을 넘겨주는 공격에 의지하고 있었다. 내가 오직 예상치 못했던 건 6분만에 이뤄진, 우리에겐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너무나 뻔한 공격이었다. 바이에른이 우리측 페널티 박스 구석에서 프리킥을 찰 기회를 얻었고, 바이에른의 마르커스 바벨은 우리의 닉키 버트가 만든 벽을 뚫었다. 그 순간 바이에른의 마리오 바슬러가 들이댄 공은 골네트의 측면쪽으로 빨려들어갔고 우리는 악몽에 휩쓸려야 했다. 한방 맞은 이후 팀을 재정비 하는데 15분이나 걸렸고 그랬음에도 우리가 평소에 보여준, 리그에서 자신있게 선보였던 완벽한 플레이의 축구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린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는 팀이었다.
우리는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고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인들은 대충 경기를 끝내버리려는 듯 했다. 그런 보잘것없는 철학을 가지곤 그들은 이길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다시 살아났고 우리에게 또다시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반 24분 예스퍼 브롬키브스키를 대신해 테디 셔링엄을 투입했을 때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를 점점 뚫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가 동점을 만들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게다가 때때로 밀려오는 독일인들의 갑작스런 역습에 두번째 골을 내줄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그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면서 우리 선수들은 지지 않는다는 강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앤디 콜 교체로 나온 올레 군나르 솔샤르는 바이에른에게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전광판 시계는 후반 45분을 향해 치달았고, 우리는 그냥 점잖게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바이에른은 거의 우승을 확신하는 듯 했고, 렌나르트 요한손 유럽축구연맹(uefa)회장은 자리에서 걸어나와 우승 세러모니 시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세계가 다 알듯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데이비드 베컴이 왼쪽에서 찔러준 두개의 코너킥이 테디 셔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연결돼 득점으로 이어졌고, 그 상황 묘사는 아마 헤이스팅스 전투에나 어울릴 법한 광경이었다. 후반 인저리타임 2분도 채 안되는 동안 마법같은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난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이 일에 대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설명해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동안 축구 역사에서 이런 위대한 일은 일어남직도 있을 법도 하지 않았다. 바이에른은 셔링엄의 골이 터지자 전의를 잃어버린듯 했고, 솔샤르의 골이 네트를 갈랐을 때 거의 시체처럼 뻗어버렸다. 우린 정말 * 사람들처럼 춤추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우리 서포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피안컵이 30년의 간격을 두고 드디어 올드 트래포드에 두번째로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매트 버스비경의 90번째 생일 선물이 되기도 했다.(매트 버스비는 68년 유러피안컵 우승을 이끈 명장) 나에게 이 결과는 도달할수 없을 것 같아 보였던 내 열망 최정점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축하의 소용돌이속에 내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새롭게 정복해야 할 단계가 떠올랐다. 그렇다. 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퍼거슨의 자서전에서도 나와있듯이 99-00 시즌은
맨유에게는 생에 최고의 한해가 되었다.
그 후 분위기를 탄 솔샤르는 01/02 시즌 볼튼 전에서의 해트트릭을 포함,
클럽과 국대경기 총 30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의 파란만장한 인생에서도 고비를 맞게 되었다.
그 고비는 바로 무릎 부상.
그는 2005년 12월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1군으로 복귀했지만 이후 20개월간
무릎 부상으로 고생하며 노르웨이 출신의 상냥한 선수가 다시는 붉은 유니폼을
입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06/07시즌이 시작되기전, 솔샤르는 05/06시즌 초반 4경기에 출전했을 뿐이었다.
주전보다 서브로써 더욱 훌륭한 활약을 펼쳐왔던 그는 베스트 11에 속하지 못하여
정기적으로 출전할 수 없었지만 솔샤르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프리미어리그 우승메달을 따는데 기여했다. 그에게는 일곱 번째 메달이었다.
솔샤르는 11골로 시즌을 마쳤고, 그중 가장 인상적이 였던 장면은 07년 1월
올드 트래포드 에서 펼쳐졌다. fa컵 3라운드에 아스톤 빌라와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맨유가 뒤늦게 솔샤르를 투입했고 그는 기대에 부응하여 최후의 순간에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 시켰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골은 데뷔골과 마찬가지로 블랙번 전 이었다.
그리고....그는 무릎부상의 악화로 34세의 나이로
화려했지만 아쉬운 자신의 축구선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코치 라는 제 2의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