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를 떠나는 고종수

--;; 작성일 09.02.17 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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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最初)

고종수는, 적어도 한국 내에서만큼은 최고이자 최초였고, 무엇보다 팬들 앞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자신있게 내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힘껏 노력했던 ‘스타’ 플레이어였다. 90년대 이후 급증한 수 많은 '신세대' 축구팬들에게 축구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인 인물도 바로 고종수였다. 고종수의 절묘한 왼발 킥과 천부적인 축구 센스는 차범근 이후 아시아 권역을 넘어서지 못했던 축구팬들의 야망을 한껏 부풀려 놓았다. 우리도 다시 세계적인 선수를 갖게 될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팬들 사이를 서성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마침 K-리그가 막 (사실상의) 실업 축구에서 프로 축구로 도약하기 시작하던 그 때, 대표팀에서 프로팀으로 엘리트 축구의 중심이 이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던 그 때, 고종수는 리그와 A매치에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선수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특히 K-리그에서 고종수의 존재감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이른바 '98년 3총사'의 동료라 할 안정환-이동국과 함께 고종수는 K-리그가 보다 폭 넓은 팬층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 무렵, 팬들에게 축구의 재미와 우승 트로피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수원 삼성 고종수의 이름은, K-리그가 대표팀 선수들의 이름만이 아닌 특정 구단의 명칭이나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조합으로도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던 명확한 상징이기도 했다. 한 가지 더. 그는 "축구 선수는 축구만 해야 한다"는 불합리한 진리에 누구도 반기를 들 지 못하던 그 시절, 자신의 신명과 팬들의 바람에 등을 돌리는 위선 대신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타협을 거부하는 무모함으로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새로운 프로 축구 선수상(象)을 제시한 것 역시 고종수의 흔적이다.

점멸(漸滅)

하지만, 고종수는 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제대로 대접받을 기회도 없었고, 조명받을 입장도 되지 못했다. 한국 축구가 '개벽'한 2002년 월드컵은 아이러니하게도 고종수 커리어 '절반의 성공'의 마침표이자 이후 6년 여간 지난하게 이어진 부상과 건강 관리 실패, 잦은 이적으로 대변되는 ‘절반의 실패’의 출발점이다. 2002년 이전, 한국 축구의 상징적 존재였던 고종수의 이름은 월드컵 4강 신화와 함께 무대 뒷켠으로 밀려났고, 그가 차지하던 자리 역시 박지성, 이천수, 박주영, 기성용 등으로 이어지는 21세기 스타들에게 건네졌다. 점점 축구계의 주류에서 멀어진 고종수는 '은사' 김호 감독과 재결합한 대전 시티즌에서 (2007년) 만년 중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입시키며 잠시 부활의 불꽃을 피웠지만 아쉽게도 반전은 거기까지였다. 또 한 번의 부상은 구단과의 불편한 관계로 이어졌고 그렇게 소식이 뜸해졌던 고종수는, 지난 6일 선수 은퇴를 선언한 뒤 화려했던 시절을 영원히 과거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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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수의 은사 김호 감독은 수원과 대전에서 고종수를 맡았다

갑작스런 은퇴 발표는 수 많은 덤블링과 왼발 킥을 기억하며 고종수의 '새로운 시대'를 고대하던 팬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자신의 별명처럼 늘 '앙팡'일 것 같던 '만년 천재' 고종수의 조금은 급작스런 퇴장은 고종수의 열혈팬인 필자의 아버지가 남긴 '가슴이 미어지더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만큼 묘한 여운을 남긴다. "아직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게 있잖아!"라고 하소연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래서 여전히 고종수는 고종수다.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다"던 좌우명을 몸소 실천하듯 선수 생명 연장의 가능성을 제 스스로 던져 버린 고종수의 은퇴 선언은 언제나처럼 '불현듯' 우리의 허를 찔렀던 '고종수 스타일'의 전형이었으니까. 오해와 편견이 뒤섞인 세상에 굳이 돌을 던지듯 반기를 들거나 고함을 치는 것으로 자신을 항변하지 않고 전화 몇 통으로 이별을 고한 '고종수식' 답가가 가슴을 더욱 더 짠-하게 하는 것도 떠날 때까지 변치 않은 '앙팡 테리블' 특유의 쿨한 자존심을 재확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회상(回想)

아르샤빈을 접고 고종수의 이름을 종이 맨 위에 적어둔 사연을 이토록 길게 늘어놓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터뷰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세기말을 축구팬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고종수는 특별한 존재다. 그리고, 몇 차례 그를 마주했던 기억을 되살리면 고종수는 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남자였다. 자기 변명이나 타인 비난에 집중하지 않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 속에서 '선수 고종수'를 함께 회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몇 언론사에 전화로 고별을 통보한 선수와의 인터뷰는 늘 그렇듯 기약이 없기 마련. 인터뷰 약속이 미뤄지는 동안, 어쩌면 은퇴 직후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이후의 인터뷰가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약간의 기록과 풍성한 감상을 엮어 글을 적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였다. 자연히, 손길은 지난 2년간 두 차례 그를 만났던 기록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열심히 들여다 본 것은 <포포투> 한국판 창간호다. 박지성의 화사한 표정이 가득한 2007년 6월호 표지 한켠에 조그맣게 박힌 그의 이름은 ‘시대와의 불화를 말하다’라는 표제 곁에 무심하게 앉아 있다. 이제는 그의 ‘호’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두 글자, '천재'와 함께.

2007년 5월,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고종수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빗줄기가 꽤나 굵었던 봄날의 저녁, 서른 살이 넘은 두 남자가 석쇠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시간은 꽤나 머쓱했다. 뒤늦게 도착한 사진 기자가 이전의 친분을 드러내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지만, 조명과 카메라가 설치되던 그 짧은 시간은 여전히 몇 시간처럼 길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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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무뚝뚝하지만, 퉁명스러운 말투 너머로 들려주는 솔직한답변이 인터뷰어를 안심시킨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시절을 몸에 지닌 '전직' 슈퍼스타를 맞이한 인터뷰이의 심정이란 잘 꾸며놓은 고급 식당의 공기마저 텁텁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묘한 것이다. 찬란한 과거, 지난한 현재, 알 수 없는 미래를 어떤 말로 풀어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장고(長考) 끝에 둔 악수(惡手)'는 하필 몸무게에 관한 질문이었다. "체중은 많이 줄었느냐"고 물은 뒤 아차 싶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역시 퉁명스러웠다. "왜 맨날 몸무게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던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선입견에 무척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짧지 않은 공백기 동안 팬들의 궁금증과 세간의 루머 사이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의 모습은, 부상 기간 동안 살이 붙은 맵시로 촬영된 사진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과체중' 이미지까지 덧씌워진 터였다. 하지만, "삐쩍 곯아" 보였다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70kg이 넘었다던 그는 이러저러한 루머에 굳이 예민하게 반응하려 하지는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고종수의 첫 번째 이미지.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다고 무심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대중에 노출된 생활을 해야 했던 스타 플레이어에게 언론의 부정적 보도와 불특정 다수의 알 수 없는 선입견은, 고종수가 자신이 가진 기를 다 뿜어내지 못하고 위축되게 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인터뷰 도중 '고교 4년생', '음주 폭행', '싸가지', '염색 파문', '연예인', '리니지' 등의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의 표정에는 일종의 체념 혹은 고통이 묻어 있었다. 말 한 마디가 크게 부각되고, 또 그것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되는 셀러브리티의 세계. 10대 시절부터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한 주목을 받지만 연예계와 달리 가림막도, 매니지먼트도 없던 그 무렵 축구계에서 자존심 강한 고종수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돌한', '무례한' 혹은 '겁없는' 고종수의 이미지가 왜곡된 것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것이 그 때였다.

고종수는 인터뷰 도중 프로 축구 신인 시절, 그리고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의 기억을 들려주며 멋적게 웃었다. "그 때, 포항이랑 할 때 보면 수비에 (홍)명보형, 공격에 (황)선홍이형, 라데… 죄다 TV에서 보던 선수들이잖아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고." "아니, 고종수가 떨었다고요? 절대 긴장않는 그 '앙팡 테리블'이?" "아휴- 월드컵 나갔을 때 얘기를 들려줄게요. 딱 가니까 TV에서만 보던 베르캄프 같은 선수들이 앞에서 몸을 푸는데… 제가 그 때 항상 껌을 씹었거든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껌 씹는 턱이 덜덜덜 떨리더라니까요. 아이고~"

불화(不和)

자신이 가진 기량만큼이나 그에 대한 자부심도 컸던 젊은 스타에게 세상은 늘 뻑뻑했다. 프로 선수로서 고종수의 기량이나 자기 관리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 그 시절, 김호 감독은 늘 그를 중용했다 – 간헐적인 방송 출연이나 머리 염색은 그런 세상이 기다렸던 먹잇감이었다. 경기력에 상관없이, 그의 돌출 행동은 늘 비난의 대상이었다. "선수라고 늘 경기장에서 거친 모습만 보여줄 필요 있나. 가끔은 방송 나와서 속 마음도 들려줄 수 있고 팬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 선수라면 공 다 차고, 훈련 다 했으면, 휴가 기간에 팬서비스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늘 나만 나쁜 놈 만들더라"던 그의 한탄에는 그래서 어딘지 모를 한이 서려 있다.

불과 2~3년이나 지난 뒤 였던가. 한 때 축구계에 갖가지 색깔의 염색 바람이 불었던 것이. 염색 때문에 올림픽 대표팀에서 쫓겨날 뻔 했던 해프닝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걸 보면 그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일 뿐이었지만 그 무렵은 '다른' 것도 '틀린' 때였다. 이제는 언론계 사람들 사이에서도 "축구 선수들은 다른 종목 선수들에 비해 말재주가 없어"라는 불평도 나오지만 그 때는 뮤직비디오니 토크쇼 출연 자체가 '선수의 본분을 저버린' 행위로 간주될 때였다. 선수 시절의 최절정기였던 당시 고종수를 떠올리면 그의 잘못은 단지 '프로 의식'을 시대보다 조금 앞질러 가졌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인터뷰 도중 사진 촬영을 준비하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다른 데 태어났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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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대전 시티즌에서의 호시절

여기에, 본인이 옳다고 믿으면 밀어붙이는 뚝심이 겹쳐지자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훈련장에서 대뜸 "종수야"라고 말을 놓는 기자들에게 "처음 뵙는 분인데 많이 배우신 분들이 무조건 말을 놓으시네요"라고 답했다가 그 다음날, <고종수, "기자들 반말하지마">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는 일화를 들려줄 때 짓던 허탈한 미소는 시대와의 불화가 빚은 스타 선수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준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가 겹치며 잦은 충돌을 빚는 과정에서 방어 기제가 강해진 그는 독기오른 자존심을 안고 방황을 시작한다. 2004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에서 수원 복귀를 준비하던 그는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데 회의를 느끼고 잠적하는 해프닝 속에 수원에 합류하지만 그를 다잡으려던 차범근 감독의 지시를 거부한 뒤 경력의 중대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삭발'을 둘러싸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던 그는 이후 수원을 떠났고 이후로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세상과의 충돌 과정에서 지친 야수였던 고종수는 잦은 부상에 반비례해 말수는 줄어들었다. 자존심 강한 캐릭터를 가진 그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폭행 논란이나 리니지 중독설 등의 루머를 애써 부인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러한 소동의 결과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그 무렵부터 흥미나 꿈을 잃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은퇴를 앞둔 그의 심정이야 한이 없었을 리 없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그 때 (수원에서) 삭발하고 계속 남아서 몸 잘 만들어 복귀했다면, 지금 내가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자존심 내세우느라 그 잠깐을 못참아서…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자존심 별거 아닌데, 머리 깎는게 뭐 대수라고…"라며 이전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누가 삭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거예요?" "당연히 안하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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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에서의 화려한 시절 (사진 제공 : 수원 삼성)

작별(作別)

누구나 인정하는 뛰어난 재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고종수. 그의 진정한 힘은 98년 월드컵 멕시코 전에서의 중거리슛이나 2001년 세계올스타전에서 칠라베르트 골키퍼의 방어를 뚫어낸 프리킥을 쏘아올린 왼발이 아니라 고종수 특유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자존심'이 전부였던 이 명민한 선수에게서 그의 가장 큰 힘을 박탈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온 것인 지 모른다. 그라운드 안보다 그라운드 밖에서 더 많은 적들을 만나야 했던 그의 선수 인생은 그래서 더 힘겨웠을 테니.

물론, 진정한 스타라면 제 스스로 이 모든 걸림돌 쯤은 유연하게 벗어 던졌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역경을 딛고 우뚝 서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의 주인공들처럼. 하지만, 그것은 고종수가 맡은 역할이 아니다. 한국 축구에서, 그리고 축구팬 개개인의 추억 속에서, 고종수는 그만의 톡톡 튀는 개성과 우악스런 자존심을 왼발에 담아 감동을 전하는 캐릭터였으니. 물론, 그는 이미 자신의 몫을 다 하고 떠났다. 때론 TV에서, 때론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때론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우리에게 찰나의 감동과 흥분을 안겨주던 '앙팡 테리블'의 뒷모습이 그다지 쓸쓸해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그리고, 조금은 일찍 우리 곁을 떠나기로 한 '선수 고종수'의 선택은, 그가 선수로서 내린 마지막 결단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이 읽혀진다는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스로의 가는 길을 손수 정해 작별을 고하고 떠난 그의 발자국 위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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