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슛도사 이충희를 아십니까?

행동반경1m 작성일 10.03.18 12: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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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시절만 해도 겨울에는 농구 대잔치 중계를 많이 즐겼습니다.  개인적으로 농구공을 처음 잡고 농구라는

 

운동을 직접 하게 되었던 때도 중학교 시절.. (중학교 1학년 당시 제 키가 185cm.. 키 크다는 이유로 동네 형들이

 

농구 경기에 끼워주었고 저도 하면서 상당한 재미를 느꼈었죠. 참고로 그 이후 신기하게도 키는 1cm도 자라지 않았

 

습니다.....허허)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팀은 촌스러운 녹색 유니폼으로 상징되는 현대전자였습니다.

 

현대 전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선수로서 작은 신장이지만 재빠른 스텝과 3점 라인(당시에는 없었음) 언저리에서

 

드러눕다시피 던지는 페이드 어웨이 슛을 구사하며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준 이충희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의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아서 이충희 선수가 전*를 구가하였던 80년대

 

의 구체적인 시즌 기록을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대충의 기억만 정리해도 득점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선수

 

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최고의 슈터로 인정받으며 고려대의 49연승을 이끌었던 이충희 선수가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

 

로 보여준 것은 아마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결승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 농구는 20년 만

 

에 만리장성 중국을 넘어서며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요. 이 경기에서 이충희 선수는 30점을 몰아넣으

 

며 한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최고의 수훈을 세우게 됩니다.(당시에는 3점슛이 없었던 시기였죠. 이런 상황에서 외곽에

 

서 주로 득점을 하는 이충희 선수가 30점을 넣었다는 것은 엄청난 폭발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흐음.... 지금부터 이름 뒤에 선수 및 감독이라는 호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이후 현대 전자에 입단한 이충희는 중앙대와의 경기에서 60득점을 기록하며 최고 득점 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전까지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은 이충희 이전에 신동파가 기록한 57득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60득점

 

이상 경기를 몇번 보여준 이충희는 명지대와의 경기에서 국내 한 경기 최다 득점인 69득점의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 때 플레이 타임이 33분 정도였다고 그러네요. '풀타임을 소화했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참고로 kbl 최다

 

득점 기록은 밀어주기 파문으로 얼룩진 우지원의 70득점입니다. 그리고 농구 대잔치 외의 아마 대회에서의 최다 득점

 

은 1987년 전국 체전에서 최철권이 세운 97득점입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 이충희는 국내 농구 선수 중 최초로 4000득점을 돌파한 선수였으며(아마 4412점 정도였던 것 같습

 

니다. 물론 이충희 보다 커리어를 더 지속한 고 김현준이 이후 이 기록을 깨게됩니다만 그 이전까지 최다 득점 기록

 

은 이충희였습니다.) 커리어 기간 내내 국내 리그와 국가대표를 오가며 쉬지를 못했던 이충희는 80년대 후반부터 무

 

릎이 고장나며 하향세를 겪게 되고 비슷한 시기에 허재를 중심으로 김유택, 한기범, 강정수, 정덕화 등으로 무장한

 

사기 유닛 기아 자동차의 등장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당시 기아 자동차의 정덕화는 이충희 전담 수비수로 명성을 날리며 주가를 올리게 되는데 정덕화의 수비력이 뛰어

 

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시기 이충희는 이미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훗날 당시 현대전자의 감독이었던 정광석 감독은 그 몸 상태로 뛰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말했다는군요.)

 

 

  1992년 국내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한 이충희는 대만으로 건너가 홍쿠오팀의 플레잉 코치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충희가 입단하기 전 6위에 머물렀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만팬들로부터 신사수(神射手)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 이충희는 현대전자의 우승을 이끌며 83~85년까지 mvp를 3회 수상하였고, 5시즌 연속 득점왕, 1982

 

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7년 abc 대회 mvp 등의 화려한 경력을 남겼습니다.

 

 

 

 

이충희의 농구 대잔치 시절 평균 득점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년도

경기 

총 득점 

평균 득점 

 1983

26

642

24.6

 1984

21

687

32.71

 1985

13

434

33.38

 1986

23

695

30.21

 1987

14

473

33.78

 1988

21

629

29.95

 1989

14

439

31.35

 1990

19

339

17.84

 1991

14

74

5.28

165 경기 출장 

4412 

26.7

 

 

 


 

  90, 91년 시즌 이충희는 이미 손가락 부상과 한계에 다다른 무릎으로 인해 풀타임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승부처에서 투입되는 식스맨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두 시즌을 제외하고 농구 대잔치에서 보여준

 

이충희의 득점력은 지금 봐도 엄청난 것이죠. 1988년 12월 17일에 이충희는 통산 3000득점을 돌파하게되는데 3000

 

점을 돌파하는데까지 99경기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이 시기까지 이충희의 평균 득점은 30.5득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충희라는 이름 석자는 세계 남자 선수권 대회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 한국이

 

 참가한 것은 총 6차례입니다. 통산 성적은 9승 30패. 1970년에 처음 출전하였고, 그 대회에서 기록한 11위가 역대 최

 

고 성적입니다.

 

 

이충희는 1986년 대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45점을 올렸습니다. 이 기록은 세계 선수권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득점

 

공동 6위에 해당되는 기록입니다.(당시 한국팀은 전반전에 브라질을 상대로 37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중 36득점이

 

 이충희가 기록한 것이고 1점은 이문규의 자유투였습니다.) 당시 대회에서 이충희는 득점 랭킹 2위에 올랐습니다.

 

 

  이 대회가 끝나고 이충희는 nba 댈러스 마베릭스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게 되었으나, 82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았던 이충희는 당시 병역 혜택 시점부터 5년 동안 해외 진출 금지라는 병역특례규정에 발목이 잡혀

 

nba 진출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잠시 이야기의 폭을 넓히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남긴 적이 없는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이지만 득점 부분에 있어서는 그 역사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선수가 두 명 더 있습니다.

 

슈터 계보에서 첫번째로 꼽히는 신동파는 1970년 세계 선수권에서 8경기 동안 평균 32.6 득점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역대 대회 통산 평균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당연히 1970년 세계 선수권 대회 득점 1위는 신동파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에서 허재는 이집트전에서 62득점을 퍼부으며 한국의 유일한 1승을 이끌었습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세계 선수권 역대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종종 국내 농구 관련 글들을 보다보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논쟁이 이충희와 허재 중 누가 최고인가라는 논쟁일 것입

 

니다. 농구 선수로서의 완성도는 당연히 허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두 선수 모두 레전드로 부족함이 없는

 

실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누가 최고냐라는 논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

 

다. 전*도 달랐고요. 동시에 플레이 스타일과 포지션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이충희와 허재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최고라 주장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로 인해 또다른 레전드들을 폄하

 

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틀린게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첨부한 영상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유고 슬라비아를 상대로 한 경기 모습입니다. 단신으로 저 장대숲을

 

누비며 돌파와 외곽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득점을 올리는 모습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네요. 

 

농구 선수로서 뛰어난 신체 조건도 아니었고 이충희의 시력 이야기야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니까 새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 핸디캡의 극복은 결국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포스팅에 이용된 정보들은 마이데일리, 점프볼의 기사와 후추닷컴 명예의 전당을 참고로 했습니다.

 

 

 

 

(출처 - kaga4467.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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