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인권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취지에서 생긴 인권이 분란의 원천이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어느 선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우선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주사의 항체-그 자체로선 좀 심하다 싶어도 결국 건강을 돕는-라는 기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은 어떤 국가, 집단, 개인도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시민의 공적 이성으로 통제를 할 수 있으면 제일 낫다. 강제조치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식인, 여론주도층, 언론이라면, 아니 그 누구라도, 표현 자유의 논쟁에 뛰어들 때엔 첫마디, 첫 줄에서부터 밝혀야 할 점이 있다. 자신의 비판이 어떤 사안의 내용에 대한 규범적 비판인 것인지, 아니면 규범적 비판에 더해 제도적 금지, 검열, 법적 제재와 처벌까지 하자는 주장인지를 정직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 둘을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면서 온갖 교묘한 언설로 비난을 퍼부은 다음, 사법당국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고 뒤에 숨는 것은 지적 비겁함이자 정치적 교활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헌법상의 자유 민주주의자를 판별할 때에도 이 질문을 리트머스 테스트처럼 활용하면 좋겠다.
비유로써 결론을 내리자. 표현의 자유는 민주체제에서 100퍼센트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의 실천은 시민들의 건전한 양식으로 조절되는 것이 좋다. 그래도 논란이 되는 10퍼센트는 여론과 논쟁의 용광로에서 치열하게 부딪쳐야 한다. 이 논쟁의 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그중 1퍼센트 정도가 법정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0.1퍼센트 미만이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모두 위협받는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표현의 자유를 전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자기절제가 가능한, 수준 높은 시민들이 있어야 표현의 자유가 바벨탑의 비극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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