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시디굽던 노인이 그립다

엄비오 작성일 08.03.26 01: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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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 전이다. 내가 갓 게이머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용산구에 올라가 살 때다.
용산역에 왔다가는 길에, 게임 시디를 한 장 사기 위해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용산역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게임 시디를 구워서 파는 노인이 있었다.
게임을 한 장 사 가지고 가려고 구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를 것 같았다.
"얼마 알아보고 왔소?"
"한 장에 5천원 아닙니까?"
"한 장에 만2천원이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다른 곳은 5천원이던데..." 했더니,
"시디 한 장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싸가지 없는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구워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이미지를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뜨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클릭하고 저리 클릭하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이렉트로 구우면 다 될 건데,
자꾸만 이미지만 뜨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구워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TV에서 "카드 앵벌이 싸구려"를 방영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이미지 안 뜨고 CD to CD로 구워줘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구울 만큼 구워야 시디가 돌아가지, 공시디에 라이터 지진다고 돌아가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굽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용팔이시구먼, 카드 앵벌이 한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방영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구워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인식이 안되고 뻑이 난다니까.
시디란 제대로 구워야지, 굽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이미지 뜬 것을 숫제 1배속으로 걸고
태연스럽게 새턴을 켜고 야구권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흥분해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시디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게임 시디다.
방영 시간을 놓치고 녹화본을 봐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용팔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용산역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용팔이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용팔이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시디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구웠다고 야단이다.
통신 판매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싸구려 벌크 시디로 구우면 얼마 못 가서 시디가 인식이 잘 안되다가
데이터가 쉬이 날아가며, 무리하게 고배속으로 구우면 다운이 잘 되고 동영상이 끊기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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