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 시계 기술자들의 수(手)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예술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파텍 필립시계. 이러한 시계를 만들어 내는 파텍 필립(Patek Philippe) 사(社)는 폴란드 망명귀족인 앙드와르 드 파텍(Antoine de PATEK)과 프랑스 시계 제조자인 쟝 아드리랑 필립 (Jeas Adrian PHILIPPE)에 의해 1839년 설립되었다.
심미안(審美眼)과 영업적인 재능을 가진 폴란드의 망명 귀족 앙뜨와느 드 파텍(Antoine de Patek:1812-1877)백작과 우수한 기술자이며 발명가인 프랑스의 천재 시계기사 쟝 아드리앙 필립(Jean Adrian Philippe:1815-1894). 이 두 사람은 제3국인 스위스에서 서로 만나 시계 제조를 시작하였다.
망명한 사업가 파텍
쥬네브로 망명, 시계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파텍 백작은 폴란드가 강대한 러시아제국의 압정에 고통받던 고난의 시기인 19세기 초에 태어났다. 16세에 폴란드 국방 기마대에 입대한 파텍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어 지휘관이 되었고, 또한 그 능력을 인정받아 훈장도 받게 되었다. 폴란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여러 차례 반란군과 합세하여 싸움을 했으나 결국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폴란드의 자유와 독립의 꿈이 깨진 파텍은 쥬네브로 망명하게 되었고, 쥬네브에서 파텍은 시계를 판매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1830년대 후반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된 파텍은 시계 수요의 증가를 확신하고, 같은 폴란드 인이며 시계 기술자인 '구쟈베크'와 같이 1839년에「파텍과 구쟈베크상회」를 설립하였다. 지금의 파텍 필립사(社)의 모체(母 )였던 이 상회는 그 당시에 6명의 숙련 기술자를 고용하여 년간 200개 정도의 시계를 만들어 냈다.
부친으로부터 시계기술을 배운 필립. 「열쇠없는 시계」개발
한편, 천재 시계사인 아드리앙 필립은 프랑스의 로왈 지방에서 태어났다. 필립의 부친은 우수한 시계기술자로 특히 기술 개발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런 부친의 영향을 받은 필립은 시계 기술 습득에 힘을 기울인지 얼마 안 되어 우수한 시계 기술자가 되었다. 이렇게 부친으로부터 시계 기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필립은 더욱 많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런던, 파리 등지에서 수업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갖게 된 필립은 이런한 재능을 바탕으로 1842년에 「열쇠없는 시계(용두시계)」를 발명하였다. 그 당시의 회중시계는 부속품인 열쇠로 일일이 태엽을 감아야만 했는데 「열쇠없는 시계」를 발명함으로써 이러한 불편을 없앴으며, 또 이 발명은 시계사(史)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열쇠없는 시계」를 1844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출품하여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열쇠없는 시계를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 파텍과 필립
박람회에서 필립이 발명한「열쇠없는 시계」를 본 파텍은 그 기술에 매료되어 필립을 만나게 되었고, 또 필립과 같이 일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렇게「열쇠없는 시계」가 인연이 되어 이듬 해인 1845년에 파텍과 구쟈베크와의 계약이 끝남에 따라 새로운 파트너인 필립이 파텍과 같이 시계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의 회사명은「파텍 필립사(社)」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
빅토리아 여왕을 매료시킨 파텍 필립시계,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 이렇게 회사 이름을「파텍 필립사(社)」로 바꾼 1851년에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 있는 수정궁(水晶宮)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 만국박람회에 참관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스위스 시계 전시 코너에서 특별히 감명을 받은 「영쇠없는 시계(용두시계)」를 선택하였는데 이 시계는 브로치 핀에 부착된 로얄블루 색상의 파텍 필립시계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파텍 필립시계는 왕후, 귀족을 시작으로 저명한 정치가, 예술가, 과학자 등으로부터 애용되어 지위의 심볼로서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 파텍 '필립사(社)의 시계는 평가가 좋아지게 되었고, 사업은 순조롭게 확산되어 갔다. 순조로운 사업 신장에 힘입어 1901년에는 주식을 발행하였고, 1928년에는 스탄가(家)가 대주주가 되면서 앙리 스탄 씨가 사장이 되어 새로운 경영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1846년에 처음으로 독립분침, 2년 후에는 자동태엽을 개발. 그리고 1851년에는 파텍필립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역사 새기기를 시작한다. 같은 해에 개최되었던 런던 세계 대 박람회에서는 금메달을 수상한 시계를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가 최초로 파텍 시계를 소유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 동시에 많은 왕후귀족인 피오9세를 비롯한 여러 명의 로마교황과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차이코프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록펠러, 아인슈타인 등이 파텍필립의 고객 명단에 올랐다.
작은 방의 기술자(Cabinotiers)에 의해 제작되는 예술의 결정(結晶), 파텍 필립시계
파텍 필립사(社)의 시계 제작방법은 1868년 스위스에서 손목시계를 생산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을 수(手)작업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들은 「작은 방의 기술자라고 불리는 숙련 시계 기술자들의 수(手)작업에 의해서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최고의 시계를 만든다」는 정책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정책으로 파텍 필립시계는 차차 하나하나를 연마해서 만들어 내는 시계 기술자, 부드러운 팔찌 밴드를 만들어 내는 밴드 기술자, 전통의 쥬네브 에나멜을 묘사하는 에나멜 세공사, 쇠붙이에 조각을 하는 조금사(彫金師), 보석 세공사 등의 손을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의 결정(結晶)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의 시계를 만드는데 8개월의 기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정도(情度)」를 목표로 하는 파텍 필립사(社)는 정도를 높이는 새로운 부품을 개발하여 여러 개의 특허를 얻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쟈이로막스 천부(Gyromax Balance)로 이것은 8개의 스크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 조정되는 것으로 우수한 정도(精度)를 유지할 수 있는 천부이다.
그러나 뭐라고 해도 파텍필립을 최고의 브랜드자리에 올려 놓은 것은 뛰어난 미의 감성이다. 지나칠 정도로 심플한 파텍필립의 시계는 기술을 위압적으로 고시하지 않는다. 대신에 다이얼의 문자, 바늘의 움직임 등 모든 것에 인간 본래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 자세야 말로 시계를 예술까지 승화시켰던 것이다. 파텍필립은 매우 고전적이지만 때로는 아주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기도했다.
쿼츠전쟁에 휘말린 파텍 필립사 전통적인 품격으로 극복
이렇게 그 명성과 영광을 얻은 파텍 필립사(社)도 1960년대 후반에 쿼츠 손목시계가 발명됨으로 해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른바 '쿼츠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파텍 필립사(社)에서도 쿼츠 손목시계의 개발에 착수하였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기계식 시계의 정확성이 아무리 높아도 쿼츠시계의 정도(精度)에 는 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새로운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잠깐 사이에 세계의 시계시장은 쿼츠시계가 석권하여 버렸다. 결국, 파텍 필립사(社)도 1970년에는 쿼츠 손목시계를 완성하여 서서히 기계식 무브먼트에서 쿼츠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브먼트에 변화를 주었지만, 파텍 필립의 시계는 그 품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쿼츠 손목시계 이외의 대부분은 지금도 수(手)작업으로 완성시켜, 최고의 시계를 생산하고자 하는 전통은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 씰(Geneva Seal)을 넘어선 파텍필립 씰(Patek Philippe Seal)
제네바씰은 수세기동안 전세계 시계산업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최고의 정밀도와 내구성이 검증된 칼리버에만 주어지는 공신력있는 인증 마크이다. 파텍필립도 제네바씰이 각인된 칼리버를 자랑스럽게 여겨왔으며 다른 시계제조사들에게도 제네바씰을 인증받는 것은 자신들이 개발한 제품의 품질에 대한 영광스러운 "공증"으로 여겨왔다. 최근 파텍필립은 칼리버에만 적용되는 제네바씰은 자신들의 타임피스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독자적으로 "파텍필립씰(Patek Philippe Seal)"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들은칼리버를 넘어서서 케이스, 아이얼, 핸즈 등 시계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들에 대해 품질기준을 부여하여 씰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텍필립은 시계 산업에서 기술적, 심미적, 브랜드 품질 관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엄격한 가족경영을 통한 철저한 브랜드 관리
[티에리 스턴]
아드리앙 필립의 후손인 헨리스턴의 아들 필립 스턴이 파텍필립을 경영하다가 최근 티에리 스턴(Thierry Stern)이 부사장에서 회장으로 승격한다고 밝혔다. 파텍필립은 스턴 형제가 브랜드를 인수한 1932년 이후 같은 패밀리 아래 관리 되어오고 있다. 찰스 스턴, 앙리 스턴, 필립 스턴에 이어 티에리 스턴은 파텍필립의 4세대 경영을 맡게 된 것이다. 현재 파텍필립은 티에리 스턴(회장), 필립 스턴(명예회장), 끌로드 페니(최고경영자)로 구성된 관리 위원회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최근 소비자 가격이 한화 90억원에 달하는 포켓워치 컬렉션 [스타칼리버 2000]을 통해 "Who is the BOSS?"라는 물음에 답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