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한 몽골기병은 왜 인도경내로 들어갈 수 없었고, 인도로 들어간 후 얼마되지 않아 철수하고 만 것일까? <<원사(元史)>>와 <<야율초재전>>의 기록에 의하면 징기스칸으로 하여금 회군하게 만든 것은 인더스강에서 만난 각단(角端)이라는 괴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당시 징기스칸의 부대는 인더스강으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멀리 강물의 수증기가 ?어져 올라오고 햇볕으로 몽롱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입이 말라 줄줄이 말에서 내려 물을 마셨다. 그러나, 강물은 매우 뜨거워서 입으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사들 사이에서는 원성이 자자했고, 모두 하루빨리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야율초재가 막 징기스칸에게 회군을 건의하려는데, 돌연 강가에 한 마리의 큰 괴수가 나타났다. 징기스칸은 병사들에게 활로 쏘아 죽이도록 명령했는데, 돌연 괴수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마치 사람이 내는 소리같았는데 잘 들어보면 "여주조환(汝主早還, 너희 주인보고 빨리 돌아가라고 해라)"이라고 하는 것같았다. 야율초재는 즉시 궁수들에게 활쏘기를 멈추게 하고, 이 기회를 틈타 징기스칸에게 진언했다. 이 괴수는 각단이라는 것인데 하늘이 보내어 징기스칸에게 백성의 목숨을 보전하도록 경계한 것이니, 하루빨리 회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징기스칸도 하늘의 명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말을 돌려 되돌아갔다.
이 역사기록은 마치 신화와 같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이런 괴수가 아마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인도지방에 사는 동물을 몽골인들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괴수라고 한 것일 뿐이다. 괴수가 지르는 소리가 "너희 주인보고 빨리 돌아가라고 해라"라고 했다는 것은 야율초재의 견강부회이고, 괴수가 소리지르는 것을 빌어 징기스칸에게 회군하도록 진언한 수법이었을 뿐이다. 비록 야율초재의 말이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방법은 괜찮았던 것같다. 여러 동물들 중에서 인도인들은 코끼리에 대하여 독특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인도인들은 코끼리를 "하디"라고 칭한다. 인도인들은 이 동물을 힘, 지혜와 선량의 상징으로 본다. 코끼리조련사의 조련을 거쳐 코끼리는 인도인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코끼리는 힘이 세고, 조련이 가능하다. 전쟁터에서 코끼리부대를 배치하면 무적의 부대로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군사역량은 이미 주로 코끼리에 의지하는 것이 되었다. 요즘 출토되는 화폐에도 전투코끼리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코끼리는 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코끼리와 말이 함께 전투를 하면, 코끼리가 길을 열고 말은 적진을 뚫고 들어간다. 말이 선봉을 서면 코끼리가 밟고 지나간다. 인도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도의 부대는 주로 4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병(象兵), 마병(馬兵), 전차병(戰車兵), 보병(步兵)이다.
몽골기병은 무적이었는게 그 비밀은 바로 몽골기병은 전격전에 능하다는데 있었다. 그들은 속도가 뛰어나서 하루에 수백리 내지 천리이상을 행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몽골군의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말은 몽골인들 특유의 장점이다. 전투시, 몽골기병은 말에 의지한다. 이것은 군수물자조달이 크게 필요없게 만들었다. 다만, 몽골기병에게도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말을 잘타고, 활을 잘 쏘므로 말을 몰아 급습하는데 능한 몽골기병은 강이나 호수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도 결국은 해결했다. 1220년, 징기스칸은 수군을 조직한다. 서정(西征)때, 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내에 백척의 배를 건조하고, 몽골기병을 싣고 강을 건넌다. 또 다른 약점은 몽골기병으로서는 해결불가능했다. 몽골초원과 시베리아스텝지역에서 생활하던 몽골인들은 더위와 습기를 싫어했고, 고온을 견디지 못했다. 이 점으로 인하여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의 전투에서 몽골군은 확실히 힘을 쓰지 못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이 인더스강에 도달한 것은 한여름이었다. 더위로 병사들이 괴로워할 때였으니, 몽골군은 투지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병사들에게는 통상적인 날씨였다. 징기스칸으로 하여금 회군하게 한 주요한 원인은 아마도 몽골기병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현지의 기후와 지리환경이었을 것이다.
-----------------------------------------------------------------------------------------------------------
몽골 제국의 몰락
오고타이칸의 승하 이후
몽골제국의 내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치 혈통인 바투는 애초에 칸이 되기를 포기하였고
결국 막내 툴루이의 아들 몽케와 셋째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가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 경쟁에서 승자는 구유크였다. 이것은 그나마 내분의 위험에 휩싸이던 몽골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몽케칸은 불행이도 몇 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것이 툴루이 가문의 음모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이를 계기로 시시때때로 대칸 자리를 노리고 있던 툴루이 가문은 4번째 대칸 자리에 드디어 앉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몽골제국을 파멸로 치닫게 된다.
이미 친척관계가 멀어진 이상 예전과 같은 우애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기회를 엿보다 이때다 하고 분풀이를 하려는 툴루이 가문은 오고타이 가문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한편 4번째 대칸이 된 몽케는 자신의 형제인 훌라구를 시켜 중동을 정벌케 하였다. 아바스 왕조와 그 밖의 수많은 이슬람 왕조들이 몽골제국군의 진격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몽골제국이 내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바투는 이미 몽골 제국과 관계가 멀어져 있었다. 결국 가장 먼저 몽골제국으로부터 분국하여 골든 호드 칸국, 즉 킵차크 칸국을 세우게 되어 자체적인 독립 칸이 되었다.
오고타이 가문은 박해를 받아 분노에 휩싸였고 다시 대칸 지위를 회복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몽골제국은 본격적인 내란에 휩싸였다.
골든 호드 칸국은 이미 몽골제국 중앙정부로부터 지원을 얻을 수 없으므로 유럽 정벌을 포기해버렸다.
몽케칸이 사망하자 오고타이 가문은 또다시 대칸위를 되찾으려 하였으나 툴루이의 아들 쿠빌라이가 간사한 수를 써서 대칸이 되자, 이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오고타이 가문은 영토를 계속넓혀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 가문의 영토까지 합병하였으며 주치 가문과도 손을 잡았다.
쿠빌라이칸은 중국문화를 너무나 좋아하여 기존의 몽골전통을 깨뜨리고 완전히 한족화 되기를 원했다.
쿠빌라이칸의 맹목적 한화 정책은 결국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일로 귀결되었으며
쿠릴타이 회의의 반발과 맞물려 결국 몽골제국이 5조각으로 분열되면서 정통 몽골제국이 멸망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서 쿠릴타이와 몽골제국은 해체되고 중국을 지배하는 원나라와 중앙아시아의 오고타이 칸국, 중동의 일칸국, 골든 호드, 차가타이 한국으로 분열하였다.
불합리한 원나라의 황위 세습
40년에 걸친 오고타이 가문의 원나라에 대한 항전은 결국 패배로 귀결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몽골제국은 몰락으로 치닫는다.
오고타이 칸국을 도왔던 골든호드 칸국(킵차크 칸국)은 원나라의 쿠빌라이와 같은 툴루이 가문인 일칸국과 쉴 새 없이 전쟁을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일칸국에게 끊임없는 지원을 하였으므로
킵차크 칸국의 힘은 계속 해서 약해져, 이에 발전을 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비합리적인 중국 유교문화에 심취한 쿠빌라이칸의 원나라도 망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쿠빌라이칸의 성리학에 입각한 통치덕분에 재정관리는 엉망이 되었고 왕실재정이 날로 위험해져갔다. 이는 심각한 세금착취로 인한 한족의 반란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성리학에 입각한 이후로 원나라의 군사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쿠빌라이칸은 몽골의 전통적인 문화나 종교를 배타적으로 여겨 몰아내려 하였다.
한편 일칸국과 골든 호드 칸국(킵차크 칸국)은 서로를 적대시 하여 싸우느라 다른 과학의 발전이나 국가발전에 힘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약해져가는 킵차크 칸국은 훗날 킵차크 칸국에서 독립한 러시아에게 몰살당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일칸국 또한 후방에서 공격해오는 맘루크 왕조에게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일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은 이슬람 맘루크 왕조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훗날에, 두 나라는 영입한 맘루크 용병들에게 이용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맘루크 왕조는 계속하여 영토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