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절묘한운빨 작성일 12.09.11 00: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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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이 낳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건달, 안상민

1992년 10월 XX일 청소교도소 정문 앞. 관광버스 3대와 일명 '깍두기차'로 불리는 고급세단 30여 대가 나타났다. 곧 건장한 사내들이 내려서더니 일렬로 쭉 늘어섰다. 잠시 후 교도소 정문에서 작달막한 체구의 남자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검은 정장의 '어깨'들은 90도로 절을 하며 일제히 이렇게 외쳤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로 80~90년대 오직 주먹 하나로 서울의 조폭세계를 평정했던 '조직폭력계의 기린아'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 씨(50)의 출소 광경이었다. 

 

"난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는게 '주먹'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주먹을 휘둘렀어. 무시받지 않기 위해. 내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지금 건달들은 달라. '돈'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돈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솔직히 말해 그건 건달이 아니야. 양아치야. 깡패 양아치."

[출처]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작성자 BlackBox준

 


80~90년대 맨주먹 하나로 천하를 통일했던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 

그는 변해버린 주먹세계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낭만과 의리가 어디있어. 오로지 돈이지. 적어도 우리때는 안그랬는데. 

그래도 의리를 알고 멋을 알고 낭만을 알았는데.적어도 그때는 말이지…" 



일대일 주먹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적이 없고 칼이나 야구방망이 등 연장을 사용하지 않고 

맨주먹만으로 조폭세계를 평정한 마지막 건달.


덩치도 작고 주먹도 작은 편이지만 그의 주먹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당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기절시키고, 2m가 넘는 헤비급 권투선수를 

단 한방에 무너뜨릴 정도였으니 웬만한 주먹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80년대 중반 거느린 조직원 사백명,

당시 대한민국에 2대밖에 없던 벤츠 s클래스 3억5천짜리 리무진방탄차를 타고다녀
80년대 중반 서울 전역을 장악했을 때에는 그야말로 천하가 다 그의 것이었다. 

거느린 조직원만 4백명이 넘었고, 한 건에 30억원, 요즘으로 치면 1백억원의 돈을 주무르기도 했다하루에 3천만원 정도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돈이었다. 

그때 그의 품위유지비가 한달에 3천만원이었었다고한다.


*안상민씨가 직접 쓰신글


 

말더듬이. 어릴적에 말을 심하게 더듬었어. 언어장애라고 하지? 거의 반벙어리 수준이었어. 사람들이 놀리더라고. 참을 수 없었지. 아마 그때부터 주먹을 쓴거 같아. 일종의 복수심이었지. 태권도, 유도, 레슬링, 킥복싱, 합기도 등 온갖 무술도 다 익혔어. 정말 밥먹는 시간빼고는 운동했지. 나를 지킬려고 말이야. 종로를 제패할 때 남들은 날 타고난 싸움꾼이라 말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싸움꾼이라기 보다 독종이었어.

 

반항심. 초등학교때 이미 나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어. 두세살 많은 형들도 내 상대가 안됐어. 다 한주먹에 자빠뜨렸거든. 그런데도 내 반항심은 끝이 없었어. 선생님 때문이었지. 선생님은 내가 잘못할때 마다 벌로 책읽기를 시켰어. 더듬더듬 책을 읽는데 얼마나 부끄럽겠어. 그때 느낀 수치심과 모욕감이란. 난 더 삐뚫어지기 시작했지. 그래서인지 밖에만 나가면 싸워댔어.

 

충남짱. 요즘 애들 흔히 '짱'이라는 말 쓰지? 중학교때 이미 충남 지역을 제패했어. 일종의 주먹짱이었지. 서산은 물론 천안, 온양, 예천, 홍성, 당진 등 충남일대 중학교를 장악해 버렸지. 충남에서 '잘친다'는 아이가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맞장을 떴어. 그때 주먹 맛을 알았어. 타자가 홈런칠때 그 느낌이 있지. 걸렸구나 하는 거. 아마 그 느낌일거야. 내 주먹이 상대 턱에 꽃힐 때 '딱'하는 소리가 나면 백발백중 넘어갔지. 100kg 넘는 거구도 말이야. 그렇게 충남을 완전 제패했어. 내 적수가 없었지.

 

서울입성. 중2때였어. 부모님이 날 서울로 전학시켰어. 당시 형님이 장충동에서 약국을 했는데. 형님댁에서 먹고자며 장충중학교에 들어갔지. 한데 웬걸. 여긴 진짜 내 세상이었어. 싸울 상대가 얼마나 많아. 시골 바닥하곤 다르거두만. 물론 중학생들은 내 적수가 안됐고. 고등학생 형들이랑 붙었지. 성동공고, 덕수상고, 장충고 등 그 일대 짱들하고 맞장떠서 다 이겼어. 내 소문이 처음으로 퍼지기 시작했어. 장충중학교 싸움귀신이라고. 한참 재밌었는데 부모님이 다시 서산으로 부르더라고. 거기서도 싸움질 할거면 차라리 내려오라고.

 

가출. 서울이 눈앞에 아른 거리더라고. 서산은 재미 없었어. 나보다 강한 상대가 없으니깐. 내가 싸우는 이유? 정말 단순해. 최고의 주먹이 되고 싶었거든. 난 그냥 싸우는게 좋았어. 나보다 강한 상대를 찾아 그를 눕히는게 좋았지. 한데 서산은 얼마나 심심해. 그래서 가출을 결심했지. 고등학교 2학년때야. 친구 6명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지. 돈 30만원 들고 종로 여관을 빌렸어. 서울제패의 꿈을 안고 말이야. 그때 여관비가 1200원 정도. 합숙을 하면서 몸을 만들었지. 운동은 종로 YMCA 체육관에서 했어.

 

종로3가. 당시 종로 3가는 이쁜이파 애들이 장악하고 있었지. 천궁이라는 음악다방에서 상납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도 행동에 들어갔지. 다방에서 이쁜이파 애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어. 아니나 다를까 사장에게 돈을 받더니 위에 당구장으로 향하더라고. 곧바로 쫓아갔지.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어. 그러니 상대가 되겠어. 한방에 보내 버렸지. 그리곤 이쁜이한테 돈을 받아 다시 천궁 주인에게 돌려줬어. 그렇게 종로 3가를 접수했고 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어. 상납? 난 필요없다고 했어.

 

종각. 종로 3가를 접수하고 때를 기다렸지.다음 타깃은 종각. 종로 1·2가는 돼지파 구역이었지. 당시 돼지파는 종각에 있는 파노라마 나이트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꽤 컸어. 한데 돼지파는 예상외로 싱겁게 접수됐어. 우연히 혼자서 돼지파와 마주쳤고 그 쪽에서 내게 먼저 시비를 걸더군. 날 얕잡아 본거지. 하지만 싸움은 상대가 10명이든 20명이든 상관없어. 우두머리급 두 세명만 눕히면 그걸로 끝이야. 보스가 꺾이면 밑에 부하들은 오합지졸이 되지. 그렇게 종각을 접수했어. 내 나이 스물살때 말이지. 사람들이 나를 김두한이라고 하더군.

 

맞장. 웬 김두한? 어린 나이에 맨주먹으로 종로를 장악했다고 말이야. 그리고 또하나. 오직 맨주먹으로 싸웠기 때문이지. 난 절대 연장을 안써. 아우들에게도 연장을 못쓰게 했지. 난 내 주먹이 사시미 칼보다 더 세다고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게 진정한 싸움꾼이지. 건달말이야. 대신 전쟁이 시작되면 복대는 차지. 가죽복대. 칼맞고 죽으면 안되잖아. 팔이나 다리는 상관없지만.

 

명동. 당시 무교동은 특별히 관리하는 애들이 없었어. 질 안좋은 양아치들이 여기 저기서 돈을 뜯고 다녔지. 종로를 완전히 접수한 우리는 무교동을 정리했어. 무교동을 장악하니 식구들이 40~50명 정도로 늘었어. 그리고 명동 접수에 들어갔어. 당시 명동은 신상사, 양은이파(조양은), 서방파(김태촌) 정도 있었는데. 신상사는 사보이호텔 테러로 거의 지는 별과 다름 없었지. 한편 양은이파는 조양은 선배가 구속돼 잠시 조용한 상태였어. 서방파 김태촌 선배와는 원래 친해 우리에게 우호적이었어. 그래서 우리가 명동에 들어가기도 쉬웠지. 그렇게 안토니파는 명동까지 일부 접수하며 세를 확장시켰어. 그런데 왜 안토니파냐고?


안토니파. 그건 이상하게 지어진 거야. 당시 성 뒤에다 '돈'을 붙여서 부르는게 유행이었어. 돈이 많다고 말이지. 예를들어 김돈, 박돈 그런식으로. 나보고는 '안돈'이라고 하더라. 그러다 영화 '대부'가 나왔어. 거기 나오는 마피아 이름 대부분이 '안토니오'잖아. 어느새 '안돈'이 '안토니'로 바껴 있더군. 우습지? 거창한 이유는 하나도 없어. 그냥 사람들이 나를 '안토니'라고 불렀고 그렇게 '안토니파'가 된거야

 

승승장구. 그렇게 승승장구했지. 마침 강남 붐이 일었고 우리도 강남으로 진출했어. 당시 강남에는 남서울호텔, 리버사이드, 팔레스 호텔, 삼정호텔 등 4개가 있었는데. 내가 팔레스 호텔을 장악했지. 남서울과 리버사이드는 호남쪽 식구들이 장악했고. 식구도 200명 이상으로 불어났어. 친구 6명과 서울로 올라온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안토니파가 전국구 조직으로 변해 있더군.

 

장악. 주먹들의 세계는 단순해. 패자는 말없이 물러난다. 바로 그거야. 장악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세력 다툼을 해서 주먹 강한 사람이 그 지역을 갖는거야.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는 거야. 물론 세력이 커질수록 견제도 많이 받아. 아마 전국 조폭 보스 중 대부분은 불법총기 가지고 있을거야. 테러에 대비하려고. 나도 항상 총을 머리맡에 대고 잠들었으니까. 물론 경찰서에 신고하고 다 반납했어.

 

야쿠자. 한번은 야쿠자랑 붙은적이 있어. 아마 대한민국 건달중에 야쿠자와 맞장뜬 사람은 나 밖에 없지. 아는 마담의 소개로 야쿠자인 야마구찌 구미 식구들을 만난 적이 있어. 안토니파가 잘 나갔으니 우리를 이용해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는 목적이었지. 무슨 사업? 마약을 국내에 풀자는거야. 미쳤어? 마약을 풀게. 난 단 한번도 '뽕'에 손댄적이 없어. 남들은 나를 건달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세계에서 바른길을 걸었어. 그래서 단호히 거절했지. 건방지다고 내게 시비를 거는거야. 그래서 아주 아작을 내줬지. 그리고 시비건 놈 손가락을 잘라버렸어. 다른 야쿠자가 보는 앞에서. 한데 되려 야쿠자들이 이 안상민의 강한 기백에 매료된거야.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제대로된 주먹이고 높이 평가했지.

 

배신. 정말 밤의 황제였어. 당시 내 자동차가 3대였지. 1호차가 GM 올즈모빌 방탄차였어. 우리나라에 방탄차 탄 사람은 대통령하고 나, 이렇게 둘 뿐이었거든. 2호차가 벤츠 500, 3호차가 푸조였어. 조직이 커지니 정치권에서도 손을 뻗더라. 그렇게 형님 아우하면서 연결될 때도 있어. 근데 원래 정치가들이 다 그렇지? 달면 삼키고쓰면 뱉고. 보기좋게 이용만 당했지. 그리고 구속됐어.

 

구속. 그때 사회면에 대문짝 만하게 나왔어. '방탄차 탄 조직보스 구속' 이라고. 내게 붙여진 죄목만 해도 9가지 더군. 살인교사, 특수강도, 마약, 외환관리법위반, 폭력교사, 총포, 도검류, 화약법 위반. 재판날 검사에게 말했지. "이보쇼. 이왕 하는거 한가지 더 추가해 10가지 채우쇼." 하하. 그랬더니 공갈 협박이라는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서 10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도 받았어. 황당하더군. 내 아우들은 모두 15년에서 10년 이상 받았지.

 

30억. 일단 사람은 살려야 되겠더라고. 당시 가진돈이 한 30억쯤 됐었어. 모두 풀었지. 나와 내 아우들 재판하는 데 있는 돈 다 풀었어. 그런데 세상이 참 웃기지? 사형이 결국 5년으로 깍이더라. 10가지 구형이 다 빠지면서. 우리나라 참 썩었지?

 

악? 난 말이지 사실 이 세계가 나쁜일인지 몰랐어. 내가 어디 서민을 괴롭혔나? 난 절대 나보다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어. 약자한테는 한없이 약했고 강자한테는 한없이 강했던 게 이 안상민이야. 단지 우리끼지 치고박고 싸웠을 뿐이었는데. 어느날 우리보고 사회악이라 하더라고. 하지만 정말 사회악은 정치하는 사람들 아닌가? 온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분노케 하잖아.

 

은퇴. 97년이지. 팔레스호텔에서 은퇴식을 가졌어. 은퇴식하는 보스 봤어? 하하. 사실 그냥 내 생일날 조직원들 불러놓고 이제 이 생활 그만 접겠다고 말한거야. 그간 10여년 동안 교도소를 들락 거렸지만 여전히 나는 손을 씻지 못했지. 하지만 결국 이제와 느낀건 환멸 뿐이었어. 의리는 사라진지 오래고 배신이 난무했지. 회의감이 들더라. 나는 적어도 사나이 의리 하나로 살았는데. 멋과 낭만을 알았는데. 어느새 주먹세계는 주먹보다 연장이 앞서는 피비린내 나는 곳으로 변했더군. 하지만 무엇보다 손을 씻게 된 계기는 내 사랑하는 아내 때문이야.

 

아내. 지금으로 부터 40년전. 아내를 처음 만났지. 나하고 한동네 소꼽친구야. 초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지. 그때부터 소위 내 여자로 점찍었지. 정말 예뻤어. 한데 그 예뻤던 여자가 자궁암에 걸렸어. 다 나 때문이지. 내가 맨날 속만 썩였으니까. 우리 와이프 정말 대단한 여자야. 여지껏 나랑 20년 넘게 살면서 내가 준 돈 단 한번도 받은적이 없어. 그런 돈은 싫데. 그리고 서산에서 혼자 이불가게 하면서 우리 아들 두명 다 키웠어. 그렇게 고생했던 부인이 자궁암에 걸린거야.

 

의리. 하루는 내 바지를 잡고 울더라. 이제 그만 옆에 있어 달라고. 그때 느꼈지. '내가 참 못된 남편이었구나. 나 여지껏 의리 하나만으로 살았는데. 정작 아내한테는 그 의리하나 조차도 지키지 못했구나.' 그리고 그때 아내가 자궁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어. 백약이 무효였지. 결국 손을 씻기로 했어. 아내에게는 이 '안상민'이 만큼 좋은 약이 없으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아내는 여전히 이불가게를 해. 나는 시간나는 대로 배달을 나가지. 천하의 안상민? 그게 뭐가 중요해. 내 사랑하는 여자 하나 못지킨다면 말이야


 

 

[출처]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작성자 BlackBox준

 


 

"옛날 방탄차를 타고 다녔던 그때와 소형차에 아내를 태우고 다니는 지금, 언제가 더 행복하신가요? "

 안상민씨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지금이 더 행복해. 우린 아직도 서로 얼굴보고 좋아서 웃어. 물론 그 화려했던 시절이 가끔 생각나기도 해. 내가 지금 시골에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웃는 아내를 보면 금새 잡생각이 사라지지. 천하를 버렸지만 아내를 얻었잖아."


“천하를 버렸지만 더 값진 아내사랑을 얻었으니 행복합니다”


충남 서산시내에 있는 동부시장에 들어서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게들 사이로 ‘행운이불’이라는 이불가게가 있다. ‘드르륵’ 이곳의 가게문이 열리고 중년의 사내가 이불을 한짐 어깨에 이고 나와 승용차에 싣는다. 배달준비를 하는 품이 왠지 어설퍼 보이는데, 뒤따라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낙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다녀올게”하며 사내가 차에 이불을 싣고 떠날 때까지 아낙의 얼굴엔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서로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한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이다. 이내 가게로 들어가려던 아낙이 기자에게 한마디한다.

“천하의 깡패 두목 안상민도 제 말 한마디면 꼼짝 못하니 제가 진짜 왕이지요.”


이처럼 천하가 다 그의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단 한사람 아내 배정화씨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벤츠를 끌고 동생들을 거느리고 집에 들어서면 “이 아파트엔 당신 같은 깡패는 없고 점잖은 사람들만 사는 곳이니까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세워놓고 걸어서 들어오라”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다.


결혼하기 전부터 안씨가 조폭의 보스였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텐데 “깡패 남편이 부끄러웠다”면서도 그와 결혼한 이유가 궁금했다. 안씨는 “제가 납치했어요”하며 웃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배씨를 색시로 점찍었다는 것. 말하자면 첫사랑과 결혼을 한 셈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래윗집에 사는 동네 소꿉친구였어요. 제가 의사를 하면 와이프는 간호사를 하곤 했죠.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어요. 결혼해서 지금까지 같이 사니까 벌써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온 셈이죠.”

동네 소꿉친구였지만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친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배씨의 눈에 매일 싸움질만 하는 안씨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아이가 바로 안씨였다고.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건 중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서울로 간 안씨가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왔다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배씨를 본 것이다.

“그때 딱 찍었죠. 그래서 똘마니들 시켜서 불러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이분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서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죠. 공부를 잘해서 서울여상을 나왔거든요. 지금은 제가 하도 고생을 시켜서 쭈그렁 할망구가 되었지만 그때는 서산에서 제일 예뻤어요. 그러니까 천하의 안상민이 아내로 삼으려고 한 거죠.”

배씨에게 안씨의 어디가 좋아서 만났냐고 묻자 “좋아서 만났나요. 무서워서 만났지”라고 한다. 

처음엔 만나는 게 죽기보다 싫어 피하기도 했는데 만나면 아이스크림 등 맛있는 것을 사주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하는 게 재미있어 무서우면서도 만났다며 웃었다.

“제게 관심을 계속 보이니까 기분은 좋았죠.”

조곤조곤 수줍게 말하는 모습이 꽤 마음이 여린 성격이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천하의 싸움꾼 앞에서 한번도 주눅 든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게 안씨의 이야기다.


“무서워서 만나기는커녕 저한테 막 화도 내요. 제가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하다보면 없어져요. 그냥 집에 가버리는 거죠. 그렇게 대범하니까 지금까지 나랑 살았죠. 어렸을 때는 여자인데도 따발총 가지고 놀았다니까요.”


배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산으로 돌아와 이불가게를 차렸다. 

안씨는 본격적으로 주먹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틈틈이 배씨를 찾았다. 

물론 그녀의 집에서 그를 탐탁하게 여길 리 없었다. 집안의 반대가 심하자 안씨는 80년 

배씨를 납치하다시피 하면서 억지로 결혼승낙을 받아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에는 전국에서 조폭들이 몰려왔는데,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떠난 뒤 

조폭들끼리 피로연장에서 싸움이 붙어 칼부림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 최고 조직 보스의 아내가 된 배씨였지만 그녀는 서산을 떠나지 않았고, 이불장사도 계속했다. 그리고 안씨가 가져다 주는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제가 한 열흘에 한번씩 서산에 내려와요. 그때마다 생활비를 내놓죠. 그땐 정말 아무 일을 안 해도 저절로 돈이 들어올 때였어요. 그런데 제가 돈을 주면 이분은 ‘도로 가져가라’며 집어던져요. 부정한 일을 해서 번 돈인 줄 알고 더러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고지식했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많이 속상했죠. 만약 그때 제가 준 돈을 다 받았으면 서산 제일의 갑부가 되었을 거예요.”

화가 나서 몇달씩 안 내려가기도 하고, 동생들이 주면 받을까 싶어 동생들에게 대신 전해주게 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배씨는 안씨의 돈을 한푼도 안 받고 혼자 이불가게를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친정부모와 시부모를 보살폈고, 자식들 교육을 시켰다.

“떳떳하지 않게 번 돈으로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번 돈으로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으니까요. 남편이 그러고 사니까 저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식당 젓가락에 종이 씌우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요. 이불도 꿰매고….”

그는 남편이 깡패라고 사람들로부터 자신까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남편의 돈을 거부했는지도 모른다고. 사실 안씨 입장에서는 남편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게 미안해 돈으로라도 보상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게 안상민식 사랑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배씨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원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제가 그 생활을 하는 동안 이분이 아이들을 정말 잘 키웠어요. 87년에 교도소에 들어가 92년에 출소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온통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상장투성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라고.”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함께 산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안씨가 조폭생활 20년 동안 10년이란 시간을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87년에는 살인교사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기도 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항소심에서 10년을 선고받은 후 5년을 살았다. 10년 동안 11번이나 감옥을 옮겨다녔는데 배씨는 꼬박꼬박 면회를 갔다.

“항상 그래요. 남편 잘 만나서 전국 유람 한번 잘했다고. 전국 곳곳의 교도소란 교도소는 다 다녀보았으니까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죠.”

조폭 인생을 살던 안씨가 손을 씻은 계기는 94년 배씨가 말기암 판정을 받으면서다. 우연히 ‘동생’들의 권유로 부부가 함께 종합검진을 받았다가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여지껏 고생만 시켰는데 이게 뭐냐 싶더군요. 삶이란 게 참 허망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때 이분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애들 누가 키우냐’며 우는데 그때 천하의 안상민이도 처음으로 눈물이란 걸 흘려보았어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아내만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점쟁이가 검은 물건이 안 좋다고 하자 그 즉시 집안에 있던 값비싼 수석들을 다 치워버릴 정도였다. 그런 정성 때문인지 배씨는 12시간에 걸쳐 암 덩어리를 78개나 떼어내는 대수술을 한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언제 다시 발병을 할지 몰라 3개월에 한번씩 병원에 다니며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가 저에게 병주고 약주었다고 해요. 마음고생 시켜서 병에 걸리게 해놓았는데, 이제는 제가 가장 효과 좋은 치료약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곁에 있는 것 이상 좋은 치료약은 없다고요.”

물론 조직생활을 일시에 청산할 순 없었다. 아니 주위에서 그를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다. 결국 97년 다시 감옥에 들어갔고, 99년 출소하면서 완전히 조직을 떠나 서산의 아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출소 후 청소년들을 범죄의 유혹에서 구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도 일주일에 3∼4일은 밤 10시면 집을 나서 새벽 4시까지 순찰활동을 하면서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붙잡아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설득하고 있다. “처음엔 멋있어 보이지만 결국엔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되고 결과가 비참하더라”는 그의 말에 불량 청소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들은 부모를 설득해 군대에 자원입대시켰다. 돌아와 새사람이 되라는 것. 그러길 3년여. 안씨는 이제 서산에 건달이나 조폭은 없다고 단언한다.

“한번은 폭주족 애들이 절도를 한 것 같아 붙잡으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폐차시킬 정도로 큰 사고였죠. 전신타박상을 입었는데, 그때 이분에게 엄청 혼났죠.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 그래도 제가 이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종종 아주머니들 아들 마음잡게 해줘서 고맙다며 만원짜리 지폐가 든 봉투를 살며시 내밀어. 대부분이 1~2만원이지. 하지만 그 돈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몇억 몇 십억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진정한 돈의 가치를 알았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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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는 지금 제2의 신혼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같이 산에도 가고 대화도 하면서 부부의 정인 무엇인지 흠뻑 느끼고 있다. 전에는 아무리 비싼 옷을 사줘도 안 입고 버리던 아내가 이제는 싸구려 옷을 사줘도 입이 함박만해진다고 한다. 서산에 정착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믿지 않던 아내도 건실하게 생활하는 그를 보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안씨가 시장에 나와 이불을 배달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전에는 동생들에게 위엄을 갖추기 위해 웃질 않았어요. 자연 아내 앞에서도 웃는 법이 없었죠. 그런데 이젠 웃어요.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된 거죠. 물론 지금도 화려한 시절에 대한 유혹이 끊이질 않죠. 처음엔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젠 흔들리지 않아요. 아내를 위해 아내가 하자는 대로 살 겁니다. 비록 천하를 잃었지만 대신 아내와 가족의 사랑을 얻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어요.”

그의 말에 힘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배씨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말을 할 때 늘 서로 높임말을 하는 이 부부를 보며 새삼 부부의 사랑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불가게를 나온 뒤 안 씨가 기자를 안내한 곳은 어느 냉면집이었다. 야외 공터에 간이 테이블을 놓고 옹기종기 모여 먹는 곳이었는데 고급 일식집이나 한정식집에 익숙할 법한 전직 보스는 음식점 사장이라도 되는 양 맛 자랑에 침이 마른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안 씨는 주방으로 슬쩍 가더니 냉면 1인분을 포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멋쩍은 듯 말하며 웃는다. "우리 집사람 갖다 주려구요." 

얼음 육수가 녹기 전에 가야한다며 서둘러 모닝에 시동을 거는 안 씨의 표정에 뒤늦게 찾은 '보통사람의 행복'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도 서산 시장의 이불가게를 찾아가면 안상민씨를 만날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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