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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교육을 받는 우리에게 한가지 받아들일 수 없는 유물들이 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유물, 즉 오파츠(OOPARTS-out of place artifacts)가 그것이며
때때로 이러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유물들이 우리의 질서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파츠는 과연 신의 지문일까요, 아니면 초고대문명의 증거일까요?
혹시 둘 모두가 아닌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최초의 인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호기심에 졌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화석이 된다, 해와 달까지도
베링거의 화석
18세기까지 매우 대중적으로 퍼져 있던 비스 플라스티카라는 학설이 있다.
이 학설은 기원후 1000년, 페르시아에서 살던 아비센나라는 아랍의 유명한 의사이자
철학자가 창시한 학설로 당시 존재했던 모든 생물이 조형적 형태로 돌에 각인된다는 이론이다.
한편, 이 이론을 동료 교수들로부터의 강력한 반론에도 개의치 않고 지지했던 뷔르츠부르크의
후작 주교의 주치의였던 요한네스 바르톨로메우스 아담 베링거 교수는 뷔르츠부르크 근방에서
발굴작업을 진행하였고 1725년을 기점으로 그의 발굴품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의 세명의 학생들이 뷔르츠부르크 근처 아이벨슈타트 산에서 수많은 발굴품을 가져다주었으며
베링거 교수 역시 해당 지역에서 직접 발굴작업으로 하며 수집품의 수가 2,000점 이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 발굴품의 대부분은 동식물이 양각 형태로 그려진 돌이었으며 꽃에 앉아 있는 벌, 거미줄에 있는 거미,
개구리, 새, 달팽이를 비롯한 타 지역의 모든 동물과 심지어 해와 달, 별과 반짝이는 꼬리가 달린 혜성과
같은 형태까지 발견되며 1726년 베링거 교수가 이에 대한 보고를 담은 책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출판 직후 대학 측에 자신의 책을 소개하고 동료 교수들과 이와 관련한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베링거는 바로 전날 한 학생으로부터 베링거의 이름이 새겨진 발굴품을 건네받으며 내막을 알게 된다.
평소 베링거 교수를 매우 거만하다는 이유로 골탕먹이기 위해 동료 교수인 수학자 이그나츠 로데릭과
사서 추밀 고문관인 게오르크 폰 에크하르트의 사주를 받은 세명의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화석을
건네줌과 함께 평소 베링거 교수가 발굴작업을 위해 정기적으로 찾는 장소에 갖다놓았던 것이다.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된 베링거 교수는 즉각 이들을 고발함과 동시에 자신이
출판한 책을 전부 회수하기에 이르나 그의 사후 1767년 이 책의 신판이 발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동반하며 결국 이러한 사실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또한, 이러한 유명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 측은 베링거 교수의 수집품을 전시해 큰 인기를 끌었고
이외에도 마인프랭키셴 박물관, 밤베르크와 에를랑켄, 슐로이징겐, 발덴부르크시의 박물관과 연구소에도
견본품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뮌헨, 예나, 할렘, 옥스퍼드, 런던에서도 개개의 소장품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한 여인에게서 이러한 가짜 화석의 표본 세개를 받게 손에 넣게 된 시인 에두아르트
뫼리케는 1862년 11월 28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영수증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이로써 서명인은 의무적으로 바우어 양이 큐레이터로부터 간신히 얻은 베링거씨의
진열장에서 나온 세개의 화석인 다지류 동물의 화석, 물떼새 화석, 또 아직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은 매우 희귀한 동물의 화석(머리와 꼬리가 까마귀처럼 생긴)이 정말로
진짜임을 입증합니다. 그 대가로 어여쁜 그 아가씨로부터 세번의 키스를 보상받았으니
내가 이자를 쳐서 반드시 속이려고 함이 없이 입으로 되갚아주리라"
공룡이 살던 시대에 지금과 같은 문명이 존재했었다
카브레라 스톤(혹은 이카의 돌)
1966년, 페루 남서쪽의 이카에 살던 카브레라 박사는 한 가난한 인디언으로부터 기묘한 돌을 선물 받는다.
이 돌은 화석으로 거기엔 수백만년 전에 멸종된 어류가 새겨져 있었고,
이에 카브레라 박사는 그 인디언에게 이러한 돌을 더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후 나스카 평원의 한 동굴과 리오이카 강 연안에서 얻은 많은 돌에는 공룡을 쫓거나
공룡 위에 타고 있는 모습, 망원경과 비슷한 형상물로 하늘을 관찰하는 인간의 모습,
심장수술과 제왕절개 수술 장면 모습 등과 같은 믿을 수 없는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고
특히 공룡을 묘사한 그림은 매우 자세하여 어떤 공룡을 표현한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이 오파츠는 공룡이 존재했던 아주 먼 옛날 지금과 같이 발달한 고대문명이
있었다는 인류의 역사를 한꺼번에 뒤집는 증거로 간주되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이러한 초고대문명의 증거물을 무려 1만 1천여개나 수집한 카브레라 박사는
사설 박물관 개장과 함께 이카문화연구소 소장에 임명되며 이카 대학의 연구과장으로
발령받음과 동시에 그의 박물관은 주요 관광목록에 오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오파츠엔 몇 가지 의혹이 존재했는데 비록 돌의 연대가 고대의 것임은 납득이
가나 카브레라 박사가 돌들의 발견 장소를 밝히지 않아 지층의 연대 측정을 통한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 1만여점이 넘는 유물이 단 한 번도 땅속에서 발굴된 적 없이 인디언들이
발굴했다는 카브레라 박사의 주장, 때문에 정상적인 고고학에서의 지층 조사를 통한 연대 산출이
아닌 돌의 표면을 덮고 있는 산화층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분석 방법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하는데 몇몇 작업을 통해 연대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지층을 통한 연대 산출로는 해당 지형이 고대의 것이라 해도 그곳에 묻혀 있는 것이
반드시 그 시대의 것이 아닌 현대의 것이 흘러들어 갈 가능성도 있으므로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탄소연대 측정법 등 여러 가지 측정법을 동원해 산출해야만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지만 거진 모든 오파츠들이 대부분 한가지 측정법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혹에 처음 그의 발견을 초고대 문명의 증거라 치켜세웠던 가장 성공한
미스터리 팔이 작가 에리히 폰 다니켄조차 이후 카브레라 박사의 이론이 의심되며
그의 화석 중 일부는 조작물이라는 주장을 피력하게 되었다.
이에 1977년 영국의 BBC에선 '고대 우주인 비행사의 실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이카의 돌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던 중 바실리오 오쿠아스라는 한 인디언을 찾아내었고, 그를 통해
이카의 돌이 구두약과 당나귀, 가축의 배설물과 함께 구워져 오래된 외관으로 보이게 탈바꿈되었으며
신문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해 치과에서 사용하는 드릴로 그림들을 새겨넣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현지 경찰은 그가 불법 유물거래 죄로 체포되면서 구속을 모면하기 위해 자기 변명식으로
진술한 것이라는 견해는 내놓았고 BBC는 좀 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이카의 돌을 구해 런던의
지질과학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조각의 단면이 지나치게 샤프하고 마모가 없으며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착색작업의 자취가 발견되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라는 감정결과를 얻게 된다.
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이루어진 'Hipergea'라는 연구 그룹 창설자의 감정에서도
런던 지질학 연구소와 같은 견해를 내며 최근 만들어진 위조품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외에도 당시의 잘못된 공룡상의 영향을 받은 듯 티라노사우루스 등이 직립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조작의 증거로 꼽혔는데 이는 비교적 최근 들어
티라노사우르스 등이 지면과 수평자세로 활동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카브레라 박사의 새로운 인류가설을 지지하던 이들로부터 옹호를 받던
이카의 돌은 1997년 독일의 TV 리포터 베르트 비덴펠트에 의해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한편, 베르트 비덴펠트가 카브레라 박사의 사설 박물관에 대한 영화를 찍기 위해 연락을
취해왔고 이러한 제안에 몹시 기뻐한 카브레라 박사가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던 이카의
돌들을 보관하고 있는 방을 오프더 레코드 조건으로 보여주었을 때 몰래 숨겨진 카메라로
녹화한 장면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베르트 비덴펠트가 카브레라 박사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처음 이카의 돌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인디언 바실리오 오쿠아스의 조카를 찾아
출처를 묻던 중 조카로부터 어느 날 카브레라 박사가 자신이 스케치한 그림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 돌에 새겨달라는 부탁을 한 것을 시작으로 몇 년 동안 온 가족과
친구들이 이러한 작업에 매달렸고 유명세를 얻은 카브레라 박사가 여전히 보잘 것
없는 보수를 지불하자 불만을 품고 폭로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추가로 그 조카는 이카의 돌에 새겨진 그림들을 스케치한 스케치북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애초 이카의 돌 공개 당시 조각기술 전문가로부터 돌의 특성을 무시한 채 그림이
새겨진 점으로 미루어 이미 밑그림이 완성된 상태에서 새겨진 것이라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카의 돌은 카브레라 박사(사실 그는 고고학자로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이카 병원의
주임의사로 일했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카 주민들로부터 자기 마을 출신의 유명한
의사가 사기꾼과 짜고서 이러한 일을 벌일 리가 없다는 변호를 받게 된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의 유보적인 태도와
법원으로부터 어떠한 법적 절차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강력히 부인하는 창조론자들로부터도 그의 발견물이
지금까지의 인류학과 진화생물학 연구결과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모든 동식물처럼 인간 역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증거로 꼽히고 있다.
15억년 전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던 중 부품을 흘리고 갔다
15억년 전 러시아의 금속 볼트
1997년 러시아의 브랸스크에서 15억년 전에 생성된 바위 속에 금속 볼트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에 모스크바 항공 대학의 교수이자 외계인 연구 학자로 '알렌센카'를 외계인이라고
주장했던 바딤 체르노브로프는 15억년 전 지구를 방문했던 외계인의 우주선에서 어떠한 원인으로
고장이나 폭발하게 되면서 튄 부품 일부라고 주장했으나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에서 딸려나온
보잘것없는 금속 부품이라기보다는 해당 오파츠가 발견된 곳에 폐쇄되었던 옛 소련 시대의 공장에서
흘러나온 현대의 쓰레기들이 오래된 지층에 흘러들었을 뿐이며 X선 감정 결과 이외에 비슷한
금속 볼트가 10개 정도 더 묻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수억년 전, 인류는 지금보다 뛰어난 하이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철제 망치
1934년 6월 미국 텍사스주 런던 부근을 산책하던 칸 부부는 풍화된 바위 덩어리에서 목제 모양과
같은 것을 발견하여 바위를 깨뜨린 끝에 미국 최고의 오파츠를 발굴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해당 오파츠는 연대 측정 결과 백악기의 사암층에서 출토된 것을 미루어 6500만년 전-1억 460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며(4.5억년 전의 오르도비스기 지층으로부터 출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연하게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시대에 인간이 사용하는 철제 망치가 존재했다는
것은 화제를 넘어 큰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고 추가로 1989년 망치의 주철부분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철 96.6%, 염소 2.6%, 유황 0.74%, 규소 0.06%라고 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왜냐하면 현대의 테크놀로지로도 염소를 포함한 합금을 만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억년도 전에 지금의 과학수준을 뛰어넘는 합금물이 존재했다는 분석결과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어떠한 종교적인 신념을 심어주기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을 예민하게 건드는 해당 오파츠에 대한 반론 역시 강하게 제기되었는데
먼저 X선 단층 검사 결과에서 단순한 부식으로 인해 염화철이나 유화철이 된 부분이 검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망치의 몸통부분이 화석화되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사실은 몸통 부분이
채 썩지도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며 만약 나무로 된 몸통 부분이 화석화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면 주철부분에서 철 96.6%의 비율이 변화하지 않는 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망치의 몸통 부분을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한 적이 없으며 해당 오파츠의 철제 망치가
발견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시대에 사용되던 전형적인 망치의 디자인이라는 점이 현재의 과학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과학력을 보유한 문명에서 제작된 것과는 멀어 보인다는 의혹으로 인해 탄광 노동자가
흘린 철제 망치가 진흙과 흙 안에서 굳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흥미롭게도 해당 오파츠를 수억년 전 철제 망치의 화석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전시를 한
'Creation Evidence Museum'은 신이 세계를 낳았다고 하는 창조론을 베이스로 하는 전시 시설이다.
50만년 전, 이미 인류는 전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코소의 점화 플러그
1961년 2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란차 부근의 코소 산맥에서 당시 보석과 귀금속류를
취급하는 기프트 숍의 공동경영자였던 Wallace Lane, Virginia Maxey, Mike Mikesell은
희귀한 돌을 수집하던 중 호수 가까운 봉우리의 정상 부근에서 문제의 오파츠를 발견한다.
다음날, 마이크는 이 돌의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려고 다이아몬드 톱으로 두 동강을 내자
그곳엔 놀랍게도 세라믹으로 되어 있는 듯한 직경 19밀리 정도의 기계 일부가 화석화 되어 있었다.
이후 X선 사진촬영으로 해당 오파츠가 점화 플러그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지질학자가
연대감정을 실시한 결과 무려 50만년 전의 것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한편, 1969년 이후 해당 오파츠의 행방과 본격적인 조사가 발견자들에 의해 거부되어오다
2000년 6월 미국의 회의주의 단체 'Pacific Northwest Skeptics'에 의해 그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
이들은 코소의 점화 플러그 X선 사진을 미국 점화 플러그 컬렉터 협회 회장, 부회장,
점화 플러그 컬렉터, 그리고 점화 플러그 사립 박물관 관장에게 감정을 부탁한 끝에
해당 오파츠가 1920년대 미국의 챔피언사에서 만들어진 점화 플러그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추가로 지질학자의 연대감정에서 50만년 전의 유물이라는 결과를 받았다는 '전설'은 발견자들의
주장일 뿐이며 사실 해당 오파츠가 진흙이 붙어 굳어진 90여년 전의 점화 플러그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당 오파츠는 학술적인 조사를 받지 않은 채 1963년 박물관에서 3개월간 전시되어 오다
미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인수와 관련한 검토가 이루어졌지만
소유자가 2만 5천달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에 없던 얘기로 되고 말았다.
현재 이 오파츠는 1920년대 코소 산맥에서 채광 작업을 하고 있던 차량에서 떨어진 점화 플러그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고대의 이집트는 헬리콥터, 전차, 전투기를 보유했었다
아비도스 신전의 헬리콥터
1997년, 블루스 로레스라는 연구가에 의해 아비도스 신전에서 발견된
이 기원전 1300년경의 오파츠는 너무나도 명확한 표현에 그 할 말을 잃게 하였다.
1999년 3월 2일, 이에 악명높은 FOX TV는 'Opening the Lost Tombs: Live from Egypt'라는
제목의 생방송을 통해 해당 오파츠를 소개하며 고대 이집트에 헬리콥터, 탱크, 전투기
(혹은 UFO)가 존재했다는 가설이 세계 전역에 퍼지게 된다.
그러나 해당 오파츠는 이러한 가설이 체 불을 지피기도 전에 시시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러한 현대의 모양들이 사실은 이집트 고고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라면 우리처럼 그림이 아닌 상형문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 세티 1세의 상징을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였던 람세스 2세의
상징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전의 문자와 새로 수정되는 문자가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생긴
일종의 착시현상으로, 본래 '누가 다섯명의 궁수를 물리쳤는가'라는 글이 '누가 이집트를 보호하고
다른 나라를 정복했는가' 라는 내용으로 수정되는 과정에서 생긴 일대 해프닝인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로망을 배제한 채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러한 고대의 비행체들 존재에 대해선 어째서 비행체의
표현물 외에 활주로나 연료, 기체를 만들 공장, 비행체보다 단순한 여러 기계들이 발견되지 않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으며 덧붙여 이집트나 콜롬비아, 나스카와 같은 곳에 정말로 고대에 비행체 정도
되는 기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세계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소박한 의문이 남게 된다.
기원전 2000-500년에 일본엔 차광기를 쓴 우주 비행사가 있었다
차광기를 쓴 토우
일본의 아오모리현에서 발굴된 이 유적은 오파츠 마니아들을 통해 NASA의 우주비행사와 소련의
우주 비행사가 우주 공간에서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차광기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주장과 함께 고대 일본에 존재했던 우주비행사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해당 토우가 유방, 배, 엉덩이가
강조된 번식과 풍요를 기원하여 만들어진 여성으로 당시 주술에 사용되던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전 200년 무렵의 글라이더
고대 이집트의 글라이더
1898년 발굴된 기원전 200년 무렵의 전체길이 14cm의 이 목제물은 고대의 비행기라는
소개로 특별전시회가 개최되며 해당 전시 케이스 앞이 대성황을 이루게 되며
NASA 직원이 새로 계획하고 있던 항공기와 유사성이 있다든지 실제 비행 테스트 결과
현재의 글라이더와 같이 하늘 높이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는 식의 말들이 뒤따름과 함께
가장 성공한 미스터리 팔이 작가 에리히 폰 다니켄에 의해서도 고대의 비행기로
소개되며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뻔한 공예품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공예품을 비행기라고 최초로 주장한 카릴 박사라는 사람도 사실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닌 내과의로 평소 이집트 고고학과 비행기의 모형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마니아로 밝혀지는 촌극이 벌어지고 만다.
또한, 사실 이 오파츠는 기원전 200년 전후 프트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것이므로 실상 고대의 이집트라고 표현하기엔 민망한 것이 사실이다.
두려울 정도로 완벽한 원형의 모습을 한 돌
코스타리카의 완전한 석구
발견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200개 이상이 발견되었고 직경 2cm에서부터 2m를 넘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돌이 존재하며 가장 큰 것은 중량이 약 25톤에 달하고 있다.
해당 오파츠는 그 제작연도나 목적이 불명이나 발견되었을 당시 주변에 있던 옛 건축의
잔존물로 추정한 결과 서기 300-800년 해당 지역에서 번성했던 석기 문화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 구 모양의 돌은 미국 하버드 대학 연구원 사뮤엘 로스 랩 박사에 의해 여러 가지
각도로부터 원주나 직경을 측정해도 최대 오차가 0.2퍼센트이며 직경이 2.0066m로 mm 이하
단위까지 동일한 크기를 지닌 2개의 돌이 발견되었다는 연구보고와 함께 소개되며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제작이 불가능한 완전한 원형의 돌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특히 이 돌이 화강섬록악으로 이러한 원형의 모양을 만들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되어왔지만 2003년 3월 9일 방영된 일본 니혼 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특명 리서치200X'를 통해 의뢰를 받은 일본의 석재 가공업자가 당시 사용되던
도구와 방식으로 같은 재료인 화강섬록악으로 제작을 시도한 결과 시간만 들이면
완전한 구에 가까운 돌을 수작업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실험에서 돌도끼와 석상을 가공할 때와 동일한 방법으만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게다가 빈틈없는 오차와 관련해서도 실제로는 그러한 계측 결과가 없었으며
대부분 직경이 5cm 이상씩 다르며 표면이 원본상태가 아닌 것들도 있어
실질적으론 정확한 계측 결과를 산출해낼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이 오파츠는 현재 도굴꾼이나 컬렉터들의 피해를 피하고자 법률로
매매가 금지된 채 대다수가 코스타리카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이 오파츠의 제작목적에 대해선 석구의 배치에 일정한 규칙성을 근거로
별자리 등 천체를 본뜨고 있다는 설과 당시 석기 문화의 지배자 계급 분묘로부터
미니 사이즈의 석구가 출토된 점과 신전 부근에 대형 석구들이 줄지어 있던 것을
근거로 어떠한 신성한 숭배물의 대상으로서 제작된 것이라는 가설 등이 있다.
최강의 오파츠
피리 레이스의 지도
몇 안 되는 명백한 오파츠이자 최강의 오파츠로 통하던 이 지도는 남극의 존재가 확인된 1819년,
그 두꺼운 얼음 아래 해안선과 대지 일부가 밝혀진 1949년의 상식을 뛰어넘으며 1929년 등장하게 된다.
151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죽에 그려진 이 지도는 1929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토카피 박물관에서 발견되었으며 제작자는 터키의 제독인 피리 레이스 이븐 하지 메무드였다.
그의 이름을 딴 피리 레이스의 지도 여백엔 20여개의 고지도와 8장의 마파문디스
(알렉산드로스대왕 시대에 제작된 세계 지도)를 이용해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금세기에 이 정도의 지도를 소유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적혀 있었다.
그의 호언장담대로 대부분 지형이 위도와 경도가 부로가 0.5도 이내에서
실재의 위차와 일치하는 믿기 어려운 정확성을 보여주었으며 충격적이게도
지도 남단에 1949년 스웨덴, 영국, 노르웨이 합동 남극 조사대가 지진 탐사를
통해 발표한 남극의 해안선과 놀랄 만큼 일치하는 해안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에 가장 성공한 미스터리 팔이 작가 에리히 폰 다니켄은 '절대적으로 정확한
이 지도는 하늘로부터 최신 기술을 빌려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해당 지도를 소개했고, 베스트 셀러 '신들의 지문'을 집필한 그레이엄 헨콕은
해당 지도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지 않으며 학자들 역시
착실한 논의를 하지 않은 채 직면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 유명한 오파츠 피리 레이스의 지도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있는데 사실 해당
지도는 오늘날의 모로코에서 코트디부아르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일부와 남미 전체를 나타낸
대성양의 지도이나 아메리카, 유럽 일부, 아프리카 서부 등이 실제 지형과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아마존의 경우 지도에 두번이나 나와 있는가 하면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등
고대 해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조각조각 붙여 만든 탓에 척도가 일정하지 않고 다소 난잡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우호적인 이들에 의해 남극이 정확히 그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남극대륙이라고 주장되는 곳이 남미와 이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유행하던 미지의 남방대륙-하부에 상세히 설명-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현실성 있으며 가장 확실시되는 것은 남극대륙이 아닌 남미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한, 비교적 최근의 과학탐사를 통해 빙하 아래에 있는 남극 대륙의 실제 형태가
얼음을 들어낼 경우 현재의 지형과 매우 달라진다는 사실 외에도 지금껏 아틀란티스가
상상의 산물이 아닌 고대 남극 대륙에 실제 존재했으며 그 찬란한 과학력으로 종말을 피해
이집트 등으로 이주해 피라미드와 같은 세계 불가사의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해오던
호사가들에게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는데 바로 남극 대륙이 기원전 1만 2천여년
전에는 빙하에 덮여 있었지만 그 뒤 점진적으로 빙하가 줄어들었다는 그들의 전제 조건이
빙하도 강처럼 미세한 토양층을 퇴적시킬 수 있으며 남극 대륙이 최근 역사에서 빙하가 없던
시대를 거쳤다고 볼 수 없음과 함께 여러 층의 빙하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라 남극 대륙이
최소한 10만년 이상 빙하에 덮여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피리 레이스의 지도 외에도 남극발견 전에 지도에 표시한 오파츠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지도(1531년 작성)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서
명백하게 남극으로 보이는 것이 표기되어 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사실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한 것으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가 본격적으로 탐사 되기 이전에는 미지의 남방 대륙으로 사람들에게
상상되어 지구 전체의 디자인적인 밸런스를 통해 북반구의 육지에 비견되는
또 다른 육지가 남반구에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되어 대항해 시대까지
이러한 생각이 계승된 끝에 여러 지도에 마치 우리가 볼 때 남극으로
생각할 수 있는 미지의 남방 대륙인 호주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피리 레이스 지도의 경우 제작 시기인 1513년엔 이미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도달로 인해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선 조사가 충분히 진행되었으며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안데스산맥의 전형적인
동물 라마가 그려져 있는 것도 사실은 남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던 라마의 조상 구아나코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류는 기원전 이미 전지를 사용했다
바그다드의 전지
1932년(혹은 1936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발견된 이 오파츠는 1938년
이라크 국립 박물관의 독일 고고학자 쾨니히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후 구운 점토 단지 안에 철로 만든 가느다란 축이 있고 그 주위로 납땜한 듯한
얇은 동판과 녹슨 철 막대가 들어 있는 이 오파츠는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1964년 7월호에 소개된 이후 1978년 서독의 한 박물관에 기원전 238-226년 무렵
파르티아 시대의 전지로 추정되는 기구로 전시되며 세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특히 전지 메이커인 보쉬사의 복원 실험에서 전해액으로 식초와 와인을 이용한 결과
전압 0.9-2볼트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전해액에 포도 주스를 이용한 실험에서는
시안화 금 용액에 담근 은제품을 몇시간이고 금도긍 가공시키는 데 성공시키며 해당
오파츠 근처에서 출토된 여러 도금제품들과 고대 이집트에서 발굴된 수은 아말감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얇은 금도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고대에 이미 기초적인
전지상식이 있었다는 가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해당 오파츠를 파르티아 시대의 것으로 세상에
알린 케니히가 사실은 고고학자가 아닌 화가였던 점과 이후 조사에서 실제 제조시기가 기원후
3세기에서 7세기 사산 왕조 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점, 그리고 해당 오파츠가 전지가 아닌 종교적인
기도문을 적은 파피루스를 넣어 매장하는 일종의 단지이며 단지 녹슨 철 막대는 파피루스의
고정봉이며 주위로 납땜한 듯한 얇은 동판은 금속제의 보호 용기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단지 안에서 파피루스의 섬유가 확인되며 파피루스의 부패를 막기 위한 철제의
고정봉으로 인해 우연히 전지와 닮은 구조가 되었을 뿐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컴퓨터가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컴퓨터, 안티키테라 기계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섬 앞바다에 침몰한 로마시대의 난파선에서 발굴된
기원전 150-1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오파츠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믿음직스럽기에 가장 충격적인 '진짜' 오파츠 중 하나이다.
당초 가로 31.5cm, 세로 19cm, 두께 10cm인 나무상자에 들어 있었으며 37개의 청동기어로
이루어졌고 시계 모양으로 된 앞과 뒤 2개의 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던 이 오파츠는
손으로 크랭크를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복원과 함께
최초이자 최고의 복잡한 과학 계산기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기계 제작이 워낙 완벽하여
고대의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마지막꺼만 반론이없군여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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