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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의 모습
콜로세움은 그 앞에 세워진 청동상, 즉 콜로수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로마는 처음에는 부족국가, 도시국가 형태로 출발했었는데.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클라우디우스, 율리우스 등등 유력한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근방의 크고작은 종족, 부족들을 복속시키거나 통합하여
점점 커다란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른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로마 또한 왕국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왕정은 곧 무너지고 민주정부로서 발전하였다.
허나 국가가 커질수록, 그리고 영토와 민족이 늘어날수록
고대사회에서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어서
결국 로마는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대격변의 시대를 선도하고 이끌어낸 인물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그 유명한 시저 (영문식 표기)에 대해서
한번 글을 써보겠다.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로마인 이야기'와
에드워드 기번의 책, 그리고 미드 ROME을 참고
카이사르가 태어날 당시 로마의 상태는 크게 격동하는 시대였는데.
로마는 특이하게도 민주정의 형태로서 커다란 고대국가를 이뤄내었다.
상류층, 귀족층을 대변하는 원로원과,
하류층, 일반국민들의 뜻을 대표하는 민회가 있었슴.
원로원의 모습.
주로 사용되던 포룸이나 공공건물 등에서 개최되었슴.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등등 유력한 가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 등등이 모여서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건 민회의 모습.
많은 로마시민들이 모여 원로원의 정책을 견제하였슴.
원로원은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그들을 지도자로 하였고,
민회는 호민관을 뽑아 그들을 대표로 세웠었다.
로마가 그리스, 카르타고 등등 외부의 강력한 적이나 라이벌을 상대할 때,
원로원과 민회는 일치단결하여 어려움을 이겨내었다.
하지만 모든 적을 제거하고 지중해 세계의 절대강자가 되고 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내부의 갈등이 시작.
그 와중에 호민관인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하다 암살당하는 등,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만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민중파의 지도자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어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원로원파를 이끄는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서 결국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남.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흉상.
카이사르는 이 마리우스의 조카.
마리우스는 잔뼈굵은 장군답게 로마를 먹고 민중파가 먼저 권력을 장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우스는 어이없게 병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 때 로마를 비우고 다른 지방에 가 있었던 술라가 소식을 듣고 반격해오지.
마리우스가 살아 있었다면 호각이었겠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는 상태.
명장인 술라의 손에 민중파는 모조리 당하고 로마는 다시 원로원파의 세상이 되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모습.
군사적, 정치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다.
술라는 전쟁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인간이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국가 비상사태에만 임시로 발동할 수 있는 독재관에 취임한 술라는
원로원파가 주도하는 로마를 만들기 위해서 위험하다 싶은 인물들을
모조리 암살하거나 추방하기 시작함.
이 당시 카이사르는 10대 청소년.
민중파의 거목이었던 마리우스의 친척이긴 했지만,
위험인물로는 분류되지 않은 데데가 명문가인 율리우스 가문의 청년이다 보니
술라도 이런 어린애는 죽이고 싶지 않았다.
술라는 카이사르가 아내와 이혼한다면 용서해 주겠다고 함.
카이사르의 마누라는 민중파 인물의 딸이었기때문에.
허나 꼬맹이 카이사르는 단박에 이를 거절해 버린다.
그리고 분노한 술라가 보낸 암살자를 피해서 로마를 탈출하고 방랑을 시작하게 됨.
그리스 근방에서 해적들에게 붙잡히자 자신의 몸값이 싸다면서 금액을 확 올려버리더니,
나중에는 군사를 모아 그 해적들을 몽땅 토벌 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영웅의 떡잎을 보이고 있었다.
기원전 78년에 술라가 죽음으로서, 억눌려 있던 민중파는 간신히 숨통을 틔게 된다.
허나 술라가 민중파를 워낙 철저히 밟아놓은 지라 로마는 원로원파의 손아귀에 있었어.
이때 카이사르는 로마로 복귀한다.
명문가 율리우스 가문을 이끌게 된 카이사르는
제사장에 취임하고 원로원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함.
그리고 타고난 매력과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 그리고 강려크한 말빨로
조금씩 세력을 추스르는 민중파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미남은 아니었지만 훤칠하고 매력있는 훈남 계열이라 여자도 깨나 많이 후리고 다녔다고..)
허나 로마사회는 원로원파에 의해 꽉 잡혀 있는 상황.
젊은 카이사르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
이때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다.
바로 그 유명한 삼두정치(三頭政治).
당시 로마 사회에는 카이사르 외에도 몇몇 유명인이 있었다.
유명한 변호사이자 오늘날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 키케로.
로마의 최대 강적인 카르타고의 목을 딴 카토의 자손인 소(小) 카토.
혈기넘치는 젊은 층을 이끌다가 반란으로 토벌당한 카틸리나 등등.
키케로의 모습.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굉장히 유명한 변호사이자 문학가.
소(小) 카토.
증조할아버지인 카토와 구분하여 대,소 로 구분.
대 카토는 로마의 최대 숙적인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장군이었고,
그 자손인 카토는 청렴결백의 대명사였다.
다만 상대가 유머와 말빨의 끝판왕인 카이사르인지라....
회의장에서 자주 조롱당하고 탈탈 털리는 안습의 사나이 ㅠㅠ
그림 맨 오른쪽의 왕따가 바로 카틸리나다.
민중파 계열의 사나이지만, 카이사르와는 달리 민중파의 지지를 받지 못함.
원로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특히 위 그림은 회의장 중간의 키케로가 카틸리나를 ㅈㄴ 까는 장면이다.
카틸리나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과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조리 쥭음...
허나 카이사르가 주목한 건 다른 아웃사이더 들이었는데.
바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마르쿠스 크라수스였었다.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 술라가 죽은 뒤 로마 최고의 장군.
특히 그리스와 지중해 일대를 못살게 굴던 해적들을 모조리 바닷속에 처넣어 버리고
로마사회 최고의 영광인 개선식을 두번이나 거행한 쟁쟁한 사람이었다.
폼페이우스의 함대.
돛에 그려진 S.P.Q.R.이란 건 로마의 주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당시는 화포도 없었고 화살정도가 전부였는데.
노를 저어 배를 들이받은 뒤 건너가서 칼전을 벌이는 게 기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전만이 아니라 아예 육지의 해적소굴까지 모조리 정리해 버림.
이 짤은 개선식의 모습.
군단을 이끌고 로마 시내를 행진하는것이다.
개선장군은 저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였고, 그 뒤에 휘하 군단병들이 행진하였다고 함.
폼페이우스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고 하면,
위대한 자라는 의미인 마그누스 라는 호칭을 스스로 이름으로 붙일 정도.
허나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되자 원로원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서,
졸지에 아싸가 되어버렸다.
이건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모습.
스파르타쿠스의 난(폭동)을 진압했었고, 로마의 재계를 주름잡는 갑부였었다.
특히 젊은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이리저리 일을 벌이면서
크라수스에게 무지막지한 돈을 빌렸는데.
(재미있는 점은 빌린 돈이 하도 많다보니 크라수스가 카이사르를 돕는 지경이 된다.
카이사르가 망하면 투자한 돈도 싹 날아가는 셈......)
이 둘은 로마사회를 주름잡을 수 있는 세력인데도 불구하고,
원로원이 심하게 견제하는 통에 아싸가 되어버린 상태.
카이사르의 제안을 받고 이 세명은 삼두정치를 구성해서
로마 전체를 자기들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카이사르의 세력은 여전히 빈약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 크라수스는 경제적으로 커다란 세력이 있었지만,
이에 비하면 카이사르는 아직 형편없는 세력이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새로운 땅으로 눈을 돌린다.
바로 로마 북부의 갈리아 지방. 바로 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독일 서부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다.
위 짤은 로마제국의 최대 영역.
붉은 동그라미 안의 갈리아 지역이 바로 카이사르가 정복한 곳.
로마제국은 갈리아를 바탕으로 잉글랜드와 게르마니아 땅까지 뻗어나게게 됨.
당시 로마제국은 성장이 멈추고 서서히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인 업적이 필요했고,
동시에 갈리아 지방이 다시금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리라 예측하고는
여기를 로마의 손에 넣기 위해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건 켈트족이라는 민족이었는데.
이 켈트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유명한 젊은이가 수많은 군사를 모아 저항을 주도함.
게다가 한때 카이사르를 몰아붙이기까지 했었다.
결국 켈트족과 로마군은 알레시아라는 곳에서 최후의 승부를 벌이게됨
알레시아 전투의 모습.
가운데 언덕은 갈리아군.
그 밑의 포위망은 로마군.
그 밖의 포위망은 갈리아군.
영화에서는 주로 붉은 옷으로 나오는데
그건 영화의 시각적 효과 때문임. 실제로 붉은 옷은 사령관급만이 입을 수 있는 귀한 옷이었다.
알레시아 공방전은 대단히 특이한 전투였는데.
카이사르는 가운데 언덕에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군대를 몰아넣고 포위하였고,
동시에 켈트족 지원군이 카이사르군을 포위하는형세.
한마디로 카이사르는 포위하고는 포위당한 것이다.
안팎으로 둘러싸인 꼴.
병법에서는 절대로 금지해야 하는 경우지만
카이사르는 여기서 멋지게 승리함으로서 결국 켈트족을 제압하게 된다.
백마를 탄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군 사령관의 망토인 붉은망토를 걸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모습.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켈트족은 결국 카이사르 손에 모조리 당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끊긴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카이사르가 장차 로마에 위험할 것이라 보고 암살했다는 의견이 많다.
이 전쟁을 통해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저 넓은 지역을 겨우 7년만에 석권해 버림.
게다가 그 지방에 살고있던 켈트족들을 모두 로마의 속주민으로 편입시켰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였다면 저항이 컸겠지만,
카이사르는 그들을 노예가 아니라 동화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일부 켈트족은 끝까지 저항하다 잉글랜드 섬으로 도망치게 되는데. 스코틀랜드 조상이 되는 이들에 대해선 기회되면 다뤄본다.)
카이사르의 이런 대승리에 로마사회는 열광한다.
그리고 동시에 삼두정치 내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해.
제일 세력이 딸리던 카이사르가 크게 부상하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도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함.
그 와중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쪽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죽고말았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간 율리아가 죽음으로서 삼두정치는 무너지고 말았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원로원파 또한 이에 가담함. 원로원 입장에서는 두놈 다 꼴보기 싫었었지만,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지도자인만큼
차라리 폼페이우스가 낫다는 생각이었다.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려 하지만
로마를 완전히 손에 넣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그야말로 냉랭한 대접....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루비콘 강 앞에서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진다.
로마의 국법에 의해 루비콘 강 아래는 군대가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이 국법에 따라서 모든 군대를 버리고 올 것을 명령함.
갈리아 정복의 개선식을 치르러야 하는 장군에게,
그 군대를 몽땅 내버려 두고 딸랑 혼자만 자기들에게 오라는 요구...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진다.
소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지만,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잠시 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 선두에 서서 외쳤다.
그 유명한 외침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군단이 함성을 지르며 루비콘을 건너기 시작하였다.